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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숙 시인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 뿐이랴' 세 번째 시집 출간
이금숙 시인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 뿐이랴' 세 번째 시집 출간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10.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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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일 오후 7시 거제관광호텔서 출판기념회
이금숙

10일부터 14일까지 거제제시청서 다섯 번째 개인 시화전도 열어

20년이 넘게 고향 거제에서 활동 중인 이금숙 시인(필명 이채영/거제문협 이사/동랑청마기념사업회 전회장)이 오랫 만에 세 번째 시집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 뿐이랴’를 출간했다.

2000년 ‘마흔 둘의 자화상’을 출간하고 15년만이다.

이금숙 시인은 그동안 여행사를 운영하며 사업과 지역봉사활동에만 매진해 오다 틈틈이 모은 시 80여 편을 정리, 이번에 ‘작가마을 사임당 시선’으로 출간하게 됐다.

이금숙 시인은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 뿐이라’라는 시집에서 ‘학동연가’ 능포 아리랑‘ ’홍포서정‘ ’능포에서‘ ’ 아버지의 강‘ 등 주로 고향 거제와 능포 바다를 배경으로 쓴 해양시와 ’사랑별곡’ ‘흐르는 강물처럼’ 등 일상의 자연과 풍경을 서정적인 감각으로 이미지화 또는 내면화 하여 그리움의 존재들을 시적 형상에 부여시키고 있다.

이 시인은 15년 만에 상재한 이번 시집의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글쓰기가 두려웠다”라고 실토했다. 또 “많은 문인들이 탄생하면서 시인이 오직 말할 수 있는 건 글이어야 하는데 어줍 잖은 말장난으로 글을 쓰고 대중 앞에 내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

특히 이시인은 이번 시집 출간과 더불어 다섯 번째 개인 시화전을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거제시청 본관 도란도란 문화쉼터 전시실에서 개최하며 출판기념회는 11일 오후 7시 고현 거제관광호텔 3층 해금강 홀에서 연다.

이금숙 시인은 92년 정공채 시인추천으로 문단에 나와 93년 문학세계로 등단했다. 거제문협회원, 섬시동인, 한국문협, 청마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며 90년부터 거제신문 시민신문 기자 편집부장, 거제문협 사무국장, 동랑청마기념사업회장 등을 역임했다.

발문 

일상의 자연화, 풍경의 내면화

- 이채영의 시를 읽으며                                 송 유 미

 

복수초 한 무리 꽃등 켜고 앉아

양지바른 언덕 위 꽃불을 밝히네

산기슭엔

바람꽃, 왕제비꽃, 가냘픈 몸매로

님 오실라 꿈꾸듯 한들거리고

어젯밤 한설에 기다리던 너의 마음

눈 먼 봄 닮아

샛노란 꽃으로나 피고 또 지고

―「복수초」부분

 

󰊱 너무나 시적인 너무나 시인적인

한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지구촌 어디서나 시詩는 천대를 받는 모양이다. 낙엽비가 쏟아지는 2014년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랜만에 심장에 남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제목은 <시인 요아브>.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나다브 라피드 감독. 이 영화는 한마디로 시를 읽지 않는 이 시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는 영화라고 하겠다.

이 황금만능주의 시대, 사실 시를 읽는 사람보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많고, 드라마 보는 사람보다는 영화 보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시대. 그러나 기이하게 시를 읽는 사람은 적은데 해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듯이, 해마다 시인 숫자도 늘어가고 시전문지도 많아지고 있다. 인문학이 죽었다는데도, 인문학이 강세인 것처럼, 시를 읽는 사람이 없는데 시집이 많이 발간되는 현상처럼 말이다.

영화 <시인 요아브>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5살짜리 요아브는 빙의된 듯 멋진 시를 줄줄 입가에 흘리고 다닌다. 요아브를 맡아 보육하고 있는 유치원교사인 니라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시인지망생이다. 그러나 시적 재능이 미천하여 잘 써지지도 않는다. 요아브는 결코 시를 배운 일도 없는데 감탄스러울 정도로 멋진 시들을 꼬막조개 같이 작은 입술에서 줄줄 바닷물처럼 쏟아낸다. 그걸 받아 적기 바쁜 니라는, 결국 요아브가 쓴 시를 자신이 쓴 시 인양 지인들 앞에서 낭송하기에 이르고, 결국 요하브는 니라가 자신을 유괴하였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영화 <시인 요아브>는 관객에게 시의 선험적인 경험과 창작의 욕망 및 현대인에게 소외된 시의 존재에 대해 매우 심미적인 질문을 던진다. 또한 순수예술(시)의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아주 실감나고 공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시인 요하브> 영화를 보면서 이채영 시인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이 시인의 시집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랴』의 원고를 읽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사실 애써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채영의 시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시)이라는 것을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이 시인의 시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로 발효되어 나오는 시라고 하겠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시를 자연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려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한 줄기 청아한 바람은 시다. 초롱초롱한 별빛도 시다. 아이의 눈망울도 시다. 이렇게 이 시인의 시는 한줄기 청아한 바람과 같은 자연이다.

내가 이채영 시인을 만난 시간은 강산이 두 번도 넘게 바뀐 세월이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우리는 사실 몇 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스쳐 지나다 만난 인연으로 족했더라도/마음을 덥혀줄 따뜻한 그리움「흐르는 강물처럼」”을 느끼는 시도詩道의 도반지기이다.

누군가 “단 한번을 만났지만 영원히 우리는 만나고 있다.”는 말처럼 그녀와 나는 자주 만나지 않지만 항상 우리는 같이 한 방향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 만난 사람처럼 그녀가 새 시집의 발문을 청탁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청정한 공기 같아서 읽으면 심신의 피로가 사라진다. 복잡한 머리를 잠시 쉬게 하고 싶을 때 나는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맑은 공기와 같은 그녀의 시를 읽는다.

시인은 「학동 연가」, 「홍포 서정」, 「능포 아리랑 2」, 표제로 삼은 「사랑별곡」등에서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대상물과 간극을 두고 형상화한다.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대략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일상 속에 일어나는 생활사를 자연의 풍경에 이입하거나 상징화한다. 둘째 풍경 속에 너부러진 시적대상물에서 투시되는 지리멸렬한 일상, 사랑의 고통과 별리 등을 내면화한다.

나는 이채영의 시인의 시집의 발문을 쓰기 위해 백번 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이 시대의 시의 가치를 다시 성찰해 보았다. 그리고 이 시인의 이러한 샘솟는 서정에의 원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쉽게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영화 <시인 요아브>처럼 시가 줄줄 흘러나오는 까닭을 쉽게 설명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이채영 시인은 만들어진 시인이 아니라 태어난 시인이라 하겠다.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시가 천대 받는 시대에 시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천상의 시인이라는 생각 말이다.

 

󰊲 심생법생心生法生, 그 언어에의 인문人文

 

아카시아 꽃이 지면 오월도 가고

시리도록 서러운 목숨도 진다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던가

(…중략…)

소주 한 잔 세상이 돌고

오월이 가도록 오지 않는 님

(…중략…)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던가

그대 가는 길

바람인들 멈출까

사랑인들 멈출까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흩어져 가는

이 지상에서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던가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던가

―「사랑별곡」부분

 

시집의 표제가 된 『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랴』은「사랑별곡」에의 시구에서 차용된다. "세상의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여/ 죽어서도 별이 되겠노라 하던 친구는/ 어느 별에 머물러 그리움 달랠까”하는 철학에서 출발되어,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흩어져가는” 인생의 궁극적 진실에의 깊이 있는 사유를 아름답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시인의 시편들 대부분 본질을 꿰뚫고 있으나, 난해하지도 무겁지 않다. 주제는 다소 우리네의 지난至難과 삶의 기억과 얼룩 등을 오브제로 삼고 있지만, 그 형상화과정에서 대부분 승화되어서 시인의 시세계는 맑고 아름답다. 오관을 활짝 열어 놓은 열린 감각에 의해 형성되는 이러한 시상詩想의 전개방식이 혼융된 일상을 처연히 조응하게 한다.

더구나 오랜 세월 탁마해온 언어의 풍부한 수사력에 의해 시의 품격과 밀도를 높이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자연 풍경에서 촉발되는 이미지들을 내면화하거나, 풍경 속에 내재된 자연을 일상화하는 식의 작업을 추구하고 있다. 시인의 부단한 정진의 결정체인 새 시집에서 삶과 사랑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에의 에너지가 놀랍도록 눈부시다.

 

삶이란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는 악기가 아니다.

잘잘못을 논하지 않고 끝없이 포용하는 강물처럼

세상과 타협하는 유연함이다.

나에게 너는 에메랄드 빛 바다 같은 곳

사랑도 애증도 돌아서면 희미한 추억이라서

분노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중략…)

현재는 살아있음 그 자체이다.

누가 이 세상을 힘들다하는가

모든 것은 다 마음속에 있어

미움도 때로는 사랑이라 가슴에 담아두기엔

지천명의 시간이 너무 짧다네.

삶이란, 그림자 같은 것

나를 밟고 있어도 결코 무겁지 않는 존재

눈 오는 날은 눈을 맞고

비 오는 날, 비 맞는 즐거움으로 행복 하느니

그대여 너에게 나는 진정 무엇이었느냐.

어제는 길가에 피어난 들꽃 한 송이로 족했거나

아니면 스쳐 지나다 만난 인연으로 족했더라도

오늘은 누군가에게 나도, 마음을 덥혀줄

따뜻한 그리움이고 싶어

이 저녁 타는 노을로 거울 앞에 선다.

-「흐르는 강물처럼」부분

 

시인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외면하지 않고 구도자처럼 이를 응시한다. 이미 저 멀리 흘러간 기억과 감정 등을 되새김하며 담담한 어조로 풍경 속에 내재된 일상의 이미지를 발견하여 형상화한다. 이에 포도주처럼 농익은 잠언의 등장이 시적분위기를 격상시킨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널리 알려진 영화 제목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는 영화의 내용과 많이 다르다. 영화는 낚시를 종교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맥클레인 가족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주인공 형제는 어려서부터 낚시를 즐긴다. 이들 가족은 너무나 사랑했지만 서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아들을 잃고 통탄하는 목사의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 시인의「흐르는 강물처럼」의 시적의도를 살펴보자.

“삶이란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는 악기가 아니다./잘잘못을 논하지 않고 끝없이 포용하는 강물처럼/세상과 타협하는 유연함이다.”, “모든 것은 다 마음속에 있어/미움도 때로는 사랑이라 가슴에 담아두기엔/ 지천명의 시간이 너무 짧다네./삶이란, 그림자 같은 것/나를 밟고 있어도 결코 무겁지 않는 존재.”이라고 성찰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서 나오는 진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을 달관한 시인에 의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시어들이, 염주처럼 한 알 두 알 꿰이듯이, 아름다운 삶의 무늬들을 잘 교직해서 보이는 듯이 그려주고 있다. 시인이「흐르는 강물처럼」을 두고 표제로 삼을까 고민했을 만큼, 시인의 특장이 잘 나타나는 시이다.

라일락 꽃향기가 뜰 안에 가득한 날

봄이 머문 나뭇가지에

바람이 앉아 고개를 흔듭니다

꽃향기가 우리 집 백구 딸 초롱이를 불러내

온 동네 녀석들에게 향기를 뿌렸는지

열 마리도 더 넘는 놈들이 대문 밖을 서성이다

바람에게 혼이나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중략…)

어쩔 수 없이 키우다보니

어느새 식구가 세 마리로 늘어서

꽃향기가 날릴 때면 자꾸 겁이 납니다

우리 집 녀석들은 모두 얌전하다지만

라일락 꽃잎이 떨어지는 어느 날, 어머니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는 한 녀석을 위해

말없이 대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람이 앉았던 나뭇가지에

아침부터 살포시 햇살이 내려

꿈꾸듯 이파리들이 기지개를 켭니다

집나간 초롱이가 돌아왔다고 저 먼저 신이나 살랑댑니다

어쩌지요

이런 날 우리 집 대문밖에는

열 댓 마리 손님들이 학익진을 펼치고

해실한 초롱이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초롱이」부분

 

어느 날 업둥이처럼 데리고 온 백구 초롱이가 이 시의 주인공인 셈이다. 귀여운 강아지의 일상을 수채화처럼 그리고 있다. 한 편의 아름다운 동시로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통상의 강아지는 바깥에 내어 놓은 쓰레기통이나 골목길의 전신주 기둥에 묻은 오줌냄새 따위를 끙끙거리며 대상을 찾아나간다. 하지만,「초롱이」의 백구(암컷)는 꽃향기에 이끌려 집을 나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적화자의 눈높이이다. 마치 예리한 침묵처럼 시인의 눈은 “초롱이”의 일상을 아름다운 풍경화 보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바깥에 나갔다가 초롱이 백구가 돌아 올 무렵이면, 잔잔했던 “바람이 앉았던 나뭇가지에/ 아침부터 살포시 햇살이 내려/ 꿈꾸듯 이파리들이 기지개를”켜며 반기는 신선한 바람의 이미지가 이채롭다.

“어쩌지요 /이런 날 우리 집 대문밖에는/열 댓 마리 손님들이 학익진을 펼치고/해실한 초롱이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에서의 ‘학익진鶴翼陣’이란 단어가 역설적으로 시적 효과를 높인다. 학익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대중에게 널린 알려져 있어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단어라 하겠다. 시인의 시심은 이와 같이 해맑다. 자연스럽게 생성된 원초적인 언어로 그려진「초롱이」는 생수와 같다. 청정한 공기와 같다. 읽고 다시 읽을수록 웃음이 입가에 초승달처럼 물리는 시다.

 

󰊳 아픈 부재 속에서 생명이 메아리치다

 

딸을 보낸다

터미널에서 또 일주일의 이별을 한다

홀로 긴 세월을 가야하는 아이에게

이별이란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목을 껴안고 볼을 부비고

그리고 입맞춤이라도 해줘야

안심하고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모녀간의 만남을 사랑해야지 하면서도

왜 태어났을까를 반문하는 나

손 발짓의 대화가

남들에게는 어색할지 모르나

둘만의 언어이기 때문에 더 정이 가는 것은

사랑이리라

일상의 잡다한 감정들을 추스리며

아이의 내면이 얼마나 섬세한가를

문득문득 깨닫는다

(…중략…)

오늘도 아이는 말없이 창원으로 갔다

불시 한 통의 전화쯤 오리라 기대하면서

비 내리는 터미널을 혼자 빠져 나온다.

―「예정된 이별 」부분

 

어머니란 어떤 존재일까. 모든 사람들이 애경하는 어머니란 존재. 그런 어머니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보고 배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이혼과 별거로 인해 엄마와 떨어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이 시대에는 넘쳐난다.

「예정된 이별 」의 시의 주인공들은 한 공간과 시간 속에 서 밥 먹고 자고 함께 생활하는 보편적인 가족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이미 예정된 이별이 기다리는 짧은 만남 속에서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각각 감당해야 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모녀간의 만남을 사랑해야지 하면서도/왜 태어났을까를 반문”을 수없이 반복한다.

우리 사회의 증가하는 이혼으로 고통을 받는 아이의 외로움과 그것을 지켜보는 입장의 어머니란 존재가 또 감당해야 할 몫의 업이 전기電氣처럼 느껴지는 시다. 그래서 확 눈에 들어오는 시이기도 하다. 그럴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 사랑함의 괴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더욱 어머니임을 느끼(이 주홍 시인의 글 중) ”는 존재인가보다.

 

수 천 번도 더 다녔을 국도 14호선을 따라

직행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한다

버스 안 라디오에선

기억조차 희미한 비틀즈의 노랫소리

황사처럼 뿌연 상념들이

지나간 청춘의 등불인양 떠올라

차창엔 어느새 노을보다 붉은 눈물이 진다

(…중략…)

마음 한 자락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났던 인연이건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존재는 진정 무엇인가

20년이 넘게 이 길을 오가며

낙엽과 바람과 꿈과 파도에

덧없이 실어 보낸 내 젊은 날의 회한들

조선소 옥탑에 걸린 하현달 모습에

불현듯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면

어디선가 귓전을 흔드는 성당의 종소리

—「퇴근길」부분

수천 번도 더 다닌 퇴근길. 그 길은 늘 똑 같지만 매번 다른 길로 다가온다. 버스 안에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비틀즈의 노랫소리가 어느 날은 “황사처럼 뿌연 상념으로, 어느 날은 노을보다 붉은 눈물”이 된다.

“20년이 넘게 이 길을 오가며/ 낙엽과 바람과 꿈과 파도에/덧없이 실어 보낸 내 젊은 날의 회한들”이 창밖의 밀려오는 파도소리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퇴근길이면 되살아난다.

삶의 근원적 모순과 결핍과 고통 등을 감각적이며 개성적인(정적) 어조로 차분히 전언하고 있다.「퇴근길」과 「예정된 이별 」의 시의 정조는 한 색깔이다. 두 편 다 삶의 고단한 길 위에서의 노래이다.

“한 사람을 위해 살아온/무상의 세월이야/그대를 볼 수 없다는 아픔인 걸”과 같은 시구에서 보이듯이, 불투명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의 대상을 풍경화하고 있다. 하여 우리네의 삶의 본질을 환기시키고 있다.

무릇 좋은 시인이란 보편적인 정서를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자를 이른다. 시인의 특장은 우리네의 고통과 아픔을 직설하지 않고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점이다. 아픔을 아픔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시가 아니듯이, 삶의 고통과 사랑의 상처조차“아무것도 아닌/그저 지나가는 시간일 뿐(「왕망령에서」)”이라며, 노래처럼 쓰린 상처를 쓰담 듯이 위무 해준다.

 

󰊴 자연 순환 구조에의 시세계

 

하필이면

개불알이야

꽃무리 언저리

실바람 불어

섬 그늘 마늘밭에

지심으로 피어나

예쁜 몸매

뽐내지도 못하고

호미사이 피해 사는

천덕꾸러기이냐

 

양지바른 길가

시름에 겨워

발길에 채이고

먼지에 얼룩져도

이른 봄 수다쟁이

꽃망울로 맺혀서

봄나들이 가자고

목 흔드는

저 짓거리

-「들꽃- 개불알꽃」전문

 

단테는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고 말한다. 괴테는 “자연은 모두 신의 영원한 장식이다.”고 말한다. 필자는 앞서 “이채영 시인의 시는 자연이다.”고 말했다. 그렇다. 시인의 자연친화적인 사상을 잘 드러낸 「들꽃- 개불알꽃」의 시를 곱씹으며 씹을수록 시인의 시는 자연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그녀는 이러한 자연친화적 메타포를 구체적으로 심화하여 「꽃들의 수다」에서 풀어낸다.

이 글의 서시 격인「복수초」작품을 다시 읽어보자. “복수초 한 무리 꽃등 켜고 앉아/ 양지바른 언덕 위 꽃불을 밝히네”와 “바람꽃, 왕제비꽃, 가냘픈 몸매로/님 오실라 꿈꾸듯 한들거리는”같은 구절을 보라. 마치 관념적인 세계의 그리움이 양지바른 언덕 위에 노란 복수초 무리로 변주되고 있다. 뛰어난 언어구사와 이미지 조화가 절묘한 수작이다.

이러한 풍경의 내면화 작업은 「겨울 백두를 오르며」,「남도기행1-하동포구에서」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여름은/ 내안의 그리움 모두 태우고/ 섬진강 어귀 소나무 등걸에 앉아/솔바람 소리로 남아” 같은 부분의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숲은 모두 눈 속에 묻혀/ 봄을 잊었는지/ 잠에서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었다(「겨울 백두를 오르며」)” 에서 다층적인 시적 의도를 신선한 이미지로 변주한다. “너무 깊은 곳에 있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화암사 가는 길을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이 말이다. 시인은 시적 기교보다 집약적인 감각적 사유를 유추하여, 곰삭은 서정의 향기를 발산한다.

 

잠을 깨면

창문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가덕도를 향해 가끔씩 삼배를 한다

(…중략…)

다리 위를 지나가는 긴 자동차들의 불빛너머

아련히 육지가 돼버린 가덕도가 아침바다로 일어선다

희뿌연 방파제 너머 양지암으로 뜨는 햇살에

겨울이 올 것을 예감하는 어머니의 손끝은

벌써 남새밭 어디 쯤 무시래기를 말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조선소로 출근하는 아들을 위한

첫새벽 아침공양은 사시장철 눈물이다

지금은 겨울로 가는 길목

방파제로 향하는 곳곳마다 동백꽃무리 붉게 피어

메기며, 대구 잡이, 새우 잡이,

할아버지, 아버지, 그 아들의, 손자들이

철철이 그물 말리며 고기 잡던 능개 부두

언제부터 빈 고기상자, 은빛 꿈으로 남아 있고

새벽안개를 접어 올리며 바라 본 가덕도의 아침은

잡 힐 듯 잡히지 않는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아무리 애써 봐도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

그래도 바닷가엔 조각난 옛사랑이 먼 기억 속을 맴돌고

두 평 반 어머니의 작은 남새밭은

늦가을 푸른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능포에서」부분

 

「능포에서」는 시인에게 “아무리 애써 봐도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그래도 바닷가엔 조각난 옛사랑이 먼 기억 속을 맴돌”는 공간이다. 이 작품 역시 삶의 풍경을 통해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시화하고 있다. 무의식 속에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들과 현실적인 바다의 풍경이 중첩되어 있다.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평온하다. 그러나 시의 바탕을 지배하는 정조는 내밀한 고통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희뿌연 방파제 너머 양지암으로 뜨는 햇살에/ 겨울이 올 것을 예감하는 어머니의 손끝은/ 벌써 남새밭 어디 쯤 무시래기를 말리고/오토바이를 타고 조선소로 출근하는 아들을 위한/첫새벽 아침공양은 사시장철 눈물이다 ”와 같은 시적 묘사에서 짐작된다. 시인은 이처럼 소박한 언어를 통해 삶의 붕괴의 징후 및 통한을 담담하게 풍경화처럼 그린다. 이 점이 덕목이라 하겠다.

절대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어조로 우리네 삶의 실체, 삶의 무늬를 천연스럽게 그려낸다. 새 시집의 많은 시편들이 이러한 삶의 탐색에의 기록이라고 하겠다. 우리네의 보편적인 일상을 자연처럼 그려내는 재능의 소유자가 이채영 시인이다.

 

몽돌이 아침을 깨우는 바다가 사라진 바닷가에는

비린 갯냄새마저도 이제는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물 보러 갔던 오시기 배들은 보이지 않고

싼 판엔 노란 플라스틱 박스들만 차곡차곡 쌓여

어부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문어단지며 멸치 그물을 삶던 가마솥들은

엿장수 리어카에 실려 고물상으로 갔습니다

진명호도, 주성호도, 새우 잡이 하던 명덕이 아제도

양지암 너머 동생들이 꾸었던 만선의 꿈도

이제는 30년 전 향수가 돼 버렸습니다

우리 집 목선은 박물관에 앉아 있고

평생을 어부로 사셨던 아버지의 넋은

오늘도 누룩나무 밑에서 졸음을 쫓으시나 봅니다

(…중략…)

양지암 앞 소광조 어장도

주인 잃은 요즘은 영 재미가 없는 모양입니다

어촌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사람들

그들마저 떠나 버리면 이제 능게는 없습니다

능포항에 공원이 조성된다고

우리 집 앞 바닷가는 한창 매립중입니다.

몇 년 후 누군가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어촌이 없어졌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요

능포엔 바닷가가 없어졌습니다.

방파제 너머 손바닥 만 한 추억이 전부인

예전의 그 바닷가에는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움만 출렁일 것이고

등대로 향하는 발 길 따라

동무와 함께 부른 인어의 노래도

속절없는 메아리로 돌아 올 때문이겠지요.

-「능포 아리랑 2」부분

 

「능포 아리랑 2」는 사라져가는 바다(죽은 바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한편의 좋은 해양 시로 주목 할 만 한 작품이다. 오늘날 지구촌의 바다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남해에서 잡혔던 멸치가 동해에서 나타나고, 동해에서 잡히던 오징어가 서해에 나타난다. 바닷가에 사는 시인. 바다가 삶의 공간인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바다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를 ‘어머니’와 ‘인어’로 상징하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물 보러 갔던 오시기 배들은 보이지 않고/ 싼 판엔 노란 플라스틱 박스들만 차곡차곡 쌓여/(…)/ 그 옛날 문어단지며 멸치 그물을 삶던 가마솥들은/

엿장수 리어카에 실려 고물상으로 갔”다고 바다의 죽음을 함축적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한 역작이다.「능포 아리랑 2」는 시인의『표류하는 것이 어디 별뿐이랴』시집의 색깔을 대표하는 시다.

불가에서 이르기를 옷깃만 스쳐도 수억 겁의 인연이 있어야 된다는데 시인의 시집 발문을 두 번이나 쓰는 이 인연의 축복은, 부처님의 손바닥처럼 정말 크고 크다.

끝으로 시인의 시집이 독자들에게 더욱 더 많이 읽히길 빌며,「도화곡을 오르며」를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맺는다. 진심으로 이채영 시인의 새 시집 발간을 축하한다.

북소리가 들린다

우공이 산을 옮겨 무릉도원에 도화곡이 생겼다고

중원 땅 선비들이 앞 다투어 오르던 비룡협

절벽을 따라 그려진 나이테 하나하나

태고의 신비가 살아 숨쉬고

발끝으로 전해져 오는 전율 같은 공포

협곡을 오르는 길은 노오란 개나리꽃 천지, 복숭아, 벚꽃, 살구꽃밭

물길인지, 발길인지, 꿈길인지 몽환 속에서

계곡을 이어 놓은 철계단을 건너 무릉도원으로 갔다

자연이 꾸며놓은 아름다운 환상은

나무도, 산도, 바위도, 계곡도 바라보는 이의 몫

천 길 낭떠러지 바람도 쉬어가는 곳에서

내 생의 끝을 안고 돌고, 또 돌고 돌다보면

다시 시작되는 삭막한 이 세상의 끝

중원 땅 태항산에서 북소리를 듣는다

나를 깨우고, 신천지를 깨우고

죽자고 싸움질만 해대는 저 잘난 사람들 마음도 깨우고

못난 짓 일삼는 우리네 영혼도 깨우고 돌아가는 길

무릉도원 신의 동네에 빗장을 풀고

북소리를 울리며 내가 간다

중원 땅을 흔들며 우리가 간다

―「도화곡을 오르며」전문

 

*필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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