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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양달석, 거제의 예술혼 ‘소와 목동의 화가’
여산 양달석, 거제의 예술혼 ‘소와 목동의 화가’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3.0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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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은 내 슬픈날의 자화상”
▲ 부인 진낙선(陳洛先)씨를 모델로 그림 그릴 때의 양 화백. 부인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려 나가며 양 화백의 작품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 했다.

독창적이고 향토적인 작품으로 민족애를 일깨우고 근대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서양화가 여산 양달석 화백(黎山 梁達錫.1908~1984)

그는 거제 사등면 출신으로 미술 활동 50여 년 동안 모두 2600여 점의 다작을 남기면서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고통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는 양달석 화백의 말처럼 그의 삶은 고통과 불안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한의사 집안의 4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4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누님이 동생들을 맡게 되면서 친척집들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얻어먹게 된다.

그리고 9세 때는 충청도에서 그의 부친이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4남매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소의 다리 잡고 ‘통곡’

그때부터 그는 사등면 큰아버지 집에서 소먹이는 목동으로 머슴살이를 하면서 소와 함께 하루종일 산마루에서 보내게 됐다. 한번은 그가 저녁나절에 산등성이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꿈의 나래를 펴고 있다가 그만 소를 잃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소가 보이지 않아 발만 동동거리며 걱정하다가 깜깜해지고 나서야 겨우 큰아버지 집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자 큰아버지는 담뱃대로 머리를 마구 치면서 당장 소를 찾아오라고 불호령을 쳤다.

깜깜한 밤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밤새도록 이 산 저 산 찾아 헤매던 그는 새벽녘에서야 산언덕에 있는 소를 찾을 수 있었다.

허둥지둥 뛰어 내려간 그는 소의 한쪽 다리를 잡고 한참을 통곡했다. 그의 그림에는 소가 제일 많이 등장한다. 평생토록 그는 소를 그려온 셈인데 그에게 있어 소는 부모나 혹은 자식들처럼 그리운 존재였던 것이다.

소 등에서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그림이나 비가 올 때 아이들이 소의 배 밑에서 비를 피하는 그림 등은 이때의 인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 때 통영사립강습소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그는 현대식 교육을 받게 된다. 첫 미술시간에 그린 연꽃 그림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고 그때부터 그는 미술가가 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게 된다.

광주학생 사건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사등면으로 내려온 그는 갯가서 온 19세의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하게 된다.

▲ 동경제국 미술학교 서양화과 2학년 시절. 신문배달과 행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어려운 유학시절을 보낸 양 화백.

그리고 스물한 살 그 해 가을에 그는 ‘제9회 조선미술 박람회’ 서양화 부분에서 첫 입선하게 된다. 이 수채화는 황곡을 배경으로 한 농부의 아내가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으며 그 옆에 계집아이가 어머니에게 기대있고 남자아이가 봇짐을 메고 있는 작품으로 만주로 피난 가던 한국 농민의 참상을 그린 것이었다.

그 후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그는 신문배달이나 길가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어렵게 학비를 조달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힘든 도쿄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향에서 면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50호 짜리 ‘풍년제’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 그림은 농악을 통해 한국농민들의 저항을 표현한 작품이었고 마치 무엇인가를 집어삼킬 듯한 태산 같은 힘을 가진 농부의 모습이라고 호평을 받기도 했다.

세 번째 출품작인 ‘가두의 예인단’은 사랑하는 자식의 생명과 바꾼 작품이었다. 전람회를 한 달 앞두고 셋째 아들이 뇌염에 결려 한 달 가량 입원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입원비와 화구 액자 등을 함께 마련할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자식은 다시 가질 수 있으나 이 전람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격려를 해주었고 작품을 완성하던 날 그의 셋째아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그의 셋째 아들이 죽은 이듬해에 목동이 등장하는 40호 그림 ‘고향’을 출품했다. 명태같이 바짝 마른 농촌의 목동들이 다 쓰러져 가는 농가를 배경으로 모여 있는 이 작품은 당시 농촌의 비참함을 리얼하게 표현해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입선하지 못하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족 부양길이 없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동경의 한 거리 계단에서 우발사고로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지게 된다. 그때 그의 눈에 계단 바닥의 무늬가 들어왔는데 그 바닥은 흑백의 돌을 아롱다롱하게 섞어 깔아둔 것이었다.

이 흑백의 조화가 이룩한 질박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그는 흑백의 무늬를 살릴 수 있는 필치를 연구하고 ‘고향’의 그림에 다시금 아롱다롱한 무늬를 넣어 ‘제10회 동경 독립전’에서 입선하게 된다.

그 당시 일본신문에서는 한국의 원시적인 농촌생활을 솔직히 표현한 작가는 드물다면 그를 호평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에게 맡겨둔 작품이 걱정돼 고향으로 갔지만 초가지붕 밑에 새끼로 묶어 놓았던 유화작품은 불에 타 사라지고 수채화는 벽의 도배지로 사용돼 버린 뒤였다.

그 때 그는 심한 충격을 받고 상심에 빠져 한참을 통곡했다.

빨갱이로 몰려 고초 겪기도

동경에서 가져온 작품 20점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환영회에서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답사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그가 제일 잊지 못할 일은 조그마한 온돌방에서 그림에 열중하다가 자리에 뉘어놓은 그의 넷째 아들 위에 넘어졌는데 넷째 아들이 이에 놀라 경풍으로 죽어버린 일이다. 결국 그는 그림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 둘을 희생 시킨 셈이 됐다.

또한 그는 한동안 빨갱이로 몰리기도 하면서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빨갱이로 몰린 이유는 순수한 미술가 단체를 정치가가 못마땅하게 여겨 불순단체로 몰아 정치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좌익으로 몰리면서 경찰서에서 20여 일간 구류도 살고 가택수색도 당하고 또 일제시대 때 그린 10여 점의 작품을 불태워 버리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겪었다.

20여 일의 고역을 겪고 무죄로 출감했을 때 그는 심한 신경쇠약을 앓았다. 이때 그의 큰아들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고 평생을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을 훌륭한 인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그래서 경남공립상업학교에 미술교사로 출근하게 된 그는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학생들에게 열중하여 미술지도를 했다. 그러나 교직 4년 뒤에 그에게 돌변사태가 생겼다.

그의 인기를 시샘하는 교장에 의해 다시금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오른팔은 자신의 미술활동을 하기 위한 나의 전부이니 오른팔 외에 다른 곳을 고문하라”고 하면서 끝끝내 부인했다.

▲ 1963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때의 모습(좌) 농촌의 비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40호 그림 ‘고향’(중) 30대 중반쯤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소와 목동’(우)

중풍으로 쓰러지다

57년 미국에 유학 갔던 그의 큰아들 양강(梁岡)이 26세의 약관으로 원자학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단체로부터 축하인사를 받게 된다.

당시 그는 두 번이나 투옥됐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좌익계열이 아닌가하고 일부의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누명을 완전히 벗게 됐다.

58년에는 그의 둘째아들 양광남(梁廣南)이 미국에서 연극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서울중앙대학교 설립 당시에 교편을 잡았다.

그는 62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으면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동요나 동화의 세계와도 같은 아늑함과 따스한 정감을 일게 하는 화가라고 호평 받기도 했다.

그 뒤 부산 서면에서 수채화 전람회를 열었는데 전람회를 마치는 날 그는 전람회장에서 급성협심증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두시간만에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하고 소생했지만 그 후 중풍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된 그는 불편한 몸으로도 여전히 작품생활을 했다.

몸이 성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림에 대한 집념이 대단해서 84년 75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붓을 들고 있었던 화가이다.

“내 그림은 어린 시절에의 귀소성이랄까, 목동은 내 슬픈 날의 자화상이고 그림은 체험 속에 자유롭게 떠올려진 향수 같은 것이지...사람들은 흔히 자연풍경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의 풍경입니다.”
 

<여산 양달석 화백 연보(年譜)>

•1909. 10. 18 거제시 사등 生
•1923 통영 공립보통학교 졸
•1924(17세) 전조선 소년미전 최고상 수상
•1927(20세) 일본 대판신문사 주최 전일본 중등학교 미전 특상수상
•1932(25세) 조선 미술 전람회(제11호) 입선
•1933 일본 제국미술학교 3년 수료
•1938~39 조선 미술전람회(제17회, 18회)입선
•1942~43 일본 동경 독립미술협회전(제11회‧12회)입선
•1946~50 고교 미술교사 재직
•1953 개인전, 부산미술협회 회장
•1960 개인전 동화화랑
•1962 사회유공표창(도지사)
•1962 경상남도 제 1회 문화상
•1969 광복동 보리수다방(회갑 기념전)
•1973 한국 미술60년 대표작가 100인전
•1974 국전초대작가
•1976 재 18회 눌원 향토문화상 수상
•1984. 10. 2(75세) 타계

 

외동딸 혜정씨가 말하는 아버지 양달석

양혜정

“배는 못 채워도 머리는 채워라.”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대단했다. 내가 경남여고 다닐 때 3년 동안 마중을 나와 가방을 들어주고 개울을 함께 건넜다.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중풍이 걸린 아버지를 17년 동안 진심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고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해왔다. 아버지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 분이다.

풍랑이 이는 통나무 속에 다섯 형제가 타고 있는데 한 명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배가 전복되어 모두 물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온 가족이 합심해서 살아야만 물에 빠지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식 교육열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배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머리를 채워야 된다고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우리 자식들이 이렇듯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양혜정

•세계 화예 작가 협회 부이사장
•한울꽃 예술학 중앙회 회장
•경성대학교 플라워샵 최고경영자 과정 지도교수
•카톨릭대학 전례 꽃꽂이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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