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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까 농장'을 아십니까?
'다나까 농장'을 아십니까?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6.2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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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량 증산 위해 이 땅의 농부들 피와 땀 요구

 

 

▲연초면 연사리 일대 과거 '다나까 농장'

 

신현읍 수월리 해명마을과 연초면 연사리 임전마을(일명 깨밭골) 앞에 펼쳐져 있는 14만 여 평의 들판. 이 땅은 1924년 다나까 후데요시라는 일본인이 간척공사를 시작해 10 여 년의 세월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낸 농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나까가 무엇 때문에 황량한 갯벌에 둑을 쌓고 농토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곳이 “다나까 농장”이라고 불리고 있는 사실만으로 다나까라는 일본인이 한 때 이 들판의 소유주였다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땅의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주연은 분명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들의 할아버지이고, 할머니였다.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잡곡 한 되에 하루종일 갯벌 위에서 가혹한 노동을 이겨냈고, 그렇게 해서 이 넓은 농토는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의 피와 땀이 14만평의 갯벌을 농토를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다나까는 단지 일제가 자기나라의 부족한 쌀을 한반도에서 해결하기 위해 수립했던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하는 ‘거제도 선봉장’으로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총독부의 후광을 업고 거제도의 쌀을 약탈해 가는 대리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80 여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이 들판을 “다나까 농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나까 농장' 간척 10년史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조선’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다. 먼저 통감부를 총독부로 개칭한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한 식민지 체제로 만들기 위해 경제체제를 확립하는 방안의 하나로 먼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에 앞서 총독부는 합방직후인 1910년 9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후 1916년 말까지 근대적 토지사유제도를 확립한다는 미명아래 약 2천 만 원의 경비를 들여 토지의 소유권, 가격, 지형, 지목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총독부는 이 같은 자료를 토대로 정확한 쌀 수확량을 가늠하고,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산미증시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쌀 약탈에 들어갔다.

이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의 독점자본이 급성장함에 따라 대중생활은 날로 궁핍해졌고, 특히 농업 생산력은 현저히 떨어지면서 ‘쌀 폭등’이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다나까 농장'이 있던 자리는 신축 아파트가 속속 준공되고 있다

일본이 수립한 산미증식계획은 30년에 걸친 대대적인 프로젝트였다.

일본은 이 기간 동안 기존 40만 정보(町步, 1정보=3,000평)의 논에 대해선 관개(灌漑)를 개선함과 동시에 밭 20만 정보를 논으로 바꾸고, 20만 정보의 논을 새롭게 개간 하는 등 총 80만 정보의 토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또한 1차로 15년 동안 40만 정보의 논을 개량해 1년에 대략 9백 만석의 쌀을 증산. 이 가운데 4백60만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다.

일본은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고, 전국 곳곳에서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한숨 소리가 넘쳐흘렀다. 거제도 역시 이 거센 바람을 비켜가지 못했다.

1924년 1월 어느 날.

총독부는 다나까 후데요시(田中筆吉)를 긴급 호출했다. 산미증식계획을 세우고 4년이 지났지만 사업진척이 미진하다고 판단했던 총독부는 다나까와 같은 건설 전문가가 필요했다. 더구나 20만 정보의 논을 새롭게 개간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총독부로서는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익 계획이 내륙지방에서는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섬 지역은 지형적인 특성상 토지 확보가 안 돼 사업진행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었던 터라 다나까로 하여금 조언을 얻고자 했다. 한편으로 총독부는 그에게 간척사업을 맡겨 농토를 확보한다는 방침을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사업차 부산에 내려왔던 다나까는 총독부의 뜻밖의 호출에 긴장하면서 총독부의 토지사업국으로 들어섰다. 사업국 직원의 안내로 후지모리 국장실로 안내를 받은 그는 지지부진한 산미증식계획에 대한 일련의 설명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제의를 받는다.

“다나까, 개간사업을 벌려 농토로 바꾸어주시오. 한반도 어느 곳이든 당신이 원하는 곳을 선택하시오. 일본제국은 당신이 최소한 10만 평 이상의 농토를 확보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일본은 당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소”

후지모리 국장의 목소리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다나까는 이내 후지모리를 향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기꺼이 일본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시원스럽게 승낙을 했다.

그는 이윽고 후지모리국장에게 간척사업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요청했다. 사업국 직원은 산더미 같은 관련자료를 다나까 앞에 내 놓았다. 그는 그의 사업 주무대인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자료를 훓어 내려가던 중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총독부가 1918년에 완료한 ‘토지조사사업’에서 몇 년 전 야마구찌라는 사람이 거제지역에서 간척사업을 진행하다 실패한 곳이었다.

그는 손으로 무릎을 쳤다. “이 곳이 가장 적지로 판단됩니다. 장승포항을 끼고 있어 앞으로 쌀을 생산하면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데 용이하고, 저의 회사가 부산에 있어 모든 장비 수송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후지모리는 그의 안목에 감탄했다.

▲신현읍 수월리 일성아리채 아파트에서 바라본 '다나까 농장'

10년에 걸친 간척사업 막 오르다

당시 60세 가량의 다나까는 ‘다나까구미’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부산지역일대 항만, 건설을 도맡아 오면서 정계는 물론 재계에서 그의 입김은 상당했다. 1백65cm 정도의 키에 금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은 60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과감한 추진력으로 밀어 부쳤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항상 민첩했다. 무엇 보다 일을 앞두고는 못 참을 정도로 성미도 급했다.

총독부의 제안을 받아들인 다나까는 그 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와 다음날 직원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총독부에서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한 뒤 선발대와 함께 현지조사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의 신현읍과 연초면 앞에 드넓게 펼쳐진 갯벌에서 만조와 간조시간을 점검하면서 야마구찌가 간척사업에 실패한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야마구찌가 실패한 이유는 많은 땅을 확보하겠다는 욕심으로 무리하게 제방을 쌓았고, 그 제방이 파도를 견디지 못하면서 무너져 내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원인분석과 함께 작업구상을 마무리한 다나까는 마침내 1924년 봄,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했다.

다나까는 먼저 바닷물의 유입을 막을 제방을 쌓기 위해 김봉수씨(작고) 소유의 개수끝산을 사들이고 필요한 돌과 흙을 확보했다. 개수끝산은 다나까의 간척사업 이후 일부 그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1980년 고려개발이 고현만을 매립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이 땅에는 거제중앙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다나까는 수백m에 달하는 제방까지 흙과 돌을 실어 나르기 위해 레일을 깔고, 그 위에 수레를 놓았다. 그러나 이 같은 장비로 한계를 느낀 다나까는 당초 계획했던 인원 보다 두 배 가량의 인원을 충원했다. 당시 일자리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은 이 곳을 향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인력동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다나까는 관리자 몇 명을 제외하고 하루하루 사람들을 뽑았는데, 그 인원은 대략 2백명 정도였다. 그래도 매일 마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로 넘쳐흘렀고, 자연히 노동에 대한 댓가는 형편 없었다. 날마다 동원된 인력들은 현장에 투입되면서 전표(일을 했다는 일종의 증서)를 받은 뒤 귀가 때 이것을 제출하고 품삯을 받아 갔다.

품삯은 남자의 경우 잡곡 한 되, 여자는 반 되 정도였다. 그러자 이 정도의 품삯에도 인력이 공급과잉현상을 빚었고, 다나까는 선착순에 의해 사람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공사현장에는 새벽마다 진풍경을 연출했다.

장승포를 비롯해 거제, 사등, 둔덕, 동부면 등 공사현장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밤늦은 시간에 집을 나와야만 새벽녘에 공사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간신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밤길을 달려 지친 몸으로 공사에 투입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면서 작업 도중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연초교에서 바라본 '다나까 농장'

이 공사 현장을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정모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다나까 농장의 간척사’는 한마디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공사시작 당시에는 어려서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진행된 공사라 거의 마무리가 됐을 때는 청년이 되어있었어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사현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던 것은 일자리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데다 헐벗고 궁핍해 밥이 생기는 일에 목숨을 걸다 시피 했어요”

“오히려 다나까의 개간사업은 당시 주민들에게는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어요. 그 때문에 그곳에서 단 하루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으로 생각했어요” 이 같은 생존경쟁의 현장에서도 특권은 존재했다. 그것은 일본어였다.

한국사람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곧바로 다나까에게 접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운이 좋아 다나까의 관심을 끈다면 관리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공사가 마무리 된 뒤 다나까가 소작인을 선정할 때에는 ‘일본어 구사’는 상당량의 농토를 소작 할 수 있는 횡재까지 안겨주었다.

고민에 빠진 다나까

공사가 시작된 이후 4년이 지난 1926년 여름, 다나까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했던 만큼 공사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자금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자비 회수에 대한 강박관념도 그를 짓눌렀다.

국가를 위해 흔쾌히 총독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 후회가 됐다. 때로는 총독부에서 공사진척상황을 물어 올 때 짜증까지 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난국을 타계해 나갈 방법은 공사속도를 높여 가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공사감독관을 불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감독관 가마모도의 무능함을 질책하고 올해 안으로 공사를 마무리 할 것을 지시했다. 현장으로 돌아온 가마모도는 일본어 구사능력으로 ‘특별채용’된 신씨와 조씨에게 다나까로부터 당한 일을 털어 놓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노동의 강도를 높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엄포를 놓았다. “공사장에서 조금이라도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은 일을 주지 않기로 했다. 모두 열심히 일해 주기 바란다”

이 같은 엄포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먹혀 들어갔다. 인부들은 사생결단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수레 밑에 깔려 중상을 입는 등 여기저기서 사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가마모도의 가혹한 행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럴수록 가마모도는 더욱 거세게 몰아 부쳤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다나까의 농막에서 기거하던 가마모도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공사현장에서 쫓겨난 사람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들은 다나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곧바로 경찰서에 연락을 취하고 범인을 색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다나까의 위세를 알고 있었던 경찰서장은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불과 이틀만에 가해자들을 잡아냈다. 그러나 다나까는 벌써 평상심을 되찾았고, 경찰서장에게 선처해줄 것을 요구했다.

다나까의 이 같은 결정의 뒷면에는 또 다른 계산이 숨어 있었다.

                                                                                           <다음회에 계속>

▲'다나까 농장'이 있던 옆으로 산책길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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