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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 …①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 …①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2.0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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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서(鄭敍)에 대한 역사 기록 1). 개요 2). 정서(鄭敍)와 거제

2. 정과정곡(鄭瓜亭曲) 거제도 창작 사유

1). 정과정곡 창작시대 도표 정리

2). 과연 정서와 고려 의종은 거제도 땅에서 재회했을까?

3). 왜? 정과정(鄭瓜亭)곡이라 부르는가?

4). 창작시기 (동래, 거제, 사면 후) 학자들의 견해.

5). 정과정곡(鄭瓜亭曲) 거제시대 창작 작품

3. 정서(鄭敍)의 배소 거제도 오양역(烏壤驛) 

4. 각종 한시(漢詩) 정과정곡(鄭瓜亭曲) 1). 정과정(鄭瓜亭) 2). 정과정 각종 한시 소개

5. 정과정곡 분석

6. 정서의 고려사절요 기록

7. 1170년 명종 즉위년 무신정변 / 고려사절요.

8. 임춘(林椿)이 쓴 정서(鄭敍, 鄭嗣文)의 이야기

1). 정시랑(정서) 서시 차운(次韻鄭侍郞敍詩)

2). 추도정학사서(追悼鄭學士敍)

3). 정학사에 차운하여 처음으로 머물며 짓다(次韻鄭學士 之元留題) 

4). 유사암(柳思庵) 벽란도(碧瀾渡) 시에 차운

9. 정과정곡 결론 및 맺음말

10. 고려의종에게 바치는 한시 / 오양 열부를 애도하며(哀烏壤烈婦辭)

1. 정서(鄭敍)에 대한 역사 기록

1). 개요 : 고려시대 정서(鄭敍)는 1157년 의종 11년 2월12일, 부산 동래에서 거제도 사등면 오양역으로 이배되어 1170년 무신정변 2달 후 10월말에 복권되었다. 1170년 9월 고려 의종이 개경에서 축출 되어, 정서의 유배지인 오양역 부근, 둔덕기성(폐왕성)에 와서, 정서와 약 한 달간 재회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인 "정과정곡"을 여기 거제도에서, 암담한 귀양살이를 겪으며 지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둔덕기성 인근 적당한 곳에 "정과정곡"과 그의 행적을 기린 "임춘의 詩"를 새긴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정서는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인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과정(瓜亭)이다. 어릴 때 이름은 정사문(鄭嗣文)이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항(沆)의 아들이다.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내시낭중(內侍郞中)에 이르렀으며, 1151년(의종 5)에 폐신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격이 경박하였다고도 하나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저서로는 《과정잡서 瓜亭雜書》가 있고, 배소에서 지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이 있다. 이 작품은 처음 귀양지인 부산 동래(東萊)에서 임금에게 자신의 죄 없음을 밝히고 선처(善處)를 청하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정과정곡 내용이나 정치적 정황, 개인의 암담한 거제유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1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거제에서 지었음이 확실하다.  조선중기 이후로 정과정이, 동래에서 지었다고 기록하는 분들이 생겨난 건, 정서의 본향이 동래라는 이유이다. 동래는 정서의 관향이자 동래정씨가 많이 살고 있어 동래에서의 생활은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서 사후 300년 후, 1451년『고려사』권71 지(志) 제25악, 1484년『동국통감』24 의종 장효대왕 조, 에 "정서가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의 명령이 오지 않았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것에 그 연유를 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13년 8개월의 거제유배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동국통감』 장효대왕 조와 정항(鄭沆) 조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사실적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유배생활동안 지은 노래'로 작성자가 유추해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건 '임'은 고려 의종이며, <정과정곡>은 정서가 약 20년 동안의 유배생활 중에 지은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 동시대에 살았던 임춘의 시(詩)를 살펴보자. ⌜그러나 이배 된 거제도에서의 유배생활(13년)은 너무나 참담했다. 뭇 사람들의 천대도 그렇지만 스스로 삶을 영위하기위해 채소나 곡식을 일구어야만 했다. 이 때 절박한 심경에서 그리움을 겉으로 드러낸 원망과 회한의 노래가 "정과정곡"이다.⌟

향찰로 표기한 정서(鄭敍)의 <정과정(鄭瓜亭)> / 악학궤범(樂學軌範) .前腔     내 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中腔     山(산) 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後腔     아니시며 거츠르신  아으  

附葉     殘月曉星(잔월 효성)이 아시리이다. 

大葉     넉시라도 님은  녀져라 아으  

附葉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二葉     過(과)도 허믈도 千萬(천만) 업소이다. 

三葉     힛마리신뎌  

四葉     읏븐뎌 아으  

附葉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五葉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풍류(風流) 재예(才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궁중을 중심으로 한 문관계 내직과 환관계 내료들의 정쟁(政爭)으로 발생한 대령후 사건으로 조정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의 본향인 동래(東萊)로 귀양가게 되었고 6년후 거제도에 이배되어 오양역 인근에서 13년8개월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때 의종의 말이 오래지 않아 곧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오랫동안 아무 기별이 없다가, 세월만 흐르던 차에 마침, 유폐되어 거제로 온 의종을 보고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정서가 유배생활을 했던 1151년∼1170년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한다. 의종11년 2월12일 거제도로 정서는 이배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의종이 축출되고 명종이 즉위한 그해 10월에야 사면이 내려졌다.

정서(鄭敍)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에 맞서고 공을 세운 아버지, 정항(鄭伉) 덕분에 음서로 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서의 누이들은 왕가와 명가의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정5품인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고 동서간인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정서가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의종의 즉위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인종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장남이 현(晛)인 의종이고 차남이 대녕후 경이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대녕후 경은 도량이 넓고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인종은 현(晛)인 의종을 태자에서 폐위하고 대녕후 경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현을 보좌하고 있었던 정승명의 옹호로 태자를 폐하려는 논의는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현이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배경을 갖고 있던 의종은 대녕후 경을 멀리했으며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정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녕후 경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은 권력을 탐했던 무리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참소한 결과로 의종 5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의종에게는 이모부이기도 했던 정서는 배척해야하는 대상 중 한명으로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라는 약속을 하였으나 이것은 여러 번의 소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예의 상, 했던 약속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이유로 명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소환되지 않았고, 이런 배경 가운데 거제에서 이모부 조카 사이로서 재회한 후, 정과정곡이 창작되게 되었다. 현존하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드러나는 작품인 만큼 작자가 처한 처지,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미리 파악하고 작품 분석을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과정은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효시이며 형식면에서 향가와 시조 그리고 가사를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적 가치를 더욱 빛 낼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연구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라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밝혀둔다. 또한 '정과정곡'을 지은 거제도에서 현대적 재창조(연극, 음악 등) 에도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2). 정서(鄭敍, 생존 연대 미상)는 인종의 매제로 벼슬은 내시낭중에 이르렀으나 참소로 귀양, 1157년(의종11년)에 거제도로 유배당했다. 의종 때에는 유배에 풀려나지 못하고 명종 즉위년에 가서야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유배기간은 총 19년 6개월이었다. 동래에서 5년 10개월, 거제현에서는 13년 8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묵죽화(墨竹畵)에도 능했다. 거제현에서의 유배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으나 그의 관향이었던 동래보다는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의 사정을 지인(知人) "임춘(林椿)"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禦魅二十年(어매이십년) 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동래 거제 유배 생활)

愆過懲於昔(건과징어석) 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벌써 그 죄가를 치렀다)

遷徙席不暖(천사석불난) 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所居如郵馹(소거여우일) 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거제시 오양역)

南中瘴霧深(남중장무심)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可虞傷氣脈(가우상기맥) 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거제 유배)

優游縱巖壑(우유종암학) 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屢躡登山屐(루섭등산극)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하네.(둔덕기성 고려의종 재회)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 이 구절은 유배인들이 그렇듯, 정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거제시 둔덕면 기성(岐城)에 올라, 둔덕기성에 유폐된 임금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했다. 정계로부터 버림받은 귀양살이에 대한 쓰린 마음에 더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 깊은 고독과 상처는 '정과정곡'을 통해 표출되었다.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하네" 이 구절은 고사를 인용해 설명하면, 본격적으로 등산할 생각 없이 그저 주위 풍경을 둘러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샅샅이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럴 때면 꼭 나막신을 준비하여 신고 다녔다는 고사가 있다.《宋書 卷67 謝靈運列傳》. 진(晉)나라 명사(名士)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밤 흥에 겨워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보고 싶자 배를 타고 그 집 문 앞에까지 갔다가 흥이 다하여 그냥 돌아왔다.《世說新語 任誕》. 위 한시에서는 아무런 목적 없이, 20년의 한이 맺힌 둔덕기성의 조카 의종에게 향하는 심정을 읊었다.

달빛 따라 오르는 둔덕기성에 나막신 소리 뒤따라 오른다. 속마음을 다 털어 놓고 싶다. 혹여나 비가오지 않을까? 우산과 지팡이 나막신 준비하여 임금을 맞이해야지...... 적막한 가운데 흥치가 일어나면 날마다 임모시고 멋지게 노닐고 싶었다. 비가 와서 어두우면 못 만나서 한이요, 혹여 나막신 굽이 진흙 속에 빠질까? 임 그리워 자꾸만 일어나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채비를 한다. 20년 귀양살이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리오. 옛 이끼에 내 나막신 자국 박히던 것이 보이는데...... 때마침 유배 사면령을 받아 보니, 더욱 내 마음이 저 유폐된 둔덕기성의 조카 의종에게 가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 마침 하늘에 뜬 흰 구름 보니 인간사 부귀영화 뜬구름 같아, 가슴에 북받쳐 흐르는 회한에 어쩔 줄 몰라 말없이 앉은 정서의 모습이 그려진다.

2. 정과정곡(鄭瓜亭曲) 거제도 창작 주장

1). <정과정곡 창작시대 주장 사유>

창작시기 동래 주장 사유

거제 창작시기 주장 사유

1). 1451년『고려사』권71 지(志) 제25악

2). 1484년『동국통감』24 의종 장효대왕 조

"정서가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의 명령이 오지 않았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 / 거제유배 언급 無.

3). 과정(瓜亭)이란 정자 동래 위치 ⇨ 정서의 자호(自號) ⇨ 노래 이름 '정과정곡'

4). 정서가 동래 정씨

1). <정과정곡> 내용을 살펴보면 왕에게 보낸 글이 아니라 직접 만나 하소연한 내용임.

2). 1170년 9월~10월 사이 거제도에서 의종과 정서가 재회한 역사적 사실. ⇨ 사면 후 벼슬살이 하지 않음. '님'은 고려 의종.

3). 임춘의 시(詩)에 나타난 정서의 거제 유배생활은 너무나 비참 ⇨ 이때 절박한 심정과 그리움을 드러낸 원망과 회한의 노래.

● 결론

『동국통감』 장효대왕 조정항(鄭沆) 조에 서로 다르게 기록. 사실적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유배생활동안 지은 노래'로 작성자가 유추해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던 '임'은 고려 의종이며, <정과정곡>은 정서가 약 20년 동안의 유배생활 중에 지은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

< 초나라 굴원(屈原)과 고려 정서(鄭敍)의 비교 >

중국 초나라 굴원(屈原)

고려 정서(鄭敍)

위 치

동아시아 유배문학의 거장

우리나라 유배문학 효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작 품

이소경(離騷經), 어부사(漁父辭)

정과정곡(鄭瓜亭曲)

결 말

멱라수(강)에 빠져 죽음

명종 즉위 후 사면, 초야에서 생을 마감.

작품 세계

문학작품 속에 사회적 의미와 도교적 색채, 신화, 전설, 교훈 등, 독특한 전일체적 상징체계를 이룸.

단순한 개인적인 분노와 넋두리, 원망과 회한을 읊음.

공통점

1). 정치가로는 실패 시인으로 성공.

2). 정치적 포부의 좌절과 유배

3). 자신이 섬기던 초나라(임금) 멸망, 고려 의종왕 폐위

4). 굴원은 사후(死後), 가의(賈誼)가 상수(湘水)을 건너면서「조굴원부(吊屈原賦)를 지어 조상했고, 정서는 사후(死後), 임춘(林椿)이 그의 행적을 기렸다.

2). 과연 정서와 고려 의종은 거제도 땅에서 재회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분은 거제도 오양역에서 1170년 9월 하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약 20일~35일 동안 거제에서 재회했다. 이때 정서가 의종에게 하소연하듯, 그리움과 원망을 노래한 곡이 "정과정곡"이다. 1170년 8월 병자일에 무신정변(정중부의 난)이 일어났고 9월 을묘일에 거제현으로 추방된다.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도 태후(太后)의 간청에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 거제로 왔다. 겨울 10월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 귀양갔던 정서는 서울 개경으로 복귀한다. 보통 개경에서 말을 갈아타고 급히 거제로 달려오면 7일 內에 거제도에 도착하나, 귀양길에는 수많은 백관과 가솔들이 함께 오기에, 최소 12일에서 20일 정도 걸렸다. 고려 의종이 거제에 도착한 날은 9월말 경에 도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서가 사면령을 접한 날은 10월 하순경이므로 최소 20일 이상은 고려의종과 정서는 회포를 나누었을 것이다. 19년 6개월의 귀양살이의 회한과 님(임금)에 대한 원망을 담아 고려의종에게 직접 불렀던 노래였다. 정과정곡의 내용을 찬찬히 끝까지 살펴보면 이런 재회가 있지 않고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내용이다.

"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맙소사 그대여 돌이켜 들었던 것을 거두어 주오" 아마도 이 노래를 들은 의종도 뒤늦은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시, 이모부 조카 사이로 돌아가 애정을 확인한 후, 후일을 기약하고 이별했다. 이후 고려의종은 끝내 복위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1170년 10월 사면령 이후, 많은 유배자들이 중앙에 복귀해 벼슬살이를 했지만 정서는 조용히 시골에서 살았다는 것으로, 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의종

1146년

즉위

1151년

대령후사건

1170년 8월 병자일

무신정변

1170년 9월 을묘일

거제현 추방

1173년 경주 웅거 살해

정서(정과정)

1151년

동래 유배

1157년

거제현 이배

1170년 10월 대사면령

1170년 9월 말~ 10월 말경까지 고려 의종과 정서는 거제현에서 함께 유폐되어 있었다.

이때 의종에게 하소연하듯 노래한 곡이 <정과정곡>이다.

3). 왜? 정과정(鄭瓜亭)곡이라 부르는가?

정서가 자신의 호(自號)를 스스로 과정(瓜亭)이라 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 작품을 〈정과정곡〉이라고 불렀다. 과정(瓜亭)은 정서의 관향 동래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정서는 1151년(고려 의종 5년)에 참소를 받고 동래로 귀양을 갔다가 1157년 거제도 오양역으로 이배된다. 곧 부르겠다는 왕의 약속을 믿고 20년을 기다렸다.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그해 10월말에 풀려났다. 또한 조선초 <악학궤범>에는 '삼진작(三眞勺)'이라고도 불렀는데, '삼'은 1,2,3의 3단 기본형식, 또는 제 3번째를 지칭한다. '진작'은 빠르기와 관계되는 "좀 더 일찍이", "좀 더 빨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삼진작(三眞勺)'은 가사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4). 창작시기 (동래, 거제, 사면 후) 학자들의 견해.

1151년~1170년(의종5년~24년)

1151년~1157년 동래시대

1157년~1170년 9월 거제시대

1170년 9월하순~ 10월 말 거제시대(의종과 재회)

1170년 대사면령 이후~

양주동 1998년'여요석주(麗謠釋注)'

①조윤제(한국

문학사 탐구당
 
1987년) '삼진

작(三眞勺)'

②서수생 '한국

시가연구' 형설

출판사 1970년

양염규 1957년 '
한국문학십강'

이가원 1952년
'정과정곡의 연

구' (
1917년.

4.6 경북안동

~2000년. 11.9

서울).

국문학자·한문학자.

김쾌덕 1983년 '
정과정곡 소

고'

(1). 의종5년 1151년 ~ 의종 24년 1170년 : ① 양주동 1998년'여요석주(麗謠釋注)' p22, ②장덕순 1983년 '국문학통론(國文學通論) p114', 동래~거제 배소에서 지었다.

(2). 동래시대 1151년~ 1157년 : ① 조윤제(한국문학사 탐구당 1987년) '삼진작(三眞勺)' 정과정곡은 익재 해시(解詩)를 통해 저절로 이명(異名同義)임을 의심할 수 없다. 즉 삼진작은 과정 정서가 배소인 동래에서 소환의 명을 기다렸으나 오지 아니함으로 스스로 탄식하여 부른 노래라 하겠다. ② 서수생 '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0년, 의종5년 5월부터 의종11년 거제현 배소로 옮기기 전, 곧 동래에서 지은 작품이다. ③ 권영철 1985년 '정과정가 신연구' p418에서 의종8년에서 11년 2월 이전의 4년간으로 추정했다.

(3). 거제전기 시대 1157년~1170년 9월 말 : 양염규 1957년 '한국문학십강'에서 주석도 없이 거제시대로 잡았다.

✳(4)번. 거제후기 1170년 9월말~10월 : 이가원 1952년 '정과정곡의 연구' 제4집, 정과정곡은 반드시 의종에게 복직을 뜻하고, 애원(哀怨)을 하소연한 동래시대의 작품이라기보다 의종이 정중부에게 추방되었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기의 곧은 절개를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이루어진 거제시대의 작품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정과정곡'은 의종24년 9월~10월까지의 대략 1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인정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5). 유배 사면후 1170년 11월 이후 : 김쾌덕 1983년 '정과정곡 소고'에서 "정서가 의종을 '임'이라 불렀다면 명종 즉위 후에 곧바로 사면되지 않았을 것이다"

5). 정과정곡(鄭瓜亭曲) 거제시대 창작 작품

위 ✳(4)번 견해와 같이, 왜? 거제도에서 지은 노래라고 주장할까? 다음과 같은 여러 사실로써 인정된다. 지금까지는 정서의 유배 약 20년간인, 1151년~1170년 사이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분들이 대부분이며,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대의 국문학자 사이에서는 관향인 동래에서 지은 것으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에 정과정곡 시비가 세워지고, 정서의 관향 동래에 있는 과정(瓜亭)이라는 정자가 조선초기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과감한 홍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거제도에서 창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 ① '고려사절요' 역사 기록 : 거제도 오양역에서 1170년 9월 하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약 20일~35일 동안 거제에서 정서와 고려의종이 재회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때 지은 노래가 바로 <정과정곡>이다. 이후 충성을 맹세한 정서는 명종시대에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다. 이가원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정과정곡>은 의종에게 복직을 뜻하고 본향인 동래에서 애원을 호소한 '동래'시대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의종이 정중부에게 추방되었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기의 곧은 절개를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이루어진 '거제'시대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종 24년 9월에서 10월 사이 약 1개월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인정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 또는 정과정곡이 의종이 왕위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니라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 명종을 '님'으로 하여 의종 24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창작했다고 봄이 타당하다한다. 전왕 의종이 자신이 기거하던 거제로 방축되어 왔을 때 자신에 대한 비감과 울분, 의종에 대한 좋지 못한 갖가지 감정이 뒤섞여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 노래가 나오지 않았나 유추해본다.

② 내용 : 정서의 의종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은 바로 정과정곡으로 그려졌다. 정과정곡은 바로 정서의 심정을 노랫말로 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과정곡은 󰡔고려사󰡕1451년 악지와 󰡔악학궤범󰡕1493년에 전하고 있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노래를 지은 연유를 소개하고 이제현의 소악부에는 한역한 것을 실었다. 국문으로 된 사설은 16세기 문헌인 󰡔악학궤범󰡕에 전한다, 그 내용 원본을 보면, 마치 앞에서 임(의종)을 보고 하소연 하듯, 노래한다.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는 두견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아니며 거짓인 줄을, 아~ 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 아실 것입니다. 죽은 혼이라도 임과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전)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를 부른다는 말) 멀쩡한 (거짓) 말씀이었습니까? 죽고만 싶은 것이여, 아~ 임께서 저를 벌써 잊으었단 말입니까? 맙소사 그대여 돌이켜 들었던 것을 거두어 주오!!"

정과정곡에 나타나는 정서의 심정은 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님이 과연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거제에서 재회한 의종이라고 보는 것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정과정곡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정과정곡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문학적 측면의 비판도 있을 수 있으나, 정과정곡은 역시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③ 동시대 인물, 임춘(林椿)의 시(詩) : 거제현에서의 유배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으나 그의 관향이었던 동래보다는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의 사정을 지인(知人) "임춘(林椿)"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 禦魅二十年 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동래 거제 유배 생활)

愆過懲於昔 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벌써 그 죄가를 치렀다)

遷徙席不暖 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所居如郵馹 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거제시 오양역)

南中瘴霧深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可虞傷氣脈 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거제 유배)

優游縱巖壑 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屢躡登山屐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하네. (둔덕기성 의종 방문) /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 이 구절은 유배인들이 그렇듯, 정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거제시 둔덕면 둔덕기성(岐城)에 올라, 유폐된 임금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과 충성을 호소했다. 의종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이 깊은 고독과 상처를 담아 거문고 연주하며 '정과정곡'을 통해 표출되었다.

--이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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