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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거제인(巨濟人) 우수(禹壽) 장군>
<임진왜란 거제인(巨濟人) 우수(禹壽) 장군>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3.0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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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로써 임진왜란 동안, 큰 공을 세웠던 거제도 출신 우수(禹壽) 장군이 있었다. 그는 1557년(丁巳) 거제(巨濟)에서 출생하였고 자(字)는 인수(仁叟),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부(父)는 우참급(禹斬級)으로 종6품 무관인 사과(司果)를 지냈으며, 형(兄)은 우지(禹枝)이고 일찍이 어머니를 여위었다. 그가 안골포 만호로써 참전한 해전은, 웅포 당항포 장문포 영등포 다대포 칠천량 명량 노량해전과 이후 1604년 당포 무장상선 나포까지였다. 또한 부산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통제사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1603년(선조36) 47세 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4명 선발 인원 중에 17위로 급제해, 1604년(선조 34) 전라좌수영 5개 진영 중 하나인, 사도진 수군절제사(蛇渡鎭水軍節制使)로 근무하다, 1604년 6월 당포(唐浦)해역에 출몰한 무장상선을 무찌른 승전(勝戰)에 참여하기도 했다. 1607년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1617년 광해 9년 금성 수령(錦城監)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한평생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전장을 누비었는데 경남•전남 남해안 일대의 바닷길과 해안지리를 꿰뚫고 있는 당시 최고의 무관 중에 하나였다. 우수(禹壽) 장군이 경남 거제도 출신이라는 기록은 지금까지 2군데에서 전한다. 첫째는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만력계묘식년문무과방목(萬曆癸卯式年文武科榜目)』 중에서, 그리고 그가 1604년 선조 왕으로부터 특별히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를 하사해, 받은 내용에도 확인할 수 있다.

◯ 1592년 여름 이순신 장군은 거제도 옥포를 시작으로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견내량 안골포 부산 다대포에서 연이은 승리를 하였다. 때마침 이해 9월 27일 왜적들에게 붙들려 있던 안골포 사람 230 여명을 군관 우수(禹壽)가 이순신 장군에게 데리고 왔고 안골포에 왜선 22척이 있다고 보고한다. 이에 선박 항해술에 능한 이들을 모아 이순신은 1척의 전선을 건조케 하였고 이들의 수장으로 우수(禹壽)를 지명하게 된다. 그가 이후 전쟁 중에 이순신의 사람으로서,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가 된 것은 아버지 뒤를 이어, 경상우수영 관할 內, 무관 집안으로 리더십은 물론, 바닷길과 항해술, 그리고 선박을 다루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안골포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 수군 만호진이 설치된 곳이었다. 하지만 이순신과 원균 통제사 휘하에서 수많은 무공(武功)에도 불구하고, 출신지역이 미천한 거제 섬이었고 정시 무관 시험을 거치지 않았기에, 고위직 승진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이에 그는 47세 1603년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응시하여 급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 동안 수많은 공(功)을 쌓아, 정3품 사도진 수군절제사(蛇渡鎭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이후 약15년 정도 무관으로써, 고을 수령으로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수(禹壽) 장군이 평생 동안 참전한 해전에서 유일한 패전이 칠천량 해전이었다. 당시 해전을 치르는 동안, 칠천도 서편 거제현 가조도 쪽에서 싸우다가 패전이 짙어지자 한산도로 후퇴하여 전선(全船)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는 이미 자궁(資窮)이 되고 말았다. 즉 조선 시대, 더 올라갈 자리가 없는 당하 정삼품(堂下正三品)이 되었음을 뜻했다. 1597년(선조 30) 음9월 16일 전남 울돌목 명량해전에 우수(禹壽)는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참전하게 된다.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등이 각각 전선 1척을 대동하였고, 이순신의 지휘 아래 총13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아가 수많은 적군을 막아내었다. (영화 ‘명량해전’에서 12척의 판옥선 중에 1척이 우수(禹壽) 장군의 전선이었다.)

 

◯ 1598년 10월 3일 왜교성 전투에서 안골포만호 우수(禹壽)가 총에 맞았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1598년 11월19일 19일 새벽,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는 사도첨사 이섬(李暹)과 서로 신호하면서 두 척의 병선을 같이 몰아 적선의 양현(兩舷)에서 동시에 총통과 화전을 집중으로 쏘아대 결국 적선을 불태웠다.

조선중기 나라가 풍전등화 앞에 놓인 국가의 환란 속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이순신의 용병술(用兵術)에 힘입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국가의 대재난을 극복하는 한가운데에, 거제인(巨濟人) 우수(禹壽) 장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 <호국(護國) 단심(丹心) 거제인 우수(禹壽)장군> 고영화(高永和)

桓桓禹公將 굳세고도 날래었던 우수(禹壽)장군은

仡仡萬戶臣 용감하고 씩씩한 신하 만호였었다.

挺身抵倭賊 앞장서서 왜적들을 막아서니

傍若蹈無人 마치 곁에 무인지경을 밟듯 했다.

 

鼎重東邦業 중대한 직임은 동방의 업적이며
碧海一片心 깊고 푸른 바다의 일편단심일세.

日映臨海水 태양은 바닷물을 밝게 비추고
百年臣節深 신하의 절조는 한평생 깊었어라.

英風洒夷夏 고상한 절조에 오랑캐도 감동하니

始終如一般 시종일관 매양 한가지였다네.
偉哉佳氣公 위대하도다! 아름다운 공이시여~
稟精巨濟山 거제 해산(海山)의 정기 받았어라.

 

 ● <우수(禹壽) 장군 임진•정유왜란 활약상>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대규모로 침공하였다. 이에 놀란 경상우도 수군진영의 수군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중에 안골포 진영은 손 쓸 틈도 없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이 연 이은 승리를 거두자 서서히 남해안 수군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에서 대첩을 거둔 조선의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통제 아래 한산도에 통제영을 개설하고 바닷길의 길목을 틀어막게 된다. 이즈음 수군 군관이었던 우수(禹壽)가 9월 27일 왜적들에게 붙들려 있던 안골포 사람 230 여명을 이순신 장군에게 데리고 왔고 또한 안골포에 왜선 22척이 있다고 보고한다. 이들은 대부분 안골포 진영의 소속 수군들이었다. 선박 항해술에 능한 이들을 모아 이순신은 1척의 전선(판옥선)을 건조케 하였고 이들의 수장으로 우수(禹壽)를 지명하게 되었다. 이후 전쟁 중에 이순신의 사람으로서, 안골포 만호가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어, 경상우수영 관할 內, 무관 집안 거제도 출신으로, 리더십은 물론 바닷길과 항해술, 그리고 선박을 다루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안골포 만호로써, 웅포 당항포 장문포 영등포 다대포 칠천량 명량해전 노량해전, 그리고 1604년 당포 무장상선 나포까지 모든 해상 전투에 참여하게 되어 큰 공을 세웠다.

◯ 그가 관련된 임진난 기록을 살펴보면, 명군의 참전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1595년 음12월 초9일, 한산도에 거제현령 안위와 더불어 이순신 통제사를 찾아뵙고 그간의 동향을 보고했다. “왜적들이 물러갈 뜻이 없는 모양입니다. 여전히 주둔하며 경계를 늦추질 않고 있습니다.” 이때 군량미를 보급 지원하는 진주의 하응구(河應龜)도 와서 만났다. 1596년 1월 5일에도 이순신 통제사를 뵙고 돌아갔다. 또한 덧붙여 병신년(丙申,1596년) 난중일기에서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 중에 거제도와 관련 있는 분들을 살펴보면,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안위(安衛), 안골포만호(安骨浦萬戶)로 거제출신 우수(禹壽), 옥포만호(玉浦萬戶) 이담(李曇)과 거제출신 옥포진영 소속군관 오수(吳壽), 박춘양(朴春陽), 공태원(孔太元), 권숙(權俶), 신홍수(申弘壽), 정사립(鄭思立), 조기(趙琦), 김숙(金俶), 김인복(金仁福), 오철(吳轍) 등이 있었다.

 

◯ 1597년 2월23일 선조실록에는, 가덕도 왜적이 초동(樵童) 한 명을 쳐 죽이고 5명을 붙잡아 갔다. 통제사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말하기를, “가덕도의 왜적이 우리 초동을 죽였으니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권율(權慄)의 생각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배를 전진시키자 적들은 스스로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방포(放砲)하였다. 가덕도로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타고 있는 배를 몰아, 권율이 거느리고 있던 항왜(降倭) 17명을 옮겨 태워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대포를 무수히 발사하자 왜적 10여 명이 보이는 곳에서 곧장 거꾸러져 죽었다. 우수(禹壽)가 왜적 1명을 사살하고 날이 저물어 영등포 앞바다로 돌아와 변을 대비하였다.

◯ 1597년 2월28일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장계(狀啓)하기를, 예전에 부산포(釜山浦) 앞바다에서 진퇴(進退)하며 병위(兵威)를 과시하고, 가덕도(加德島) 등처에서 접전(接戰)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미 치계(馳啓)하였는데, 그때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통제사 이순신의 배가 부산포 앞바다에서 바닷물이 빠져 배 밑창이 땅에 닿아 배를 빼앗기게 되었는데, 배 위의 전졸(戰卒)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니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노를 빨리 저어 달려가서 이순신(李舜臣)을 등에 업어 어렵게 우수의 배로 옮겼고 이순신이 탔던 배는 선미(船尾)를 연결하여 간신히 안골포로 끌고 왔다.“한다. 어찌되었건 우수(禹壽)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위기에서 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 1597년 3월 19일(3월 24일 장계도착),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치보(馳報)에 ‘3월 8일 왜선(倭船) 대·중·소 3척이 거제(巨濟) 기문포(器問浦)에 와서 정박(定泊) 상륙(上陸)하였다.’하기에 원균 통제사가 즉시 주사(舟師)를 거느리고서 일시에 발선(發船)하여 밤새도록 노를 저어 9일 이른 아침에 기문포에 당도하여 보니, 왜선 3척이 해안(海岸)에 매여 있는데 왜적은 모두 상륙하였고, 산기슭 사이에서 밥 짓는 연기가 잠시 일어나는 중에 왜적 3∼4명이 칼을 번뜩이며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원균 통제사가 항왜(降倭) 남여문(南汝文) 등을 보내어 이해(利害)로 회유(誨誘)하게 하였더니, 숨어 있던 왜적 20여 명이 나왔고, 남여문이 왜추(倭酋)와 조용히 담설(談說)하자 숨어 있던 왜적이 다 나왔는데 대개 80여 명이었으며 우리 주사(舟師)의 성대한 위용(威容)을 보고는 엄습을 받을까 의심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다.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이 탄 배가 다투어 올라가서 항복을 받으니, 장왜(將倭)가 그 무리 7명을 거느리고 와서 통제사의 배로 올라갔다. 통제사가 그에게 술을 주고 배를 타고서 떠날 것을 허락하니 왜적들은 생환(生還)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여 죽 늘어서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수히 치사(致辭)하고는 저희 배 있는 데로 내려가서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돛을 달려는 즈음에 통제사가 먼저 지자총통(地字銃筒)을 쏘고 지휘기(持揮旗)를 흔들며 적각(笛角)을 급히 부니, 제선(諸船)이 앞을 다투어 공격하였다. 조응도(趙凝道)가 탄 배는 다른 배보다 상당히 빨라 먼저 적에게로 달려 들어가서 적선을 공격하니 왜적 20여 명이 조응도의 배로 올라와 싸웠는데 조응도와 사부(射夫)·격군(格軍) 등이 적의 칼날에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여, 혹은 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배에 구제되기도 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적의 칼을 맞고 물로 뛰어든 조응도를 우수(禹壽)의 배가 접근해 건졌으나 잠시 뒤에 죽었다. 적들이 그대로 조응도의 배인 고성(固城)의 배를 타고서 노를 저어 북쪽으로 달아날 때 제선이 포위하여 지자총통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을 계속 쏘아대니 좌우의 방패(防牌)가 총에 맞아 다 떨어졌고, 화살이 비 오듯 하니 왜적은 허둥대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임치 첨사(臨淄僉使) 홍견(洪堅),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용제(李容濟)로 하여금 당화전(唐火箭)과 송거(松炬) 등으로 적선에 불을 지르도록 하여 왜적들이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 육지를 향해 헤엄칠 때 사살하고서 그 시체를 건져 목을 벤 것이 도합 18급(級)이었다. 변험(辨驗)하여 통제사에게 보내어 수송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적의 수급을 벤 사람들은 통제사가 군공(軍功)을 마련하여 장계하기를 기다린 뒤에 논상(論賞)하고, 조응도와 전사(戰死)한 사람들도 자세한 치계가 있은 뒤에 휼전(恤典)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통제사에게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 1597년(선조 30) 음7월 15일 칠천량 해전 후에 원균과 함께 달아났던 선전관 김식의 입계 내용을 살펴보자. “조선 수군은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물러났으나 형세 상 더 이상 대적할 수 없어서 고성 땅 추원포(秋原浦 또는 춘원포)로 퇴각하여 머물렀는데 적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우리나라 전선들은 전부 불타거나 침몰되고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은 불에 타고 물에 빠져 모두 죽고 말았다.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몸을 빼어 뭍으로 올라왔는데, 원균은 늙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집고 소나무 밑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신이 달려가다가 돌아보니 왜놈들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는데, 원균의 생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과 옥포만호 이담(李曇 1524∼1600),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만 겨우 살아났다. 여러 배들이 당하여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었고, 왜적의 배들이 무수히 한산도로 향하였다.

 

◯ 1597년 8월3일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재임용되어 전라도로 향해 달려갔다. 1597년(선조 30) 음9월 16일 전남 울돌목 명량해전에 우수(禹壽)는 이순신 통제사와 함께 참전하게 된다.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등등과 각각 전선 1척, 총13척의 판옥선을 타고 나아가 수많은 적군을 막아내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에 한 가닥 숨통을 터주었다. 이후 1597년 10월 11일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는 김응함, 우치적, 조효남, 안위 등과 함께 이순신에게 왔다가 수군전력의 재정비를 계획하고 20일 날 돌아가, 전선의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수군인원의 보충과 훈련에 전력을 기하였다.

 

◯ 1598년(선조 31) 4월 28일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 등 3인에 대하여 각기 한 자급(資級)씩 올리도록 판하(判下)하신 바에 의하여 이순신과 김응함(金應緘)은 이미 절충(折衝)이 되었으니 가선(嘉善)에 올리고, 우수(禹壽)는 이미 자궁(資窮)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상(堂上)으로 승급되어야 한다는 승전을 받든 바 있습니다. 다만 한산(閑山) 싸움(칠천량해전)에서 패한 사람은 그대로 치부(置簿)하였다가 사핵(査覈)을 거쳐 처리하라는 전교가 계셨는데, 김응함과 우수는 모두 한산 패전에 간여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수(禹壽)는 거제현 가음조도(加音助島, 가조도) 앞바다(칠천량 해전)에서의 접전 때 전선(全船)이 살아 돌아왔었고, 김응함은 병 치료를 위하여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김응함은 싸움에서 패한 것과는 다르다 하겠으나 우수(禹壽)는 당연히 실제의 사정이나 정세를 자세히 조사하여 밝혀야 할 것 같은데, 이 두 사람 모두에 대해 승전을 받들 것인지, 감히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른바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은 한산(閑山)을 가리켜 한 말인가? 또 김응함이 병 치료를 위하여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은 어디에서 나왔는가?"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수(禹壽)가 평생 동안 참전한 해전에서 유일한 패전이 칠천량 해전이었다. 당시 해전을 치르는 동안에 칠천도 서편 거제현 가조도 쪽에서 싸우다가 패전이 짙어지자 한산도로 후퇴하여 전선(全船)을 보존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는 이미 자궁(資窮)이 되고 말았다. 즉 조선 시대, 더 올라갈 자리가 없는 당하 정삼품(堂下正三品)이 되었음을 뜻했다.

 

◯ 1598년 진린의 명(明)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 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 상호간의 구원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이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000의 병력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조명 연합 육상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1598년 10월 3일 왜교성 전투에서 도독 진린이 초저녁에 나가 싸워 자정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왜군 3,000명을 무찔렀다.(장도해전)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피해도 커 명나라 전선 30척이 격침당하고, 명 수군 2,300명이 전사했으며, 왜군에게 포위된 명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안골포만호 우수(禹壽)가 총에 맞았으나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 1598년 11월19일 19일 새벽,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선단이 어둠을 뚫고 근접해 오자 진린은 도독기(都督旗)를 높이 올린 다음 북을 크게 울리면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순신도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먼저 적의 선열(船列) 중간 부분을 돌격해 들어갔다.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는 사도첨사 이섬(李暹)과 서로 신호하면서 두 척의 병선을 같이 몰아 적선의 양현(兩舷)에서 동시에 총통과 화전을 집중으로 쏘아대 결국 적선을 불태웠다. 이때에 적병 두 사람이 진린의 배에 뛰어 들어 그가 위급해졌을 때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이 몸으로 적의 칼을 막아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나 구경은 계속 분전하였는데 기고관(旗鼓官) 문위(文)가 급히 달려들어 그 적을 모조리 창으로 찔러 죽였다.

◯ 1598년 12월 18일 도원수 권율(權慄)이 아뢰기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손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인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수군인 주사(舟師)의 공이었습니다. 우치적(禹致績)·이섬(李暹)·우수(禹壽)·류형(柳珩)·이언양(李彦良)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首功)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12월 25일 군공청(軍功廳)이 아뢰기를 “도원수의 장계에 ‘주사(舟師)가 승첩을 올린 군공에 대해서 예사로운 전공과 같은 예로 논상하는 것은 불가한 듯하다.’ 하였기에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원수의 논리적인 계사를 보고 안팎의 소문을 참작해 보건대, 이번의 전공은 다른 전공과 같지 않다. 그리고 손문욱(孫文彧)이 군사를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한 공은 당상직을 초수(超授)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고, 우치적(禹致績)·이섬(李暹)·우수(禹壽)·류형(柳珩)·이언양(李彦良) 등도 승서(陞敍)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목 이외의 별규(別規)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대신 및 비변사 당상은 가자 헌의하도록 하라. 이 곳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 자세히 알기 어려운 형편인데다가 수전을 치른 사람들 중에는 이들 뿐만이 아닐 것이니, 원수에게 다시 문의해서 처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 듯싶다.”하였다.

 

◯ 임진•정유 왜란이 끝난 후, 1604년 6월4일 우수(禹壽) 장군은 ‘사도진수군절제사(蛇渡鎭水軍節制使)’로 통제영에서 수군훈련에 대비하고자 파견 나와 있었다. 이 때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唐浦) 앞바다에 조선인들이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의 검고 큰 배(黑色大船)가 당포 해안으로 접근하자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판옥선을 몰고 출동하여 제압하였다. 포르투칼(寶東家流) 상인 조앙 멘드스(Joao Mendes,之褑面弟愁) 1명, 남만인 흑인 1명, 일본인 31명(여자 1명), 중국 국적이 16명 총 49명의 포로를 잡았다. 선조왕이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참전한 28명의 공신들에게 이를 하사할 때, 우수(禹壽) 장군도 그 중에 한 분이었다.

◯ 1607년 5월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로 있던 우수(禹壽)는 출신이 미천하면서도 스스로 근신하지 않고 오로지 제 몸 살찌우기만을 일삼아 군졸을 침학한다하여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재능과 무훈을 인정받아 1617년(광해 9) 전남 나주지방, 금성 고을 수령(錦城監)으로 재직하다 사직하고, 향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노후를 보냈다.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 1604년 우수(禹壽) 장군이 참전한 해전(海戰)기록>

 

1)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

갑신년 1604년 선조왕이 다국적 무장상선을 나포하는 조선 수군을 그린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공신들에게 하사했다. 1604년 (선조 37년) 6월 4일 오후에 일본 선단과 벌어진 해상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지휘관 28명 모두에게 내린 하사품이었다.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상단은 당포해전을 상징하는 해전도(海戰圖)이고, 하단에는 해전에 참여했던 인물 28명의 좌목(座目) 당포승전도제명(唐浦勝戰圖題名)이 적혀 있다. 그림은 크고 작은 전선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위풍당당하게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새가 하늘을 날며 내려다 본 부감법으로 그렸다. 배에는 노를 젓고, 활을 쏘거나 칼싸움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당포승전도제명(唐浦勝戰圖題名)>에는 당시 개인의 직책과 함께 각각의 본관, 자(字), 출생년도, 고향(거주지)을 순서대로 적어 그 공로를 치하했다. 왕은 신하에게 호(號) 대신에 자(字)를 적는 것이 법도였다.

 

2) 당포승전도제명[唐浦勝戰圖題名]

(1) 가선대부 겸 충청경상전라 삼도통제사 행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이경준(字 심원), 1561년 출생, 한산 이씨, 서울 거주 (嘉義大夫兼忠淸慶尙全羅三道統制使行慶尙右道水軍節度使 李慶濬 深源辛酉 韓山人 居京) 남원·무주지역의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2) 가선대부 경상우후 신여량(字 중임), 1534년 출생, 고령 신씨, 흥양 거주(嘉善大夫慶尙虞侯申汝樑 重任甲午 高靈人 興陽) 1593년 진도싸움에서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

(3) 절충장군 충청우후 송안정(字 정향) 1554년 출생, 홍성 송씨, 서울 거주(折衝將軍忠淸虞侯宋安廷 正鄕甲寅 洪州人 京)

(4) 사도진 수군절제사 우수(字 인수) 1557년 출생, 예안 우씨, 거제 거주(蛇渡鎭水軍節制使禹壽 仁叟丁巳 禮安人 巨濟) 부산포 칠천량 명량 노량해전 안골포 만호.

(5) 미조정진 전절제사 이섬(字 태명) 1566년 출생, 전의 이씨, 서울 거주(彌助頂鎭全節制使李暹 太明丙寅 全義人 京)

(6) 절충장군 신탁(字 자미) 1571년 출생, 평산 신씨, 서울 거주(折衝將軍申琢 子美辛未 平山人 京)

(7) 절충장군 이기남(字 대윤) 1553년 출생, 광산 이씨, 순천 거주(折衝將軍李奇男 大胤癸丑 光山人 順天) 거북선 좌돌격장.

(8) 어모장군 송덕일(字 치원) 1566년 출생, 남양 송씨, 흥양 거주(禦侮將軍宋德馹 致遠丙寅 南陽人 興陽) 1592년 훈련원첨정으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진도군수로 전공을 세웠다.

(9) 어모장군 임영립(字 사웅) 1566년 출생, 진천 임씨, 진천 거주(禦侮將軍林英立 士雄丙寅 鎭川人 鎭川)

(10) 어모장군 맹우증(字 효백) 1566년 출생, 신창 맹씨, 울산 거주(禦侮將軍孟友曽 孝伯丙寅 新昌人 蔚山)

(11) 보공장군 조흡(字 호원) 1572년 출생, 평양 조씨, 서울 거주(保功將軍趙潝 浩源壬申 平壤人 京)

(12) 진위장군 이희참(字 이로) 1556년 출생, 전의 이씨, 서울 거주(振威將軍李希參 而魯丙辰 全義人 京)

(13) 진위장군 두기문(字 시언) 1571년 출생, 만경 두씨, 만경 거주(振威將軍杜起文 詩彥辛未 萬頃人 萬頃) 임진왜란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으며,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4) 소위장군 윤기(字 여온) 1571년 출생, 해남 윤씨, 해남 거주(昭威將軍尹琦 汝溫辛未 海南人 海南)

(15) 정략장군 이명길(字 천석) 1569년 출생, 태안 이씨, 안산 거주(定略將軍李命吉 天錫己巳 泰安人 安山)

(16) 정략장군 노홍(字 여신) 1561년 출생, 함평 노씨, 장흥 거주(定略將軍魯鴻 汝信辛酉 咸平人 長興) 남도포(南桃浦) 만호로 임진난 참전.

(17) 현신교위 노의남(字 사강) 1574년 출생, 교하 노씨, 수원 거주(顯信校尉盧毅男 士剛甲戌 交河人 水原)

(18) 돈용교위 정흔(字 경명) 1578년 출생, 계림 정씨, 서울 거주(敦勇校尉鄭昕 景明戊寅 鷄林人 京)

(19) 진용교위 노인(1566∼1622, 字 공식) 1566년 출생, 함평 노씨, 나주 거주(進勇校尉魯認 公識丙寅 咸平人 羅州)

(20) 병절교위 이희춘(字 경순) 1562년 출생, 보은 이씨, 해남 거주(秉節校尉李希春 景純壬戌 報恩人 海南)

(21) 어모장군 김일개(字 여신) 1562년 출생, 김해 김씨, 울산 거주(禦侮將軍金一介 汝臣壬戌 金海人 蔚山) 권관으로 임진난 참전.

(22) 어모장군 박옹(字 무중) 1557년 출생, 서울 거주(禦侮將軍朴蓊 茂仲丁巳 京) 직장(直長)으로 임진란 참전.

(23) 정략장군 김대관(字 언홍) 1566년 출생, 경주 김씨, 신령 거주(定略將軍金大寬 彥弘丙寅 慶州人 新寧)

(24) 병절교위 이자징(字 징지) 1554년 출생, 광주 이씨, 서울 거주(秉節校尉李自澄 澄之甲寅 廣州人 京) 1604년 남해 현령 제수.

(25) 소함장군 박제, 전주 박씨(昭咸將軍朴璾 全州人) 증 자헌대부(贈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증직.

(26) 병정교위 이광춘, 강진 거주(秉節校尉李光春 康津)

(27) 통정대부 옹진현령 윤흥룡(字 중우) 1547년 출생, 파평 윤씨, 대흥 거주(通訓大夫 瓮津縣令尹興龍 仲遇丁未 坡平人 大興)

(28) 승훈랑전 장성현감 손응호(字 경우) 1560년 출생, 밀양 손씨, 당진 거주(承訓郞前長城縣監孫應虎 景又庚申 密陽人 唐津)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 만력갑신년 1604년 6월 일(萬曆甲辰六月日)

 

3) 당포 앞바다 무장상선 나포(唐浦前洋武裝商船拿捕) 사건 개요.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는 1604년 6월4일~5일, 경상남도 통영시의 당포(唐浦) 앞바다를 침범한 일본 무장 상선을 나포한 사건을 담은 기록화다. 승첩지도(勝捷之圖) 그림에는 조선수군 25척의 함선이 맹렬한 화공을 퍼붓고 일본 선단의 좌현에 2척 선수에 2척 우현에 1척 5척의 판옥선(板屋船)이 근접전으로 활을 쏘며 맹공격을 한다. 쌍범대선(雙帆大船)은 그들의 운명처럼 긴 붉은 깃발이 꺾어지면서 바다에 떨어지는 모습이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그려져 있다. 일본선단에는 특유의 일본식 머리를 하고 창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왜군의 모습이 보이고, 조선수군 판옥선 사이에는 소형 하후선(何候船)이 해상을 누비고 있다. 그림상의 수군은 신여량(申汝梁)의 승첩지도에서는 233명이며, 일본인 선단의 저항하는 사람은 21명이다. 조선수군의 군선 25척이며 만호 노홍의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에 나타난 군선(軍船)은 23척 승선인원은 130명 하후선(何候船)은 15척이었다. 1604년 선조(宣祖)는 이 해전의 전승(戰勝)을 기념하여 “당포전양승첩지도”를 참전 장군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고, 명나라에서는 이경준(李慶濬), 신여량(申汝梁)과 최초의 발견자인 미조첨사 이섬(李暹)장군에게 별도로 포상하였다.

이 당포전투는 조선인들이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의 검고 큰 배(黑色大船)가 당포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시작됐다. 통제영이 위치한 요충지에 정체불명의 선박이 출현했으므로 조선 수군에 비상이 걸리고 판옥선이 줄줄이 출동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건 초기에 선박에 타고 있던 일부 중국인이 국적을 밝히면서 살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전면 공격 결정을 내리기까지 다소 지연시간이 있었다. 미조항 첨사가 탄 판옥선이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 흑색대선의 선원들에게 국적을 밝히고 배를 멈추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고 얼마 전까지 임진왜란을 겪은 수군으로서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당시 통제영에는 또 다른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첨방(添防)이라는 수군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음2월에서 음7월까지 6개월간에 해상을 지키기 위한 기동대(機動隊) 형태의 수군 연합부대였다. 전라우수영 15척 판옥선(板屋船), 전라 좌수영 5척 판옥선(板屋船), 충청수영 10척의 판옥선(板屋船)을 합한 30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며, 좌목(座目)의 지휘관은 본영에서 10명, 전라좌수영에서 6명, 전라우수영에서 5명 충청수영에서 7명으로 모두 28명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휘선에 함께 승선한 우후(虞侯) 신여량(申汝梁)과 각 판옥선(板屋船)의 지휘관은 우후(虞侯) 송안정(宋安廷),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우수(禹壽), 첨사(僉使) 이섬(李暹), 절충장군(折衝將軍) 신탁(申琢)․이기남(李奇男), 어모장군(御侮將軍) 송덕일(宋德馹)․임영립(林英立)․맹우증(孟友曾), 보공장군(保功將軍) 조흡(趙潝), 진위장군(振威將軍) 이희삼(李希參)․두기문(杜起文), 소위장군(昭威將軍) 윤기(尹琦), 정략장군(定略將軍) 이명길(李命吉), 정략장군(定略將軍) 노홍(魯鴻), 현신교위(顯信校尉) 노의남(盧毅男), 돈용교위(敦勇校尉) 정흔(鄭昕), 진용교위(進勇校尉) 노인(魯認), 병절교위(秉節校尉) 이희춘(李希春), 어모장군(御侮將軍) 김일개(金一介)․박옹(朴蓊), 정략장군(定略將軍) 김대관(金大寬),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자징(李自澄), 소위장군(昭威將軍) 박제(朴璾), 병절교위(秉節校尉) 이광춘(李光春), 옹진현령(甕津縣令) 윤흥용(尹興龍), 장성현감(長城縣監) 손응호(孫應虎)으로 구성된 첨방(添防)부대 였다.

처음에는 조선 수군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흑색대선(黑色大船)의 중국인은 항복을, 임진난을 겪은 일본인들은 죽음이 두려워, 전투 후에 도망을 가기로 결정하며 일부 중국인을 죽이고 배를 장악하여 대양을 향해 나아가며 조총 사격으로 대항해 왔다. 결국 조선 수군은 흑색대선을 포위한 상태에서 활과 총통으로 일제 공격을 퍼부었다. 단 1척의 배였지만 싸움은 쉽지 않았다. 흑색대선은 서양식 대양 항해용 범선에 가까운 배로 조선 수군의 판옥선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24시간 이상 지속된 전투 끝에 조선군은 흑색대선 갑판에 올라 저항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진압, 항복하는 자는 생포했다. 흑색대선은 그야말로 여자까지 포함된 다국적 무장상선이기 때문에 무력진압에 성공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흑색대선 생존자들이 털어놓은 배의 정체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 배는 일본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령에 따라 캄보디아와 교역 관계를 체결하기 위해 파견된 무역 사절선박으로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무장 상선의 일종이었다. 이들은 도쿠가와가 지급한 은 500냥을 가지고 캄보디아에서 상아·코뿔소 뿔 등을 사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귀환하던 중 폭풍으로 조선 해안에 표류해 온 것이다. 흑색대선에는 무역을 중계한 선주 황정(黃廷)을 비롯한 중국인 16명, 일본인 31명(여자1명), 남만인 흑인 1명, 포르투칼 상인 조앙 멘드스(Joao Mendes, 之褑面弟愁)에 이르기까지 총 49명의 여러 나라 사람이 타고 있었다. 조선 당국의 심문 결과 중국인들은 조선 수군의 정선 명령에 응하려 했으나 일본인들이 반대해 중국인 선원을 살해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이 일본인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겁먹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약 4개월 간 포로로 체류한 후에 배의 선주가 중국인인 점을 고려,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생존자를 중국으로 강제 송환했다. 중국 조정은 적국인 일본의 교역에 종사한 선박을 나포한 조선의 대응이 타당했다고 인정, 조선 수군통제사에게 은 20냥을 상금으로 지급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당포전양승첩은 영해를 침범한 외국 선박에 신속히 대응 조치를 취한 조선 수군의 작전 준비 태세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임난(壬亂) 이후 조선은 강력한 해상 방위태세를 갖추고 일본과 기유조약(己酉條約)이 체결되기까지 해상의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일본·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17세기 초기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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