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명당은 살아있다.

2014-06-24     거제시민뉴스

아직도 명당은 살아있다
편지를 쓰되 내용이 없는 백지를 그대로 보내는 것을 백간(白簡)이라 한다. 유행가의 가사처럼 사연을 차마 쓸 수 없을 때 상대방이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뜻에서 보내는 것이다.

조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익에게 김재찬(金載瓚) 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김재찬이 어렸을 때이다. 훈련 대장이 그를 불러서 병졸로 삼고자 하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훈련 대장이 부르면 가야 하는데, 그는 아버지의 힘을 믿고서 가지 않았다. 당시는 명령을 거역하면 인정사정 없이 사형에 처했다. 김재찬은 자신을 잡으러온 병졸을 보고 아비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김익은, “내가 정승이지 너는 아니다”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끌려가는 아들을 보며 김익은 병졸에게 편지 한통을 넘겨주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자식을 살려 달라고 쓰면 국법을 어기는 일이요, 자식이 죽는 것은 아비로서 큰 슬픔이기 때문에 차마 글로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한참 들여다본 훈련대장은 곤장만 때리고는 훈방했다.

그 후 김재찬은 아비의 깊은 뜻을 헤아려 학문에 매진하였고, 훗날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편지에만 백지가 있는 게 아니다. 묘비는 보통 무덤의 정면이나 혹은 오른쪽에 세우는 석물로 망자의 행적을 간략하게 글로 새긴다. 그런데 묘비를 세우되 글자를 새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비석을 백비(白碑)라고 한다. 벼슬을 했으나 뚜fut한 업적이 없거나, 일찍이 죽어 기록할 공적이 없거나, 남존여비 사상에 근거해 여자의 것일 때가 많다.

중국 위나라의 조조는 죽으면서 전하기를, 무덤을 72개나 만들어 훗날 자기 묘가 훼손되는 일을 막으려 하였다. 이것은 살아생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면서 자기의 묘를 파헤칠 것을 염려한 유언이다.

아무런 기록도 없는 명당을 찾겠다고 집을 나서는 일 또한 백지나 백비를 보듯이 깜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뜻을 세운 다음에 보아야 한다.

산 속 어디에 숨어 있을 명당이 ‘나 여기 있소’라고 대답할 만큼 다정스럽지 않다. 명당은 미모만큼이나 사람을 쌀쌀맞게 대한다. 하늘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명당이라 땅이 신비하게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명당이 옛날 사람만 좋아하여 보이고, 현대인은 싫어하여 보이지 않는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행복은 찾고 발견하는 사람의 몫’이듯이 명당을 찾는 잣대만 정확하게 세우고 찾으면 모습을 내밀 것이다. 우리의 산천에는 아직도 많은 명당 터가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혼탁하면 혼탁할수록 사람들의 맥박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이 나라를 이끌 위대한 인물을 배출할 큰 터를 찾아 아낌없이 후손에게 선사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명 풍수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큰 돈을 벌터
1. 돈이 몰려오는 큰 터

충북 괴산(槐山)은 산 높고 물 맑은 곳으로 아직도 개발의 손길이 더디어 자연 환경을 수려하게 간직한 고장이다. 괴산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선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정자(亭子)가 곳곳에 널려 있어 놀란다. 노송이 굽어보는 높은 대(臺)에는 어김없이 풍류를 알던 선비가 정자를 짓고 마음을 쉬었다. 솔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오고,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흘러 번거로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산세가 웅장하고 물이 맑고 풍부하게 흘러 선비들이 마음을 쉬었던 곳이 많으면 그곳 어딘가에는 분명히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큰 터가 있다. 그래서 괴산의 지도에 용맥을 그리고 패철로 이기론에 맞추어 자리를 찾았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단계를 여러 번 거치니, 칠성면 두천리에 부자가 되고 후손은 번창 하면서 장수까지 한다는 자리가 나왔다.

그곳은 옥녀봉(玉女峯, 604m)과 군자산(君子山, 948m)이 높이 솟아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루며, 명당은 성불산(成佛山)에서 급하게 뻗어 내린 내룡이 몸통을 길게 드리우다 쌍천을 만나며 생기를 응집한 곳이었다. 성불산은 혈장을 향해 부는 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아늑하고도 든든한 분위기를 준다. 산 정상 부근에는 도덕사(道德寺)가 있으며 골짜기마다 두천리, 갈읍리, 검승리 등 살기 좋은 마을을 여럿 만들어 놓아 말 그대로 자비로운 부처님 같은 산이다.

즉시 현장을 찾아갔더니, 그곳은 벌목 후에 자라난 떡갈나무와 잡목들이 듬성듬성 자란 야산으로 앞쪽에는 군자산이 수려하게 보였다.

군자산은 속리산의 줄기로 예로부터 영산으로 이름난 산이다. 이 산에 기도를 드리면 귀한 자식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또 산 중턱에는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 굴이 있어 기도를 드리고 약수를 마시면 소원성취 한다고 전해진다.

또 옥녀봉은 구름 산의 형상으로 매우 오묘하게 에워 쌓였는데 ‘솔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솔바위에서 매일 한 잔의 감로주(甘露酒)가 나왔는데, 어느 욕심 많은 스님이 한 잔을 더 먹고 싶어 지팡이로 술 나오는 구멍을 뚫었더니 그 뒤로는 감로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터는 책에 이르기를 ‘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는 큰 터이다. 혈장에서 보면, 수구는 목국의 곤파(坤破)로 자연은 좌방의 갑방(甲方)의 제왕수에서 득수하여 정면으로 들어오는 역수(逆水)와 합쳐져 우방으로 흐르고, 계축(癸丑)방에서 내려뻗은 내룡은 관대룡(冠帶龍)으로 청년기에 해당하여 생기가 발랄하고 튼튼하다. 특히 정면으로 들어오는 큰물은 재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아 길격이다.

이곳은 자연이 좌선수이고 곤방절파(坤方絶破)에 내룡이 관대룡이니, 목국의 묘향(墓向)인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으면 삼합연주(三合聯珠)의 명당으로 정면에 군자산을 바라본다. 혈장의 흙은 짙은 황색으로 윤기가 넘친다.

쌍천(雙川) 건너 편에 있는 안산을 허리 아래로 나지막하게 드러누운 형상인데, 뒤쪽에는 율원리(栗院里)가 중심이 되어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 곤방(坤方)으로 옥녀봉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있는데, 정면으로 흘러오는 강물과 쌍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뭉툭하게 솟아 강으로 내려앉았다. 이 물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로 일단 칠성 저수지에 모였다가 강 아래쪽의 사은리(沙隱里) 등 여러 마을을 달리며 혈 앞에서 쌍천과 합쳐져 달천(達川)으로 흐른다.

성불산에서 뻗어내린 내룡과 나란히 내려온 청룡은 인삼밭이 들어서 있고, 34번 국도와 접한다. 형세는 평평한 구릉을 이루고 끝지점에 벼락 바위가 있다. 백호보다는 장대해 보여 남자쪽 자손이 발복하고 존귀해질 형상이다.

백호는 현재 전투경찰 부대가 자리 잡은 건물이 보인다. 결인을 지나며 우측으로 돌아서 혈을 감싸는 모양이다. 진혈은 우주의 중심으로 임금과 같이 존귀하다. 혈을 중심으로 보면 왼쪽에는 임금이 먹을 인삼을 재배하고, 오른쪽에는 임금을 지킨 군대가 포진했으니 금상첨화이다. 혈 아래로는 국도가 있어 교통도 편리하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비늘을 번뜩이며 뛰어 노니, 가히 한 나라의 임금이 머물 만한 큰 터이다.

2. 선박 왕이 날 자리

서울은 그 자체도 천하의 명당이지만 주변에도 수려한 산들이 에워싼 좋은 터들이 많다. 그것은 백두대간의 힘찬 정기가 대간룡(大幹龍)으로 굽이쳐 내륙으로 뻗다가 속리산에서 일단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그 정기는 다시 안성의 칠현산에서 한남정맥을 이루며 북쪽으로 뻗어 올랐기 때문이다. 수원의 광교산(582m)은 경기 남부의 중조산에 해당하며 생기가 충만한 명산이다.

비결에 전하는 명당을 되찾고자 지도에 용맥을 그리다 보니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에 책에 이르기를 ‘貴人祿馬上御街(귀인이 말이 이끄는 대궐로 들어간다)’라는 풍수에서 가장 대길하다는 명당 터가 숨겨져 있음을 알았다. 광교산의 한 용맥이 동쪽으로 뻗어내려 수지읍으로 흘러내리다 남쪽으로 지룡을 뻗어 풍덕천(豊德川)을 만나며 생기를 응결시킨 곳이다.

그곳은 후손과 재물이 왕성하고 자손은 모두 공명현달하며 발복은 오래도록 이어지며, 아들마다 출세하지만 딸들도 모두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큰 터이다.

형제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내룡이 벌의 허리같은 과협(過峽)을 이루고 재자 생기를 내뿜으며 힘차되 토성을 이루니 안산으론 제격이며 또 손을 뻗으면 잡을 듯이 보이니 재물이 두둑이 쌓일 것이다. 정방(丁方)에 있는 매와 닯은 응봉(鷹峯, 236m)은 모양이 수려하고 얌전하여 마치 혈을 향해 예를 취하는 듯하다. 중손 고개에서 고개를 쳐든 용맥이 좌측으로 길게 뻗어내려 풍덕천으로 빠지면서 홍천 마을의 뒤쪽을 병풍으로 막은 것처럼 생기발랄한 청룡을 이루었다.

그리고 중손 고개에서 우측으로 여러 갈래가 뻗어 내렸는데, 내백호는 전원주택을 지으며 잘려 나갔고 외백호는 상홍천 마을의 뒤쪽을 막아섰다. 이곳은 자연이 우선수이고 손방절파(巽方絶破)에 계축 방에서 내려뻗은 양룡(養龍)이니 수국의 양향(養向)인 계좌정향을 놓으면 제격이다.

혈장의 흙은 누런 기운이 짙고, 진혈에는 산 짐승이 새끼를 낳았는지 털이 수북이 쌓여 있다. 짐승이 새끼를 낳은 곳은 수맥이 흐르는 찬 땅이 아니고, 바람이 잠자고, 햇볕이 따스한 곳으로 짐승이 본능으로 찾아낸 명당이다.

음양이 조화로운 대단한 혈이며 형제봉은 대통령의 비서관이, 광교산은 항공, 선박, 자동차 등 교통과 연관해 사업을 크게 일으키는 사업가가 날 좋은 산이다.

▲갈마음수형산도
3. 명의(名醫)를 배출할 자리

어느 시인은 경기도 가평 땅을 밟으며 그곳의 산천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가평은 경기도 동북 방에 위치한 산자수명한 고장으로 군내에는 화악산을 비롯하여 해발 일천 미터에 가까운 산들이 깍아 지른 듯한 절벽과 많은 폭포를 빚어 경관이 수려하기가 견줄 데가 없다. 포천으로 가다 현리 방향으로 바꾸니 한 자락 길이 깊은 골을 뚫고 가는데 곁에는 조종천이 햇볕에 일렁거려 가닥진 여러 봉우리가 천 가지 모습 만 가지 형상으로 마음까지 시원해 이미 이 고장 사람의 순박함을 알겠다.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

가평군 상면 덕현리에는, 책에 이르기를 ‘귀인녹마상어가(貴人祿馬上御街)’라는 풍수에서 대길하다는 명당 터가 있다. 백두대간이 경기 북부로 들어오며 한북정맥을 이루고 명지산(1267m)에서 가평군의 험준한 용맥을 분출했다.

생기 왕성한 용맥이 중심으로 출백해 대금산으로 솟구치고 청우산(619m)이 소조산을 이루며 그 중 한 줄기 내룡이 덕현리로 뻗어 조종천을 만나며 생기를 멈춘 곳이다. 그 곳에 묘를 쓰면 후손과 재물이 왕성하고 자손을 모두 공명현달해 발복은 오래도록 이어진다. 또 충효현량한 자손이 나고 남녀 모두 장수하며, 아들마다 출세하지만 특히 셋째가 더욱 이름을 날리고, 딸들도 모두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한다.

혈장에서 보면, 수구는 수국의 손파(巽破)로 자연은 우측에서 나온 물이 혈 앞을 금성수로 감싸 안으며 흐른다. 계축 방에서 내려뻗은 내룡은 양룡(養龍)으로 하나의 생명이 이루어져 큰 포부에 부푼 상태로 길하다.

자연이 우선수이고 손방절파(巽方絶破)에 내룡이 양룡이니 수국의 양향(養向)인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으면 제격이다. 혈장의 누런 기운이 밝고 혈장에는 일체의 잡목이나 잡풀이 없으며 2백20~30년 된 잣나무가 울창하다.

안산은 축령산(879m)에서 뻗어내린 용맥이 조종천과 만나며 뭉툭하게 생기를 멈추며 마치 책을 펼쳐놓은 듯 보이며, 정방(丁方)에 있는 깃대봉(623m)은 모양이 매우 수려하고 얌전하여 혈에 대해 공손한 예를 취하고 있다. 청룡은 청우산에서 뻗어내린 용맥이 조종천으로 빠지며 덕현마을을 감싸 안으며 생기발랄한 청룡을 이루고, 백호 역시 청우산에서 덕현리로 뻗은 용맥이다.

음양이 대단한 혈이며 또 정방에 깃대봉이 우뚝 솟았으니 이 집안은 명의가 줄줄이 배출될 것이다.

▲진혈의 4요소
4. 석승 같은 큰 부자가 되고파

남양주시의 운길산(云吉山, 610m)에는 조선조의 세조와 인연이 있는 수종사(水鍾寺)란 절이 있다. 하루는 금강산을 다녀오던 세조가 근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이 자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니 어디서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 신하를 시켜 알아보게 했더니, 운길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이 울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러자 세조는 그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 하였다. 현재는 동굴 앞쪽으로 약사전이 있고 그 아래로 물길을 터 물을 마시게 수도를 설치하였다.

정상이 가까운 곳에서 그처럼 많은 물이 솟아나니 그저 신비한 생각이 앞선다. 대개의 경우 높은 산에 묘를 쓰면 무덤 안에 물이 고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백두산의 천지를 보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수맥을 타고 위로 치솟는다.

따라서 산이 높아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맥이 없어야 물이 없는 길지가 된다.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에 책에 이르기를 ‘三合聯珠貴無價(귀함을 값을 칠 수 없다)’라며 생방, 왕방, 묘방의 물이 삼합을 이루는 큰 터가 있다. 그곳에 묘를 쓰면 대부대귀하고 후손이 번창하며 충효현량이 난다. 또 남녀 모두 오래 살고 자식마다 발복이 오래오래 이어진다.

백두대간이 강원도를 걸려 경기 북부로 들어오며 한북정맥을 이루더니 운악산(936m)으로 치솟았고, 다시 남서방과 남방으로 갈라져 험준한 용맥을 분출하며 뻗더니 남방의 용맥은 한강을 만나며 예봉산(638m)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중의 한 용맥이 중심으로 출맥하여 한강을 만나 왕성한 생기를 응결시켰다.

예봉산은 수풀이 무성하고 골짜기마다 절정을 이룬 산으로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수도권 일대에 땔감을 공급하였고 멀리는 천마산과 연이어졌고 운길산과도 이웃해 있다. 그럼으로 이곳의 내룡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룡이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며 굽이쳐 흘러오다가 운악산에서 일단 숨을 고르니 중조산이요 재차 남쪽으로 뻗어 치솟으니 예봉산이 소조산이다. 내룡은 한강의 큰 양기에 어울리도록 생기가 왕성하다.

혈장에서 보면, 수구는 화국의 신파로 자연은 좌측에서 나와 둥근 모양으로 혈을 감싸 안은 금성수법이라 복록이 대단하다. 간인(間印) 방에서 내려뻗은 내룡은 제왕룡으로 사람이 장성하여 가장 부귀영화를 누리는 전성기이다.

안산은 검단산(382m)에서 북방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자연스럽게 이루고, 조산은 병방(丙方)에 우뚝 솟은 검단산이 매우 수려하다. 예봉산에서 뻗어 내린 용맥이 한강으로 빠지며 팔당리 마을을 감싸 안으며 생기발랄한 청룡을 이루고, 역시 예봉산에 팔당리로 뻗은 용맥이 백호를 이루었다.

이곳은 자연이 좌선수이고 신방묘파(辛方墓破)에 내룡이 제왕룡이니 화국의 제왕향이 임좌병향(壬坐丙向)을 놓으며 바로 검단산의 정상을 바라본다. 혈장의 흙은 홍황(紅黃)이 밝으며 주위에는 진혈임을 증명하는 표석(標石 : 바위)이 널려있다. 옛말에 병방에 산이 비만하여 통실하고 왕방수가 모여들면 중국의 큰 부자였던 석승 같은 부자가 된다고 했는데 이곳은 병방에 검단산이 우뚝 솟아 있다. 특히 병사(丙砂)는 태미(太薇)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산이니 길한 날을 택해 이곳에 조상을 모시면 그 생기의 발복으로 자손 중에 과학자나 발명가가 태어나 이 나라의 과학 문명과 국부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