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고종3년) 거제군으로 승격, 1914년 통영군으로 복속, 1953년 거제군으로 복군, 1995년 거제시(巨濟市) 탄생, 그리고 민선시대의 개막!
절망과 희망, 사랑과 증오, 희열과 슬픔을 온 몸으로 부딪치며 숨가쁜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거제인들…
이 격정의 세월 속에는 이들의 눈물과 피와 땀방울이 있었고, 이것은 거제현대사의 한 장르가 되어 오늘의 거제를 일구는 원동력이 됐다.
그때마다 이들은 거제 발전의 출연자로서 지친 몸을 아낌없이 내던졌고, 그 순간마다 거제의 내일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파란만장한 1백년의 거제사(巨濟史)를 엮어 온 또 한 사람의 출연자가 있었다면 민초(民草)들의 삶, 그 한복판에서 동고동락하며 거제에서 살다갔던 ‘섬나라의 통치자’들인 군수(郡守)들이다.
이들은 민초들과 함께 삶의 현장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간 ‘오늘의 거제’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1995년 거제시출범 때까지 42년 동안 거제군정을 살폈던 26명 ‘영감(令監)’들의 행적을 어렴풋하게 나마 짚어본다.
피 비린내 났던 한국전쟁이 종말을 고하던 1953년, 그 해 1월1일 거제는 통영군에서 분리돼 거제군으로 복군(復郡)된다.1914년 3월1일 용남군과 거제군이 합쳐져 통영군으로 통합된 이후 39년만의 경사였다.
이채오(李采五)국회의원이 발의한 ‘거제군 설치에 관한 법률안’이 1950년 11월 27일 국회에 상정돼 1951년 10월 14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어 1952년 12월14일 법률 제271호로 ‘거제군 설치에 관한 법률은 1953년 1월1일부터 시행 한다’고 공포함으로써 거제의 ‘통영 더부살이’는 마침표를 찍는다.
1952년 말부터 거제군 출범을 위한 업무인수인계가 진행됐고, 사무인수를 마치고 기다리던 조창제(趙昌濟) 초대 거제 군수가 1953년 1월15일 부임했다.
그는 1월22일 임시청사로 정해진 장승포 읍사무소(현 거제문화원)에 ‘거제군청(巨濟郡廳)’현판식을 마치고 시무식과 함께 본격 업무에 들어간다. 이로써 42년간의 역사적인 군정시대가 막이 오른다.
3개월 여 지난 5월27일. 심상고등소학교(현 장승포 초등학교)에서 1만 여명의 군민과 국회의원, 도지사 등 3백 여명에 이르는 축하객들이 모인 가운데 거창한 개청식이 거행됐다. 공무원 수는 조창제 초대군수를 포함, 2과 11계에 49명.
초대군수 조창제(趙昌濟)
조창제 군수의 본관은 함안이며 함안면 출신이다. 당시 함양군수로 재직하다 거제군수로 발령을 받은 그는 경남도내 군수 가운데 업무에 관한 한 가장 빈틈없다는 평을 받았다.
그가 새롭게 탄생한 거제군의 초대군수로 발탁된 것은 탁월한 행정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에 대한 태어난 시기, 학력 등 신상에 관한 자료는 정리된 것이 없지만, 부임 당시의 그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부산시 서대신동에 자택을 두고 있었던 그는 가족과 헤어져 혼자 장승포지역에 일본인이 살다 떠난 적산가옥을 관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부임 초기부터 신설 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던 그는 ‘발로 뛰는 행정’의 전형을 보였다.
관용차도 없이 오로지 발에 의지해 민생 현장을 두루 살폈는데,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말로만 영감(令監)님’이지, 시쳇말로 ‘스타일을 구겼다’
53년 5월, 장마철도 아닌데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도로 곳곳이 온통 물바다로 변화면서 유실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때 그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무릎까지 차 오른 도로를 누비며 복구 작업에 비지땀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그 해 8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이던 포로석방을 앞두고 반공포로들에 의해 포로수용소 사령관 돗트준장 납치 사건이 일어나면서 신협읍 일대 주민들의 소개령이 내려진다. 이로 인해 인근 야산으로 쫓겨난 주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부 여성들은 군용 담요 한 장을 ‘밑천’으로 단 1달러에 미군들에게 몸을 파는 매춘행위가 공공연히 이뤄지면서 성병 또한 만연했다.
성병에 감염된 일부 여성들은 치료약이 없어 전전긍긍했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조 군수가 나섰다고 한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끝에, 책임자를 만나 치료약 지원을 약속받는 등 민생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6‧25 전쟁의 포성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 시절, 열악한 재정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는 1953년 11월25일. 11월간을 초대군수로 재임하고 떠났다.
1953년 11월26일 2대 군수에 부임한 박재욱(朴載煜)씨는 키가 크고, 얼굴도 미남이었다고 한다.
경남 고성군이 고향인 그는 오사카시(大坂)동판상업학교를 20세에 졸업하고 경남도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고성군 하일면 면장, 경남도 공보과 통계계장, 사회과 구호계장, 동래군 산업과장, 밀양군 내무과장, 함안군수를 역임하기까지 그의 공직생활은 ‘순풍에 돛을 단 듯’순조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촌부(村夫)처럼 진솔하고 웅변에 뛰어났으며 원만한 성격에 중심을 잃지 않는 중용의 도를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자세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고 군민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상태가 쓴 거제신지(巨濟新誌)에는 “어버이를 효도로서 섬기되 남의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실천궁행함은 박씨가 사가(士家)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증명하며, 박씨가 한갓 지방행정관으로 쓰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적고 있다.
박씨는 거제에 부임하자마자 군민들의 생활실태를 우선적으로 살피면서, 농촌부흥만이 군민들이 사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정의 역점 사업으로 삼았다.
그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축산업을 군정의 제일 과제로 삼고 ‘한 집에 돼지 한 마리, 열 집에 닭 열 마리’갖기 운동을 펼쳤다는 것.
이와 때를 맞추어 닭 3만수와 돼지 3천두, 감나무 등 유실수 묘목 1만3천5백 본을 드려와 집집마다 배급하면서, 이른바 ‘농가부흥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또 6‧25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산림을 복원하는 한편 도로보수 등 각 방면에 걸쳐 주력하는 등 기민함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군민들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농‧축산업에서 찾았던 그는 1955년 11월25일, 2년 동안의 군수생활을 접고 거제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