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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귀신 잡는 해병’ 천혜의 섬 거제도를 지켜내다.
[6.25특집]‘귀신 잡는 해병’ 천혜의 섬 거제도를 지켜내다.
  • 김갑상기자
  • 승인 2015.06.25 13:2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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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원문고개 전투’ 해병 1개 대대가 북한군 1개 연대를 격파
해병대의 용맹을 천하에 알린 원문고개 전투 전적비.

김성은 대대장, 군 수뇌부에 ‘거제 상륙하라’ 명령, 끈질기게 설득 통영으로 상륙

한국군 단독 최초의 상륙작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인민군은 T52전차를 앞세우고 전 전선에 걸쳐 기습 남침을 감행한다. 이른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인민군의 움직임을 감지 못한 당시 국군은 전체병력 삼분의 일 이상이 휴가 또는 외출 ‧ 외박 중 이었다.

38선을 넘은 인민군의 기세는 무서웠다.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한반도의 위기에 미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한반도 공산화는 일본과 태평양의 위기이기도 했다. ‘절대 미군은 참전하지 않는다’라는 김일성의 예상을 깨고 미 공군을 필두로 유엔 16개국이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연합군과 국군에 맞선 인민군은 기세를 꺾지 않았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다. 이곳마저 무너지면 끝이었다. 당시 한국은 부산에 임시정부를 두고 있었다.

인민군의 공세는 치열했다.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유엔군과 국군의 저항도 완강했다. 양보 할 수 없는 싸움에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국군의 목숨을 건 방어벽에 인민군은 다른 전술을 편다. 먼저 통영에 상륙, 이어 거제도를 점령하고 고성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치고 올라가는 이른바 양동작전이었던 셈이었다. 인민군의 속셈을 알아차린 군 수뇌부는 해병대 김성은 대대장에게 특명을 내린다. 통영을 접수, 거제도를 방어하고 궁극적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하지만 군 수뇌부와 김성은 대대장과 의견이 엇갈린다. 수뇌부는 거제에 상륙하라는 지시였고 김성은 대대장은 1개 대대 병력으로 거제도 칠백리 해안선을 방어하는 것은 무리이니 통영에 상륙하여 원문고개에서 방어막을 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군 수뇌부가 마침내 김성은 대대장의 작전에 동의하게 된다.

당시 인민군 제104치안연대 일부가 통영시가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7일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해병대는 한국군 최초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시가지에서 인민군을 몰아내고 원문고개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불의의 기습작전에 당한 인민군은 병력을 충원한다. 1,000여 명의 주력부대를 동원, 통영 재탈환의 기치를 든다. 방어하는 해병대는 병력은 적들 보다 세배 적은 300여 명이었다.

8월 19일, 인민군은 고성에 주둔시킨 포병대의 지원을 요청, 원문고개 방어선에 3시간에 걸쳐 포탄 600여발을 퍼붓는다. 이에 맞선 국군은 함포사격 지원과 동시 공중지원을 요청한다. 해군사령부는 지체 없이 T-5 4대를 보내 원문고개 서북쪽에 위치한 적의 포병대에 융단 폭격을 가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힌다.

포격전이 끝나자 어둠이 짙어진 8시 경 적은 보병을 투입시킨다. 김성은 대대장은 적이 사격권에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한 뒤 300미터 까지 근접하는 것을 확인 한 후 일제 사격을 퍼붓는다. 4시간 동안 진행 된 치열한 총격전은 아군 쪽으로 저울의 추가 기운다. 자정 무렵 적은 많은 전사자를 두고 퇴각한다.

20일 아침 8시 경 다시 인민군은 2차 공격을 감행한다. 용맹한 해병대의 저항에 또 다시 후퇴 한 후 저녁 9시 경 3차 공격을 단행하지만 2시간여의 교전 끝에 격퇴시킨다.

21일, 인민군은 야음을 틈타 4차 공격을 시작한다. 치열한 전투 속에 참호 여기저기서 ‘나가자, 해병대‼’ 군가 소리가 들려온다. 군가에 용기백배한 해병용사들의 투혼에 적은 맥없이 후퇴하고 만다.

22일, 이른 아침에 전선을 확인한 결과 적은 62구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부상당한 채 쓰러져 있는 3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도 올렸다. 이에 반해 아군은 사망 2명, 부상 6명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저녁 9시, 적은 5차 공격을 결행하지만 아군은 함포사격 지원 속에 1시간 만에 적을 물리친다.

23일, 저녁 8시 해병대의 투혼에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소장이 전선에 방문하여 해병대원들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며 사기를 북돋아 주고 돌아간다.

원문고개 전투는 9월 11일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하지만 용맹한 해병은 모조리 격퇴시킨다. 인민군은 이날을 끝으로 완전철수를 한다. 한마디로 세배의 병력으로 해병 1개 대대 병력에 참패하고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고 만 것이었다.

원문고개 전투에 동행한 외신기자들은 하나까지 헤드라인에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으로 장식하였다. 이때부터 해병대 전설의 시작이었고 ‘귀신 잡는 해병’의 탄생이었다.

인민군은 원문고개 전투의 참패로 양동작전을 포기하였고 얼마 뒤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만약 이 전투에 패해 인민군의 의도대로 양동작전이 실행되었다면 이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당시 지휘관은 해병대장 중령 김성은, 제2중대장 대위 김광식, 제3중대장 대위 이봉출, 제7중대장 대위 안창관, 해군방위대장 소령 백남표 등이었다.(전투 도중 2차례에 걸쳐 지휘관 교체가 있었다.)

참고 : 해병대 주요 전사

귀신잡은 해병을 최초로 보도한 마거릿 히긴스 당시 기자.
통영상륙작전 해병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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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2015-06-26 17:36:47
6.25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역사이다. 우리 아버님! 연세가 많아 기억도 흐리지만, 6.25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라는 후손들에게도 역사교육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진몽돌 2015-06-25 20:15:21
귀신 잡는 해병이 여기서 나온말이 맞다면 왜 해병 전사에 기록이 없었을까?
해병 기념관이 있는 줄 처음 알았지만 자랑스럽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