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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신용우
소남 신용우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11.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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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 맹종죽 개발, 농촌 운동의 아버지

제2의 우장춘 박사 ‘신용우’

신용우의 호는 소남이요, 본관은 영산으로 하청면 하청리 성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공부를 하다 50리 거리에 있는 거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부친의 뜻에 따라 진주농업학교로 진학했고 제1회 졸업생으로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성실했다.

신용우는 성품이 온순한 반면 고집이 세고 집착력이 강했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 개척의 선구자로 가난한 농촌사람들의 희망이 된다. 1927년 일제가 농촌 정책의 일환으로 모범 영농인을 일본에 산업시찰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신용우에게는 농촌운동의 계기가 됐다. 이때 신용우는 최남단 거제도가 아열대 지역으로 기후가 온난하여 죽순이 자라는데 최적지라고 생각하여 맹종죽(孟宗竹) 모죽(母竹) 3그루를 구하여 귀국했다.

모죽 3그루를 가져온 신용우는 즉시 자기 집 뒷산 밭에 구덩이를 파고 퇴비와 분뇨를 충분히 넣어 흙을 깔고 정성껏 심었다. 그 해 겨울에는 한 그루는 고사하고 두 그루는 생육에 성공했다. 3년째가 되자 굵고 싱싱한 죽순이 사방의 구덩이마다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신용우는 5년 후부터 죽순을 캐어 일본인이나 중국요리집에 내다 팔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성공하기까지 쏟은 정성과 고생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새벽달이 남았을 때 대밭에 나가 일했고, 대밭에 나갈 때에는 퇴비 또는 오줌장군을 지게로 지고 다녔다. 하루 세끼 식사 또한 부인이 가져와 대밭가에서 먹었으며, 손과 발이 트고 얼굴은 햇살에 그을려 의복과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어쩌다 손님이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면 연락 온 부인에게 말하기를 “찾아온 그 분이 남루한 옷을 입은 농민이더냐, 아니면 양복을 입은 사람이냐”고 확인하고는 “양복을 입은 사람이면 만날 수 없으니 밤에 오라”고 하고는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신용우는 한편 하청면사무소의 권농사무를 담당하여 농촌부흥을 선도하였고, 1937년 2월 25일에는 제5대 하청면장에 임명되어 5년간 재임하면서 하청면의 야산을 개간하여 대밭으로 조성하였다. 종전의 잡나무산을 온통 죽림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13일에는 제9대 하청면장으로 재임용되어 3년간에 걸쳐 산지에는 맹종죽과 밤나무, 산록의 밭에는 포도나무를 심는 한편 고구마를 다산품종으로 개량, 농촌의 자급자족을 이끌어 나갔다. 이때부터 신용우는 제2의 우장춘 박사로 불리우게 됐다. 하청면은 신용우의 맹종죽 개발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고소득 농촌으로 자리잡았다.

신용우는 1952년 5월 10일에 시행한 초대 경남도의회 의원 통영군 선거에서 당당 최고 득점자로 당선된다. 당시 거제도의 실정은 6·25전쟁으로 원주민, 이북피난민 그리고 포로를 합쳐 30만명이 살고 있었지만, 복군이 되지 않아 여러측면에서 애로사항이 많았다.

신용우는 도의원으로서 제2대 국회의원 이채오(李采五)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거제군 복군을 강력히 건의하기도 했다. 1960년 5월 20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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