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0:22 (수)
<거제도 대나무와 죽순을 읊다(巨濟島 詠竹與筍)>
<거제도 대나무와 죽순을 읊다(巨濟島 詠竹與筍)>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7.04.24 0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밭에서 자라는 대나무는 모두 한 가족처럼 30~40cm 땅 아래에 뿌리가 연결되어 있고, 세계적으로 자라는 죽순의 종류는 1천5백여 종에 이르며, 우리나라에는 그 중 3종류의 죽순이 재배된다. 가장 먼저 나오는 맹종죽은 4월 중순에서 5월 초순까지 자라고 이후에는 분죽이, 그리고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왕죽이 난다. 거제시 맹종죽은 밑동 지름이 20㎝ 정도인 죽순용 대나무다. 우리나라 맹종죽의 80% 이상이 거제에서 생산된다. 올해 경남 거제시는 거제 맹종 대나무 축제를 2017년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4일간 개최한다고 한다. 4월 29일 오후 2시 거제맹종죽 테마파크에서 개장식에 이어 벨리댄스, 꿈&꾼과 함께하는 음악회가 펼쳐지고, 색소폰 연주, 국악, 거제영등오광대공연 등 시민들의 재능기부 공연도 진행될 예정이고 죽순요리시식, 죽순수확체험, 지역 특산품 판매, 가훈 써주기, 페이스페인팅, 풍선아트, 추억 사진촬영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거제역사문화 관련 다양한 볼거리가 이어진다고 한다. 거제시민은 물론 관광객의 방문을 적극 권유한다.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지니고 있으며 속이 비어 있으나 곧게 자라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로 여겨왔다. '대쪽 같다'라는 말은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킨다는 것을 뜻한다. 동양권에서는 소나무와 함께 송죽(松竹)으로 부르는 대나무는 사군자와 십장생의 하나로서 귀하게 여긴다.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 五友歌>에 나오는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리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는 시조는 이러한 대나무의 지조와 절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김집(金集 1574~1656)이 대나무(竹)를 시제로 읊조렸다. “이미 굳은 절개 품었거니 눈서리 무서워할 까닭 있으랴. 사시장철 그 모습 그대로 떨어지는 것도 다시 피는 것도 없다네(已懷剛勁節 寧怕雪霜來 四時長不改 無落亦無開)”하였고, 조선 중기 문신 신흠(申欽 1566~1628)은 좋아하는 대나무 두어 그루를 옮겨 심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조용하고 조촐한 두어 그루 대나무야~ 묻노라! 너희들을 무엇 하려 심었겠나? 바람이 불어오고 서리가 내리거든,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의지하자는 것이란다(蕭條數竿竹 種爾問何爲 只是風霜後 相依我與伊)”

중국 문인 소식(蘇軾)의 ‘어잠승녹균헌시(於潛僧綠筠軒詩)’에 “고기 없이 밥 먹을 수는 있지만 대가 없이 지낼 수는 없네. 고기 없으면 사람이 여위지만 대 없으면 사람이 속되어지네. 사람이 여윈 건 살 찌울 수 있지만 선비가 속된 건 치유할 수 없다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하여 대나무를 통해, 마땅히 물욕을 경계하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고 마음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함을 강조했다.

 

시원한 대숲에 들어서면, 쏴쏴~찌찌~ 바람에 의한 대나무 소리가 귀를 청아하게 만들고, 오싹하게 후려치는 댓잎이 마음속의 온갖 상념을 씻어 주는듯하다.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의 온갖 아픔과 시름을 달래주던 대나무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염명(廉明)한 고고함을 일깨워주었으며, 깨끗한 절조(節操)를 다지는 신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옛날 바람 부는 대숲에 달빛이 부서지고 대숲의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니 정자(程子)가 이를 보고 말하길, “대숲에 바람이 불면 대숲은 무심(無心)한 상태로 느껴 반응한다.”하였다. 대나무의 속성은 바람이 불면 막 흔들리고 시원한 음향을 쏟아낸다. 하지만 바람이 멎게 되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고요해진다. 대나무는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서 할 뿐, 주관(主觀)이 개입되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 곧 올바른 감응(感應)이요, 무심(無心)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다음은 모두 거제도에서 거제도 대나무를 보고 읊은 작품들이다.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거제유배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용재(容齋) 이행(李荇) 등은 다음 시편을 통해 독야청청한 굳은 지조와 강직한 마음을 표현했다.

 

1) 운죽[雲竹] 구름 낀 대숲 /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淇園勁節見何辰 대나무의 굿굿한 지조를 어느 날에 보려나

不辨東風萬木春 봄바람도 분별 못하는 온갖 나무들의 봄일세

最是嚴威霜雪裡 가장 차가운 맹위를 떨치는 눈서리 속에서

靑靑犻也守天眞 독야청청하며 자연의 본성을 지키네

 

대나무는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차군(此君)'이라 일컬었고, 청색 바탕에 주옥처럼 아름답다고 '청랑간(靑琅玕)'이라고도 했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절개 강직함 지조를 상징한다. 죽순을 '용손(龍孫)'이라 하는데 '푸른 옥 묶음' 같다고 '창옥속(蒼玉束)'이라 부르기도 한다. 갓 돋은 죽순은 '금맹(錦繃)'이라 하는데, 당나라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죽순을 먹으니 열흘이 넘도록 고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전한다. 한마디로 ‘감미로운 별미’이다. 거제도는 옛날 화살용으로 사용되던 ‘시누대(신이대)’ 또는 ‘시릿대’ 와, 생활용품 공예품에 사용되던 ‘왕대’ ‘분죽(솜대)‘ 등이 있는데 죽순은 대부분 ‘왕대’ 죽순을 이용했다.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또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근죽(䈽竹)은 시쳇말로 왕대[王竹]란 것이고 담죽(澹竹)은 바로 솜대[綿竹]며 참대[苦竹]는 바로 오죽(烏竹)이다’한다.

 

● 김진규(金鎭圭) 선생이 1691년경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인근, 귀양살이한 배소 주위에는 대나무가 우거져있었다. 봄철 돋아나는 죽순(竹筍)을 보고, "온 땅에 비단무늬가 있는 물소뿔이 돋아나 용모와 풍미가 뛰어나고, 비단에 염색한 갖옷을 휘날리며 웃통을 벗은 듯하고, 속 바탕이 티 없는 흰 빛이라 옥을 깎아 세운듯하다. 강직함과 덕을 갖추니 스승의 길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2) 거제 죽순을 읊다(筍賦) 거제면 동상리 /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文犀滿地突爾出兮 온 땅에 비단무늬로 새긴 물소뿔이 솟아나더니

石壅土塡奮莫遏兮 돌이 막고 흙이 메워도 막힘없이 떨쳐 나온다

緗縹之裘纈以裼兮 비단에 염색한 갖옷을 휘날리며 웃통을 벗은 듯하고

內質精白若玉削兮 속 바탕이 티 없는 흰 빛이라 옥을 깎아 세운듯하다

一折不蘖立守死兮 한 번의 꺾임도 없이 똑바로 서서 목숨을 다해 지키니

受命靡貳介自矢兮 명령에 두 마음 먹지 않는 강직한 마음 스스로 맹세하네

 

3) 영죽(詠竹) 거제도 대나무를 읊다. 거제면 동상리 /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砌竹枯猶活 섬돌의 대나무가 마른듯하나 오히려 생기 넘쳐

新梢稍覺長 햇대나무 가지 끝이 자라고 있음을 알겠네

龍蛇初起蟄 용과 뱀이 동면하다 막 일어난 듯 하고

鸞鳳佇回翔 난새와 봉황이 우두커니 서서 빙빙 날아다니는듯하다

葉軋秋聲早 잎사귀 삐걱거리니 가을 바람소리 서두르고

叢遮夏日凉 떨기에 가리어 여름날이 서늘하네

兒童休剪伐 아이는 대나무를 베다 쉬는데

留取見凌霜 남은 것 잡아 보니 서리를 이기고 피었고나

  又

苦節堪醫俗 굳은 절개 참으로 속됨을 치료할 만하고

疎枝瘦似吾 성근 가지는 나처럼 야위었다

相應非富貴 서로 맞아 통하는 것이 부귀는 아닌데

心豈有榮枯 마음은 어찌하여 영화에 약해지는가?

霧雨霑逾淨 안개비에 젖으니 더욱 차갑고

風塵逈自孤 세상 풍진에 멀어지니 절로 외롭다

丁寧歲寒約 틀림없이 추운겨울에는 대부분

要與此君俱 대나무와 모두 함께 하리라

 

 

4) 대나무에 물을 주며(灌竹) 거제시 상문동에서/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自匊小池水 작은 지당의 물, 손으로 움켜서

爲澆新竹根 새로 심은 대나무 뿌리에 주노니

娟娟生淨色 곱디곱게 맑은 빛이 생겨나고

一一洗幽寃 하나하나 원통한 한 씻어 주누나

丘壑渾增價 내가 사는 골짜기 한층 빛나나니

松楠孰竝尊 소나무 녹나문들 어이 어깨 겨루랴

會看雷雨作 틀림없이 보겠지 우레 비 내릴 때

扶起籜龍孫 하늘로 치솟으며 용손(龍孫)을 떨어뜨림을

[주1] 하나하나 원통한 한 씻어 주누나(一一洗幽寃) : 순(舜) 임금이 승하하고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눈물을 흘려 대나무에 뿌렸더니 얼룩이 생겼다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의 전설을 차용한 듯하다.

[주2] 용손(龍孫) : 대나무는 곧잘 용에 비유된다. 여기서는 비가 내릴 때 대나무가 쑥쑥 자라서 죽순 껍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비유하여 형용한 듯하다. 후한(後漢) 비장방(費長房)이 신선 호공(壺公)을 따라 선술(仙術)을 배운 뒤 호공이 준 죽장(竹杖)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지팡이를 갈피(葛陂)란 언덕에 버렸더니 곧 용으로 화하였다 한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명으로 대나무를 기르는 일을 장려하도록 신칙하는 내용이 많다. 이는 대나무의 용도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대 활(竹弓)과 화살대(箭竹), 대나무 부채, 낚싯대, 대신발, 주렴, 고기잡이 도구, 지팡이, 바구니, 각종 그릇 등의 생활도구 뿐만 아니라, 대나무 가지에 세모꼴의 날카로운 쇠를 달아 사용한 창을 ‘낭선창(狼筅槍)’이라 부르는데 각진(各鎭)에 나누어 배치하면 성을 지키는 데 매우 긴요했기 때문이다.

 

● 다음은 1506년 초가을 거제도 유배지에서 여러 유배문인들과 고현천 시냇가에서 노닐다가 모두 돌아갔는데,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선생이 대나무 부채를 남겨두고 갔기에, 고현천변에 거주하던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이 부채 위에 칠언절구 2수를 적어 놓는다. 유배지에 버려진 자신들을, 곧 버려진 부채에 투영한다. 한 여름 더운 날 손에 놓지도 않던 부채도 가을로 접어드니 버려지는 이치인데, 언제 다시 여름이 돌아오려나. 조정에서 자신들을 쓴다고 무엇에 고마우며 버린다손 무엇에 슬퍼하랴! 위수(渭水)에는 대나무가 무성히 우거져 있으니....

 

5) 공석(公碩)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이 대나무 부채를 남겨 두고 돌아갔기에 부채 위에 희롱 삼아 적다. 2수(二首) / 이행(李荇 1478~1534) 1506년 초가을 거제시 고현천

愛惜炎天懷袖裏 더운 여름 소매에 넣고 애지중지하더니

豈言中道遽相忘 중도에 잊고 버릴 줄을 어이 알았으리요

恩情旋被秋涼變 은정(恩情)이 문득 가을 날씨 따라 변해 가니

萬事眞成不可常 인간 만사 참으로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翻覆悠悠自一時 뒤바뀌는 인심이야 절로 한때인 것을

用之何德舍何悲 쓴다고 무엇에 고마우며 버린다손 무엇에 슬퍼하랴

莫須更望火雲日 더운 여름날 오기를 부디 바라지 말라

渭畝森森多竹枝 위수(渭水)의 이랑에 빽빽하게 대나무 가지도 많단다

 

 

● 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죽순(竹筍)을 보고, “네 분명 하늘을 치솟을 뜻 있을 텐데, 어째서 담 틈바구니 가로질러 돋아났나? 한시 바삐 백 척 높이 대나무로 자라서 삶아 먹으려는 탐욕에서 벗어나려 함이리(問渠端有干霄意 何事橫穿壁罅生 速削琅玕高百尺 免敎饞客日求烹)”라고 읊었고, 조선전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죽순(竹筍)을 보고, “뾰족뾰족 새 죽순이 대숲 가득 얼룩거려라. 날마다 정원을 돌며 몇 번이나 보았던고? 좋은 비 한 번 내리면 한 자쯤 더 자라니 늙은이는 흥겨워 낚싯대 만들길 생각하네(抽抽新筍滿林斑 日日巡園幾度看 好雨一番高一尺 老夫乘興記漁竿)”라고 노래했다.

현재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어수선한 시기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대나무의 지조와 절개 그리고 무심(無心)한 속성을 배워야하고, 죽순처럼 쑥쑥 자라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대나무의 상징을 통해 사시장철 마음의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