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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梁明)…비운의 독립운동가
양명(梁明)…비운의 독립운동가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4.0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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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만리에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

▲ 거제 사등출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양명'

양명은 한국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사회주의 역사에 있어서는 김일성의 족적을 훨씬 뛰어 넘을 뿐 아니라 박헌영(남로당 당수)에 앞서는 전력을 갖고 있다. 초창기 조선공산당은 그의 손에 의해 완벽한 틀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밖에 6·10만세운동, 신간회 창건, 일제에 대항한 농민·노동자투쟁(10회) 등 독립운동의 족적 또한 어느 독립운동가에 못지않다.

하지만 양명은 1945년 거제 동부면 학동에서 모습을 보인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 1945년 양명은 건국준비위원회 72인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고 그해 10월 학동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 자리에서 양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동지 여러분, 손바닥만 한 이 나라가 서로의 세력다툼으로 풍전등화에 놓였소. 나는 이국 하늘에서 완전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동지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주시오.”

이후 양명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의 부인 조원숙도 1930년대 거제 사등의 본가에서 머물다가 해방 후인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다음부터는 아무런 자취가 없다. 후손으로 아들 양대가 있다.

후손들은 2005년 양명의 사망신고를 마치고 독립유공자 신청했으며 2007년 8월15일 경남 도청 도민홀에서 열린 제62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제62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 민족자존의 기치를 높이 세운 양명선생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포상한다고 밝혔다.

거제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업적이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젊은 항일운동가 양명, 사회주의에 입문

양명은 젊었을 때부터 항일운동가로 크게 주목받았다. 1902년 사등면에서 천석군(실제 5000석 재력)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양명은 거제초등학교를 거쳐 부산상고로 진학했다. 1919년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중국 북경대학 문과에 입학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택한 항일운동의 방법은 사회주의운동에의 참여였다.(양명의 고등학교와 관련 부산상고를 졸업했다는 기록과 서울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공존하고 있다. 명확한 것은 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이다.)

1924년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들어가 기관지 「혁명」을 만들다가 25년 8월 귀국하여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에 들어갔고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하활동에 들어간다.(양명의 활동에 앞서 1925년 4월에 창당된 제1차 조선공산당은 박현영 등 수뇌부의 일제검거로 인해 궤멸상태였다.)

양명은 제2차 조선공산당 창당서부터 제4차 조선공산당까지 기획, 조직, 자금을 담당하며 신출귀몰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1926년 말 제3차 조선공산당 결성은 양명의 기획 하에 전국적 조직으로 완성돼 나갔다. 1대 김철수 책임비서 시절 선전위원으로 활동했고 2대 김준연 책임비서(전 민중당 대통령 후보 및 당수) 때에는 기획, 자금을 담당하는 중앙위원을 맡았다. 이듬 해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으면서 공산당 지도자로 부각했다.

1927년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상해를 다녀온 다음 조선공산당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1927년 11월 초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김준연에게 모든 당무와 후계당 조직을 위임받았다.

당시의 상황을 일제사법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외부에 대해여 비밀누설이 극심해지면서 간부들의 신상에 위험이 조석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간부총사직을 행하고 후계 간부에게 인계하자는 주장이 대두됐다. 수차례 토의한 결과 현 중앙간부의 사무일체를 양명에게 인수하고, 오직 양명 한사람이 후계간부를 조직한 다음 해외로 밀항해 버리면 당국에 검거되는 일이 있더라도 당간부는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11월에 일체의 사무를 양명에게 일임했다.’

▲ 1929년 모스크바 공산청년대학(국제레닌학교)에서 공부한 멤버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김태연(김단야), 박헌영, 양명. 뒷줄 오른쪽 첫째가 베트남 혁명의 영웅 호치민이다.

제6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비롯 중앙간부 인선 책임을 맡은 양명은 이때부터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배후에서 지휘한다. 양명은 선전위원 하필원과 의논한 뒤 충남 논산 출신 김세연을 책임비서로 임명하며 조직일체를 넘겼다. 자신은 조선공산당의 고문격으로 막후에서 조선공산당을 지휘했다. 일본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낙인돼 바깥출입이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 소련으로 망명한 양명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연구원이 되었고 1934년쯤 외국문 출판사 조선어 담당이 되었다.

당시 양명의 활약상은 45년이 지난 1970년 5월4일 김준연(독립훈장, 전 민중당 당수, 대통령 후보)이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김준연은 조선공산당 내 양명의 위치와 활약상을 공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양명은 당대의 이론가이며 조직가이며 투쟁가였다. 당 활동가로서는 하필원(3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의 상위였다. 그는 상해와 만주 및 노령에 많은 동지들을 갖고 있었다. 양명은 하필원과 자리를 바꾸었지만 하필원의 고려공산청년회를 당간부의 위치에서 지도했다.”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 선택

양명의 활동은 국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상해로, 상해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하면서 코민테른 및 각국 공산당 지도부와 연합전선을 펴는 책임자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내에서 가장 능력있는 해외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양명의 해외출장이 장기화 될 경우 조직의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양명의 지도하에 있던 고려공산청년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산하에 전국적으로 학생위원회가 발족됐고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은 양명이 지도하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독립운동의 방향과 사회주의 사상을 배워나갔다. 당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합작으로 출범시킨 신간회도 양명이 배후에서 조종했다. 신간회 주요 멤버로 참여한 홍명희(소설 임꺽정 작가. 전 북한 부수상)도 양명의 지휘 아래 조직 확장사업에 투입됐다.

양명은 조봉암(전 대통령 후보) 등과 함께 상해에 거점을 두고 코민테른을 통해 조선공산당 운영자금을 전달했고 조선공산당에서 코민테른에 보내지는 보고서도 관장했다.

1929년 5월 일본 경무국이 작성한 ‘치안개황’에 보면 양명의 조선공산당 운영자금 관장업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모스크바 운동자금의 입수 및 용도, 1928년 3월15일에 상해의 양명이 김용찬을 시켜 선전비 2500원을 보내왔는데 그 금액은 양명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에 1500원을, 공산청년회에 1000원을 분배했다.’

모든 조선공산당 자금이 양명의 손을 거쳤고 사용내역 또한 양명의 지시에 따라 쓰여진 것이다. 이 같은 이유는 상해에서 활동하던 양명이 코민테른 극동부 요원으로서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명이 4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공산당 내부의 갈등으로 해체되고 만다. 내부파쟁을 주도한 세력은 서울파였다.(서울파는 해방직후 박헌영이 접수하여 남로당을 창당했다.)

이후 구심점을 잃은 조선공산당은 파벌간 주도권 싸움으로 극렬해지기 시작한다. 곳곳에서 과격한 투쟁이 빈발하여 사회주의 운동은 극좌로 선회하게 된다. 결국 비합법투쟁이 빈발하면서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합동전선을 폈던 신간회가 문을 닫게 되고 종래의 민족통일전선도 단절, 와해된다. 여기에다 일제의 공산당 검거작전이 해를 갈수록 강도가 높아져 해방될 때까지 약 15년간 공산당 활동은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양명의 독립운동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제2차 독립운동을 신채호, 김두봉의 의열단을 통해 실현한다.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을 택했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1945년 양명은 건국준비위원회 72인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고 그해 10월 거제 동부면 학동에 모습을 드러낸다. 양명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동지 여러분, 손바닥만 한 이 나라가 서로의 세력다툼으로 풍전등화에 놓였소. 나는 이국 하늘에서 완전한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동지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주시오.”
 

상해 망명 중 만난 양명의 부인 조원숙

▲ 양명의 부인 조원숙.
양명의 동지이자 신여성.

양명의 부인 조원숙(趙元淑, 1906~?)은 강원도 양양(襄陽)에서 태어났다. 1924년 우리나라에서 맨처음 생겨난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에 들어가 집행위원이 됐다. 1926년 6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조두원과 함께 들어간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으로 왜경에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다음해 4월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 5월 근우회 집행위원 및 서부부원이 되었다. 같은 해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근우회 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어 28년 2월까지 활동했다. 지하투쟁을 하던 중 8·15를 맞아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조원숙 자취는 알 길이 없다. 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다음부터는 아무런 자취가 없다. 오라비인 조두원과 함께 처형당하지는 않았더라도 여류혁명가 조원숙에게는 밟아나가야 할 ‘역사’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와 관련된 기록은 1946년 11월20일자 ‘독립신보’에 난 ‘폭풍전야에 헤어져 기다릴 길 없는 남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양명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하 기사 전문이다.

▲ 1948년 북한 제1차 최고인민회의 장면. 조원숙은 대의원으로 뽑혔으나 이때 이후 자취를 알 수 없다.

개천을 끼고 삼청동 막바지가 거진 끝나도록 올라가다가 호젓한 골목으로 열 걸음쯤 구부러지면 좁직한 ‘산파’ 간판이 붙은 양옥에 조원숙 여사가 묵고 있었다. ‘여성동우회’ ‘근우회’ ‘6·10만세사건’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을 거쳐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한 것까지를 알고 있는 기자는 “상해에서의 결혼생활과 그 후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하고 물었다.

상해 망명중 만난 남편 모스크바로

“상해에서 양명이라는 남성동지와 만나 극히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을 시작했죠. 그때 난 서른 살이었드랬는데, 안온한 가정생활이 그리운 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마는 그인 밤낮을 가림이 없이 연락사업에 바빴고 때로는 소련 연안 등지로 장기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동거생활 3개년에 한 달을 함께 살아본 일이 없어요. 그땐 나두 열심히 공부는 했댔어요.”

“그 다음 그분은 어데로 가셨습니까?”

“모르죠. 폭풍전야에 모스크바로 간다고 가버렸는데 어데 소식이 있어요.”

“그게 몇 년 전 일입니까?”

“그때 배 안에 들었든 애가 지금 열여섯 살이니까 17년 전(1929년경으로 추정)이군요. 그동안 전연 종적을 모르죠. 그 다음 나는 그이의 고향인 경상도 거제도 섬 속에 들어가서 하고 많은 날 시어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무 배추를 매 가꾸면서 그만 이렇게 늙어버렸답니다. 호호…. 이 시집살이 하는 동안 나의 운동이란 극히 미온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운동이란 오히려 저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기에 필요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큰 키에 걸맞은 머리털하고 안경 밑에 언제나 이지적인 눈이 노리고 있는 여사가 갑자기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일지 모르나 드물게 보는 일일 게다. 마지막으로 여사는 “지금부터의 운동은 새로운 동무들에 절대적으로 믿는 바가 큽니다. 새 세대는 새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우리 같은 늙은이는 억지로 젊어지려는 노력에서만 용기를 얻습니다”라고 말했다.

병정구두의 복잡한 구두끈을 맬 때 벌써 해가 저물어 갔다.
 

▲ 1926년 1월1일자 동아일보에는 ‘先驅女性들의 新年新氣焰(선구여성들의 신년신기염)’이라는 기사에서 조원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란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조원숙이다.


 

▲ 1926년 1월6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女性運動의 先驅와 現役(여성운동의 선구와 현역)’이라는 기사에 게재된 양명의 부인 ‘조원숙’. 파란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조원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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