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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전설 ‘짱구’ 장정구…㉕
살아있는 전설 ‘짱구’ 장정구…㉕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1.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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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장정구

1980년대는 대한민국 프로복싱의 황금기였다.

황금시대를 이끌어 가는 수많은 절세고수들 중 두 명의 전설적인 지존이 있었다. 그들은 맹주의 자리에 올라 당금 무림(WBA, WBC)을 양분하여 모든 권력을 움켜지고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구축, 권좌에 도전하는 수많은 살수들을 도륙하였다. 세인들은 그 시대를 가리켜 위대한 맹주 장정구 ‧ 유명우 시대라 명명했다. 그들은 세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절대 영웅이었다. 그리고 세인들은 위대한 두 맹주의 시대를 조선왕조 영 ‧ 정조 시대와 버금가는 대한민국 무림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고 입을 모았다.

1982년 9월 18일 충주 시민체육관, 먼 훗날 라이트 플라이급 역사상 최고의 지존으로 칭송받게 될 장정구가 당시 맹주 일랄리오 사파타와 지존의 자리를 놓고 비무를 벌인다. 장정구에게는 생애 최초의 도전인 셈이었다.

당시 장정구는 18연승(8KO)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사파타는 20승(8KO) 2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파나마 출신인 사파타는 최경량급인 라이트 플라이급에서는 보기 드문 169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게다가 단 12전만에 김성준에게서 맹주의 자리를 빼앗아 간 일본의 나카지마 시게오를 적지에서 심판전원 일치 판정으로 왕좌를 탈취 한 뒤 9차 방어에서 아만도 우르수아에게 무너지지만 다시 일본의 토모리 다다시에게 왕관을 되찾아 온 다음 장정구와는 첫 방어전이었다. 사파타는 까다로운 사우스포에다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최상위급의 절정고수였다.

비무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초반에 기세를 올린 쪽은 장정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파타쪽으로 전세가 기울고 있였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도전자를 라이트 잽으로 적절이 견제하면서 간혹 어퍼컷과 함께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도전자를 괴롭혔다. 그렇게 열세 속에서 비무는 종료된다. 2대1 판정패였다. 장정구 생애 최초의 패배였다.

장정구 답지 않는 석연치 않은 패배는 비무가 끝난 후 밝혀졌다.

비무 한 달 전 어린이대공원에서 맨발로 스트레칭을 하다 깨진 유리병을 밟아 제대로 된 연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포기 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비무에 임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기회는 허망하게 날아갔다.

현역시절의 유명우와장정구.

1963년 2월 4일, 장차 세계 복싱사에 길이 남을 장정구는 부산 아미동 산동네에서 태어난다. 당시 아미동은 택시운전기사들이 운행을 꺼릴 만큼 험한 동네였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장정구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세계를 어릴 적부터 체험하면서 커간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다. 스스로 가야 될 이유도 없었고 집에서도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러 산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고 때론 다른 동네로 원정싸움을 다니며 일과를 보냈다.

하루는 만화방에서 전율이 온 몸을 휘감을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그것은 1975년 김현치와 필리핀의 벤 비나폴로와의 WBA 세계슈퍼페더급 타이틀매치였다. 적지에서 다운을 허용하고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김현치를 보고 그는 한 눈에 반한다. 장정구는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그때 그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1975년 장정구는 충무동 로터리에 있는 극동체육관의 문을 두드린다. 입관비와 회비를 합한 1,500원을 내고 스스로 결정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닻을 올린다.

타고난 체질에다 아미동 산동네에 살며 실전경험도 많은 그는 한 마리 맹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걸출한 실력을 갖추었으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우승하고 부산대표로 세 번이나 뽑히고도 뿌리 깊은 텃세 때문에 태극마크를 달고 한 번도 링에 오르지 못하자 관장과 사범은 “때려치우고 차라리 프로로 가자” 며 폭발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프로 데뷔 준비를 하던 중 일본의 나카지마 시게오에게 지존의 자리를 내어 준 라이트 플라이급 전 챔피언 김성준이 부산에 운동하러 내려왔다. 스파링 파트너가 장정구였다. 신들린 듯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장정구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복싱계의 대모’ 심영자의 오빠였다. 그는 상경 후 동생에게 “성준이가 일방적으로 몰리더라”며 입에 거품을 물며 장정구에 대해 장황한 스토리를 늘어놓으며 그를 추천한다.

1980년 11월 17일 장정구는 신인왕전을 시작으로 강호에 첫 발을 내디딘다.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6전 전승(2KO)으로 우승하고 우수 신인상마저 거며 쥐며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이 후 그는 사파타에게 도전할 때까지 12연승(6KO)을 수확하지만 생애 최초의 지존 쟁탈전에서 사파타에게 패배의 쓰라림을 맛 본 장정구는 심기일전 내공을 증진한 후 두 차례의 재기전에서 승리한다.

대모 심영자는 장정구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어 준다. 1983년 3월 26일로 결전을 날은 정해졌다. 사파타의 3차 방어전이자 장정구에겐 생애 두 번째 정상탈환의 기회였다.

갑작스런 부상으로 자신의 무공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첫 번째 도전을 거울삼아 이번엔 철저한 몸 관리와 함께 상대방의 약점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도 병행했다. 사파타의 스타일은 섣불리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고 상대방의 공격 후 반응을 한다는 것에 착안, 허세 공격을 시도한 다음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퍼컷으로 타격을 가한다는 구체적인 전술까지 무장한다.

비무 당일, 대전 충무체육관으로 장정구를 응원하기 위해 세인들은 삼삼오오 구름처럼 운집한다.

손자병법은 틀리지 않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였다. 두 차례의 걸쳐 10차까지 지존의 자리를 지킨 사파타였지만 장정구에게 3회 2분 46초 만에 지존의 자리를 강탈당한다. 장정구는 승리 후 사각의 캔버스 중앙에서 맹수처럼 포효하며 만천하에 위대한 ‘짱구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맹주에 자리에 오른 장정구는 지존의 자리를 자진 반납할 때까지 5년 4개월 동안 천하를 통치하면서 세 가지의 운명과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하나는 지존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살수와의 싸움이었고 또 하나는 체중 감량고에 시달리는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내부의 적인 두 여자와의 싸움이었다.

지존의 자리에 등극한 지 3개월 후 그의 첫 번째 희생양이 정해진다. 상대는 19승(4KO) 1무 2패의 레코드를 가진 일본의 이나미 마사하루, 짱구에겐 3분 58초면 충분한 상대였다. 이나미는 제대로 된 초식조차 펼치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 사각의 캔버스를 뒤로 했다.

이나미의 처절한 패배는 사무라이의 후손들에게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짱구는 섬나라 일본의 자객들의 숱한 암습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다.

또 다시 3개월 후 이나미의 복수를 위해 일본은 용병을 투입한다. 그는 멕시코 출신의 강타자 헤르만 토레스였다. 당시 그는 일본의 오자키 짐 소속이었다.

토레스와의 6차 방어전

1983년 9월 10일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치러진 비무는 43승(33KO) 5패 1무에 빛나는 강타자이자 백전노장 이었던 토레스였지만 느려 터진 그의 경공술로는 짱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까지 가지만 심판전원 10점 이상의 압도적인 점수 차로 패한다. 이 후 토레스는 두 차례 더 와신상담하지만 짱구의 신공에 좌절한다. 그에게 짱구는 결국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짱구에게 태국이 낳은 무에타이 출신의 불세출의 기재 4전 4승(3KO)의 쇼트 치탈라타가 진검승부를 요청해 온다.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거행된 이날의 비무는 시종일관 난타전으로 전개하여 참관한 세인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결과는 짱구의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막을 내린다. 짱구에게 패한 치탈라타는 한 체급을 올려 플라이급으로 전향 한 후 지존의 자리에 올라 대한민국의 김용강에게 패할 때까지 6차 방어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사무라이 후예가 또 한명의 살수를 보낸다. 4차 방어의 상대는 토카시키 카즈오였다. 토카시키는 대한민국의 김환진에게 지존의 자리를 탈취 한 후 6차 방어에서 루페 마데라에게 맹주의 자리를 내어준 기교파였다. 당시 토카시키는 19승(4KO) 1무 2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1984년 8월 18일 포항시민체육관, 광복절이 며칠 지나지 않는 시점에 세인들은 짱구의 통쾌한 승리를 염원하며 입추에 여지없이 비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날 짱구는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무려 14킬로그램을 감량한 탓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항의 살인적인 찜통더위마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1회부터 다운을 빼앗으며 상쾌하게 출발했지만 이 후 열세를 만회하려는 도전자의 집요함에 짱구도 서서히 지쳐갔다.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오버페이스를 하고 만 것이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의 뇌리에는 광복절에 왜놈에게 패한 놈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다시 내공을 끌어 올려 기어이 9회 1분 47초 만에 승부를 결정짓는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그래서 그 기쁨은 배가 됐다. 그렇게 짱구는 한 고비를 넘고 장기집권의 틀을 갖춘다. 짱구에게 패한 도전자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험난했던 강호여정을 끝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4차 방어를 마치고 맹주의 위엄마저 더해진 짱구는 거칠 것이 없었다. 타다시 쿠라모찌, 헤르만 토레스, 프란시스코 몬티엘, 조지 카노 또 다시 헤르만 토레스, 프란시스코 몬티엘과의 재대결을 펼쳐 차례로 제압하고 10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이제 위대한 지존의 반열에 오른 짱구는 그가 나아가는 길 자체가 대한민국 무림사의 기록이며 전설이 된다.

짱구의 순항에 배알이 뒤틀린 일본은 구시켄 요코의 후계자라 떠벌리는 자객 오하시 히데키를 11차 방어의 상대로 출격시킨다.

오하시는 5승(3KO) 1패의 전적으로 기본기가 잘 되어 있고 펀치력을 겸비한 기교파였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욱일승천하는 짱구의 상대가 되겠는가. 5회 1분 55초 만에 괴멸된다. 그렇게 위대한 맹주 짱구는 또 한명의 사무라이를 도륙한다. 1986년 한 해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1987년, 짱구는 세 차례에 걸쳐 대전을 치른다. 에프렌 핀토를 6회에 제압하고 어그스틴 가르시아를 10회에 날려버리고 이어 이시드로 페레즈를 12회 심판전원 일치 판정으로 내려앉히고 14차 방어를 마무리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해가 밝았다. 짱구는 안방맹주라는 오명을 씻고자 강호입문이래 최초로 원정길을 떠난다. 장소는 일본 동경 고라쿠엔 홀, 상대는 11차 방어전의 재물이 된 오하시 히데키였다.

동존상잔의 비극 6 ‧ 25가 이틀 지난 6월 27일, 짱구의 15차 방어전이었다.

 

공이 울리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상대라 초반부터 탐색전은 사치였다. 둘은 링 중앙에서 화끈한 난타전을 시작한다. 구름처럼 운집한 군웅들의 함성에 비무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다.

3회, 짱구의 절정무공에 오하시는 3번의 다운을 당한다. 만약 프리녹다운제가 아니었다면 승부는 그때 결정되었을 것이었다.

열세를 느낀 도전자는 4, 5, 6회에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 잠시 수세에 몰렸지만 7회에 들어 짱구의 맹렬한 반격에 오하시는 두 차례의 걸쳐 다운을 허용한다.

8회, 짱구는 상처 난 먹잇감을 본 맹수처럼 맹렬하게 도전자를 윽박지른다. 매타작에 장사 없는 법. 8회 들어 두 번째 다운, 도합 일곱 번의 다운을 허용하자 보다 못한 주심이 비무를 중단시킨다. 1분 47초만의 일이였다. 그렇게 일본의 자존심 구시켄 요코의 기록을 두 차례에 걸쳐 경신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짱구의 거침없는 진군에 세인들은 과연 언제까지 새로운 전설을 써 나갈까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15차 방어전을 치른 얼마 뒤 세인들은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접한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장정구 은퇴 선언’ 세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당금 무림의 절대 지존인 그가, 그것도 한참 나이인 스물여섯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은퇴를 결정했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사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그것은 내부의 적이었다. 그의 장모와 부인이 자신이 매맞아가며 번 돈을 전부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 세월이 한참 흐른 2009년 9월 23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가슴속에 담고 있던 말을 하게 된다.

“절망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배신감에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어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경기당 파이트머니 약 7천만원선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의 최고 연봉이 2천만원 정도였고 강남 35평형 아파트 한 채 값이 7천만원이던 시절이었으니까 최소 강남아파트 15채 값을 날린 셈이었죠.”

절망한 그는 재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였지만 결국 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문제라는 걸 안 순간 소송을 취하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여자에 배신당해 낙담에 빠져 있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여자였다.

짱구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자 돌아보니 무일푼이었다. 먹고 살아야 했다. 그는 다시 사각의 정글로 돌아오지만 멕시코의 25전승(20KO)의 새로운 맹주 움베르토 곤잘레스에게 판정패 당한다.

이후 체급을 올려 쇼트 치탈라타, 무앙차이 카타카셈에게 도전해 보지만 차례로 패하며 11년간의 강호생활을 접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짱구’ 장정구, 그는 1980년대 군사독재에 신음하고 있던 민초들에게 청량제 같은 존재였으며 대힌민국 무림사에 큰 획을 그은 절대지존이자 거물이었다. 전 세계 복싱선수 기록을 관장하는 BOX REC과 WBC에서는 역대 라이트 플라이급 올 타임 파이터 1위에 그를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2000년 ‘WBC선정 20세기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프로복싱기자협회선정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위대한 지존 장정구’ 1983년 왕좌에 올라 1988년까지 무려 15방어까지 성공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경기하는 날에는 TV시청률이 50% 이상을 기록했고 시내 한복판이 한산해질 정도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세인들은 그를 그리워한다.

장정구 생애 통산 전적 42전 38승(17KO) 4패

대한민국 살아있는 전설 장정구와 유명우(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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