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儒敎)의 근본 원리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있다. 즉 사서는 ‘논어•맹자•대학•중용’이고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이다.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은 사서삼경 모두를 통달하신 분이기는 하나, 특히 『대학(大學)』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아니면 제자들 교훈으로써, ‘대학’을 강조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남긴 서적(書籍)에는 ‘대학’의 내용에 나오는 글귀가 많이 남아 전한다.
현재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내에 정혼성(鄭渾性) 선생을 기리는 동록당(東麓堂)이 위치하고 있으나, 본디 동록당은 계해년 1863년(철종14년) 3월에 거제군 동부면 명진리 515번지에 최초로 건립했다가 광무10년 1906년 거제군 거제면 동상리 367번지로 이건(移建)하였다. 2013년 반곡서원이 새로이 복원되기 전에는 동록당의 현판(懸板)에, 동록당(東麓堂), 명덕재(明德齋), 도남문(道南門)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는 계해년 1863년, 1881년 등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직접 적은 현판들이다. 동록(東麓) 선생이 돌아가신지 80년 되던 1923년에 선생의 학문을 기리자는 거제유림들의 사론(士論)이 일어나, 명덕재(明德齋)를 새로이 중건하였으나, 지금은 ‘동록당’만 반곡서원 內 ‘우암사’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명덕(明德, 밝은 덕을 밝히자)‘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선생이 『대학(大學)』의 성의정심(誠意正心)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제자들에게 많이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능히 덕을 밝힌다.(克明德)”하고 “이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顧諟天之明命)”하고 “능히 큰 덕을 밝힌다.(克明峻德)”한 것은 모두 명명덕(明明德)의 뜻을 말한 것이다. 특히 약 200년 전, 선생이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던 <대학도도(大學道圖)> 즉, ’큰 배움의 길을 나타낸 도표(圖表)‘는 『대학(大學)』의 내용을 하나로 집약해 놓은 것으로 아직도 그 형태가 전해지고 있다.
『대학(大學)』의 첫 장에, "만물에는 그 근본과 끝이 있으니 만사 또한 그 시작과 끝이 있다.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야 도(道)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이 말은 자신의 인격을 닦은 연후에야 백성을 다스려야한다는 유교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릇 본말(本末)과 종시(終始)라는 것은 사람이 근본도리를 잘 지켜서 해야 할 바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근본이라는 것은 인간이 실천해야할 기본 도리이고 앞서고 뒤설 것을 안다면 길은 가깝다고 하였다. 또한 『대학(大學)』의 본문에는,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고 재신민(在新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니라. 즉,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나치지 않는 선에 머무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大學)』은 오늘날에도 유용한 자기 계발경영서라고 말한다. '대학'의 목적은 '나의 능력을 계발하여, 세상 사람들을 새롭게 변화시켜,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3강령 8조목 중 '내 안에 위대한 가능성을 끌어내라, 명덕(明德)' '어떤 존재든 그 실체를 규명하려면 먼저 다가가라, 격물(格物)' 모두 현대인들에게 유효한 조언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이란? 대상으로부터 몰입하고 무지로부터 해방하여 나를 속이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아가자는 의미이다. 현대적 의미로써 한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 기능의 문제인 금전과 권력의 세속적인 천박함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소중한 가치창출에 집중하라. 자아탐구에 치우치지 말고 자아창조를 하라. 자신만의 가치로 자신을 새로이 창신(創新)하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인간이 비록 지구의 한 고등생물체일 뿐이기는 하나, 가치창조와 의미부여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이며, 또한 인간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의 가르침으로 점화(點化)하여 광채를 내는 것이다.’ 또는 ‘폐와 간을 보는 듯하고 내면이 성실하면 겉으로 드러난다(如見其肺肝然 誠於中形於外)’의 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大學)』의 3강령(綱領) 8조목(八條目)을 수행 달성하기 위해, 자기(自己)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지지(知止)’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한 상황을 인식하여, 이를 ‘수행해 나가는 5가지가 항목’으로, ‘목표를 설정하고(有定), 일에 집중 몰입하며(能靜), 내 자신이 안정되고(能安), 사고가 깊어져(能慮), 성과가 달성(能得)된다.’였다. 이는 동록(東麓) 선생이 <대학도도(大學道圖)>를 통해 문하(門下)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계발을 경영하라고 가르친 핵심적인 교훈이었다. 목표 수행 6단계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지지(知止)> 유정(有定)> 능정(能靜)> 능안(能安)> 능려(能慮)> 능득(能得)이다.
1) 『대학(大學)』의 독해(讀解)
주자(朱熹)의 성리학(性理學)은 우주와 인간이 같다는 기초에서 시작한다. 우주가 구동하는 원리를 천리(天理)라 하고 인간을 구동하는 원리를 인성(人性)이라 설정했다. 하늘의 리(理)과 인간의 성(性)은 이름만 다르지 원래 같은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리(理)와 성(性)을 공부하는 학문을 성리학(性理學)이라 했고 인간이 가지는 우주적 사고를 이성(理性)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대학(大學)』은 BC 43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정치철학과 학문을 직접 연결한 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원래는 『예기(禮記)』 제42편이었는데 주자(朱子)가 그것을 따로 떼어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어 주석하였다. 경(經)은 공자의 말씀을 증자가 기술한 것이고 전(傳)은 증자의 뜻을 그 제자가 기술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대(漢代) 유가(儒家)의 공동저작이 통설이다. 『대학(大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서 유가사상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내용이라 평가된다.
『대학(大學)』의 내용 요약인 3강령(綱領) 8조목(八條目)은, 첫째 명덕을 밝히는 것(明明德), 둘째 백성을 친애하는 것(親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新民), 셋째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 이 3가지를 3강령(三綱領)이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덕을 닦는 근본 이치인,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따져 밝히다), 치지(致知 사물의 도리를 깨달아서 알기에 이름), 성의(誠意 진실 되고 정성스러운 뜻), 정심(正心 마음을 곧고 바르게 가짐), 수신(修身 마음을 착하게 하고 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 마음과 몸을 닦음), 제가(齊家 집안을 바르게 다스려 바로잡음), 치국(治國 나라를 다스림), 평천하(平天下 온 세상을 평안하게 다스림)가 8가지 조목이다.
주자(朱子)의 『대학(大學)』은 일반적으로 대인(大人) 즉 귀족(貴族), 위정자(爲政者)의 학(學)이라 하나, 단지 지식계층의 학(學)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선언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명덕이 있는 사회, 백성을 친애하는 사회, 최고의 선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계의 건설이다.
『대학(大學)』에서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이 8조목인데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순서다. 이 순서가 반드시 옳은 것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학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은 개인(個人), 가(家), 국(國), 천하(天下,世界)는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수양과 해탈도 전체 체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수양과 해탈에 가장 근접한 조목이 성의(誠意) 정심(正心) 그리고 수신(修身)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체과정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대학(大學)』은 3강령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사회상과, 8조목으로 선언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통일적 인식에, 그 핵심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2)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의 『대학(大學)』 강독(講讀)
대학(大學)의 글을 별도의 항목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경(經)에서 전하는 바, 강한 조정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며, 격치(格致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지식을 얻다) 또한 필요치 않다. 부질없이 근본(本)과 말단(末)만 더하지만 의구한 근본(本)만 읽어 질서정연한 조리가 있으니 자연히 서로를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말한 바에 따라, 자신을 알고 그칠 줄 알면 안정을 취하게 되니,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앎의 확장은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따져 밝히다)에 달려 있고 사물이 이른 다음에야 앎에 이른다. 거기에는 강령과 조목이 있는데,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먼저하고 나중할 것이 있다.”는 말단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외물을 묶여 놓고 이르길, “이를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하고 이를 일러 지식이 지극하다고 한다.” 편(篇)의 머리로부터 여기까지는 격치(格致)를 해석하는 이유가 아니다. 소위 이로부터 뜻을 성실하게 한다고 다투어 논쟁하는 것은 그쳐야한다. 이를 일러 근본(本)을 안다고 하니 모두 성의(誠意)로써 해석하고 행하라. 이는 첫 번째 문제해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 중에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며(新民)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至善)을 삽입하라. 세 가지 조목이라는 것은 대개 훌륭한 덕(盛德)을 접(接)하여 지극한 선(至善) 아래에 머물고 문리(文理)를 스스로 이어가 끝도 없는 말의 의미(意味), 그 뜻(意)에 정성(誠)을 다하려 하는 것이다. 고로 훌륭한 덕은 지극한 선(至善)에 이르는 것이다. 백성은 효험(效驗)을 잊지 못한다. 그 공부에는 반드시 성의(誠意)가 있어야한다. 이후에는 밝은 덕을 밝히어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게 된다(3綱領). 송사를 처리함에 모두 지극정성을 다하라. 한 구절이라도 모이면 논쟁의 땅이 되어 버린다. 끝내 변하지 않는 단안(斷案)은 듣지 못했다. 대개 모두가 완전하지 못하니 그 말이 숨어 버린다. 그 선하지 못한 자를 함께 막고 감추고자 하는데, 실제와는 달리 소인은 핑계를 자꾸 지어낸다. 더불어 평민들은 두려워 복종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는 성의(誠意 진실과 정성)라고 할 수 없다. 평민(下民)과 소인(小人) 또한 그러하다. 고로 그 무익함이 드러난다.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고 우리의 성의(誠意)로써 확충해야 한다. 그 무정함으로 인해 천하의 사람들은 사리의 맞음과 틀림에 따른 한 부분을 두려워한다. 이로 인해 자기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각기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신중하고 경계하라. 이로써 그 명덕(明德)을 밝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말로써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마음부터 정성을 다해 백성에게 다가가라. 옛 말씀에, “근본을 알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더하여 백성을 위하는 것이 근본이다.” 새도 돌아갈 곳을 아는 것과 같다.
경(經)에서 이르길, "만물에는 그 근본과 끝이 있으니 만사 또한 그 시작과 끝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만사가 그러하다하였다. 시(詩)의 만물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붙일만한 것을 뉘가 만물이 어긋난다하랴. 만물은 ‘의·심·신·가·국·천하(意心身家國天下)’와 끊을 수 없다. 가히 뉘가 만사가 어긋난다하랴. 만사는 ‘성·정·수·제·치·평(誠正修齊治平)’에 막중하다. 마땅히 근본과 시작(本始)은 먼저 할 것이요, 끝과 마침(末終)은 뒤에 할 것이다. 이른바 격물(格物)이 아니겠는가. 이는 대학(大學)의 덕(德)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지선(至善)이고, 세 번째로 지선(至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道)로써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이치(格物)로 돌아가 구명함이 일곱 번째요, 여덟 번째로 격물(格物)이 옳지 않음이 아니라 앎(知)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런즉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있다(앎을 지극하게 함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함에 있다). 나의 앎을 지극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본말(本末)에 따라야 하며 격(格)은 선후(先後)에 따라야한다.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천하 만물을 연구하게 하랴마는 너무 넘치고 방랑하여 흐릿하다면 그칠 줄도 알아야한다. 요순(堯舜)시대 지혜로도 만물에 두루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먼저 할 일을 급하게 서두른 까닭이다. 이와 같이 그 선후와 완급의 순서를 또한 알 수 없다면, 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일, 근본이 되는 직무에다 가장 궁한 것에 따른다면 여러 사물의 도리로써 거의 사실에 가깝지 않겠는가.
[大學之書不須別立經傳不可强闕格致不必剰添本末只依舊本讀之井井有條理自相貫通其曰知止而后有定曰知所先後曰致知在格物曰物格而後知至其於綱領條目先後本末無不言知而末又結之曰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自篇首至此非所以釋格致乎 自所謂誠其意者止聽訟之此謂知本皆以釋誠意而爲一篇之闗鍵其中插入明明德新民止於至善三條之釋者盖接盛德至善之下而自成文理意味無窮言其意誠故有盛德至善民不忘之效驗其工夫則必誠意而後乃有以明明德新民止於至善也 至於聽訟一節冣爲聚訟之地而終未聞有鐵案盖不得盡其辭與揜其不善者同是消沮閉藏而其實則有異小人之矯籂與下民之畏服耳然其不能誠意則下民亦小人故知其無益而必愼其獨推我誠意而慴其無情使天下之人就曲直之一端而因其自知之明各誠其意於隱微之地以至於明其明德也 言欲明明德於天下必先誠其意於民也 故曰此謂知本誠意爲修身之本身又爲民之本 經曰物有本末事有終始事者則也 詩之物有則是也 可名者孰非物也 而物莫切於意心身家國天下可爲者孰非事也 而事莫重於誠正修齊治平於此鳥知其夲始之所當先末終之所當後者非所謂格物耶 大學之爲德者二而要在於至善而三之非至善不足以爲道爲目者七而歸在於格物而八之非格物不可以爲知矣 然則致知在格物者言欲致吾之知必須循其本末而格其先後之則也 豈使人日究天下之物而泛濫流蕩茫無止泊乎 堯舜之知而不能徧物者急於先務也 若不知先後緩急之序而舍切己之本務徒以窮庶物之理爲事則不幾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