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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의 생애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의 생애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7.05.0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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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1)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의 생애 2) 동록문집(東麓文集)과 거제한문학

3) 동록(東麓)의 철학과 사상 4) 맺음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선생은 조선후기 거제도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평생 거제도에 살면서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거제도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사상과 철학뿐만 아니라, 특히 거제문학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거제시 거제면에 거주했던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과, 39세 이후 거제도를 떠나 중부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던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1845) 선생 두 분은, 거제출신으로서 현재까지 한문학 문집을 남긴 유일한 분들이다. 동록 선생은 조부(祖父) 정욱(鄭昱), 부(父) 정종의(鄭宗儀), 형(兄) 정언성(鄭彦性)이고 부인은 밀양 박씨이며, 선생은 거제면 명진리에서 출생했고 그의 재종숙(再從叔)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의 부친인 정유(鄭游 1739~1804)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현재 선생은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盤谷書院) 內, 동록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매년 춘3월 첫 정일에 거제 유림들이 반곡서원(盤谷書院)의 우암사 송시열과 함께 제사를 올리고 있다. 호는 동록(東麓), 자는 사성(士成)으로 1881년 거제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석채례를 행하고 선생의 호로 인하여 "동록당(東麓堂)"이라 명명했다.

동록당(東麓堂)은 계해년 1863년(철종14년) 3월에 거제군 동부면 명진리 515번지에 최초로 건립했다가 광무10년 1906년 거제군 거제면 동상리 367번지로 이건(移建)하였다. 최초 동록당이 있었던 명진리 건립 시(時)인 1863년에 동록당기(東麓堂記)를 처음 작성했다. 당시의 기문(記文)은 전하지 않으나 1881년의 동록당기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판(懸板) 동록당(東麓堂) 명덕재(明德齋) 도남문(道南門)은 계해년 1863년 10월(음)에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직접 적어 걸었다.

 

동록당기(東麓堂記)에 따르면, “기성(岐城 거제도)은 동쪽 해도에 위치하며 또 한성으로부터 거리가 먼데 땅 끝의 남은 기슭에 고을을 이루었다. 그 지세를 말할 것 같으면 바로 동록(東麓)이라 일컫는다. 이로써 선생의 호를 동록(東麓)이라 하였다. 기성에서 태어나 동록이라 자호(自號)한 것 또한 선생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글은 대부분 초서(草書)와 해서(楷書)로 글씨체가 아름답고 유순하며 지나침이 없는 그의 생활과 닮아 있다. 동록 선생은 일생동안, 빈곤에 개념치 않았고 마음을 넓고 편안하게 하면서 오로지 학문을 좋아하여 깊은 숲과 계곡 속(계룡산 선자산 일대)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셨던 분이었다. 학문의 도를 닦는 데는 이성(理性)과 정성을 다하여 물체와 합치되는 조화로움에 그 기반을 두었다. 추사 김정희와는 동시대인(同時代人)으로서 김정희가 동록문집을 읽고 감탄하여 7언절구 시 한편을 남긴 찬사의 글이 전해지고 있고, 또한 중국인 심평향도 동록의 시와 글씨를 보고 피와 생활이 모두 군자라고 하였다.

동록 정혼성은 거제의 유림이나 사회에서 정군자(鄭君子)라 호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에 대한 신출귀몰한 많은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의 시(詩)는 자연과 함께한  도가적 냄새가 짙게 풍기는 산수 전원시풍이 왠지 느껴진다.  선생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학문의 표준으로 삼았고 육경(六經)에 통달하였는데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였으며,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선경지명이 마치 거울을 비추듯 하였다.

 

김추사(金秋史, 김정희)가 동록 선생께 쓴 시에 이르길, “자고의 시격에다 채진의 놀음이라 열 자의 황진 속엔 두각을 내지 않아 후파를 힘입어서 일편향을 전수하니 옛날의 기주에는 현정이 적적하이(鷓鴣詩格采眞遊 十尺黃塵不出頭 賴有侯芭傳一辨 玄亭寂寂古岐州)”라 하였다. 중국인 심평향(沈萍香)은 단지 필획만 보고도 혈식군자(血食君子)라 여겼다.

선생의 집을 ‘명덕(明德, 밝은 덕을 밝히자)‘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선생이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제자들에게 많이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능히 덕을 밝힌다(克明德)”하고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顧諟天之明命)”하였고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峻德)”한 것은 모두 명명덕(明明德)의 뜻을 말한 것이다. 특히 약 200년 전, 선생이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던 <대학도도(大學道圖)> 즉, ’큰 배움의 길을 나타낸 도표(圖表)‘는 『대학(大學)』의 내용을 하나로 집약해 놓은 것으로 아직도 그 형태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선생(先生)은 거제시(巨濟市) 거제면(巨濟面) 명진리(明珍里)에서 태어나, 서정리, 사촌(沙村) 등의 거제읍치에서 살았으며 그가 제자를 가르친 곳은 거제면 녹동(鹿洞), 사슴골이라 전한다. 많은 제자(통영, 고성출신 포함)를 양성했고 글씨가 명필이었으나 벼슬은 못했다. 자손이 없어서 행장을 만들지 아니했다는 것과, 무덤이 신현면 금곡(金谷)에 있다가 이장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여기 다시 묘를 썼다가 독봉산으로 이장했다한다(巨濟郡 新縣邑 古縣里). 그는 도학자이자 성리학자였다. 소생은 없었으나 애자(愛子, 양자)는 있었다 전한다. 또한 약 200년 전,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선생은 거제읍내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두었다. 거제부사, 동헌의 단실에서 근무하는 이(李)생원 그리고 진(倲) 아무개, 하(河) 아무개, 이(李) 훈장(訓長), 윤취지(尹取之), 의원 감사침(金士忱)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읍치에서 글깨나 쓰는 분들과 더불어 시단(詩壇)을 조직해 경치 좋은 야외에서 시문을 서로 주고받았다. 인근 구천동에서 시우들과 더불어 쓴 한시도 여러 편 남아 전한다.

 

동록(東麓) 선생은 그의 인생여정에서 벼슬살이를 할 기회가 한번 있었다. 그의 학문이 서울까지 알려진 어느 해 가을철에 거제관리가 사슴고기와 함께 승정원에서 보내온 의관을 주며 천 리 먼 서울에서 등용을 결정했으니 상경하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선생은 부모가 이미 병이 들어 나 홀로 서울로 갈 수 없다고 반려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결정을 하기 전에 마을 언덕에서 교지를 여러 번 읽으며 친족들의 사정과 노쇠한 부모의 얼굴이 겹쳐 망설이다가 결국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선생은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과 저 멀리 아득한 계룡산과 선자산, 달과 별, 이렇듯 고요한 정취가 깃든 깊은 계곡에서,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만물의 소생과 쇠퇴를 지켜보며 자연과 벗이 되어 한 평생을 보냈다.

 

한편 어느 해, 중국의 명(命)으로 통상을 하던 중국 상선이 큰 바다에서 풍파에 길을 잃고 거제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천자의 통상 문서를 보여주며 거제도에 체류케 된 것이다. 거제고을 수령은 급히 말을 타고 달려가 밥을 주고 옷을 입혀 먼 곳의 사람을 구휼해 보살피니 섬나라 예의에 감동하며 서로가 동하였다. 그리고 상선의 심평향(沈萍香)과 상인들이 도촌(道村)에 기거하면서 여정을 풀도록 배려하였다.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이 통역을 위해 파견되었고 심평향과 서로 글을 써서 그 상황과 의사를 전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서로가 시문을 주고받으며 서양의 여러 문물과 상품을 선물로 받았고 이들이 필요한 식량 등의 생활필수품과 교환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서양의 여러 지식들을 심평향으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당시 중국 상선은 그 옛날 서불이 교역하려고 거제도를 방문한 것처럼 돛대를 달았으며 오나라 합려의 고향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선은 백 척의 누대와 같이 높았으며 줄을 잡고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야 했고 수천의 신기한 보물들이 있었다고 그 소회를 적었다. 심평향은 옥관자를 단 선명한 모자를 썻고 왕이 내린 직물과 옥비녀, 벼슬과 녹봉을 가진 노인이었다고 전한다. 사천성(四川省) 형경현(滎經縣) 사자로써, 소주(蘇州) 창먼(閶門)의 나그네이며 양주(楊州)의 학의 등을 탄 신선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록 선생은 이후 떠나는 심평향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조개와 고래 사는 바닷길로 천만리 건너왔으니 원컨대 별 탈 없이 소주(蘇州)에 이르시게(蛤海鯨道千萬里 願君無愁到蘇州)’라고 화답하며 아쉬운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애체(靉靆) 속명 ‘안경’(俗名眼鏡)이 있었는데 동록 선생이 말하길, ‘맑은 하늘이 깨끗하게 보이고 작은 것에도 눈이 밝아진다. 눈동자를 횃불처럼 밝게 만들며 편지의 파리만한 글자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서양금(西洋琴)’에 대한 동록 선생의 말에 따르면, ‘서양금(西洋琴 양금)은 이마두(利瑪竇) 즉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으로 전래한 현악기라 하며,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선생의 시편에서 건륭(乾隆) 계축년(癸丑年 정조17, 1793년) 7월 10일(七月十日), 서양금(洋琴)에 황홀(怳惚)했으나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해 연주할 수는 없었다(無能解若)고 적고 있으나 불과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 약 3시간 만에 능히 이해해 곡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自巳至未不過三時能解得腔調)고 기록해 놓았다.

덧붙여 선생은 취미로써 평생 바둑(圍碁)을 자주 두었고, 여름에는 죽삼(竹衫) 즉, 대나무 적삼을 즐겨 입었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서 읊조리길, “잘게 쪼갠 대껍질로 얇은 한 벌 적삼 옷을 만들었는데 반소매가 팔뚝을 숨기고 배꼽까지 가리었네. 막힘없이 트여 있어 더위가 깨끗이 사라지니 긴 여름의 무더위가 갑자기 시원해지누나.”하며 즐거워했다.

결론적으로 선생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즐거움을 찾으려 했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이웃들과 소통하며 소박하게 살고자 애썼다. 이에 시인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림으로써, 일상 속에서 늘 접하면서 포착하기 어려운 자연의 움직임을 관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내면의 성찰과 정신적 고요를 얻었던 듯하다.

 

 

1) 봉선화[鳳仚花] 봉선화(鳳仙花)

萬紫滔滔一色凨 만자천홍(萬紫千紅) 도도한 일색의 경치이니

不遇媚艶競萶風 봄바람에 다투듯 핀 요염한 모습을 보질 아니하랴

人中仙也禽中鳳 사람 속에 신선이고 날짐승 중에 봉새이듯

知爾超羣犻傳紅 널리 붉은 빛을 퍼뜨린 비범함을 너는 아느냐

[주] 만자천홍(萬紫千紅) : 울긋불긋하게 만발해 있는 꽃의 온갖 색깔

봉선화는 우리나라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도래되어,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다정한 꽃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조상들이 망국의 한을 노래하던 꽃이기도 하다. 여름철에 봉선화가 피면 소녀들은 봉선화 꽃잎에 괭이밥의 잎을 섞고 백반 또는 소금을 약간 넣어 빻아서 손톱에 얹고 헝겊으로 싸매어 손톱을 곱게 물들였다. 그 원리는 괭이밥에 포함된 수산이 손톱의 형질을 물렁하게 하고 소금이 매염제가 되어 봉선화의 물감이 잘 물들게 하는 것이다.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로 뜰에 널리 심고 있는 봉선화는 1241년 완성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7월 25일경 오색으로 꽃이 피고 비바람이 불지 않아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 나간다는 봉상화(鳳翔花)"가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봉선화를 널리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꽃의 생김새가 마치 봉(鳳)을 닮아 봉선화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책에는 봉선화로 되어 있는데, 이 봉선화가 봉숭아로 발음된 것 같다. 부녀자들이 언제부터 손톱을 물들이는 데 봉선화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충선왕 때 손톱에 봉선화를 물들인 궁녀에 대한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봉선화꽃을 백반과 함께 짓이겨 손톱에 동여맨 후 하루가 지나면 곱게 물든다. 꽃말은 속단해결, 경멸, 신경질,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한국에서 옛날부터 자라던 종류로는 물봉선과 노랑물봉선화가 있는데, 이들은 산이나 들의 습지에서 흔히 자란다.

 

2) 해당화[海棠花]

傾國名花艶艶幽 미인과 이름난 꽃이 곱고도 그윽하니

女中嬌態有如不 여성의 교태(嬌態)와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康人縱此楊妑睡 양귀비(楊貴妃)가 이같이 편안한 봄잠에 취한 듯하고

佹宅分明見此羞 문득 안주인이 분명한 수줍음을 표현한 듯하네

[주] 양파(楊妑) : 원본에는 양파로 기록되어 있으나 양귀비(楊貴妃)로 풀이함.

해당(海棠)은 곧 우리나라의 산다(山茶 동백나무)와 그 이름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래서 옛 선인의 시(詩)에서 "동백꽃" 인지, "해당화" 인지는 그 꽃이 피는 시기가 초봄인지, 여름인지를 보면 알 수 있고, 또한 당시 동백꽃은 우리나라 남쪽에서만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닷가 모래톱 주위에 피워있으면, 해당화라고 볼 수 있다.

 

 

3) 백일홍화[百日紅花]

丹精每得十旬從 매양 백일동안 계속해서 정성을 다해 피우는데

綽約其形浸赭容 붉은 빛에 잠긴 그 모습이 가냘프고 아리땁네

高倚芳藩君子節 울타리에 의지한 고상함과 아름다움은 군자의 절개이나

還吃媚艶小人縱 도리어 소인에게는 요염하게 웃는 꽃이라네

배롱나무 꽃을 한자어로는 자미화(紫薇花)라 하며, 별칭으로 백일홍(百日紅)·오리향(五里香)·만당홍(滿堂紅)이라 부른다. 피고 지는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백일홍은 국화과 식물(초백일홍)에도 같은 이름이 있으므로 구별하기 위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수피를 긁으면 잎이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미화(백일홍)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그런지, 자미화 관련 한시가 수백편이나 전해 오고 있다.

4) 금은화[金銀花] 인동초

艶香媚眼絶無雙 고운 향기와 애교 띤 눈초리, 견줄 꽃이 없으니

種爾由來對北向 너를 심은 유래는 북쪽을 향해 마주하기 위해서다

傻重間金欺惡草 금빛이라 소중히 하도록 악초(惡草)들을 속여 자라고

色增冠玉爲劉邦 색깔이 관에 달린 옥보다 더하니 유방(劉邦)의 상징이 되었네

[주] 유방(劉邦) : 중국 한나라 초대 황제(BC 256~BC 195) 한고조(漢高祖)의 본명. 중국 황제가 되어 최초로 누른빛(금빛) 곤룡포를 입었다는 사실에 누런 인동초는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다.

 

흰색의 꽃이 피어 노란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마치 두 가지 꽃이 동시에 피어나는 것처럼 보여 금은화(金銀花)라고도 하고, 또한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버텨낸다고 하여 인동초(忍冬草) 또는 인동덩굴이라고도 한다. 인동이란 추운 겨울 모진 풍파를 견뎌내고 새봄까지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날씨가 좀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겨울철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으나 중부지방에서는 잎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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