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주 집에서 만난 한 지인이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김종필 전 총리의 황혼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뉴스를 통해 김 전 총리가 평생을 함께 해왔던 부인을 떠나보내며 하염없이 눈물짓던 모습을 본 터라 이를 두고 하는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90세의 연세에도 그렇게 부인에 대한 애틋함을 표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받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의 의도는 좀 더 달랐다.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에 있어 이 분만큼 노년을 제대로 정리하는 정치인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빈소를 찾는 정치인들에게 그가 던지는 촌철살인 같은 한마디가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한 나라의 원로의 모습은 이래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럼 우리 거제사회에도 이런 원로가 있을까요?” 받는 쪽에서는 난감했다. 그냥 한때는 지역사회를 호령하며 이름깨나 날렸고,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는 인물이면 원로급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닌 듯싶어 쉽사리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다음날 나는 김종필 전 총리와 관련된 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언론들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던 노정객 김종필 전 총리가 그의 부인을 조문했던 후배 정치인과 대화에서 자신의 정치적 경륜과 지혜를 정제된 언어로 전달한 것을 두고 ‘빈소정치’ ‘정치훈수’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국가 원로로서의 품격을 논했다.
어떤 정치평론가는 김 전총리를 ‘늙은 말의 지혜’라는 뜻의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한자성어로 요약했다. 이 한자성어는 한비자의 설림(設林)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그 어원을 보면 이렇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환공이 어느 해 봄 명재상 관중과 대부 습붕을 데리고 고죽국 징벌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이 계획했던 것보다 길어져 그 해 겨울에서야 끝이 났다.
혹한 속에서 지름길을 찾아 돌아온다는 것이 결국 길을 잘못 들어 모든 군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관중이 “이럴 때는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며 즉시 늙은 말 한 필을 풀어 놓으라고 명을 내렸다. 그 늙은 말을 따라 군사가 이동하다보니 얼마 안 돼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지금 거제사회에는 품격 있는 진정한 원로가 있는가. 그리고 젊은 세대들은 원로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존경으로 맞이할 수 있는가. 전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선뜻 답을 꺼린다. 인간관계에 따라 저마다 호불호가 있고, 그 사람에 대한 가치 평가의 잣대가 서로 다른 것도 이유가 있지만 손으로 꼽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만큼 ‘인품을 갖춘 원로다운 원로’가 귀하다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어떤 지역사회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원로는 존재한다.
사전적으로 원로는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하며 나이와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역사회에서 화려한 이력과 경력을 가진 원로들은 더러 있지만,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찾으라면 많은 이들이 의문부호를 단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지역에 품격 있는 원로는 없다”고 아예 말을 잘라 버린다. 당황스러우면서 한편으로 이 지역사회가 원로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왜 이렇게 각박한지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 지금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는 내공이 높고 품격 있는 원로들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 같은 풍토에 대해 지역의 한 인사는 “원로로 자처하는 일부 인사들의 가벼운 처신이 가장 큰 이유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일부 원로들의 ‘원로답지 못한 행동양식’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이런 부류를 ‘무늬만 원로’라고 토를 달았다.
특히 선거 때 특정 진영에 출근하다시피하며 이런저런 훈수를 두다 되레 그 진영의 젊은 일꾼들로부터 외면 받거나, 반대파들로부터는 곱지 않은 시선을 자초하면서 스스로 원로로서의 위엄을 추락시키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일부 원로들의 경우에는 기업과 관가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각종 사업의 이권은 물론 인사까지 개입하는 볼썽사나운 처신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며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의 현안사업과 관련해 일의 전문성은 제쳐두고라도 사업에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쓸데없는 오해를 사는 것도 원로로서의 품격을 잃는 하나의 이유로 꼽았다.
심지어 자칭 원로로 자처하는 일부 인사의 경우 인·허가 등 이권사업에 개입해 행정과 정치권 등에 입김을 넣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처사는 한마디로 꼴불견이라고 지적했다.
원로들이 지역의 리더를 자처하며 지역의 현안마다 ‘약방의 감초’격으로 나서는 것은 리더와 원로의 설 자리를 혼동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꼬집었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흔히 풍문으로도 들을 법한 이야기지만 어찌 보면 말 푼께나 하는 ‘동네 유지’들의 장난질 같아 씁쓰레하다. 어쨌든 “원로가 원로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대충 이런 정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로들이 이러지는 않다. 우리 주변에는 분명 고결한 인품을 갖춘 원로는 있다. 다만 이들은 나서질 않을 뿐이다.
우리말에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하지 않는가. 일부 원로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처신 때문에 품격 있는 원로들이 도매금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더더욱 젊은 세대들도 유감스러운 몇몇 원로들의 처신과 수준을 가지고 지역의 원로들 모두가 그런 것으로 단증 하는 섣부름은 금물이다.
그리고 원로들을 ‘뒷방 늙은이’로 평가절하하며 그들의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를 ‘잔소리’ 정도로 흘려듣는 그런 경솔함은 안 될 일이다.
가능하다면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지역의 원로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 고견을 듣는 정기적인 자리를 어느 누구라도, 어느 기관이라도 하루빨리 시작했으면 좋겠다.
품격 있고 존경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원로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후배들에게 전달하는 장(場)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래서 갈등과 반목에 발목을 잡힌 지역의 현안들이 그들의 경륜과 지혜로 해법을 찾았으면 한다. 품격 있는 원로는 충분히 그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가치가 있는 존재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헤치며 살아온 천년 노송을 그냥 멀거니 쳐다만 보아서 그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지 않는가. 원로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원로의 살아온 세월이 무시되는 사회는 뿌리를 부정하는 사회다.
쳐다만 보아도 설레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그런 원로들의 등장이 그리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