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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정의 옷을 입은 새하얀 순결 ‘거제굴젓’
붉은 열정의 옷을 입은 새하얀 순결 ‘거제굴젓’
  • 배종근 기자
  • 승인 2014.12.08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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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석화로 만든 겨울 별미…무와 어우러진 거제의 독특한 젓갈
▲ 거제면 사람들이 즐겨먹는 겨울철 별미 거제굴젓. 그 맛을 한번 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한다.

굴이 맛있는 계절이다. 더불어 거제시에서 굴 생산이 가장 많은 거제만이 분주해진다. 거제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요 박신장(굴 까는 공장)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굴까는 사람, 굴을 사는 사람들로 모처럼 활기를 띈다.

방금 깐 싱싱한 굴을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 ‘호로록’ 하고 한입 먹으면 굴이 가진 독특한 향과 함께 상큼한 맛이 짠 바닷물과 어우러진다.

이처럼 싱싱하면서도 맛있는 굴이 때마침 맛이 든 무와 만나면 서로가 어울려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바로 거제면 사람들이 즐겨먹는 굴젓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0월경부터 이듬해 3월까지 즐겨먹는 젓갈의 일종(?)인 굴젓(이하 거제굴젓)은 거제면의 독특한 별미다. 젓갈이라고 말하지만 국물이 5할 남짓이고 굴이 3~4할, 나머지는 채 썬 무와 고춧가루 등 양념이다. 국내 다른 지역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젓갈이다. 맛 또한 기가 막힐 정도다.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국물 위로 무채와 하얀 굴, 초록색 쪽파, 통깨 등이 어우러진 거제굴젓은 강렬한 색처럼 진한 맛을 품고 있다. 찬 국물의 매운탕이 있다면 딱 이와 같을 것이다.

매운 고춧가루 때문에 칼칼한 듯 하면서도 무와 굴의 시원한 맛을 동시에 품은 그 맛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제굴젓을 찾게 된다.

국내에서 그 예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거제굴젓은 젓갈이면서도 젓갈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 음식이다.

국내에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충남 서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즐겨먹는 ‘어리굴젓’이 있다. 곰소나 강경 등 젓갈로 유명한 곳에서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된 때문이다.

어리굴젓은 원래 석화(돌에 붙은 굴)로 만들며 간한 굴에 고춧가루를 섞어 얼간으로 삭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고춧가루로 양념을 해서 '얼얼하다', '얼큰하다'는 맛의 표현이 어형 변화를 가져와 '어리굴젓'이 됐다.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6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거제굴젓은 그 형태부터가 어리굴젓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어리굴젓은 국물 없이 굴에 직접 염장을 하고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하는 반면 거제굴젓은 국물이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또한 굴에다 직접 염장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어찌 보면 굴이 들어 간 ‘안동식혜’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또한 기본 재료에서 ‘굴’과 ‘쌀’이라는 확연한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안동식혜는 엿기름을 넣고 삭혀 만들지만 거제굴젓은 엿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 굴을 오직 적정한 시간으로만 삭힌다.

 

거제만의 독특한 별미

거제굴젓은 거제가 가진 독특한 음식문화 중 하나다. 특히 물질적 풍요와 조선시대의 양반문화가 공존하는 거제면의 특성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다.

거제굴젓을 정확히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다시 며느리로 이어진 긴 세대를 감안해 보면, 이 또한 어리굴젓 못지않은 긴 세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거제면은 지역 특성상 굴이 생장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내만이 깊게 형성돼 있어 큰 파도가 없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맛있는 굴(양식이전엔 석화)의 생산이 가능하다. 어리굴젓의 명성도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석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거제만에는 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심지어 동네 아낙들이 채취한 석화를 사모아 대규모로 유통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굴에 있어서만큼은 거제면이 가장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 거제면은 거제시 전체에서 가장 넓은 땅(농사지을)을 가지고 있다. 농사가 주업이던 산업화 이전에는 가장 풍요로운 곳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한 조선시대 관아가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양반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산도와도 가까워 수군통제영 관리들의 출입 또한 잦았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양반문화의 특성 중 하나는 자기 집안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안동이나 경주 등 양반문화가 번성한 지역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풍요로운 거제에 사는 어떤 양반이 거제만에 지천으로 널린 석화를 재료로 자기 집안만의 독특한 음식으로 ‘거제굴젓’을 만들어 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넉넉한 양반가에서 이웃을 위해 나누어 먹던 음식인 거제굴젓은 근동 전체로 퍼졌을 것이다. 어리굴젓과 안동식혜가 그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 거제굴젓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재료인 싱싱한 석화.

음식의 참맛은 만드는 이의 ‘정성’

이처럼 거제면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제굴젓은 급속한 세대교체로 그 맛을 잇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거제면의 음식점들 중에서 거제굴젓의 옛 맛을 그대로 지키는 곳은 성내횟집(사장 이두문)을 비롯한 몇 집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많이 바뀌면서 거제면에서도 굴젓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 있나. 그나마 우리는 고향이 거제이고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을 기억하니까 이렇게 밑반찬으로 내놓지.”

거제굴젓과 관련 성내횟집 이두문 사장은 독특한 제조법이 없다고 했다. 이 사장의 어머니가 해주던 거제굴젓을 부인이 그대로 전수받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거제굴젓의 맛을 내기 위한 첫 번째 요소는 싱싱한 석화다. 일명 돌굴이라고도 하는 석화는 양식굴에 비해 양념이 잘 스며들고 고소한 맛이 더 강하다. 그래서 이 사장은 거제굴적을 만들 때면 항상 양식굴을 마다하고 석화를 고집한다.

석화가 준비되면 맑은 물에 석화를 깨끗이 씻어 손질하는 것으로 거제굴젓의 두 번째 과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석화는 그대로 삭히는 과정에 돌입한다. 여기서 어리굴젓과 거제굴젓의 첫 번째 차이가 발생한다. 어리굴젓은 소금으로 간하는 염장의 과정을 거치는데 반해 거제굴젓은 염장하지 않는다. 굴을 그대로 삭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굴만으로 삭힌다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여기서 거제굴젓의 비법이 등장하는데 굴과 함께 삭혀질 재료에 따라 각자 맛이 틀려지게 된다. 그냥 물과 함께 깨끗이 씻은 굴을 넣은 경우가 있고, 다른 특별한 재료를 넣은 경우가 있다.

이두문 사장네는 쌀뜨물과 함께 삭힌다고 한다. 물로만 할 때보다 맛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새하얀 쌀뜨물과 만난 석화는 삭히는 과정, 즉 발효과정에 돌입하는데 이 과정은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우리네 전통 난방기구인 부뚜막에서 3~4일정도 삭히는 것이다. 한겨울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인 부뚜막이 두 번째 비법이다. 옛날처럼 아궁이에 군불 때고 난 뒤 훈훈함을 주던 그런 부뚜막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이 사장네는 그 부뚜막의 온기를 그대로 기억하고 옛 맛을 살리기 위해 부뚜막에 삭히는 과정을 고집하고 있다.

여기에 세 번째 비법인 정성이 더해진다. 어떤 정성일까. 여기서 이 사장 내외는 자기들만의 비법이기 때문에 밖으로의 노출을 꺼렸다. 이 정성이 더해지지 않으면 굴이 상하여 음식으로서 가치가 없어진다고 했다.

 

칼칼하면서도 속을 ‘뻥’ 뚫어주는 거제굴젓

따뜻한 부뚜막에서 제대로 숙성된 재료들은 양념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이틀 정도를 삭히면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맛으로 속을 ‘뻥’ 뚫어주는 거제굴젓으로 탄생하게 된다. 특히 젓갈의 생명인 소금(쓴 맛을 뺀 천일염)은 이 단계에서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데 단지 간을 맞추는 용도로만 쓰인다.

그래서 거제굴젓은 ‘젓갈’하면 떠오르는 ‘짠맛’이 거의 없다. 물론 간을 잘못하면 짜겠지만 짠맛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다. 젓갈의 미덕인 ‘보관성’도 없다. 찬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만들어 먹는다는 말은 그런 보관성의 부족도 한몫 하고 있다. 요즘이야 냉장고가 있으니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찬바람이 불면 만들어 먹는 진짜 이유는 재료들과의 궁합 때문이다. 기본인 굴이 찬바람이 불어야 제 맛이 난다. 또 굴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무도 찬바람이 불면 단맛이 더해진다. 거기에 한여름 뙤약볕을 이겨내고 제대로 붉은 빛을 머금은 고추(태양초)가 어우러질 수 있는 계절이 바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무렵이다. 쪽파 또한 이들과 어우러져 그 맛을 더한다.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이 그 맛을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그런데 이두문 사장 내외는 좀 특이하다. 거제굴젓을 만드는 당사자인 이두문 사장의 부인보다 이 사장 본인이 맛에 더 까다롭다. 어릴 때부터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거제굴젓을 먹어왔던 기억 때문이다.

이 사장 부인은 시어머니로부터 비법을 전수 받은 뒤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서 거제굴젓의 참맛을 알았다고 했다. 특히 숙취해소에도 거제굴젓이 한 몫 한다고 이두문 사장의 부인이 예찬했다.

“사람들이 술 마신 다음날 숙취 해소를 위해 굴젓을 먹는다는데 나는 진짜 몰랐거든요.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다음 날 굴젓을 먹었는데 정말 속이 뻥 뚫리고 머리 아픈 게 없어지데요.”

한편으로는 거제굴젓의 명맥을 잇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현실도 안타까워했다.

이 사장의 부인은 “예전에는 그래도 만들어 먹는 집이 많고, 시장에 가면 굴젓을 만들어 파는 (노점상)할머니들도 간간이 있었는데 요즘은 굴젓 만들어 파는 할머니가 한 분 정도 계신 걸로 안다”고 말했다.

또 “거제에 몇 분, 굴젓을 잘 만드시는 분들이 아직 계신 것으로 안다”고도 덧붙였다. 거제면 전통의 맛이 사라지지 않게 이들의 비법을 전수받을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형태로 거제면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거제굴젓은 통영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가까운 지역이라 왕래하는 동안 전파됐거나 아니면 통영의 것을 거제면에서 발전시켰을 수 있다.

하지만 거제면의 굴젓과 통영의 굴젓은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거제굴젓은 무를 곱게 채 쓸어 사용하지만 통영의 굴젓은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낸다. 또 만드는 순서나 비법면에서도 분명한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거제의 독특한 별미, 젓갈이면서도 짠맛을 멀리하고, 젓갈이면서도 국물이 주를 이루는 ‘거제굴젓’은 섬이면서도 섬이 아닌 거제와 매우 닮아 있다.

▲ 성내횟집 이두문 사장의 부인이 싱싱한 석화를 깨끗이 손질하고 있다.
▲ 깨끗이 손질된 석화에 성내횟집만의 비법 중 하나인 쌀뜨물을 붓고 있다.
▲ 새하얀 쌀뜨물과 함께 삭히는 과정에 돌입할 준비가 완료된 상태.
▲ 삭히는 과정이 완료된 뒤 양념을 하기 전에 채 쓴 무를 넣는 과정.
▲ 주 양념인 붉은색의 고춧가루로 기초양념을 한 상태.
▲ 짠맛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 거제굴젓에 소금 간을 하는 과정.
▲ 쪽파, 통깨, 마늘 등의 양념을 넣은 거제굴젓은 이틀정도 더 숙성시키면 밥상 위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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