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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民歌)의 시가(詩歌) ‘거제도죽지사(巨濟島竹枝詞)’
민가(民歌)의 시가(詩歌) ‘거제도죽지사(巨濟島竹枝詞)’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1.2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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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

죽지사(竹枝詞)는 넓은 의미로 악부시(樂府詩)에 포함된다. 악부(樂府)는 민가(民歌)로부터 발전한 중국의 시가 형식을 가리키며, 한국의 민요와 시가를 한시화한 소악부를 모방해서 지은 시와 역사·풍속·민간의 풍정을 묘사한 시 등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죽지사는 어떤 지역의 역사•지리•문물•인물•풍속•환경 등에서, 서정적인 요소보다는 성격상 서사성을 조금 더 짙게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지방의 당시 문화풍속에 따른 생활상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한시로 노래한 ‘지역찬가‘로써의 기능을 해왔으며, 그 지역의 정서와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역사현실에도 귀중한 텍스트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민가(民歌)의 제목을 ‘죽지(竹枝)’라고 명명한 것은 대나무와 관련된 사정이 있다. 순(舜)임금이 남방을 순수하다가 창오야(蒼梧野)에서 세상을 떠나자 두 부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다. 이 후 지역민들은 두 여인을 상수의 신(神)으로 받들어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일컫고, 이 지역에서 나는 대나무에 그들의 피눈물 흔적을 상징하는 무늬가 있다고 하여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하였다. 이에 당시의 동정호일대에서 처량하고 원망 어린 노래, 죽지가 생겨났다.

 

죽지(竹枝)라는 민가(民歌)를 죽지사(竹枝詞) 작품양식으로 재정비하여 문단에 부각시킨 사람은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다. 그가 낭주(朗州)로 귀양 갔을 때 그 지방의 민가(民歌)인 〈파유사(巴渝詞)〉를 9장으로 개작해서 만든 신사(新詞)로, 삼협(三峽) 일대의 풍광과 남녀의 사랑 등을 노래한 것이다.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여 지어서 지역의 토속 및 아녀자들의 섬세한 감정 등을 노래하였다. 형식은 7언절구이며, 가사는 통속적이고 음조(音調)는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그 지방 민요풍의 가사만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방 특유의 자연이나 인사를 향토색 짙게 읊은 시가를 모두 〈죽지사〉라 일컬었다. 한국에서 창작된 죽지사는 거의 1000수 정도에 달하며, 조선시대의 죽지사는 전기와 후기에 서로 다른 특징을 띄고 있다. 전기의 죽지사는 당나라의 것과 거의 비슷하여 한반도의 문물과 자연경관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조선후기의 죽지사는 한반도의 풍속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도 있고, 외국의 풍물과 문화를 다룬 내용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연작형식의 죽지사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청나라의 죽지사와 같은 양상을 띄고 있다.

 

우리나라 죽지사(竹枝詞)는 한국고유음악으로 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 가창(歌唱)되는 12가사 중의 하나이며 '건곤가(乾坤歌)'라고도 한다. 보통 죽지사의 후렴은 "어히요 이히요 이히요 이히야 어 일심정념(一心情念)은 극락나무아미상(極樂南無阿彌像)이로구나 야루 너니나야루나"이다. 소리 높여 명랑하게 부르면 듣기 좋고 시원함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의 죽지사는 고려 말부터 부분적으로 실험되었다. 처음에는 중국 죽지사의 영향을 받아 남녀상사지정(男女相思之情)을 읊은 것과 우리나라 특정지역의 풍물 유적 자연경관을 읊은 죽지사가 혼재되어 창작되었다. 대표적인 죽지사로, 이제현이 유우석의 <죽지사>를 근거로 <소악부>를 지었고 조선초기 성현(成俔)이 <죽지사> 10수를 지어 ≪허백당풍아록(虛白堂風雅錄)≫에 수록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작품이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표작으로, 신유한(申維翰)의 <일동죽지사(日東竹枝詞)> 34수, 조수삼(趙秀三)의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133수, 이학규(李學逵)의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수, 이유원(李裕元)의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30수, 최영년(崔永年)의 560수 장편의 <해동죽지사(海東竹枝詞)>가 있다.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두한 죽지사는 중세적 보편주의 동요와 새로운 작품양식의 모색이라는, 조선 후기 문단의 커다란 변화의 흐름에 부응한 것이다. 역사 문화 예술 사회 경제 뿐만 아니라, 한시의 소재를 민간의 토속쇄사(土俗瑣事)에까지 확대시켜, 조선시 조선풍의 실현에 일정하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될 수 있다. 거제도에 전하는 죽지사는 현재까지 '오비촌죽지사(烏飛村竹枝詞)'와 '기성죽지사(岐城竹枝詞)'가 있다.

 

◯ 기성죽지사[岐城竹枝詞]를 지은 이유원(李裕元)은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분으로, 1881년 거제도로 유배 왔으나,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어 조만간 정계복귀가 유력하였다. 또한 그의 재력은 조선의 10대 부호 중에 하나였다. 이에 거제부사와 거제부민들의 지극한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거제유배기간 약 120여 일 동안, 그는 거제도 역사상 가장 편안한 귀양살이를 한 분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이유원은 집안 손자뻘 '이석영'을 양손으로 삼았다. 이석영의 형이 이회영이었다. 이유원 선생 사망 후, 그 재산을 물려받은 이석영은 한일합방 후에 본집의 재산과 함께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게 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그의 형제들 중에 이시영만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 이유원은 유배지 거제도에 대한 애정이 많아, 여러 시편에서 애정 어린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민족과 국토에 대한 그의 문재(文才)적인 인식과 문예취향적인 개성이 어울려, 거제도의 토속생활상을 형상화 하게 되었고, 해배된 후에 ‘거제죽지사’를 완성하였다. 거제죽지사 전반부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전주 산청 진주 고성 통영까지 이동하며 느낀 간단한 시편들이 있고 중반부는 처음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사당과 돌비석, 철비, 이후 거제 해금강 ‘서불‘마애각을 탁본하고 느낀 소회를 적었다. 종반부는 당시 거제도 환경과 거제부민의 토속생활상을 나열하고 있다.

 

1) <거제(기성) 죽지사[岐城竹枝詞] 中> 이유원(李裕元) 1882년 作.

“선배 몇 사람이 이 땅에 앞서 귀양 왔었는데 옛 사당은 이미 훼손되었고 돌비석은 아직도 남아있다. 백년이나 뒤를 이어, 이제는 옛날 영광과 더불어, 괴로운 가을 석 달 동안, 까맣게 잊고 칩거 했다. 무심히 살펴보니 철비(鐵碑) 하나가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돌아가신 관리의 선정비로 감당나무 그늘에서 미혹한다. 관민이 따로 위탁하여 물 뿌리고 청소하며 돌아갈 때는 우러러 사모하니, 배소로 가는 길이 지체되는 사유다. 갈도(해금강)는 경치가 수려하나 먼 곳에 있어 올 수가 없었는데 돌에 글이 새겨 있는 걸 탁본(탑본)하니 먹처럼 새까만 빛이 신묘하여 분별하기가 어렵다. 중국 진나라 서불 선박에 의해 새겨진 글씨로써 천 년이나 되었는지 가히 의심스럽다. 붓의 털끝에 의지한 결과, 지나간 과거를 기록한 흔적이다.”

 

“거제도는 집집마다 푸른 대나무와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고 누런 유자가 반쯤 익었을 때에는 심히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달 5일에 장사배가 항구에 머문다니 광주리를 기울어 잡아온 새우를 바꾸어 얻어야겠다. 채소밭엔 섣달 달빛이 눈 속에서 새롭고, 섬섬옥수 청실을 여자아이에게 보내니 치마 걷어 매양 가슴에 끼워 놓고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른아이 없이 함께 시름만 같이 할 뿐이다. 바다 그물(고망)을 가로 세로로 해면에다 넓혀 놓으니 푸른 비늘 큰 입을 가진 물고기가 어장 속에 돌아다닌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해도 물에 몸을 던져 노력하지만 이로부터 부잣집 장사만 좋았다 나빴다 한다. 소는 풀어 놓고 흩어진 채로 기르고, 노루와 사슴을 소중히 여기며 담장을 만들려고 골짜기 골짜기마다 돌을 쌓고 비바람에 자나깨나 근심하고 잘 몰라서 피한다. 석양이 내릴 때까지 내려와서 한가한 잠을 잔다. 양곡배가 겹겹이 바닷길을 덮고 내주(서남쪽 해안)로부터 소식 전하니 낮 동안은 서로 떠들썩하다. 후한 이익을 위해 앞서기를 다투니 도리어 얻지 못하게 되어도, 지방관은 흩어지는 걸 막고 저녁밥을 가로챈다. 모두에게 땅을 나눠주니 물가 백성들이 존경하고, 경서를 읽는 서생이 편안하여 자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농사와 어업 외에도 감자농사에 힘쓰며 혹은 산 앞쪽 위에서 칡뿌리를 캔다. 마을 문은 열어놓고 사람이 다니도록 비워두며, 풍속은 조용해, 수확이 적어도 마음은 편안히 한다. 좋은 의복과 토삼으로 원기가 왕성하여 거제현민은 풍토병을 가벼이 여기며 고향에서 늙어간다.“

[先輩幾人謫此土 遺祠已毁石猶覩 後進百年今與榮 蟄居頓忘三秋苦 料外審看一鐵碑 先君曾是棠陰迷 另囑官民勤灑掃 歸時瞻仰故遅遅 葛島奇觀遠莫致 搨來石刻墨光秘 可疑千載秦徐船 其果投毫過去誌 ]

[家家綠竹紫薇花 半熟黃柚滿眼奢 五日市船門港泊 傾筐換取雜魚鰕 菜田臈月雪中奇 纖手靑絲送女兒 褰裳每向胸中揷 老少同愁尊曁卑 罟網縱橫海面張 靑鱗巨口散漁塲 不計萬錢投水盡 從玆出沒富家商 放牛散牧尊獐鹿 疊石爲墻在谷谷 風雨畫宵避莫知 夕陽不見下閑宿 米舶重重蔽海門 萊州消息日相喧 厚利爭先如不獲 漫充官長攫爲飧 錫土無非河姓尊 一經安有敎兒孫 魚農以外藷農務 或上山前採葛根 里門不閉虗人行 風俗淳淳歲少康 多服土蔘元氣健 居民凌瘴老於鄕].

 

2) 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

오죽재(烏竹齋)는 예전,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에 위치했었다. 임진왜란 선무원공신 칠원 제(諸)씨 형제들의 후손인 제경직(諸景直)이 장수지소(藏修之所, 학문을 통한 수양한 곳)하던 곳이다. 이 마을 이름이 오비촌(烏飛村)인데 마침 대숲 속에 거주하고 있는 푸른 대숲 집을 '오죽재(烏竹齋)'라 호칭하니 의아해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후기, 진사 소금산인(小琴散人) 이용근(李容根)의 글에 따르면, 어느 때 남으로 바다를 건너 기성(거제) 오비촌(연초면)에 왔더니 산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한결 맑아 고운 것이 내 마음에 흡족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모두 순하고 마음에 맞아 더욱 기뻤다. 어느 날 오비촌에 거주하는 제경직(諸景直)이, 소매 속에서 종이 조각을 끄집어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길, "내 일찍이 내가 사는 이 좁고 조그마한 집을 이름하여 '오죽재'라하고, 한 문인의 글을 빌려 자(字)로 하였으니, 자네 또한 여기에서 살지 않겠는가?" 하며 묻기에, 내 이르기를 "이상하다?" "자네 집 이름 '오죽(검은 대나무)'이란 뜻이 어찌된 영문인가?“ 옛 중국 소상(潚湘)의 대를 반죽이라 하는 것과 기오(淇澳)의 대(竹)가 연죽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푸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직장(劉直長)이란 자는, 누워서 대를 보니 희게 보여 백죽(白竹)이라 하였고, 문여가(文與歌)는 먹으로써 대를 그려 묵죽(墨竹)이라 하였으며, 그 밖의 풍죽(風竹), 우죽(雨竹), 형죽(炯竹), 수죽(水竹)이란 말은 있으나, 모두 그 이름만 있고 그 실은 없는 것이다. 지금 자네 집을 둘러싼 몇 천개의 정정한 푸른 대(竹)를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이라 부르며, 그 편액에 써 놓고 있으니 내 묻기에 이른 것이다.

제경직(諸景直)이 이르기를, "자네 잘 못 보았노라. 내 집이 오비촌(烏飛村) 마을의 죽림(대 숲)속에 있기 때문에 '오죽재(烏竹齋)'라 하였을 뿐이네. 오오지(烏吾誌)에다 '오촌죽(烏村竹)'이라 하였으니 내 집을 이름 함에 그 이름과 실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네." 내 웃으면서 "자네 말이 옳다." 하며, 내어놓은 술을 '오오(烏烏)'라 하며 즐거이 '죽지사(竹枝詞)를 노래했다.

다음 ‘오비촌죽지사’는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까마귀(烏)와 대나무(竹)를 소재로 사용해 ‘陽‘,‘虞’ 운자(韻字)를 써, 대숲의 정경과 신묘한 까마귀(金烏)가 날아드는 바닷가 마을을 고상하게 읊었다.

 

<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 이용근(李容根) ‘陽‘ 韻字

岐東秋事慾蒼茫 기성(거제) 동쪽엔 가을추수가 창망하여

徒倚篁欄愛晩凉 대숲난간에 기대어 늦가을을 즐기누나.

任敎金烏飛入定 금 까마귀 들어와 선경(仙境)에 의탁하는데

海山幽夢落魚梁 바다 산, 고요한 꿈속 어량에 떨어지네.

 

속운(續韻) ‘虞’ 韻字

摩修楣顔愛及烏 얼굴을 문미에 문지르며 까마귀까지 사랑하니

主人幽事竹同孤 주인의 한가한 일에 대(竹)도 함께 외롭다네.

枝迎爽籟鏗鳴瑟 가지는 바람맞아 비파를 울리고

曄漏園輪活展圖 잎 사이에 햇빛 새어 그림을 그리누나.

 

不可此君無一日 대나무 없이 하루라도 아니 볼 수 없으니

能令韻士責千觚 시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술잔을 비운다네.

明春我有重來約 내년 봄에 다시 올 기약하니

留待淸陰曲檻隅 대(竹)그늘 굽은 난간의 구석이 기다려진다.

 

◯ 위 ‘죽지사’ 내용에 등장하는 오비촌의 제경직(諸景直)은 칠원 제(諸)씨로서, 임진왜란 때 경남과 거제도에서 맹활약을 떨친 '거제 명가(名家)' 집안이다. 특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제조겸(諸祖謙)의 아들인, 제괵(諸漍), 제억(諸億), 제진(諸璡), 제말(諸沫) 형제와 제괵(諸漍)의 아들 제홍록(諸弘祿)은 거제 고현성 전투, 연초 다공전투, 진주성 방어는 물론 이순신 휘하에서 당포 노량 벽파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어찌 이토록 제씨 집안에 충의가 많은고?"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경남의 칠원 제씨는 대부분 무관을 지냈으며, 제말(諸沫)의 6,7대손 제경욱(諸景彧, 추증(追贈) 통제사), 제안국(諸安國)은 조선 정조 순조 때 큰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조 16년 1792년 진주성에 '제씨쌍충비명(제말장군, 조카 제홍록)'의 비각이 건립되어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뒤 거제 후손들이 장목면 송진포리 후룡산 자좌에 장의하였고, 1793년 하청면 중리에 '경충사(景忠祠)'를 건립, 제씨 충신들을 매년 음력 10월 첫 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거창부 가조현에 따르면, "고려 원종12년(1272년)에서 조선 세종4년(1422년)까지 150년간 이곳에서 "기성 반씨(潘氏), 제씨(諸氏), 아주 신씨(申氏), 옥씨(玉氏)" 같은 성씨들이 거제도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았는데, 환도(還島)하지 않고 남아 산 사람도 있었으며 또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으로 함께 거제 본도(巨濟 本島)로 옮겨간 성씨들도 있었다."전하니, 제씨 등이 거제도로 최초 입도(入島)한 시기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3) 다음은 각종 유명 죽지사[竹枝詞]를 감상해 보자.

① <죽지사[竹枝詞]> 정섭(鄭燮 693~1765) 청(淸)나라 문인(文人).

湓江江口是奴家 분강 들머리에 소녀의 집 있사오니

郎若閑時來吃茶 낭군께서 한가할 때 오시어 차 한 잔 하시죠.

黃土築牆茅盖屋 진흙으로 담쌓고 띠로 이은 집이지만

門前一樹紫荊花 문 앞의 박태기나무 한그루에 꽃이 피었어요.

 

[주1] 형화(荊花) : 자형화(紫荊花) 박태기나무의 꽃. 화목한 형제애를 상징 함.

[주2] 정섭(鄭燮 1693~1765) : 팔대산인(八大山人) 중국 청(淸)나라 때의 문인(文人) 화가(畵家) 서예가(書藝家). 특히 대나무 그림에 정통하였고 양주 팔괴(揚州 八怪)의 한 사람으로 호는 판교(板橋) 강소성(江蘇省) 출생으로, 1752년에 60세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시(詩).서(書).화(畵)로 세월을 보냈다.

 

 

② <죽지사[竹枝詞] 9수 中>. 유우석(劉禹錫 772~842) 당나라 문인.

楊柳靑靑江水平 버들은 푸릇푸릇 강물은 잔잔한데

聞郎江上踏歌聲 강 위에서 들려오는 임의 노랫소리.

東邊日出西邊雨 동쪽엔 해 뜨는데 서쪽은 비 내리니

道是無晴欲有晴 말하자면 무정한 듯 오히려 다정함이라.

 

죽지(竹枝)라는 민가(民歌)를 죽지사(竹枝詞)라는 작품양식으로 재정비하여 문단에 부각시킨 사람은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이다. 읊조리는 시가 아니라 가창(歌唱)을 전제한 노랫말로 지어졌다. 개별 작품의 양식은 7언절구이면서 전체가 9수의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대단히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유우석의 <죽지사>의 특징을 의미 있게 주목하고 자기의 시대와 지역에 알맞게 응용하여 새로운 죽지사를 창작하였다. 마침내 죽지사는 문인들이 즐겨 짓는 문학작품의 하나로 문단에 정착하게 되었다.

 

③ <죽지사[竹枝詞] 10수(十首) 中>. 성현(成俔 1439~1504) 조선초 관료 문인.

君今南去海山遙 낭군이 지금 멀리 남쪽으로 길 떠나며

西風吹鬢吟蕭蕭 서풍을 향해 서서 쓸쓸하게 읊조리네.

請君更借須臾住 청하노니 낭군이여 조금만 더 머물러

飮我船頭酒一瓢 내 배에서 술 한 잔만 더 마시고 가시어요.

 

江南江北竹枝歌 강 남쪽과 강 북쪽에 널리 퍼진 〈죽지가〉

歌中意思奈如何 〈죽지가〉 노래 속에 담긴 뜻이 어떠한가?

樂者自歌還自樂 기쁜 자는 노래하며 절로 즐거워하지만

愁人聞之愁更多 시름겨운 사람은 듣고 더욱 시름한다네.

 

 

④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수 中에. 1809년 이학규(李學逵)

조선 후기에 김해에서 24년간의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李學逵)가 지은 <금관죽지사 金官竹枝詞> 30수 악부시(樂府詩)는 7절 30수로, 작자의 문집인 『인수옥집(因樹屋集)』 기사년조(己巳年條)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경상도 김해의 경치·인정·물산·풍속 등을 1809년(순조 9)을 중심으로 시화(詩化)한 것이다. 무료한 유배지의 생활에서 지방의 특산물·민속 등 생활주변의 모습들을 시로 많이 담아냈던 이학규의 다른 시편보다는 현실비판이나 풍자의 농도가 옅게 깔려 있다. 「영남악부(嶺南樂府)」나 「기경기사(己庚紀事)」에 비하면 다소 감흥이 적은 편이고 결구의 수법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간혹 발견된다. 하지만 삽화식으로 간략하게 유배지의 풍속과 세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시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문나팔소리, 산유화노래, 화랭이음악, 대나무 발, 부채, 골패놀이, 고기국맛[勝歌妓臛], 고둥·조개 잡이, 버드나무 꺾기, 갈대밭, 명지염전, 강변풍경, 모기떼, 시장사람들 모습, 훈장의 낚시질, 파사탑·초선대, 영등신맞이, 상여, 왕릉, 걸고(乞鼓), 무당춤, 선농단(先農壇), 기우제, 동래목욕탕, 상청행수(上廳行首)의 모습, 퇴기의 생활모습 등을 담고 있다.

 

◯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수 中 일부. 1809년 이학규(李學逵).

西直樓前星月殘 누각 앞의 서쪽 하늘엔 별과 달이 기우는데

開門畵角當高寒 화각소리에 문이 열리니 차가운 바람 불어오네.

南官鐃吹無律呂 남녘의 관리는 징소리 제멋대로 가락을 따지라만

不作軍前難又難 군사에겐 쓸데없어 난감하기 그지없네.

 

山有花傳嶺外歌 산유화 민요는 영남의 노래로 전해져

遺音不斷洛東波 낙동강 물결 타고 끊임없이 이어 오누나.

鵶頭十五唱歌女 검은 머리 열다섯은 노래하는 여인인데

月落楓江愁柰何 달 지는 풍강(楓江)에서 어찌 하리까.

지금 시골 마을에서 부르는 노래에 ‘산유화‘라는 곡조가 있다.(今鄕里歌曲 有山有花調)

 

砑光摺扇端陽骨 번쩍번쩍 빛나는 접부채는 단오날의 댓살이요

閃色圓幮日本紋 번뜩이는 빛의 둥근 베는 일본의 무늬로다.

持與京人作問訊 안부를 물으며 서울 사람에게 쥐어 주며

來頭好事長官聞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장관(長官)에게 아뢰네.


倭館牙牌三隻骰 왜관의 상아 호패(號牌)로 만든 세 짝 주사위에

一拋百萬未云優 한 번에 백만금을 던지고도 넉넉하다 하질 않네.

豪門摠道傾家好 호족 모두 가세가 곧 기울어 갈 것이라 말하니

八葉從今眼不留 지금부터 8잎의 연꽃에 눈길도 주질 않구려.


勝歌妓臛出歌妓 승가기 국물은 가희(歌姬)보다 낫고

造㳒先從黍齒傳 만드는 법은 앞서 일본으로부터 전해왔다.

狂殺神仙酒鑪畔 펄펄 끓는 신선로에 술상이 푸짐하니

科頭跂腳做神仙 맨머리에 두 다리 뻗고 신선인척 한다네.

승가기는 고깃국이고 신선로는 일본에서 전해왔다.(勝歌妓 肉臛名, 神仙鑪 出日本)

 

藉藉凝州香扇墜 밀양은 '향선추(香扇墜)‘란 부채로 명성이 자자한데

近因落藉罷糚梳 빗살을 세심히 단정한 낙죽을 만든 것이 가장 큰 이유다.

南湖上日浣帬去 남쪽 고을(南湖) 초하루에 치마를 빨고 갈 제,

倭傘遮陽步屐徐 일본 양산으로 햇빛 가리며 천천히 걸어가네.

 

 

⑤ <해동죽지사(海東竹枝詞)> 560수 장편 中에. 최영년(崔永年) 1925년 作.

한말의 서리 출신인 최영년(崔永年)은 사화(史話)와 민간 풍물(風物)을 다양하게 작품화하여 560수에 달하는 장편의 <해동죽지사 海東竹枝詞>를 지었다. 다음은 최영년의 죽지사 中 일부로써, 년초 세시풍속에 관한 글이다. 정월 초하룻날 설빔을 지어 입는 풍속, 정월 대보름날 호두와 잣 등 단단한 견과류를 깨물어 부스럼과 종기를 예방하기 위해 행한 풍속, 대보름날 약밥을 먹거나 더위팔기를 하는 풍속이다.

 

家家慈母手中線 집집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실로

五色斑斕歲拜衣 오색빛 무늬 고운 세배옷을 지으시네.

甲紗檀紀黃金字 갑사댕기에 수놓은 황금색 글자

壽富多男映日輝 수부다남 네 글자 햇빛에 빛나구나.

 

祓除瘡瘍大嚼破 종기 예방하려 힘껏 깨물어 깨뜨리니

爭如金荔百千顆 수많은 금빛 여지보다 못할 것이 무엇인가

春來好得如來緣 봄이 오면 부처의 인연 잘 얻으니

萬戶福田因食果 집집마다 복 받음은 열매를 먹어서라네.

 

羅王早獵上林苑 신라 왕이 일찍이 상림원에서 사냥하고

飼罷寒鴉宮日晩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고 나니 해 저물었네

千年故事仍相訛 천 년 전의 옛일이 잘못 전해 내려와

今俗還爲祭祖飯 지금 도리어 조상의 제사 음식 되었네.

 

西俗賣痴東賣暑 중국은 어리석음 팔고 우리는 더위를 파니

暑痴皆病不堪毉 더위와 어리석음 병통이나 치료할 수 없네

護生痴是平生寶 삶을 보전함에는 어리석음이 평생의 보배니

我賣暑來不賣痴 나는 더위는 팔아도 어리석음은 팔지 않으리.

◯ 위의 시는 정월 대보름날 행하는 더위팔기 풍속이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더위를 팔았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동네 사람을 만나는 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게”라고 하며 더위를 팔면 그해 여름은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날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내 더위 먼저 사가게”라고 응수하면 이름을 먼저 부른 사람이 도리어 더위를 사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여름 내내 더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의 시는 우리 민족의 더위팔기 풍속과 중국의 어리석음을 파는 풍속을 비교한 것인데 사람으로서 어리석음을 파는 것이 낫다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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