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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를 만나다... 대우병원 신경외과 척추 전문의 김상현 교수
명의를 만나다... 대우병원 신경외과 척추 전문의 김상현 교수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24.04.1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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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환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대우병원 신경외과 김상현교수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는 누구나 회복과 완치에 대한 꿈을 갖고 찾아온다. 그러나 말 그대로 ‘꿈’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 또한 환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 굵은 동아줄을 내미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지만 김상현 교수에게는 사명을 뛰어넘어, 삶에 스며든 일상이다. 희망을 품고 찾아오는 환자에게 매 순간 최선의 결과를 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대우병원 신경외과 김상현 교수, 그의 명성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소년, 의사가 되다

6살 꼬마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집안의 막둥이로 사랑받으며 늘 꼬물꼬물 엄마 옆에 붙어 자던 소년에게 병원으로 실려 가는 엄마의 모습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자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당시 급성 복막염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엄마는 가까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고 새벽에 불려 나온 의사 선생님의 응급 수술을 받고 다행히 회복할 수 있었다.

어린 꼬마에게 이 하룻밤의 기억은 참으로 강렬하게 남았다. 엄마를 살려준 의사 선생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병원을 기웃기웃했고, 감사와 감동의 그 마음은 소년에게 “나도 커서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될 거야”라는 꿈을 안겨주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었던 그 꿈은 소년을 의사로 만든 가장 단단한 반석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었다.

환자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

지금도 그렇지만 김상현 교수는 처음부터 수술을 참 좋아한 의사였다. 레지던트 때 신경외과 동기들이 400~800건의 수술을 할 때 그는 3,000건을 했으니 그냥 수술방에서 살았다고 보는 게 정확했다. 레지던트 때 이미 척추 수술을 2,000건이나 했다니 신경외과의 척추 은사님이 그를 탐낸 건 일견 당연한 결과였다. 엄청난 추진력을 갖고 있었던 은사님은 뇌종양 분야로 진로를 정한 그를 데려오기 위해 앞장서 조용히 주변을 정리(?)해줬고 탐냈던 김상현 교수를 척추 분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김 교수는 국내 최초로 키아리 증후군이 있는 척추측만증 환자를 대상으로 흉추 측만증 교정 수술에 성공하고, 2011년 도무오이 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치료했던 일은 대한민국 의료계와 환자들에게 ‘신경외과의 김상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본인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종의 사건이었다.

“키아리 증후군과 척추측만증이 함께 있는 경우 치료를 기존방식으로 하면 상처도 크고 마비가 올 수도 있으며 회복이 어렵고 일상생활도 힘듭니다. 저는 당시 척추 수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교수님들의 수술법을 배우러 유명 병원 3곳에 해외연수를 다녀온 후였고, 미세침습수술의 도입이 기존의 수술 방법보다 안전하고 상처와 후유증이 적다는 확신으로 신기법의 새로운 수술을 시도했죠.”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13세였던 환자는 큰 상처 없이 이후 키가 17cm나 자라면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김상현 교수가 잔잔히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수술의 성공이 아닌 회복한 환자의 삶을 뿌듯해하고 대견해하는 미소다.

베트남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한 도무오이 서기장 수술 역시 드라마틱했다. 갑작스럽게 병원으로 찾아온 베트남 사람들이 당시는 누군지도 몰랐고 치료할 환자는 더더군다나 몰랐던 상황. 환자가 베트남 고위직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그 위력을 느낀 건 급하게 도착한 베트남 공항에서부터였다. 비행기에서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게이트고 심사고 뭐고 없이 그냥 바로 병원으로 직행을 한 것. “환자가 당시 95세로 노령이었고 6개월간 걷지를 못해서 거의 누워 지내던 상태였었죠. 누구도 상황이 더 나빠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김상현 교수는 당시 새로운 수술기법이었던 레이저 추간판 감압술을 시행했고 이를 통해 환자는 수술 당일에 바로 걷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환자는 의사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의사는 환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또한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정말 중요한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뒤 호치민 병원은 김 교수가 수술에 썼던 장비와 수술기법을 도입했고 우리나라는 우연찮게도 베트남 사업에서 당시 4조 원 규모의 건설 수주를 받는 등의 경사가 잇달았으니 서기장 수술 성공과의 연계성을 부인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베트남 수상이 내한했을 때 김 교수가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고 외교통상부의 표창을 받은 것은 부수적인 일이었다.

많이 듣고, 정확히 진료하며, 꼭 필요한 치료를 한다.

척추 명의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상현 교수지만 그 명성이 반드시 수술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노화로 인한 척추 질환과 질병으로 인한 척추 질환을 명확히 구분해 치료하고 환자를 대하는 그만의 방식은 그의 이름을 살아있는 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게 했다.

김상현 교수는 “많이 듣고, 정확히 진료하며, 꼭 필요한 치료를 한다”는 신념으로 척추 질환은 가급적 보존적 요법으로 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치료라며, “저는 수술이 잘된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듣는 것보다, 다른 병원에서는 수술하자고 했는데 여기 와서 수술을 안 해도 된다는 소견을 듣고 기뻐하는 환자들의 모습에 더 감사함을 느껴요.”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또 하나, 그는 첫인상의 깐깐함과 달리 환자를 매우 편하게 대하는 따뜻하고 자상한 의사이다.

“저는 늘 환자의 얘기를 다 듣습니다. 환자의 불편한 증상을 충분히 알아야 정확한 진료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환자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때까지 모두 다 듣습니다. 시간에 쫓겨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으면 정확한 진단이 어렵고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없어요.” “진단 후 수술이 결정되면 오직 병과 환자밖에 안 보입니다. 고민과 생각은 수술 전에 다 끝내고 일단 수술이 진행되면 계획대로 착착해 나가는 거예요. 변수조차도 전부 수술 전에 계산을 끝내놓는 거죠.”

그를 보면서 그가 왜 명의일 수밖에 없는가? 에 대한 답을 다시 한번 구한다.

좀 더 완성도 높은 수술을 향한 끝없는 연구와 열망, 남들이 포기할 때 홀로 포기하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 몰입…. 생명과 회복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의는 오늘도 환자의 꿈과 희망에 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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