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가 정치판이란 순박한 대중이 믿고 있듯이 도의심이 많고, 깊은 안목이 있고 뚜렷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들이 떳떳하게 승패를 겨누는 무대가 아니다. 그저 처세에 능하고 타산적이며 신념이 없는 이악스러운 사람들이 권모술수를 겨누는 장소”라고 프랑스혁명의 격동기를 연구한 스테판 즈바이크는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러고 보면 정치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필수코스가 선거판이니, 정치판이나 선거판이나 굳이 그 속성을 따지면 ‘오십 보 백보’다.
이 판에 대한 대접이 이렇는데, 시즌만 되면 왜 이렇게 많은 지망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치열한 경쟁률을 기록하는지, 그것은 그들에게 물어야 될 것 같다. 답은 뻔하겠지만.
어쨌든 세월은 흘러 6·4 지방선거를 6개월 정도 남겨 놓고 있다.
그런데 작금의 일부 예상주자들의 행태는 간과 할 수 없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들은 신중한 처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남모르게 던, 알게 던 수 백 만원이 들어가는 여론조사에 신문 인터뷰, 각종 행사 참석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영락없는 선거준비다.
그런데 겉으로는 선거준비가 맞는데, 그 속내는 딴 곳에 있는 것 같아 찜찜하다.
벌써 ‘응수타진’ ‘외상값 회수’ ‘불공천 불출마’ 등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각종 ‘설’이 난무한다.
더욱이 ‘물밑 거래’를 염두에 두고 선거준비 흉내만 내고 있다는 큰일 날 이야기도 들린다. 분명 ‘멋있는 지도자감’들이 쓰는 정공법은 아니다. 무협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암수’다.
사실이라면, 타산적이며 신념 없는 권모술수로 선거판을 뒤흔들겠다는 심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준비하다 접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다. 이왕이면 이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빨리 거취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당부하고 싶다. 그렇잖아도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선거판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데, 시작부터 ‘×판’으로 만들지 말라고.
이런 기우를 불식하자면 지금부터라도 ‘하겠다’ ‘안 하겠다’로 답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 있다. “~한다면”이라는 뒤끝 없는 깔끔한 선택을 하라는 이야기다.
지금의 지역 정치판은 출마예상자는 많은데, 딱히 ‘하겠다’고 치고 나오는 사람은 드물다.
도대체 자신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과 공익을 위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잰다.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댁들의 사정이지 유권자들에 대한 도리는 아닌 것 같다.
나의 사정이 이러니 유권자들이 알아 달라는 것인데, 유권자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당신들의 무언의 몸짓까지 애써 알려고 하겠는가.
유권자들은 정식으로 보고받고, 정식으로 인사 받을 권리가 있다,
‘벼슬’을 하고 싶다면 천명해라. 그래야 유권자들은 당신들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정치에 무관심한 다수파 세대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지 누가 알겠는가.
일부에서는 너무 이른 시간에 후보군들이 집결되고, 구도가 확정되면 선거가 과열양상으로 치닫는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선거가 즐거운 운동 하듯이는 못되더라도 회색빛 납덩이처럼 무거워서는 안 된다.
정치가 열리고, 화창하고, 신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
우리가 출마예상자들에게 ‘신고식’을 재촉하는 것은 이런 인물을 찾기 위함이다.
첫째는 지혜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사람, 둘째는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희망과 용기를 주며 ‘나는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 셋째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넷째는 건강하고, 청결한 마음과 무쇠와 같은 결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어쩌다 저지른 잘못을 시인한다고 해서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는다고 여길 만큼 그릇이 크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인품을 가진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지도자감을 곁에 두고 찾지 못한다면, 우리들에게서 정의와 양심이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이건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