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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 김병욱
우강 김병욱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1.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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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의 마지막 전수자

우강(愚岡)김병욱은 영남일대에 큰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김병욱은 거제가 낳은 서예의 대가 성파 하동주선생의 문인으로 추사체의 마지막 전수자이다. 살아생전 그는 추사 김정희의 필법과 정신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수십년동안 전국을 무대로 서예전을 열었다. 이 같은 행적으로 한국서단에서는 그를 ‘추사체의 전도사’라고 불렀다.

1965년, 당시 서예가 오제봉은 김병욱의 서예전에 참석,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심(心)이 정(正)하여야 필(筆)이 정(正)하다 하였으니 과연 서도에 있어서는 초연한 인격을 지니고 고난의 과정을 쌓은 자가 아니고는 서체를 논할 자격이 없다할 것이다. 오늘 선생의 글을 보니 옛 성현들의 말이 너무나 옳지 않은가, 우강이야말로 참으로 추사와 성파의 전수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음이로다”

추사체

김병욱은 1907년 거제면(당시 서부면) 동상리에서 사법서사 김정수(金正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거제 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어릴 적부터 해오던 한문 학습을 그대로 이어갔는데, 그 때부터 서예가로서의 특출한 자질을 보였다. 이를 눈여겨본 성파 하동주선생은 김병욱의 부친 김정수옹에게 권유하여 졸업직후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게 했다.

김병욱은 하동주선생으로부터 추사체의 정수를 사사받는 한편 스승을 따라 영남일대의 산천을 유람했다. 스승이 영남루의 편액을 완성할때는 직접 수발을 들었고, 스승을 따라 서예대가들을 만나면서 서도에의 눈을 떠 갔다. 이 때 교류한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이 1980년대 한국 서예계를 주름잡던 오제봉, 정명수 등이다.

성파선생은 임종직전 김병욱을 수제자로 명명하면서 추사체의 전수를 전적으로 일임했다. 그러나 김병욱 이후 추사체를 전수할 자질이나 역량이 있는 문하생들이 나타나지 않아 추사체의 맥이 끊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병욱은 20대에 동아일보 지국장, 30대에 통영시청 공무원을 거쳐 해방후 거제면장(1952년)으로 근무했다. 퇴직후에는 주로 고성, 통영일대에서 활동했다. 그 이유는 당시 거제도는 서예의 불모지일 뿐 아니라 서예가들이 활동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병욱은 살아생전 총 33회의 개인전 및 서도전을 열었다. 1931년 거제를 시작으로 통영, 고성, 사천, 진주, 함양, 울산을 넘어 부산, 경기도 평안도까지 무려 32회에 걸쳐 순회 서도전을 개최했다. 전국적으로 추사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의 마지막 개인전은 1979년 서울과 고성에서 열렸는데 서울에서 개최한 서도전에서는 당시 활동하던 대한민국의ㅏ 서예 대가들이 대거 참석해 그의 서예가로서의 족적에 찬사를 보냈다.

원로작가 이면서 영남 서예대가 정명수는 김병욱이 출품한 ‘해불양수(海不讓水 : 바다는 어떠한 물이라도 모두 수용한다)’란 글을 보고 “추사는 행복할 것이다. 성파 또한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청출어람’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에서 성파 하동주 그리고, 우강 김병욱으로 전해지는 추사체의 의연함과 힘찬 필법을 보고 내뱉은 감동의 표현이었다.

김병욱은 마지막 숨을 고르면서까지 후일을 부탁했다. “반드시 추사체의 전수자를 찾아라” 임종을 지키고 있던 아들 김환곤씨(본교 30회)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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