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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개…타고난 수렵능력은 멧돼지도 포획…②회
거제개…타고난 수렵능력은 멧돼지도 포획…②회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2.1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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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회에 이어>

한번 쫓은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아
“그처럼 영리하던 명견을 볼 수 있다면…”

“물어라 물어라”를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에 개들은 오직 짐승을 향해 뛰었고 노루는 사력을 다해 달릴 뿐이었다.

50여분이 지나자 연초면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어 다시 하청면 쪽으로 달려가던 노루는 들판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루의 뒤를 쫓아야 했던 메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김해사람 일행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김해 개 한 마리만 노루의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다.

이곳 산세에 익숙한 조씨. 10대 중반부터 산(山)사람으로, 또한 개 전문 사냥꾼으로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이를 놓치지 않고 따르고 있었다.

이번 시합은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씨의 가슴은 안타까움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날 사냥시합은 연초면 오비리 마을 뒤편 밭 언덕에서 끝이 났다. 작은 언덕을 차고 올라 다시 큰 언덕을 치솟던 노루가 뒷발이 미끄러지며 주춤거리는 순간 김해개는 노루의 목덜미를 물고 뒹굴기 시작했다. 조씨가 사냥현장으로 달려갔을때는 개의 눈에는 광기 어린 핏발이 서고 노루의 비명은 산골을 찢고 있었다.

조씨는 더 이상 지켜 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1분여의 시간이 흐른 순간 눈 앞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메리가 돌진해와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김해개의 목덜미를 물고 사정없이 내동댕이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노루의 목을 물고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우째 이런 일이...”

조씨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메리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는 김해개를 조씨는 미군용 ‘워카발’로 세차게 걷어 차버리자 개는 언덕 아래로 뒹굴었다.

김해사람들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노루의 목에서 선혈이 솟고 버둥거리던 동작은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그 노루는 암컷으로 흔히들 사냥꾼이 말하는 대물(大物)이었다. 그러나 김해개는 멀찌감치서 이 광경을 지켜 볼 뿐 감히 접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장을 목격한 김해사람들 일행은 이번 시합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말, 메리의 뛰어난 수렵능력을 칭찬하는 말 외는 더 이상 다른 말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날 사냥시합은 사실상 메리의 반칙승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 씨는 이 같은 사실을 숨긴 채 침묵을 지켜왔다. 그것은 “거제개의 자존심이며 곧 거제인의 자존심으로 부각됐기 때문 이었다”고 30여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이 같은 사실을 토로했다.

거제인의 기상 닮은 거제개,
온순하고 주인에 충직

거제개는 짐승을 찾다가 피곤하면 주인의 옆에서 잠시 쉬었다가 재도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또 짐승의 굴을 발견하고 입구가 좁아 들어가지 못할 때는 주인의 얼굴을 핥거나 꼬리로 주인을 유인, 신호해 주기도 했다.

사냥을 마치고도 주인이 보이지 않으면 크게 짖어 주인을 불렀고 그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주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 주인의 옷깃을 물고 함께 가자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김건주(59·거제시 사등면 지석리 출신)씨는 그 옛날 자신이 기르던 거제개를 가끔씩 떠올리며 한 숨 짓는다. 그처럼 영리하던 명견을 또다시 만날 수 있으면 “보다 더한 즐거움을 없을 것” 이라는게 김 씨의 푸념이다.

김씨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사등면 지석리에서 기르던 거제개 ‘독구’는 노루나 오소리를 사냥했지만 주인의 물건을 지켜주는데도 충실했다.

김 씨와 그의 모친이 주는 음식 외 남이 주는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고 쥐를 잡았을 때도 먹지 않고 마당복판에 놓아두고 주인이 보고 칭찬해 주도록 기다리는 슬기로움도 보였다. 또한 식구들이 일을 나가면 논이나 밭으로 따라가 지게나 농기구를 지키기도 했으며 소나 염소 등 가축을 들이나 산에 내다 매면 하루에도 수차례씩 둘러보았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네 가축에 다가 가면 짖거나 으르렁 거리며 위협해 접근을 못하도록 했다.

가끔은 산에서 꿩이나 작은 노루를 잡아 물고 오기도 했고 멧돼지의 진로를 막아 포획하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해냈다.

또 시집간 누나가 2년만에 다니러 와도 꼬리를 치며 반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는 것이 거제개에 대한 김 씨의 평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김 씨가 성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편 가조도에 가는 길에 ‘독구’가 따라왔으나 사공은 개를 배에 태우면 재수가 없다며 실어주지를 않았다.

배가 떠나자 ‘독구’는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헤엄을 쳐 배를 따라왔으며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도 또다시 바다를 헤엄쳐 건너왔다.

신현읍 수월리 윤봉권(68)씨는 1967년 가을, 동부면 산촌리 친구집에서 하얀 숫강아지 한 마리를 사왔다. 그 개는 9개월째 접어들던 어느 날 족제비를 잡더니 11개월째는 나무하러가는데 따라와 멧돼지를 발견했으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할 뿐 덤비지를 못했다. 며칠 후 윤 씨는 땔감나무를 자르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 집 개가 어느새 노루의 목을 물로 버티고 있었다.

그 개는 생후 15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2마리의 노루를 잡는 날도 있었고 노루를 발견하면 놓치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 개가 생후 3년째 접어들며 사냥을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느 날 연초면 아래 모실에 산다는 사람이 찾아와 개를 팔라고 졸라댔다. 못이기는 척 개를 팔았지만 사실 윤 씨는 개가 노루를 잡을 때 마다 질러대는 노루의 비명소리가 싫어서 팔았다고 그때의 속마음을 말한다. 그러니 지금은 그 같은 명견이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사겠다”는 것이 윤 씨의 생각이다.

<③회에 계속>

사등면 장좌부락 조규봉(60)씨는 거제개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길렀던 사람이다. 특히 조씨는 1969년 첫눈이 내리던 날 거제개가 겪었던 그야말로 감격적인 한 토막의 파노라마를 잊지 못한다.

맨발에 흰 고무신을 신은 채 텃밭에 갔는데 방금 지나간 노루의 발자욱이 있었다. 마침 따라 나섰던 개가 마을 앞쪽 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조 씨도 개를 따라 뛰었다.

쫓고 쫓기는 개와 노루의 게임은 산과 산을 넘어 둔덕면 상서리 뒷산까지 가게 됐고 결국 그곳에서는 노루도 개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귀가할 생각이 들었을 때는 온 발이 피투성이에 신발조차 없어졌음을 알았다.

그때부터는 싸리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의 공포가 엄습하며 단 한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맨발의 추위도 상처의 아픔도 잊은 채 오직 사냥에만 몰두했던 조 씨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통과 공포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고 신발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노루를 쫓아갔던 개가 입언저리는 붉은 피로 물든 채 조 씨에게로 달려왔다. 사냥감을 이미 정복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신발도 없이 사냥감을 찾아가기는 불가능했다.

어림잡아 길을 허둥대며 한참을 내려오는 데 얼마동안 보이지 않던 개가 신발을 찾아 입에 물고 조 씨 곁으로 다가 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조 씨는 입조차 다물 수가 없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산으로 가서 잡아두었던 노루를 찾아와 마을 잔치를 벌였다.

며칠 후 조 씨는 뱃사공에게 부탁해 개를 데리고 인근 섬인 가조도에 가게 됐다. 그곳 논골이라는 곳에서 또 노루를 발견해 1시간30여분의 추격전을 벌였고 노루는 급한 김에 추운 바다로 뛰어들었다. 개도 같이 바다로 뛰어들며 필사의 추격은 시작됐다. 썰물의 물살은 노루와 개를 육지로부터 200여m가량 바다 가운데로 밀고 갔다. 30여분의 사투 끝에 결국 개는 노루를 물었으나 노루의 발악은 심했다. 육지에 있던 사람들은 개가 죽는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거제개는 4시간 사투 끝에
오소리도 포획

바다로 내몰린 노루는 끝내 개에게 항복했지만 이를 건져오기가 쉽지 않았다.

뱃사공은 노루를 배에 실으면 재수가 없다며 건져 올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루를 포획한 개도 재수가 없어 건져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겨울 파도에 지친 개는 기진맥진, 헤어 나오질 못했다.

거제개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조규봉(사등면 장좌부락)씨는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산에서 단련한 그의 육체는 바다를 가르는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노루는 버려둔 채 개를 안고 뭍으로 올라왔을 대는 개도 사람도 초죽음 상태였다. 사람들이 피워둔 모닥불에 몸을 녹인 조 씨는 두 번 다시 무모한 사냥을 하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조 씨는 지금도 그 옛날 거제개처럼 주인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거제개가 있다면 수 천만원을 홋가 하더라도 필히 사겠다고 말한다.

조 씨는 자신이 사육하던 거제개중 ‘에스’를 유난히도 잊지 못한다. 강아지 때 동부면에서 사온 ‘에스’는 사냥도 사냥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미리 읽고 또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였다고 술회한다.

11개월째 접어들면서부터 노루를 잡기 시작했던 ‘에스’는 노루를 산채로 포획하라고 지시하면 다리와 엉덩이를 물고 늘어져 산채로 포획했고 죽여서 잡으라면 사정없이 목을 물어 사냥하는 개였다. 2년째 접어들어서는 멧돼지를 포획하는가 하면 굴속에 들어있는 오소리도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끄집어내는 용맹성을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동부면 구천계곡 어느 골짜기에서 조 씨는 에스를 안고 소리 높여 울었던 날이 있다. 그날따라 산에 오르던 길로 오소리굴을 발견한 에스는 거침없이 굴로 향해 돌진했다. 대체로 오소리굴은 개미집처럼 만들어져 그 속에 3~4대가 함께 살기도 하지만 입구는 좁아 개가 들어갈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래서 조 씨는 괭이와 호미를 이용, 입구를 넓혀 주었다. 에스는 몸을 비틀며 겨우 굴속으로 들어갔다. 에스가 들어가자 곧바로 짐승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흐르고 조 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세 시간이 가까워 와도 에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짐승들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 씨는 굴속을 향해 에스를 불렀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네 시간을 갓 넘긴 때 에스의 꼬리부분이 굴 밖으로 나왔다. 조 씨는 에스의 뒷부분을 안고 힘껏 당기기를 3~4분, 결국 에스는 자기 몸둥이에 버금가는 커다란 오소리를 끌고 나왔다. 준비해간 창으로 오소리를 찔러 숨통을 끊을 때까지 조 씨는 에스의 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소리사냥이 완전 끝났을 때 조 씨는 에스의 얼굴을 보고 그만 아연실색(啞然失色), 에스의 목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수차례 오소리의 발톱에 할킨 에스의 얼굴은 큰 바윗돌로 짓이겨 놓은 것 같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조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고 말한다.

에스가 네 살로 접어들던 어는 겨울날 조 씨는 가정형편상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에스를 팔아야만 했다. 당시 통영시 북신동에 거주하던 박준열씨는 에스의 값으로 황소 한 마리 값에 버금가는 자금을 지불했고 조 씨는 그 돈을 받아 쥐고 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평소 너무나 영리한 에스였기에 화물차에 싣고 가면 가던 길을 기억했다가 되돌아 올까봐 택시의 트렁크에 가두었다. 그때 조 씨에게는 이제 갓 사냥을 시작한 에스의 자견, ‘워리’가 있었기에 사냥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 씨는 가족처럼 아끼던 에스를 보내면서 가난을 한탄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책망했다. 에스를 보내고 1주 2주 3주… 시간이 흘렀지만 에스의 잿빛 모습은 언제나 조 씨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하게 에스를 팔았던 날로부터 46일째 되던 날 새벽, 두 마리의 개가 짖어대는 소리에 조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결에 들리던 개 짖는 소리는 분명, 에스의 소리였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조 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트렁크에 싣고 간 에스, 더구나 거제대교가 놓이기 이전, 개를 실은 차를 배에 싣고 견내량의 바다를 건너간 에스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사냥능력 인정,
황소 한 마리 가격은 예사.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에스’는 견내량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옛 주인을 찾아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새벽 먼동이 트는 시각, 조씨는 ‘에스’와 ‘워리’를 데리고 산으로 향했다.

그 날 아침 두 시간여 추격 끝에 한 마리의 노루를 포획했고 이틀 후에는 오전 내내 노루를 쫓아 두 마리의 노루를 잡았다. 그날 오후 조 씨가 성포에 노루를 팔러 간 사이 통영의 박준영씨가 찾아왔다.

‘에스’와 ‘워리’가 노루를 잡아 팔러갔다는 조 씨 부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씨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에스를 한 달 반이나 데리고 다니며 사냥을 시켜봤지만 도저히 사냥하는 개라고는 믿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통영으로 팔려간 에스는 그간 8마리의 노루를 발견, 추적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며 더구나 노루를 발견하고 멀리는 3km정도, 가까이는 4~500m 정도 추격 하는 척 하다가는 되돌아 왔고 언제나 축 늘어진, 기운 빠진 모습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다.

개를 잃어버린 날도 박 씨는 에스를 데리고 미륵산, 용화사 뒤편에 사냥을 갔었는데 5부능선 정도에서 노루를 발견한 에스는 7부능선 까지 추격하다가 갑자기 뒤돌아보더니 거제 쪽 먼 산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거제 쪽 산야를 바라보던 에스는 갑자기 아래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박 씨는 목이 터져라 ‘에스’를 외쳐댔지만 개는 새 주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산 아래로 내달렸다.

에스는 거제도의 산마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그로인해 거제도 산야는 에스의 눈에 익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조 씨는 말했다. 때문에 조 씨는 흔히들 개는 먼 곳의 물체를 식별하지 못하는 근시안을 가진 동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통영에서 에스가 거제 쪽을 바라보고 기억을 더듬은 것, 그래서 자기가 살던 옛 집을 찾아 온 것, 등을 미루어 개는 먼 곳의 산도 식별하고 방향감각이나 기억도 오랫동안 간직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조 씨의 주장이다.

그날 통영의 박준열씨는 에스를 다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후 사냥에 나설 때마다 에스는 옛 주인을 찾아오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에스가 팔려 간지 6개월여 기간 동안 7번이나 되돌아오자 박 씨는 에스를 다시 조 씨에게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어쩔 수 없이 조 씨는 에스를 다시 인수해야만 했다.

돌아온 에스는 노루사냥은 물론 멧돼지 오소리 사냥에 더욱 열을 올렸다. 에스의 행동은 열심히 사냥만 해주면 주인이 두 번 다시 다른 곳으로 팔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사냥에 나서기만 하면 단 한 번도 허탕 치는 일이 없었던 에스의 사냥 능력, 에스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통영의 박준열씨가 다시 조 씨를 찾아왔다. 진주에 사는 돈 많은 사람이 에스를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조 씨에게 “진주 사람은 황소 3마리 값을 요구해도 살 사람이니까 마음 놓고 값을 부르라”고 말했다. 개를 팔기는 싫었지만 조 씨의 쪼들리는 가정 형편은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 에스는 당시 황소 1마리 반 값으로 진주로 팔려갔다.

에스를 사가는 진주 사람에게 조 씨는 당부했다. 처음부터 사냥에 신경 쓰지 말고 한 달 간은 개의 마음을 사야할 것, 주인과 개가 의사를 소통할 만큼 친숙해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에스를 보낸 지 2개월이 가까워 오자 진주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지난 토요일에는 노루를 두 마리나 잡았고 수요일에는 30관쯤 되는 멧돼지를 잡았다며 좋은 개를 보내주어 정말 고맙다는 인사 까지 덧붙였다.

타고난 수렵능력은 멧돼지도 포획

영국의 대학자 하바트씨는 “세계에는 사람이 사냥을 시작한 이래 개를 이용해 본격 사냥을 시작한 것은 1만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집트의 고분벽화(古墳壁畵)에 개를 이용한 사냥 모습의 그림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같이 개는 가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이며 맨 먼저 인류의 사냥을 도운 가축임을 알 수 있다.

둔덕면 시목리 이재우(65)씨는 1980년대 거제개 1마리로 살림의 기반을 조성했다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만큼 거제개로 독특한 재미를 본 사람이다.

1981년 봄, 신현읍 수월리 윤봉권씨 댁에서 강아지 ‘메리’를 사온 이 씨는 이듬해부터 이개를 이용, 사냥을 하기 시작해 1989년까지 30여 마리의 멧돼지를 비롯 오소리 28마리, 노루 89마리를 잡은 것으로 기록됐다.

메리는 1995년 9월, 거제개 보호육성회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4살을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고 회원들은 계룡산자락에 메리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1970년대만 해도 가을철에 접어들면 육지의 사냥꾼들이 거제도로 사냥개를 구하기 위해 수없이 찾아 들었던 것만 해도 거제개의 우수성은 인정되고 남음이 있다.

<③회에 계속>

                                                                                        글 : 거제투데이 반용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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