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거제면 죽림포(대숲개) 마을은 거제도에서 옛 역사와 전통 풍속이 가장 많이 남아 전하는 유서 깊은 어촌이다. 넓은 해안에는 굴 가리비 종묘장과 죽림해수욕장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남해안별신굿, 수중묘, 할매미륵석불 등을 보유하고 있다.
거제현은 1644년 고현성에서 거제면으로 읍치를 이건하였고, 숙종(肅宗) 37년(1711) 거제도호부(巨濟都護府)로 승격(昇格)하면서 거제부사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직(兼職)하여 문무(文武)를 통할(統轄)하였고, 죽림포(竹林浦)에 어해정(禦海亭)을 두어 전선대장(戰船代將)이 전함(戰艦)을 상비(常備)하고 해군양성(海軍養成)을 하며 거제7진영 수군조련을 행하기도한 곳이다. 1899년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에 따르면, 죽림포에는 수진군기고(水陣軍器庫), 죽림포 해창(海倉)이 있었으며, 죽림포 누정으로 대변정(待變亭)과 제승정(制勝亭) 운주루(運籌樓)가 위치했다고 전한다. 거제부사가 주관하는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할 때에는 고을 백성들이 그 장관을 보기위해 죽림포 인근에 새벽부터 모여들어 수천 명이 구경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진주목(晉州牧)편에 의하면, ‘진주부에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과거 800년 전 명진현 시절에는 거제항 일대가 ‘명진포’로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1) 죽포 어가[竹浦漁謌] 거제면 죽림포 어부가 / 정혼성(鄭渾性 1779~1843)
水處長州擧網初 긴 섬의 물가에 그물을 처음 쳐놓으려고
庸庸蜃雨暮天疎 저문 하늘에 성긴 여우비 속에서 애를 쓰는구나.
笛中和曲能荒世 공허한 인간세상 피리소리에 가락을 맞춰보는데
却使詩肩(浞+耳)起余 갑자기 어깨에 의지한 나의 귀를 흡족하게 하네.
2) 죽림루[竹林樓](1) / 이학규(李學逵 1770∼1835)
江日亭亭隱一灣 강 위의 해는 우뚝 솟아 만(灣)속에 감추니
遊人猶自凭空欄 구경꾼은 스스로 빈 난간에 기대어 보는구나
百秊可使樓中住 한평생 일을 부리다 다락에서 머무는데
未必人間做好官 높은 벼슬에 올랐다하여 반드시 됨됨이가 좋지는 않다네.
● 이학규(李學逵) 선생의 낙하생집에 나오는 거제관련 한시들은 경남 김해 유배시절인 1810년과 1821년 거제도 지인인 유한옥의 집을 방문하여 남긴 작품들이다. 당시 거제부(巨濟府)는 김해진관(金海鎭管) 소속이었던 까닭에 김해유배객은 김해진관 소속의 지역에, 유배객을 일시 위탁관리 하기도 했다. [이배(移配)와는 그 의미가 달랐고 거제면에서 약 4년간 거주하였다]. 거제면 외간초등학교 입구 장군돌은 그의 거제유배 자취로 남아 전한다. 이에 이학규 선생은 고성통영은 물론, 거제시 거제면으로 자주 내왕할 수가 있었다. 또한 유달리 풍류와 시를 좋아했던 이학규선생이었고, 거제 유한옥(兪漢玉) 선비와는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사이였다. 또한 이학규 선생이 창작한 많은 시편 중에 바다의 물산 즉, 어패류 관련 작품은 거제도와 김해에서 체험한 작품이 함께 섞여 <낙하생집>에 실려 있어, 당시 19세기 초의 경남 해안지방의 물산(物産)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집이다. 선생이 남긴 거제 시편 중에는 '거제 기녀(기생)' '죽림포' '죽림루' '기성표고버섯찬가' '은적암(隱寂庵)' '정수사(淨水寺)' 등 수십 편의 작품이 있다. 거제도의 모든 형승을 아름답게 읊어준 선생께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3) 죽림루[竹林樓](2) / 이학규(李學逵 1770∼1835)
一曲朱欄枕碧流 한 굽이 붉은 난간 푸른 물을 베고 있어
行人指點竹林樓 행인이 가리키며 죽림포라네
管絃聲裏沉紅日 관현악 소리에 석양의 붉은 해 가라앉고
楊柳枝歬隱綠洲 버들개지 가지 앞에 푸른 물가 숨는구나
百尺元龍眞幷世 큰 다락에서 참으로 인간세상을 아우르고
万錢騎鶴屬同游 만전(万錢)에 학을 타고 함께 무리지어 노닌다네
佗時擬見岐城好 다른 때 언제 보아도 거제(기성)는 아름다워
名(西*水)千鐘畵鷁浮 소문엔 서쪽 물가에 천개의 종이 있어 익조(물새)화상이 떠다닌다네
不風流自缺風流 바람이 없어 자연히 흘러 풍류에 젖으니
始說名樓便詠樓 비로소 말하길 이름난 누각이 편영루라네
朙月幾回留畵壁 밝은 달이 몇 번이나 화벽(畵壁)에 머물고
綠蕪何處近長洲 푸른 풀섶 어느 곳이 가까운 장주(長洲)인가?
百秊未滿嗟吾老 한평생 만족하지 못해 늙어서 탄식하는데
一世相知羡爾游 그 때 서로 아는 사이라 너의 헤엄치는 모습을 부러워하겠지
十曲欄干千尺舫 열굽이 난간에 천 자(길이)의 배
常時魂夢此中浮 상시 꿈속의 넋은 이 가운데 떠다니네
[주] 백척원룡(百尺元龍) : 원룡은 동한 진 등의 자. 호기가 있는 사람. 허범이라는 사람이 찾아가니 그는 큰 침상에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백척원룡은 큰 다락을 일컬음.
● 특히 이학규가 유배생활을 하던 19세기 초는 조선왕조 세도정치로 국정은 극히 어지러웠고, 지방에서는 수령과 아전, 토호들의 착취가 날로 심해져 삼정(三政)이 문란하였으며, 그에 따라 백성의 생활도 도탄에 빠졌다. 선생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24년 동안(김해 거제 등) 유배 생활을 겪는다. 물론 그 역시 같은 배경 하에서 비참한 양반의 처지로 전락하였으며, 그의 집안 또한 정치적․경제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봉건 지배계급 내부의 심각한 모순과 갈등이 고질화함에 따라 소수의 문벌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 이 와중에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했던 이학규는 유배지에서의 체험에 기초하여 당대 사회 현실의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가짐으로써 부패한 관리들의 실정을 낱낱이 포착하고 기록해 나간다. 이는 조선조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 체감과 적극적인 문학 의식의 한 표명이었고 궁벽한 유배지에서 부른 ‘역사의 노래’였다.
4) 죽림마을 문화재와 설화
● 먼저 중요무형문화재인 <남해안별신굿>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대동굿의 일종으로, 동제가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것인 데 비해 다신을 모시는 제축적 성격이 강하다. 남해안별신굿은 경남 거제시를 중심으로 거제시 도서지방, 한산도, 욕지도, 사량도, 통영, 삼천포, 남해등지에서 이루어지는 이 지역 어촌마을의 공동제의이다. 이 별신굿은 제의를 중심으로 하는 축제적 기능, 통합적 기능, 정치적 기능, 종합예술적 기능 등 우리 고유의 신앙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별신굿은 예전 거제지역에서는 흔한 굿판이었으나 거제지역의 별신굿은 조선산업의 발달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1992년 공연을 끝으로 중단되어 오랜 세월 이어온 거제의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지난 2008년 정영만회장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던 죽림별신굿을 2년마다 공연하기로 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예전엔 거제도의 양화, 망치, 구조라, 수산, 도장포, 저구, 다대등 별신굿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띠배놀이와 탈굿(탈놀음)은 유일하게 죽림마을에만 있는 전통이다. 따라서 죽림의 별신굿은 반드시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띠뱃놀이는 억새풀로 배모양을 만드는 것인데 지금은 볏집으로 한다. 배모양으로 두 채를 만들어 각 배에 동네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후 그곳에 동네의 액운과 소원을 담아 말리 보내는 것으로 복을 두고 액운을 가져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다음으로 죽림마을 대숲개(竹林浦)의 '미륵당'에는 '할매미륵'이라 불리우는 '벅수(法首)‘가 있다. 할매미륵불은 마을과 바닷길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고 어선의 풍어를 바라는 일종의 신당 같은 역할을 했다. '미륵당' 앞바다의 물이 빠지면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할배벅수'를 힘들게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할배벅수'와 '할매벅수'는 조선시대의 수군水軍(海軍)들이 주둔 하였던 '어해정'禦海亭이 있었던 곳으로, '수군'의 운영에 필요한 병기(兵器)와 식량을 보관 하였던 대숲개의 '부두(埠頭)’에서, '할매, 할배 미륵'은 '수호신(守護神)의 역할과, '계선주(繫船柱 배를 매어두는 기둥)의 역할도 하였다. 또한 거제도7수군 진영의 전선이 모여 수군훈령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대숲개의 유명한 '곤발네 할매'이야기는, 1885년 고종 22년, 온 나라가 흉년으로 고통 받을 당시, 70평생을 오두막집에서 검소하고 외롭게 살면서도, 흉년이 들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어린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으로 '엿'을 만들어 '오줌장군'속에 감추어 두고, 마을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만 나누어 먹여, 어린생명들을 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곤발네 할매'는 매일 매일 치성(致誠)을 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 곳이 바로 '대숲개'의 "미륵당 돌벅수"라고 전하여 졌으며, 마을사람들은 이 돌'벅수'를 '할매미륵'이라고 한다. 돌'벅수'가 '계선주' 역할을 겸한 곳은 바닷가의 '포구'마을과 내륙의 강가(江邊)마을 '나루'터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외 거제도에 미륵전설로는 장목면 대금리 방골 부처바위, 거제면 내간리 미륵소골 돌미륵, 둔덕면 산방리 구절암(貴絶庵)의 미륵과, 통영용화사(統營龍華寺)의 포교소인 산방산 보현사(普賢寺), 거제면 오수리 미륵불당(彌勒佛堂), 거제 해금강의 미륵바위, 미륵이 도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일운면 지세포리 미조라(彌助羅) 등이 있다. 거제설화로는 '두더지 신랑고르기', '수중명당'에 미륵사상이 남아 전한다.
미륵하생, 용화세계, 천도(天道), 인내천(人乃天)은 우리민중의 염원이자 그 세계관이다. 만물에 내재하는 원인이 함께 통한다는 것, 지상정토를 이루는 개벽을 완성시키는 세상은 그야말로 '최고의 세계관'을 얻는 길이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중생과 중생이 화합하여 총체적 삶을 실현하는 문명인 것이다. 인간화와 하늘화 이것이 밑바탕이 되어야함을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런 미륵사상을 비롯한 고유문화는 현대사회에서 대중매체의 엄청난 홍수에 의해 이제 낯선 문화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옛날 선조의 가슴속, 미래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 마지막으로 죽림마을 여치끝에 ‘수중묘‘가 있다. 거제면사무소 자료에 따르면, 배귀임(1863~1948) 할머니는 생전에 남편과 금슬이 좋아 슬하에 6남 4녀를 두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는 것을 할머니는 안타까워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난 후 "조상인 듯한 분이 죽게 되면 마을 끝 바닷가인 '여치 끝'에 묘를 쓰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자신이 죽거든 꼭 그 곳에 묻어달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그 말을 한지 한두 달 뒤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에 놀란 자식들이 장례를 의논하게 됐다. 자식들이 "여치 끝에 묻어 달라"던 할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어머니의 생전 당부대로 여치 끝에 묘를 쓰자는 자식들과 파도에 유실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자식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드는 뜻에서 여치 끝에 묘를 쓰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자 손자들이 잇달아 태어났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죽림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조상이 꿈에 나타나 해안 끝에 묘를 쓰고 나자 자식이 없던 아들이 자식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자 죽림마을은 물론 자손이 귀한 집안과 금슬이 좋지 않은 아낙들이 할머니의 묘를 찾아 정성을 다해 기도한 후 자식을 얻고 금슬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최근까지 구전돼 오고 있다. 지금도 70여 년이란 세월과 세파 속에서도 할머니의 유골은 잘 보존돼 있어 후손들이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