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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영 재판장
서순영 재판장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10.29 10:43
  •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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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판결로서만 말한다”
서순영 재판장

반민특위 서순영 재판장

서순영은 1914년 거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한학을 수학했다. 24세에 부친 사망으로 가계를 책임지면서도 면학에 힘썼던 중 29세때 동경유학(동경 동아상업고등학교)길에 올랐다. 곧이어 일본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 2년 후 졸업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에서 고등문관 시험을 준비했으나 2번 실패하고 4년 후인 1939년 6월과 11월에 조선변호사 시험과 고등문관 사법과 시험에 동시에 합격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9세였다. 곧바로 변호사로 개업하고, 대구에서 4년 동안 활동했다. 서순영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상 약자의 편에 서서 일제 검찰과 맞대응한 기록을 남겼다. 이 당시 장남이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동남아로 끌려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대구공소원(현 대구고법) 판사로 임명된다. 2년 뒤인 48년 진주지원장으로 재직 중 향토인사들의 요청으로 제헌국회의원 선서(통영을구)에 출마, 당선됐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서순영은 법조계의 거봉으로 우뚝 선다. 때마침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제3부 재판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소신판결’은 전국을 놀라게 하면서 “법관은 판결로서만 말한다”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재판과 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수차례 면담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제2대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아쉽게도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와 6·25전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서순영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시기에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거제도 보도연맹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후폭풍을 맞은 것이다. 당시 서순영은 국방부장관 신성모에게 요청해 거제도주둔 백골부대의 만행을 규탄하고 경찰로써 치안을 대신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전시하의 막강한 국방부장관도 정치적 거물인 서순영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서순영의 이런 노력은 그러나 선거판에 전달되지 못했다. 어쨌든 희생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직 국회의원의 책임이 크다 했다. 물론 상대후보의 교묘한 역선전도 작용했다.

제헌국회의원 기념사진

3대 때는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침몰했다.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있을 때 시작된 이승만과의 악연이 가져다 준 예고된 패배였다. 이후 서순영은 영원히 정계를 떠났다. “영예와 굴욕, 오르고 내림이 모두 꿈이러니, 어찌하여 세상사가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는가”, “영웅은 천고로부터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한평생 성공과 실패는 모두 구름과 같네” 당시 지었던 한시(漢詩)가 당시 그의 심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순영의 정치행보는 이승만 정권과는 언제나 상극이었다. 서순영은 전쟁 중 부산 수도에서 벌어진 독재정치를 막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당시 야당은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문’을 작성했다. 서순영은 조병옥, 장면, 이시영, 김성수, 유진산 등 야당과 재야 65명 인사 중 1인(변호사 대표)으로서 참가했다. 이일로 인해 그는 한때 통영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피난처 통영에서 지은 ‘자유교환’ 이라는 한시는 그 시대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자유의 다리는 무슨 새로운 일 하려는가. 이름은 자유라지만 건너지 못하는 나루일세. 가을 바람에 통곡하면서 강귀신에 묻노라”

5·16혁명 직후에는 중정 요인이 부산까지 찾아와 서순영의 정계 복귀를 권유했다. 그는 한시 한수로 답했다. “세상의 많은 정책이 무슨 소용이리요. 다만 가슴속 한 가닥 양심만 바랄 뿐일세” 3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면서 겪은 정치무상이 골수깊이 맺혔던 것이다. 1년 뒤 공화당 요인이 또 다시 찾아왔다. 공화당 고문직을 제의했다. 서순영은 “정계인사들이 정치규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도의상 참여할 수 없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정치가로서 자격이 없음을 반성하는 어록들을 다수 남겼다. 쿠데타 세력의 정권 장악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자책했던 것이다. 서순영은 “제헌시대 이후 전개된 정치상황에 대해 그 책임의 일단은 제헌국회의원들이 져야 한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서순영은 정계활동당시 야당의 거목 김준연씨와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정직하고 소신이 있음을 흠모했다. 그러나 친분은 친분이었고 공적인 일은 서로 간에 정확했다. 김준연씨가 한일국교관련 자금수수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선생의 조카인 서주연씨가 서울지검장이었다. 김준연씨의 지인들이 찾아 왔을 때 “그분(김준연)은 결코 뒷전으로 일을 꾸미는 것을 바랄분이 아니오”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후 오히려 김준연씨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정계를 은퇴한 그는 ‘삼락장학회’와 ‘연재장학회’를 운영하면서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영남권 일대의 수재들을 뒷바라지했다. 김기춘 전 국회의원 등 수백 명의 저명인사들이 그의 장학생들이다.

서순영은 살아 생전에 총 500여 편의 한시를 지었을 정도로 한시부문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해마다 가시나무가 선비사회를 침노하니, 곳곳에 연기와 티끌이 싸움터처럼 가득하다’(하략). 말년에 지은 이 한시는 그의 선비적 기풍과 성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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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이 2016-03-14 11:15:13
큰아버지 못다하신 일 이 진찬이가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꽃 무국화 벌래가 많고 사철 프르지 못하니 나라가 금방 질 수 있으니 사철 푸른 동백꽃과 같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1956년 변호사가 판 검사 결탁없이 승소할 수 었는 시대라면 나는 그런 변론 안한다고 사법부를 떠니셨다 나는 이런 큰아버지를 현실도피형이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그런 사법부를 개기위하여 여기에 섰다

서복이 2016-03-14 11:33:47
신영철 전 대법관은 199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항고 51부 재판장이었다 본인의 부동산 특단의사정이 없음에도 정치권력 자들이( 김덕룡 전의원 이일로 공천권 박탈당함) 특단의사정이 없음에도 3년기간도래전 처분하여 개시결정에 대한 이의신청 사건 항고부에서 신영철을 직법 만나 매월이자를 불입하기로 약정한 사실이나 근저당계약기간 3년우선할 별도 대출기간 정한 사실이 없음에도 3년도래전 처분이라고 울고 불고

서복이 2016-03-14 11:37:24
하면서 살려 달라고 나는 울 큰아버지 동상을 만들기 위하여 여라몸으로 건출업을 26살 때부터 하였다 그런후 경매신청서에 첨부된 근저당이 설정된 부동산등기부 등본을 빼버리고 결정문에 근저당 설정게약서 제1조 4가항 3년 기간은 대출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기각하였다 차한성 민사 16부 서울고법 판사는 판결문에 별도로 다른기간의 정함이 없을 경우 3년기간으로 인정한다고 판결하였다,

서복이 2016-03-14 11:41:58
피고신한은행이 삼성으로가신 김상균재판장에게 자백하기를 담보물이 1999,12,6일 처분된 후 배당금 받기위하여 3년기간 전 처분이 위법이라 대출기간 2년기간과 이율 16% 약정서를 변조하여 경매신청서에 첨부된 이울과기간이 공란인 약정서와 바궈치기하여 경매신청서에 이율과기간을 보충하였다고 자백하여 이 자백증거로 건물원상회복 사건에 대법원서 신영철이 자기가 처분한 경매사건 신리불속해우사유로 기각하였다

서복이 2016-03-14 11:46:18
5번글
자신이 결정한 위법한 경매사건에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 처분하자 대법원민사 3부 재판부에서 대법원안에서도 신영철이가 잘못처분하여 골치아프다고 소문이 났다고 한다,
내가 어떤집안 자손인데 사기행위를 하겠는가 건물을 ?빼앗가간 전 김영삼 정부 3인이 절대로 경매가 무효되는 일 막아주기로 하고 경매신청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신우너조회에 사기군 스파이등으로 올려놓았다 사기전과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