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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3.1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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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를 배경으로 그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림

1) 조선시대 각종 ‘동회도(同會圖)’ 개요 2) 조선(朝鮮) 동회도(同會圖)의 일반적 양식

3) <조라포남봉관해도> 그림 분석(分析) 4) 좌목(座目)에 대한 분석(分析)

5) <조라포남봉관해도> 좌목(座目) 6) <좌목(座目)> 인물 약력

7) 참고 : 경상도관찰사 홍성민(洪聖民) ‘구조라(助羅) 포구(浦口)에서

 

고영화 선생

1) 조선시대 각종 ‘동회도(同會圖)’ 개요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조라포 남봉(現수정봉) 바닷가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 ‘계회도(契會圖)’에 속하나 엄밀히 말하면, 관찰사 순시(巡視) 時, 예하 관리들과 호위(護衛)하던 수행원들이 모여 회동한 ‘경상감사 순시 조라포 동회도(慶尙監司巡視助羅浦同會圖)’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은, 고려시대에는 인물 중심으로 그리다가, 세종연간부터 각종 모임에 배경을 더하여 그리기 시작한 ‘동회도(同會圖)’인데 그 목적과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왕과 공신이 모여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도(會盟圖), 술자리에 참석한 것을 기념하는 회음도(會飮圖), 원로대신들의 모임인 기영회도(耆英會圖), 문무과 합격 동기들 모임인 방회도(榜會圖), 각종 잔치의 모습을 그린 연회도(宴會圖), 문인이나 관료들이 약속하여 모인 계회도(契會圖), 글로써 교유하는 인물들이나 시회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시회도(詩會圖)•시사도(詩社圖)라 불린다. 조선초기 산수(山水)를 위주로 그리던 계회도의 경향이 1550년경의 「호조랑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나 「연정계회도(蓮亭契會圖)」 등에서와 같이 계회 장면의 비중이, 배경인 산수와 대등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계원들을 작게 표현하지 않고 훨씬 크고 자세하게 그렸다. 계회의 장면이 자연의 경관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보다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다. 1570년대 들어 등장한 계회도(契會圖) 형식은 그림의 배경인 산이나 수목 표현에, 16세기 중엽 이후부터 거칠고 흑백의 명암 대조가 뚜렷한 절파(浙派)화풍이 적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종래의 관아 중심에서 중인 문인층으로 확산, 민간화되면서 화첩형식의 시회도(詩會圖)와 아집도(雅集圖)로 발전했다.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는 조선중기 계회도의 변화에 따라, 인물들이 화면구성의 중심이 되어 산수를 그려낸 ‘소경 산수 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 형식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한 폭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에도 개인소장(個人所藏)품 한 점이 있으며, 그림의 크기는 세로 98cm 가로 58cm이다. 당시 그림 좌목(座目)에 등장하는 13명이 각각 한 점씩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조선(朝鮮) 동회도(同會圖)의 일반적 양식

조선(朝鮮)의 여러 동회도(同會圖)는 주로 문인들의 모임장면을 그린 일종의 기록화로서 고려시대 이래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형으로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러한 류(類)의 계회도는 정형화된 양식을 보이는데, 화면을 3분(分)하여 상단에 예서(隷書)로 계회명(契會名)을, 중단에 계회 장면을 그림으로, 하단에는 참석자들의 관직, 이름, 자(字), 본(本), 관(官), 부(父)의 관직 성명 등 좌목(座目)을 적는다. 계회 참가자들의 생존연대, 혹은 실제 계회를 개최한 연도에 간기(干紀)가 있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계회도는 회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관원들의 계회는 백 수십에 이르는데,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도 포괄적인 범위에서 볼 때 여기에 속한다. 화면(畫面) 맨 위에 예서체로 ‘조라포남봉관해산도’라고 적었고, 화면 중앙에 집회가 열리는 조라포 남봉(수정봉)을 중심으로 크게 그렸으며, 좌우에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구조라리, 망치리와 거제해금강, 그리고 최상단에 대마도를 그려냈다. 이어 맨 아래 하단에는 참석한 관리들의 좌목(座目)을 차례로 적었다. 조라포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의 항구로 수군진영의 기지(基地)였다. 비록 모임이 열린 구체적인 연도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좌목(座目)의 첫머리에 나온 류영립(柳永立, 1537~1599)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한 기간이 1586∼1587년이므로 이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판단된다. 1586~1587년 사이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이 관찰사로 부임한 후 예하 군현 수군진영 등을 수행원과 순행하다가 경남 지역에서 합류한 예하 무인, 관원과 함께 거제도 조라포 남봉(수정봉)에 올라, 해가 뜨는 시점에 조찬을 겸해서, 행한 행사를 그린 것이다.

 

 

3) <조라포남봉관해도> 그림 분석(分析)

‘조라포남봉관해도’는 옛 조라(助羅) 수군 진영에 경상도관찰사 유영립이 경상우도를 순시(巡視)하던 중에 여러 분들과 現 구조라 수정봉에 모여 바다의 일출을 보며, 조찬(朝餐)을 겸해 국가에 대한 충성과 굳건한 해안방어에 대한 관찰사의 서약을 다짐하는, 일종의 하례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당시에 참석했던 주요인물들이 조라성(助羅城) 위, 남봉(南峰) 現 수정봉에서 만찬과 더불어 풍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 그림에 역력하다. 이에 그림의 품격에서 알 수 있듯, 전문적인 화공이 그린 것이다. 조선초중기 여타 계회도(契會圖)나 회맹도(會盟圖), 기영회도(耆英會圖)에서 보이듯, 중앙 상단에 천막을 치고 여러 관원들이 좌우와 아래쪽에 나열해 있으며, 악사가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전체 약70명 정도의 인물을 그려 넣었다. 상단 천막 아래는 탁자와 술동이, 화로, 식사와 안주 식탁 등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묘사되어 있고 아래에는 군졸들이 일렬 반원형으로 나열해 있다. 그 뒤로 6~7명의 병사가 일렬로 서 있는데 그 중 2명은 경상도 관찰사의 군기(軍旗)를 세워 붙잡고 있으며, 나머지는 긴 삼지창(三枝槍)을 세워 위엄을 과시한다. 말(馬)은 총 12필이 그려져 있고 모두 한명씩 하인이 고삐를 잡고 있으나 그림 제일 아래쪽 말 한필은, 하인이 고삐를 놓친 사이에 서쪽 망치마을 쪽으로 달아나고 있다. 말 뒤에서 쫓아가는 하인의 익살스런 모습에서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그리고 그림에서 구조라 성곽 서편 산길을 따라 말(馬)이 줄지어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조라성(助羅城) 옆길로 통해 남봉 수정봉으로 올라간 그림속의 그 길은, 지금도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산 아래 왼편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인 조라성(助羅城)인데 지금은 성곽을 보수 재건하여 잘 단장해 놓았다. 조라성 아래쪽 정문(북문)에는 청심루(淸心樓)라는 성루이다. 출입구는 원형의 성문(城門)인데 아치형 육축(陸築)을 쌓고 판문을 달았으며 위에는 청심각(淸心閣) 누각건물을 건축하니 성곽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청심루(淸心樓) 명칭은 1581년 경상도관찰사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이 경상우도를 순행하며 지은 시편에서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성곽 위 흰 분첩을 바른 듯한 성가퀴가 줄이어 있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조라포 성곽 제일 높은 곳인 위쪽에 남문이 보이며 동서남북 성문 중에 동문만 성문(城門)이 보이질 않는다. 또한 성내(城內) 관아(官衙) 건물이 총 6채가 보이는데 객사 내아 사령청 군기고 등등이 □자 형태로 빙 둘러 들어서 있다. 성 내부 위쪽에는 잡다한 건축물 2채가 보이는데 이는 사졸들의 숙소나 기타 창고일 것으로 추정된다. 現 해양경비센터 출장소가 위치한 인근 바닷가에 선소(船所)가 보이는데 전선(戰船) 2척이 정박되어 있다. 선소에는 선박 시설물 추깡이 양쪽으로 나열되어 있고 밧줄로 단단히 배를 고정시킨 모습이 인상적이다. [現在 조라포 해안이 많이 매립이 되어 있다.]

관해도(觀海圖) 양면을 살펴보면, 왼쪽 하단에는 와현 해수욕장의 백사장이 보이고 위쪽으로 내도 외도 섬이 있고 마지막으로 現 서이말 등대 산줄기가 그려져 있다. 또한 중앙 하단의 섬은 現 윤돌섬(윤돌도, 윤교리도)이고 오른편 하단은 일운면 망치마을이며, 오른쪽 제일 위쪽 섬 그림에, 現 거제해금강 ‘갈도‘ 섬과 ’사자바위‘를 그려놓았다. 또한 그림의 최상부에는, 수평선과 나란히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표현하였고 그 사이 왼쪽(동남쪽) 부분에서, 부상(扶桑)의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실제로 구조라 수정봉에서 해마다 정월 초하루 일출 행사를 지금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587년 초봄일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라 수정봉에 서서 대마도 북섬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면, 늦가을에서 초봄까지인데,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의 의복과, 산 위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점, 그리고 관찰사가 한겨울에는 순행하지 않는 점은 물론, 1581년 관찰사 홍성민이 음력2월초에 거제도를 순행했던 사례로 보아, 1587년 음력1월~2월초 사이가 가장 타당한 시기로 보인다. 1586년 초봄은 관찰사 유영립이 부임한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여러 고을에 통신문(通信文)을 보내고, 당시 몇 달에 걸쳐 순행하던 행장을 꾸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일출장면을 보고 소원을 빌면서, 신년하례식을 겸해 여러 관리들과 만찬을 즐긴 것으로도 추정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관찰사 홍성민은 순시선(巡視船)을 타고 경남 여러 수군진영을 시찰(視察)하며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반면에, 유영립(柳永立) 관찰사는 거제도의 지형과 산길의 특성 上, 말을 타고 다닌 점과 동회도(同會圖)를 그려 13명이 나누어 가진 점이 서로 다르다. 덧붙여 유영립 관찰사는 창원에서 고성군을 거쳐 견내량을 건너와 오양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거제읍치 고현성에서 여장을 풀어놓고, 거제도 수군진영을 둘러보았다. 한편으론 조선시대 행차나 행사 그림이 그러하듯, 사건의 주제와 인물 중심으로 크게 그려 표현한 점에서 특별히 다른 그림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찾기란 사실상 어렵지만, 부상(扶桑)의 동쪽 대마도를 배경으로 일출 장면을 묘사한 점은 물론, 고위층 지방 관리가 순시하던 차에 남해의 어느 수군진영 뒷산에서 일출을 보며 회동을 한 그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해상일출 고화(古畵)로써 인정된다. 어찌되었건, 현재까지 거제도를 배경으로 묘사한 그림으로는[지도(地圖) 불화 제외] 가장 오래됐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겠다.

 

 

4) <조라포남봉관해도> 좌목(座目)에 따른 분석(分析)

관해도(觀海圖) 좌목(座目)에 기록된 현직(現職) 인물들의 직책을 분석해 보면 당시 이 그림속의 여러 형편을 추정할 수 있다. 1586년~1587년경,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이 좌장(座長)으로 경상감영을 출발할 때, 훈련원판관 김옥(金玉), 前동부주부 성취(成鷲), 前사헌부감찰 박몽득(朴夢得), 권지(權知, 임시직)병절교위 김태허(金太虛), 권지(權知)효력부위 김명윤(金命胤), 前사헌부 무관 정대현(鄭大賢), 학생(學生) 김선각(金先覺) 등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영립(柳永立) 일행이 경남 지역 역로(驛路)을 따라 순시(巡視)하다가, 경남 창원시 자여역(自如驛)에 도착하였다. 창원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태형(李泰亨)이 근무하고 있었고 자여역에는 이정(李瀞) 찰방(察訪)이 통솔하고 있었다. 창원시 경상우도병마절도영(慶尙右道兵馬節度營) 성내(城內) 객사에 머문 자리에서 많은 지역민들이 환영해 주었는데 그 중에 창원향교 김응룡(金應龍) 훈도와 권지(權知)여절교위 제말(諸沫)이 참석하였다. 이들 모두가 경남고성군 배둔역을 거쳐 고성읍치에서 하룻밤 머문 후에 거제도 견내량을 건너 오양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거제시 고현동 거제읍성에 집결한 것으로 보인다. 읍성 고현성(古縣城)에서 여장을 푼 후, 거제현령 이천문(李天文)이 조라진영 만호(萬戶)에게 연락해 아침 일출을 맞아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관찰사 일행은 거제현령 이천문의 안내를 받아, 조라포 남봉(南峰 現수정봉)에서 일출을 보며 경상감영에서 함께 온 관리들과 경남 창원에서부터 수행한 이들, 그리고 거제도 여러 분들과 더불어 탁 트인 남해 해산(海山)에서, 조찬(朝餐)을 겸해 조촐한 행사를 행하는 장면이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이다. 이후 거제도 일운면 조라포(助羅浦) 수군진영을 둘러보고 되돌아갔다.

 

 

5)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 좌목(座目)>

◯ 좌목(座目) 순서(順序) : 참석자 관직, 이름, 자(字), 본관(本官), / 부(父)의 관직, 이름.

 

(1) 유영립(柳永立) : 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유영립, 입지, 전주인(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柳永立 立之 全州人) / 부(父) 증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성균관사행, 통훈대부의정부사인 겸 춘추관 편수관 감(父 贈嘉善大夫吏曹參判 兼同知 經筵成均館事行 通訓大夫議政府舍人 兼 春秋館編修官 堪)

(2) 이태형(李泰亨) : 절충장군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태형, 통중, 고성인(折衝將軍慶尙右道兵馬節度使 李泰亨 通仲 固城人) / 부(父) 증가선대부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성균진사 예원(父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兼同知 義禁府事成均進士 禮元)

(3) 김응룡(金應龍) : 가도사권지 성균관학유 행창원훈도후임랑, 김응룡, 시견, 의성인(假都事權知成均館學諭行昌原訓導後任郞 金應龍 時見 義城人) / 부(父) 성균생원 담수(父 成均生員 聃壽)

(4) 이정(李瀞) : 선무랑자여도찰방, 이정, 사결, 덕수인(宣務郞自如道察訪 李瀞 士潔 德水人) / 부(父) 통훈대부행장례원사의, 원복(父 通訓大夫行掌隷院司議 元福)

(5) 이천문(李天文) : 선의랑수 거제현령 김해진관 병마절제도위 겸 감목, 이천문, 경질, 경주인(宣議郞守巨濟縣令金海鎭管兵馬節制都尉 兼監牧 李天文 景質 慶州人) / 부(父) 통덕랑행무안현감, 관(父 通德郞行務安縣監 灌)

◯ 군관(軍官)

(6) 김옥(金玉) : 통훈대부훈련원판관, 김옥, 백온, 순천인(通訓大夫訓鍊院判官 金玉 伯溫 順天人) / 부(父) 통훈대부행고원군수, 근(父 通訓大夫行高原郡守 瑾)

(7) 성취(成鷲) : 어모장군전행동부주부, 성취, 양중, 창령인(禦侮將軍前行東部主簿 成鷲 揚仲 昌寜人) / 부(父) 학생, 봉의(父 學生 奉儀)

(8) 박몽득(朴夢得) : 조산대부전행사헌부감찰, 박몽득, 경열, 울산인(朝散大夫前行司憲府監察 朴夢得 景說 蔚山人) / 부(父) 통덕랑전의영고봉사, 서(父 通德郞前義盈庫奉事 犀)

(9) 김태허(金太虛) : 권지훈련원봉사 겸 절교위, 김태허, 중혼, 광주인(權知訓鍊院奉事秉節校尉 金太虛 仲混 廣州人) / 부(父) 학생, 희증(父 學生 希曾)

(10) 김명윤(金命胤) : 권지훈련원봉사효력부위, 김명윤, 경찬, 상주인(權知訓鍊院奉事效力副尉 金命胤 景纘 尙州人) / 부(父) 父 통훈대부제용감첨정, 한(通訓大夫濟用監僉正 漢)

(11) 제말(諸沫) : 권지훈련원봉사여절교위, 제말, 이원, 칠원인(權知訓鍊院奉事勵節校尉 諸沫 而源 漆原人) / 부(父) 학생, 필강(父 學生 弼岡)

(12) 정대현(鄭大賢) : 어모장군충무위상호군 전내금위, 정대현, 희성, 하동인(禦侮將軍忠武衛上護軍前內禁衛 鄭大賢 希聖 河東人) / 부(父) 선략장군충무위부사직, 숭의(父 宣畧將軍忠武衛副司直 崇義)

(13) 김선각(金先覺) : 학생, 김선각, 안동인(學生 金先覺 師尹 安東人) / 부(父) 정략장군충순위, 찬(父 定畧將軍忠順衛 鑽)

 

6) <좌목(座目)> 인물 약력

(1) 유영립(柳永立 1537∼159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字)는 입지(立之), 호는 사송헌(四松軒), 헌(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구(世龜)이고, 아버지는 사인 유감(柳堪)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윤무(允武)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사인(舍人)·지평(持平)·영변판관·보성군수·철산군수·공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582년 종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탕개(尼蕩介)의 난으로 1만여 명의 야인이 침입하자, 우후 장의현(張義賢), 판관 원희(元喜) 등과 이를 막으려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그 책임으로 하옥되었다. 곧 풀려나 승지·개성유수를 거쳐 1586년 경상도관찰사, 1588년 전라도관찰사, 1591년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 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뇌물로 매(鷹)를 바치고 탈출,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곧 복직되어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86~1587년 당시 가선대부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부(父)는 유감(柳堪), 증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성균관사행, 통훈대부의정부사인 겸 춘추관 편수관(父 贈嘉善大夫吏曹參判 兼同知 經筵成均館事行 通訓大夫議政府舍人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2) 이태형(李泰亨 1527년~?)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자(字)가 통중(通仲), 본관은 고성(固城), 관직은 강계부사(江界府使)‧해주목사(海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588년(선조 21) 강계부사로 재임하고 있었는데, 북쪽 변경이 불안한 상황에서 이태형(李泰亨)의 나이가 너무 많아 평안도 강계를 책임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언신(鄭彦信)의 의견이 개진되었고, 젊은 문관과 무사(武士)가 파견되면서 후방으로 밀려났다. 해주목사로 재임하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군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훈련이 덜된 군사를 전장에 보내었다가 전 병력을 잃는 과오를 범하였다. 또 그동안 튼튼하게 방비해오던 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쉽사리 왜적들에게 성을 내주었다. 이러한 죄로 종전 후 국문(鞠問)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잉임(仍任)이 청해져서 국문을 당하는 일은 면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의 과오가 계속 문제시 되어 추국 상소가 이어졌고, 끝내 서울로 압송되게 되었다. 압송 중에 마차(馬車)를 타고 여유를 부렸으며, 편한 곳으로 정배(定配)되게 위해 청탁을 하다가 반발 여론이 들끓어 끝내 파직되었다. 정배 중이던 1593년(선조 26)에도 임진왜란에서의 과오가 거듭 문제시되었고, 왜적에 대항해 싸워야 할 백성들의 의자를 꺾은 장본인이라며 죄에 비해 벌이 가볍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1586~1587년 당시 절충장군경상우도병마절도사(折衝將軍慶尙右道兵馬節度使), 부(父)는 이례원(李禮元)으로 증가선대부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성균진사(父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兼同知 義禁府事成均進士)이다.

 

(3) 김응룡(金應龍)은 자(字)가 시견(時見), 본관은 의성(義城), 1586~1587년 당시 가도사 권지 성균관학유(假都事權知成均館學諭) 및 경남 창원훈도 후임랑(昌原訓導後任郞)이었고 부(父) 김담수(金聃壽)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다. 1594년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1595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 1603년 별감(別監) 등을 역임했다.

 

(4) 이정(李瀞)은 자(字)가 사결(士潔), 본관은 덕수(德水), 1586~1587년 당시 경상남도 창원의 자여역(自如驛)에서 선무랑자여도찰방(宣務郞自如道察訪)을 지냈고, 부(父) 이원복(李元福), 통훈대부행장례원사의(通訓大夫行掌隷院司議)이었다. 이후 이정(李瀞)은 임진왜란 時, 사근찰방(沙斤察訪)을 지냈다.

 

(5) 이천문(李天文)은 자(字)가 경질(景質), 본관은 경주(慶州), 1593년 금산군수(錦山郡守), 1595년 5월 파총(把摠), 10월 천총(千摠), 1603년 별장(別將), 1604년 함경남도 우후(虞侯), 1606년 경상도 좌수사, 1608년 8월 행부호군(行副護軍)을 역임했다. 1586~1587년 당시 선의랑수 거제현령 김해진관 병마절제도위 겸 감목(宣議郞守巨濟縣令金海鎭管兵馬節制都尉 兼監牧)이었고, 부(父)는 이관(李灌)으로 통덕랑행무안현감(通德郞行務安縣監)을 지냈다.

 

<군관(軍官)>

(6) 김옥(金玉)은 자(字)가 백온(伯溫),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종5품 외관직 통훈대부훈련원판관(通訓大夫訓鍊院判官)이고 부(父)는 김근(金瑾)으로 통훈대부행고원군수(通訓大夫行高原郡守)를 지냈다.

 

(7) 성취(成鷲)는 자(字)가 공중(公仲) 또는 양중(揚仲), 본관은 창녕(昌寧), 동래출신이다. 부(父)는 학생(學生) 성봉의(成奉儀) 또는 성봉의(成鳳儀)로 건공장군(建功將軍)이었다. 성취(成鷲)는 선조(宣祖) 5년(1572) 임신(壬申) 별시2(別試) 병과(丙科) 1위(16/52)로 무과에 급제했다. 1586~1587년 당시, 관서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던 종6품 어모장군전행동부주부(禦侮將軍前行東部主簿)였다.

 

(8) 박몽득(朴夢得)은 자(字)가 경열(景說), 본관은 울산(蔚山), 1586~1587년 당시, 조산대부전행사헌부감찰(朝散大夫前行司憲府監察) 종4품이었고 부(父)는 박서(朴犀)로 통덕랑전의영고봉사(通德郞前義盈庫奉事)를 지냈다. 1595년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근무하다가 1597년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역임했다.[죽계일기(竹溪日記)]

 

(9) 김태허(金太虛 1555∼1620)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보(汝寶) 또는 중혼(仲混), 호는 박연정(博淵亭), 아버지(父)는 좌찬성 김희증(金希曾)이다.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 옥포만호(玉浦萬戶)가 되었다. 인품이 충직 순박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밀양성이 함락된 뒤 밀양부사로 임명되어 분전하였다. 이어 울산군수로 전임되고, 울산성 전투에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와 큰 전공을 세워 당상관에 올랐다. 1599년 성주목사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8년 행부호군(行副護軍)에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오위도총부도총관·호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1586~1587년 당시, 권지훈련원봉사 겸 절교위(權知訓鍊院奉事秉節校尉)였다.

 

(10) 김명윤(金命胤)은 조선 중기 창원 출신의 무신으로 본관은 상산(商山, 尙州), 자(字)는 경찬(景纘), 호는 동산(東山). 아버지는 김한(金漢)이고, 어머니는 감찰을 지낸 이옥성(李玉成)의 딸로서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김명윤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석산리에 살았다. 1583년(선조 16)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1584년 사헌부감찰에 이어 선전관이 되었으며, 1585년 훈련부정에 이어 인동(구미)부사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 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1년 돌아와 일본의 풍토·민요·풍속과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을 그림 그리듯이 기록하였는데, 선조가 김명윤의 글을 보고 곧 파주목사에 제수하였다. 파주목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온 힘을 다 썼다. 1594년 파주목사에서 충주목사로 재임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성을 포위하자 이를 크게 물리쳤다. 1599년 진주목사가 되었고, 1602년에는 홍주목사가 된 데 이어 제주목사가 되어 1604년 임기를 마쳤다. 1605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그 뒤 창원으로 돌아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586~1587년 당시, 권지훈련원봉사효력부위(權知訓鍊院奉事效力副尉) 종9품 무관이었고 부(父)는 통훈대부제용감첨정(通訓大夫濟用監僉正)을 지냈다.

 

(11) 제말(諸沫 1567~1593)은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 창원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이원(而源)이다. 아버지는 필강(弼岡) 제조겸(諸祖謙)이고, 어머니는 창원 황씨이다. 제말(諸沫)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총부수문장(摠府守門長)을 역임하였다. 신장이 8척이나 되는 거구이면서도 몸이 날래어 비장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조카 홍록(弘祿)을 비롯한 67명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웅천, 김해, 정암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곽재우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고령, 성주가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주둔해 있던 왜군을 격파했다. 이후 성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조카 홍록과 함께 제씨 쌍충지(諸氏雙忠趾)를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장이었다가 1812(순조 12)에 받은 충의(忠毅)로 바뀌었다. 묘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다구리 옥녀봉에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동 서문 고개의 쌍충비에 기록되어 있다. 옥천 충절사에도 제향되었다. 1586~1587년 당시, 제말(諸沫)은 권지훈련원봉사여절교위(權知訓鍊院奉事勵節校尉) 종6품 무관이었다.

 

 

(12) 정대현(鄭大賢)은 자(字)가 희성(希聖),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1586~1587년 당시, 어모장군(禦侮將軍) 충무위 상호군(忠武衛上護軍) 정3품 무관이었고, 전(前)에 내금위(內禁衛)에서 근무했다. 부(父)는 정숭의(鄭崇義), 선략장군충무위부사직(宣畧將軍忠武衛副司直) 종4품을 역임했다.

 

(13) 김선각(金先覺)은 자(字)가 사윤(師尹), 본관은 안동(安東), 출신지는 충남 천안시 목천(木川)이고, 5형제 중에 막내동생 김문각(金文覺 1571~?)은 자(字)가 여림(汝林)이었다. 1586~1587년 당시에는 학생(學生)이었다. 부(父)는 김찬(金鑽)으로 적순부위(迪順副尉) 충순위(忠順衛), 또는 정략장군 충순위(定畧將軍忠順衛) 무관이었다.

7) 참고 : 경상도관찰사 홍성민(洪聖民) ‘거제시 구조라(助羅) 포구(浦口)에서

홍성민(洪聖民 1536~1594)선생은 1581년 초봄, 경상도관찰사로서 웅천 안골포에서 순시선(巡視船)을 타고 가덕도 영등포(구영등) 수영지를 거쳐 율포(구율포) 옥포 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오아포(가배) 진영, 거제의 각종 누정과 각종 관아 건물(고현성), 명진리을 모두 순행하고 느낀 점을 시로 남겼다. 이후 통영 여러 수군진영을 둘러보고 고성, 진동을 거쳐 돌아갔다. 그 뒤 두 번째 거제 방문인, 1590년경 순행 때(時)에도 여러 편의 거제도 한시를 남겼다.

선생은 16세기 말엽 구조라성(助羅城) 진영의 초봄 어느 날, 삼면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바다와 조라성(助羅城) 청심각(淸心閣) 누각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시(詩) 한편을 짓는다. 바쁘게 변하는 봄날 해상의 변덕스런 날씨를 시각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표현했다. 당시 그 상황이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약430년 전의 광경이 언어에 의한 이미지·시각 등의 회화적(시각적) 요소에 의해,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짤막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감동적인 詩 임이 틀림없다.

 

(1) 조라포 청심각에서(助羅浦淸心閣)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滄溟三面亂山橫 넓은 바다 삼면에 수많은 산이 가로 놓여 있고

小閣高臨粉堞明 높게 위치한 작은 누각, 흰 성가퀴 밝게 빛나네.

海戍煙消春雨歇 변방 해상에 운무 사라지니 봄비 걷히고

風花無數撲行旌 무수히 날리는 가랑눈이 나열한 오색 깃발 때린다.

[주1] 성가퀴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장.

[주2] 청심각(淸心閣) : 구조라성 위쪽 작은 누각 이름.

 

◯ 맑은 봄날 햇빛에 일렁거리는 물결 빛이, 성곽 위 석회로 분칠한 성가퀴에 반사되어, 작가에게 기쁜 마음으로 눈짓 하는 것 같다. 1580년에 조라성에 왔다가 이번 11년 만에 다시 방문한, 조라(구조라)성의 멋진 봄 풍경에,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작가의 심정을 나타냈다. 그리고 구조라 城에는 누각의 현판에 적힌 "청심각"이 있고, 성곽 둘레에 오색 깃발이 걸려 있는 성 마루에는, 하얗게 석회로 바른 성가퀴가 성을 한 바퀴를 돌아 멀리서도 그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참 멋진 풍경이지 아니한가?

(2) 조라포운(助羅浦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거제시 일운면 조라성(助羅城)

煙花搖堞碧波明 성가퀴를 흔드는 봄날에 새하얀 푸른 물결이

靑眼還從海岳橫 정다운 눈짓으로 이어 따라와 바다와 산을 가로 지른다.

十一年回春二月 십일 년 만에 돌아 온 초봄 2월인데

天敎於此駐行旌 하늘은 어쨌든 줄지어 선 오색 깃발에 머물라 하네.

 

◯ 선조 32년 1599년, 정철·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구조라(助羅城) 성주(만호)로 부임해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사졸들이 유애비(遺愛碑,善政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이때 당시 만호란 벼슬은 녹봉이나 토지가 주어지지 않아 생활기반인 둔전도 대부분 권력자에게 빼앗겨 그의 생활은 궁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조라 유애비(遺愛碑) 내용은 '행만호박공인로유애비(行萬戶朴公仁老遺愛碑)'이며, 1600년 경자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흔적조차 없으나 당시 항리(구조라)마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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