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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복싱계의 전설 ‘사무라이’ 파이팅 하라다 … ㉒
일본 복싱계의 전설 ‘사무라이’ 파이팅 하라다 … ㉒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8.2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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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다 마사히코 선수

110년의 유구함을 자랑하는 ‘황금의 체급’ 밴텀에는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전설의 고수들이 즐비하였다. 그들은 깊은 산중에 칩거하며 절세신공을 익혀 혜성처럼 나타나 무림천하를 뒤흔들어 놓으며 세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하지만 강호는 냉정한 법,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영원함은 없었다. 혹자(或者)는 명예롭게 퇴진하기도 하였지만 혹자는 자객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져 가기도 하였다.

1960년 11월 18일, 브라질이 낳은 초 절정 고수 에델 조프레가 미국 LA에서 엘로이 산체스를 6회에 격파하고 황금의 밴텀 맹주에 오른다. 그는 또 다시 1년 2개월 후 조니 칼디웰 마저 무너뜨리고 밴텀금의 천하를 한 손에 장악한다. 위대한 맹주 조프레 시대의 시작이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조프레의 철권통치는 5년이 지나 여섯 해로 치닫고 있었다.

1965년 5월 18일 일본 아이치현(愛知県) 나고야(名古屋), 세인들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경천동지 할 일이 터진다. 위대한 제왕 조프레의 패배였다. 상대는 160센티미터의 단신 ‘파이팅 하라다’였다. 그는 사무라이 후예답게 15라운드 내내 조프레를 핍박하여 2대1 판정으로 승리한다. 일본열도는 물론 천하 무림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었다.

조프레는 78전의 비무중에 단 두 번을 패한다. 그것도 한사람에게, 그 주인공이 하라다였다.

아시아 최초로 두 체급을 석권한 일본 복싱계의 전설 하라다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1943년 4월 5일 도쿄(東京) 세타가야(世田谷)에서 태어난다. 본명은 하라다 마사히코(原田 政彦).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난 하라다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주경야독이 몸에 배여 있었다. 그가 쌀집에서 일하며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가 다부진 그를 보고 복싱을 권유한다. 하라다는 망설임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하라다는 플라이급으로 시작한다. 그는 1960년 2월 21일 만 열 일곱 살이 되던 해 마쓰이 이사미를 4회에 내려 앉히고 험난한 강호에 첫 발을 내딛는다.

데뷔 후 1962년 5월 3일까지 하라다는 파죽의 25연승(8KO)을 달린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던 그에게 생애 첫 번째 시련이 온다. 세계랭킹 진입 목전에 에드문도 에스파라자에게 10회 판정으로 패한다. 하라다는 실망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한 달 후 리틀 루페를 일본으로 불러 판정으로 제압하고 세계랭킹 10위에 이름을 올린다.

묵묵히 앞만 보고 진군하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태국의 ‘귀공자’ 폰 킹피치에게 도전 예정이었던 동급 1위 일본의 야오이타 사다오가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제 막 세계랭킹에 진입한 하라다에게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온다.

1962년 10월 10일 도쿄 국기관, 당시 챔피언 폰 킹피치는 파스쿠엘 페레즈를 15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맹주에 오른 뒤 3차 방어를 끝내고 하라다를 상대로 쉬어 가는 기분으로 원정에 나섰던 것이었다. 챔피언은 25승(9KO) 3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도전자 하라다는 26승(8KO)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노칠 수는 없었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도전자는 굶주린 맹수처럼 챔피언을 압박한다.

11회, 도전자는 상대코너에 챔피언을 가두고 좌우 연타 80여발을 쏟아 붙는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에 챔피언은 주저앉는다. 새로운 맹주의 탄생에 흥분한 관중들은 깔고 있던 방석을 국기관 천정을 향해 내던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맹주에 오른 3개월 후 태국 방콕으로 날아가 폰과의 리턴매치에서 허무하게 15회 판정으로 왕좌를 내어주고 만다. 언제나 자신을 괴롭혔던 감량고로 인한 컨디션 조절 실패였던 것이었다.

폰에게 패한 후 하라다는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린다. 전향 후 한결 가벼워진 몸놀림으로 4연승을 질주하다 복병을 만난다. 77전에 빛나는 백전노장 ‘로프의 마술사’ 죠 메델에게 6회 세 번의 다운을 허용한 후 생애 최초로 KO로 패한다.

   
조프레에게 강력한 라이트 어퍼컷을 날리는 하라다

하라다는 오뚝이처럼 일어선다. 기(氣)를 가다듬은 그는 1964년 10월 29일, 자국의 동양 챔피언 아오키에게 도전하여 3회 KO승으로 타이틀 탈취와 함께 밴텀급 세계통합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한다. 상대는 브라질이 자랑하는 무적의 제왕 에델 조프레.

조프레는 황금의 밴텀에 걸 맞는 맹주였다. 왕좌를 쟁취한 대전은 물론 통합타이틀 포함 8번의 비무에서 그 어떤 도전자도 마지막 공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중에는 일본의 강타자 아오키 그리고 하라다에게 최초로 KO패를 안겨준 죠 메델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프레는 강한 펀치력은 물론 디펜스도 뛰어난 최절정 고수였다. 당시 도박사들은 9:1로 조프레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하였다. 조프레는 그의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마치 관광하듯 일본을 방문한다.

   
아오키와 대전

1965년 5월 18일 아이치현 체육관 WBA/WBC 밴텀급 통합세계타이틀매치, 당시 챔피언 조프레는 47승(37KO) 3무승부를 기록하고 있었고 이에 맞선 도전자 하라다는 38승(15KO) 3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하라다는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본인의 스타일인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버리고 아웃복싱을 전개한다. 조프레가 당황한다. 하라다의 인파이팅에 대비해 연습을 해 온 조프레는 하라다의 기괴한 행동에 초반부터 갈피를 못 잡고 잔매에 곤혹을 치른다. 4회, 양웅은 링 중앙에서 격렬하게 대립한다. 펀치의 정확성에서 하라다가 확연히 앞선다. 하라다는 조프레의 유일한 약점인 약한 턱을 끈질기게 라이트 어퍼컷으로 괴롭힌다. 라운드 종료 전 조프레는 도전자의 강력한 어퍼컷에 로프까지 날아간다. 하라다가 맹렬하게 대시 하지만 조프레는 링을 등지고 방어, 더 이상 클린 히트를 허용하지 않는다.

5회, 조프레는 반격에 나선다. 전 라운드에서 제법 재미를 본 하라다는 다시 본연의 스타일로 돌아가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순간, 조프레의 강력한 라이트가 적중한다. 자신의 코너를 찾지 못 할 정도의 데미지를 입었으나 이번 시합을 대비해 링 바닥에 쓰러질 정도의 연습량을 소화한 하라다는 내상을 치유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이팅 하라다의 전성기 시절

중반과 종반은 양자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마지막 15라운드를 마쳤다. 결과는 일본의 부심 다카타는 72:70으로 하라다를, 미국의 또 한명의 부심 에드슨은 72:71로 조프레를 선택하였다. 이어 마지막 남은 주심 미국의 바니 로즈는 71:69로 하라다를 선택했다. 2:1 판정으로 밴텀급 통합타이틀은 물론 아시아인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천하무적 에델 조프레를 무너뜨리고. 왕좌를 탈취한 하라다는 자국의 사이토 카츠오를 상대로 동양타이틀 방어에 나서 12회 판정으로 승리한다. 통합타이틀 맹주에 올랐지만 하라다는 동양타이틀을 반납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동경 무도관에서 23승(9KO) 1패의 영국이 자랑하는 기교파 복서 알란 루드킨을 상대로 통합타이틀 방어전을 치러 15회 판정으로 승리하고 에델 조프레와의 2차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1966년 5월 31일, 조프레는 1차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년간 맹훈을 거듭하고 전장에 나섰지만 전 시합보다 더 큰 점수 차로 패배하고 만다. 하라다에게 연거푸 패배한 조프레는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린 후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타이틀 방어전을 포함하여 25연승을 거둔 후 명예롭게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조프레는 생애 두 번을 패했지만 하라다라는 단 한명에게 패했던 것 이였다.

   
3차 방어를 마친 후 산께이 스포츠에 대서특필 된 당시의 신문

1967년 1월 3일, 하라다는 자신에게 첫 KO패를 안긴 조 메델을 나고야로 불러 15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3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이어 6개월 후 조 프레 이후 가장 강력한 도전자를 맞이한다. 상대는 콜롬비아의 강타자 베르날도 카라바일로였다. 카라바일로는 하라다에게 도전하기 전까지 54전(51승 23KO 1패 2무)중 조프레에게 유일한 패배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라다의 변칙적인 전법에 휘말려 자신의 무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15회 심판전원 일치 판정으로 무릎을 꿇으면서 4차 방어 제물이 된다.

롱런을 기초를 마련한 하라다에게 또 다시 감량고가 그를 괴롭힌다. 체질 자체가 살이 찌기 쉬운 몸을 갖고 태어난 그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것이었다. 4차 방어가 끝난 그 다음해 2월 27일 비교적 약체라고 생각하고 호주의 라이오넬 로즈를 5차 방어 상대로 지목한다. 로즈는 27승(8KO) 2패를 전적을 가진 기교파 복서였다. 도쿄 무도관에서 치르진 대전은 세인들을 실망시킨 한마디로 졸전이었다. 15회 내내 도전자의 맹공에 쩔쩔 매는 하라다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감량고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난 한판이었다. 결국 홈 링임에도 불구하고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패한다. 맹주에 오른 로즈는 5차 방어에서 밴텀의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 멕시코의 괴물 루벤 올리바레즈에게 5회에 무너진 후 세인들에게 잊혀져간다.

하라다는 로즈에게 패한 후 또 다시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린다. 전향한 뒤 4승(2KO) 1패의 성적을 거둔 후 3체급 제패에 도전한다. 상대는 호주가 자랑하는 테크니션 조니 파메슨.

   
파메슨과의 대전.

1969년 7월 28일 호주 시드니 WBC 페더급 세계타이틀매치, 파메슨은 118전의 백전노장 콜롬비아의 호세 레가로부터 판정으로 왕좌를 탈취한 후 하라다와는 첫 번째 방어전이었다. 파메슨은 51승(18KO) 6무 4패의 경험이 풍부한 전사였다. 파메슨은 홈 관중의 압도적인 성원을 등에 업고 전장에 나섰지만 하라다의 절세신공에 2회, 11회, 14회 세 차례나 다운을 허용한다. 그 중에 14라운드에는 하라다의 카운터에 링 바닥에 널브러져 실신 직전까지 갔지만 그 날 주심을 맡은 호주의 윌리 펫프는 카운트를 하던 도중 중간에 중지하고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파메슨을 껴안다 시피 일으켜 세워 시합을 재개했다.

15회는 파메슨은 복싱이 아니라 마치 육상선수처럼 도망가기 바빴다. 그렇게 비무는 종료되고 판정으로 가야 하는데 점수가 발표되기도 전에 주심은 양선수의 손을 같이 든다. 무승부라는 소리다. 이외의 결과에 홈 팬들로부터 야유가 쏟아진다. 당시 세계타이틀전은 판정으로 갈 적에는 개최지 룰을 따른다는 원칙에 의해 판정은 주심 혼자 할 수 있다는 영연방 룰을 적용하여 주심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한 것이었다.

며칠 후 하라다측에서 채점표를 요구해 확인 결과 무승부가 아닌 하라다의 패배로 채점되어 있어 결국 기록은 무승부가 아닌 패배로 정정되었다. 당시 호주 스포츠신문에는 14회 하라다의 주먹에 실신지경까지 간 사진을 대서특필하며 파메슨을 조롱했다. 하라다는 파메슨을 이겼지만 주심에게 진 시합이었다. 그렇게 하라다의 3체급 제패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음해 1970년 1월 6일 이번엔 파메슨을 일본으로 불러 대전하지만 14회 KO패 진 뒤 미련 없이 글로브를 던져 버리고 은퇴한다.

은퇴 후 그는 복싱 도장을 개원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TV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89년 일본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복싱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훗날 그는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된다.

‘파이팅 하라다’ 그는 아시아인으로 최초로 두 체급을 석권했으며 동양 복싱의 선구자적인 존재였다.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10년 동안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세인들의 뭇사랑을 받았다. 그가 출전한 시합은 일본 역대 스포츠 시청률 톱10에 5위와 8위에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그 만큼 일본 전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훗날 그를 모델로 영화는 물론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파이팅 하라다 생애 통산 전적 62전 55승(22KO) 7패

   
알리와 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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