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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④-2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④-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3.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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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약(芍藥) 시(詩)에 대한 응제(應製) / 황보탁(皇甫倬)

의종은 정치보다 놀이를 좋아했다. 의종(毅宗)이 상림원(上林苑)에 놀이를 나가서 작약꽃을 구경하다가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모신 신하들 가운데서 이를 갱운(?韻)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황보탁이 한 편의 시를 지어서 올렸는데, 왕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그는 궁궐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 시가 아래와 같다.誰道花無主 누가 꽃을 보고 주인이 없다던고

龍顔日賜親 임금님이 매일 친히 와 보신다네

也應迎早夏 첫여름을 응당 맞이해야 할 텐데

獨自殿餘春 혼자서 남은 봄을 지키고 있구나

午睡風吹覺 졸던 낮잠이 바람결에 깨이고

晨粧雨洗新 새벽 단장이 빗물에 지워졌네

宮娥莫相妬 궁중의 여인이여 질투를 말게나

雖似竟非眞 아무리 닮아도 진짜는 아니라네.

작약이 꽃나라의 재상이라고 하나 여성적이다. 오나라 절세미인 '서시(西施)'가 술에 취한 모습과 같다하여 '취서시(醉西施)'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약 꽃이 피어나면 시들어질 때가 근심스럽다. 화려하고 풍요롭고 붉은 꽃이 사람의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땅에 깃들어 사는 생명이거늘, 사람이 짓는 잿빛과 작약 꽃이 지은 빨강 빛의 대조는 심히 극단적이다. 오래오래 작약과 생명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나원(羅願)이 지은 <이아익(爾雅翼)>에는 "음식의 독을 푸는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어서 '약(藥)'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작약은 중국에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함박꽃'이며, 본래 깊은 산중에 자생하는 꽃이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 왕비가 된 원나라 제국공주로 인해 단번에 정사에 남게 된다. 당시 수녕궁 향각에 작약이 성대하게 피어있었다. 공주가 꺾어 온 작약을 만지다가 흐느껴 울었다. 그러더니 이로부터 얼마못가 죽었다. <고려사>에 공주의 비애를 나타낸 까닭에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게 되었다. 

[주] 작품 해설 :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거제현 오양역(巨濟縣 烏壤驛)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모씨의 며느리가 피공으로부터 절개를 지킨 열부(烈婦) 이야기인데 김진규(金鎭圭)가 그 시어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조선 중기에는 양반이나 귀족 권세가들의 열녀비나 열녀문은 조정에서 표창하여 비를 세우고 그 가문을 빛나게 하였지만 일반 평민은 그렇지 못하였다. 다행이 김진규 좌참성이 마침 거제에 유배와 있다가 이 사실을 알고 기록 하게 되었고, 전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정절하는 마음은 착하고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천성을 그대로 지킨 것이라고 저자(김진규)는 말한다. 특히 우리 거제도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지역이 점령당했다. 당시 부녀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절개를 지키기에는 거의 불가능 했다. 그런 격동기를 막 지난 후인 1674년에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김진규 좌참찬은 유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거제도와는 사뭇 그 생활상과 풍습이 다르겠지만, 오양역 부근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작은 기념비라도 하나 건립 했으면 한다. 이 글은 거제도 유배시절 지은 죽천집 6권에 수록되어 있다.
● 거제군읍지1899년 : 기성유사(岐城遺事) [高麗毅宗爲鄭仲夫所廢處此出麗史] 고려 의종 정중부 난으로 폐처에 귀양 왔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卷之三十二 거제현 고적지(巨濟縣 古蹟條), 屯德 岐城 在縣西三十七里 石築周一千尺 內有一池 世專 本朝初 高麗宗姓 來配之處 둔덕기성 고현성에서 서쪽 37리, 석축 둘레 1000 척, 성내 못 1개, 조선초기1392년 고려 종성(왕씨들)이 유배 온 곳이라 전한다.

《경상도여지집성》 거제군읍지 고적조(巨濟郡邑誌 古蹟條), 岐城 遺事 高麗 毅宗 爲 鄭仲夫 廢此 出麗史 기성(거제) 유사(전하는 사적)에는 고려 의종이 정중부에 의해 이곳에 폐출되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 오양 열부를 애도하며(哀烏壤烈婦辭) / 김진규(金鎭圭).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거제현 사등면 오양역 산밭 골짜기에서 죽은 모씨 처의 이야기다. 가난하게 살며 부지런히 힘써 일을 하며 살고 있는 과부(열부)가, 산밭에서 목화를 손으로 따고 있었는데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이웃 사람(皮工,피공)이 마침 나무하려 산으로 향해 가다가 열부가 혼자 밭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열부가 오줌을 누려고 건너가니 피공이 다가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으르고 달래며, 강제로 안아서 일으켰다. 열부는 있는 힘을 다하여 거부하니 옷은 모두 찢어지고 온몸은 터졌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피공(皮工)은 그러는 동안 화를 내었으나, 열부는 음란함에 따르지 아니 하였다. 만일 열부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 일이 밝혀질까 두려워 칼날을 뽑아 위협하였으나 계속 따르지 아니하니, 이에 곧 찔러서 간음하고 죽이고는 시신을 깊은 산골짜기에 내버리고 돌로 쌓아 숨겼다. 그때 산 나무 과실 열매를 따 모으는 할머니가 그 장면을 보게 됐다. 마을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웃사람들은 대낮에 벌어진 모 며느리(열부)의 허물인지라, 말 못하고 있다가 아침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가 되어 찾아 나섰다. 사방의 이웃들이 두루 퍼져 찾아 부르니, 피공은 이웃들이 의심스러워 가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골짜기에서 시신을 찾아보니 옷에 피가 물들고 벗겨 있었고, 그동안 역복(상을 당한 후에 갈아입는 옷)은 그 칼날에 해어지고 하나로 묶여 있었다. 거제현 관아에 고하고, 증좌인 의복을 보냈다. 이로써 피공을 잡아 하옥하니 스스로 목을 매었다. 사람들은 열부가 지아비를 향해 따라 갔다고... 예전에도 지아비가 어렵고 가난하여 그 목화솜을 주워 모았다 한다. 열부의 절개가 완전하고 고고하여 밝게 빛나니,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오양 열부를 애도하며> 거제시 사등면 오양리 산밭 골짜기. 

烈婦 巨濟縣烏壤驛卒某之妻 窮居力作 歲甲寅秋 如山田擷木綿 隣有皮工 亦樵于山 見婦獨在田 便欲滛之 抱持誘刦百端 婦力拒 衣皆裂破 終不從 皮工旣怒不從滛 又懼婦歸發其事 抽刃䝱之 亦不從 乃亂刺以殺 抛屍深壑 積石掩之 會山木摘果之嫗在焉 歸語隣人 隣人陽言某婦朝出不還 隣里當共往尋 徧召四隣 皮工恐不往人疑 脫漬血衣 易服以往 則計紿奪其刃 共縛之 告于縣 令驗問卽輸服 而下獄自經 不克决其罪 令又不爲奏白 旌褒故闕焉 噫 海島遐遠 俗類蠻蜑 而婦匹庶賤陋 生長田畒之 間 非有傅姆之訓 而乃能不敗於强暴 舍命靡他 此豈非烈性貞質 稟乎天者耶 然而吏憃地僻 未蒙奬嘉 可勝歎哉 余僇人 力不能顯之世 而惜其久將湮沒無傳 姑記得於土人者 爲辭以哀之 仍欲以風厲甿俗 辭曰 惟婦于夫 一而不貳 子父臣主 參爲人紀 孰無秉彛 或斲以喪 懿厥烈婦 獨全乎性 結髮許身 窮窶匪患 冀野之饁 會稽之案 帬布可安 唯念夫寒 爰掇其緜 于山之田 蚩蚩彼蕘 要我乎谷 江漢之廣 謂如淇濮 偪以强力 訹用美利 貞心皭如 寃號憤詈 蹈刃莫渝 節完身殞 高高監昭 罪人安遯 世恒有言 善惡由敎 猗嗟烈婦 焉受焉斅 跡下處荒 俗厖業鄙 學昧詩禮 觀乏圖史 辨義與生 若固講識 淑靈攸鍾 信篤而特 玉産戎土 珠出于蠻 德尤無類 物豈獨然 行之孔媺 褒胡不及 旣得吾仁 婦無未慊 善苟不彰 陋裔曷刑 作辭以予 以告黎甿 凡百黎甿 有女有婦 念爾烈婦 秉彛人有

열부,  거제현 오양역에서 죽은 모씨의 처다. 가난하게 살면서 부지런히 애써 일을 했었다.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산밭 같은 곳에서 목면(목화)을 손으로 따고 있었다.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이웃 사람(皮工)이 있었는데 그때 또 이웃사람(피공)이 나무하려 산으로 향해 가다가 며느리(열부)가 혼자 밭에 있는 것을 보았다.

오줌을 누려고 건너가니 다가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으르고 달래다가 안아서 일으켰다. 며느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거부했으나 옷은 모두 찢어지고 온몸은 터졌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피공(皮工)은 그러는 동안 화를 내었으나, 며느리는 음란함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또한 동시에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 일이 밝혀질까 두려워 칼날을 뽑아 위협하였으나 또 다시 따르지 아니하니 이에 곧 찔러 간음하고 죽이고는 시신을 깊은 산골짜기에 내버리고  돌로 쌓아 숨겼다. 이 때 산 나무 과실 열매를 따 모으는 할머니가 있어 간음 장면을 보게 됐다. 마을로 돌아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웃사람들은 모 며느리의 대낮에 벌어진 허물인지라.. 아침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마침내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가 되어 찾아 갔다. 사방의 이웃들이 두루 퍼져 찾아 부르니 피공(皮工)은 이웃들이 의심스러워 가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시신을 찾고 보니 피가 옷에 물들고 벗겨 있었고 그동안 역복(상을 당한 후에 갈아입는 옷)은 그 칼날에 없어져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로 묶여 있었다. 고을현(거제현)관아에 고하고 이 후에 증좌를 찾기에, 곧 의복을 보냈다. 이로써 피공을 잡아 하옥하니 스스로 목을 매었다.  참고 견디지 못한 그 죄를 가려 판단해야하지만 이를테면 또다시 명백히(상세히) 아뢰지 못하다 보니 공로에 대해 표창은 했으나, 고로 있어야 할 게 없어 아쉬워 탄식하였다.  

거제도는 어찌 이리도 멀리 있는지.. 속된 유의 미개한 오랑캐 풍습이 있고 그리고 일반 여염집 며느리는 인품이 낮고 번지럽다. 태어나 자라면서 그 동안 밭이랑을 갈며 가르치는 부모(스승)가 없지만, 이로써 강하고 사납고 지조가 있어 능히 일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생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쓰러지니 이에 어찌 바탕이 곧고 성품이 굳세지 아니한가? 여쭈노라, 타고난 천성이 그러한가?

그러나 구석지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는 벼슬아치의 사리가 어둡다보니, 내가 어리석게도 장려하고 기뻐했구나.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 동안 사람들을 욕보이게 하였구나. 힘써 애써도 인간 한평생에 나타나서 어찌 할 수가 없는 일이 있다. 애석하지만, 그 옛날 열부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면 자취도 없이(이야기가)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이 시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다가 토착민의 이야기로 전해져 듣게 되었다. 무지한 백성의 풍속이 썩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 아니하더라도 그로 인해, 글(문체)로 기록해 애도하고자 한다.

열부사(哀烏壤烈婦辭)에서 생각하며 말한다. "과부(며느리)가 지아비를 향해 따라 갔다"고..

"오로지 두마음을 갖지 않고 한결같았다"고.. 자식과 아비, 신하와 군주사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위해 관계한다. 누가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 하리오. 어떤 경우는 잃어 죽음으로서 깎아 아로 새기지만, 지혜로운(아름다운) 여자가 열부이다. 그 성품에 홀몸으로 어찌 온전하랴?

머리에 쪽을 올린 여자가 몸을 사내에게 맡기고 도적과 질병으로 가난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중국 기주의 들에 들밥을 내오고 중국 천추전국시대 회계산 사건의 치욕을 잊었는가?

치마를 드러내도 가히 편히 할 수 있다면 오직 생각하라! 지아비가 어렵고 가난하면 이에 그 햇솜(목화솜)을 주워 모으려고 밭이 있는 산으로 향해 갔는데 저 땔나무꾼(皮工)이 한없이 어리석었구나. 골짜기가 나를 맞이하고 중국 강수와 한수가 넓었다네. 이를 일컬어 물과 강 이름 같다 한다.  강력하게 핍박하여 꾀어 즐기고 탐하려 행하였으나 정절하는 마음은 맑고 깨끗했다. 원통하게 부르짖고 꾸짖어 분노하지만 칼날 밟듯 변하는 게 불가했다. 절개가 완전하니 자신이 죽는구나. 고고하고 밝게 빛남을 거울삼아라 말한다. 죄인은 이에 도망치지만, 인간은 항상 유언(자신만의 논리)이 있다. 선과 악의 가르침에 따르는 이유다.

아~ 열부가 멋지다!  어찌 받아들이고 어찌 가르칠까? 이러한 흔적(사건) 하에 덮어버리고 살아가더라도 풍속(관습)은 이런 부끄러운 일로부터 두터이 될 것이다. 시와 예를 배운 것이 어둡고  지도와 사서가 모자라 보이지만, 생명과 함께 의리를 분별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배우고 외어 알면 단단하게 굳어진다. 맑은 혼백은 한결같은 바, 특별히 진심으로 믿는다.

구슬(옥)을 생산하는 병장기의 땅 거제도에 오랑캐로부터 진주가 나왔다. 오히려 원한을 덕으로 여겨 비길 데가 없도다. 만물이 어찌 홀로 다 그러 하겠나마는 다녀보니 공자가 선(善)하고 아름답다 하겠구나. 오랑캐 같은 바를 칭찬하는 것은 미치지 아니한 만 못하다.

나는 인(仁)을 이미 얻어 배웠다. 며느리가 흠잡을 데가 없어도, 마음에 차지 않으랴. 진실로 착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더러운 후손에겐 어찌 벌하지 아니하랴.

나는 글을 지어 고하니, 백성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온갖 여러 가지 일로 통해 백성에게 와 닿으리라. 지어미나 계집이나 열부를,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킨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리라.

[주] 작품 해설 :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거제현 오양역(巨濟縣 烏壤驛)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모씨의 며느리가 피공으로부터 절개를 지킨 열부(烈婦) 이야기인데 김진규(金鎭圭)가 그 시어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조선 중기에는 양반이나 귀족 권세가들의 열녀비나 열녀문은 조정에서 표창하여 비를 세우고 그 가문을 빛나게 하였지만 일반 평민은 그렇지 못하였다. 다행이 김진규 좌참성이 마침 거제에 유배와 있다가 이 사실을 알고 기록 하게 되었고, 전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정절하는 마음은 착하고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천성을 그대로 지킨 것이라고 저자(김진규)는 말한다. 특히 우리 거제도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지역이 점령당했다. 당시 부녀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절개를 지키기에는 거의 불가능 했다. 그런 격동기를 막 지난 후인 1674년에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김진규 좌참찬은 유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거제도와는 사뭇 그 생활상과 풍습이 다르겠지만, 오양역 부근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작은 기념비라도 하나 건립 했으면 한다. 이 글은 거제도 유배시절 지은 죽천집 6권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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