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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해금강(海金剛)갈도(葛島), 서불과차(徐市過此) 2.
거제 해금강(海金剛)갈도(葛島), 서불과차(徐市過此) 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4.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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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남의 서불과차(徐市過此)

☞ 차례 : 1). 서불(徐市, 徐福)의 간략한 소개 및 경남의 서불과차.
             2).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적 사실.
                 (갈도석각가, 매물도 방휼시, 일운면 와현마을, 남해도 석각)
            조서불(嘲徐芾).  봉래각(蓬萊閣)에 올라.
            3). 맺음말

 

1). 서불(徐市, 徐福)의 간략한 소개와 경남의 서불과차.

서불과차(徐市過此)는 동아시아에서 그 전설과 설화가 3국(중국 한국 일본)에 걸쳐서 전하는 멋진 문화 콘텐츠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거제도가 만들어 내야만 하는 관광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제의 유구한 역사를 왜곡해서까지 아젠다를 삼을 필요도 없다.  

2200년 前, 서불[徐市, 서복(徐福)]은 중국의 진(秦)나라 때, 낭야(琅邪) 사람으로 연단술(煉丹術)로 불로장생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의 한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 정(政)이 B.C. 221년(始皇 26年)에 6국을 정복하여 대륙을 통일한 뒤, 천하의 부호(富豪) 120000호(戶)를 함양(咸陽,현西安)으로 이주시켰으며, 죄수 700000명을 동원하여 함양(咸陽) 북판산(北阪山)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하였다. 3년 후 B.C. 218년에 천하의 명산(名山)마다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러 다니던 진시황(秦始皇)이 낭야(琅邪)에 왔을 때, 서불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어린 소년, 소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려 합니다." 시황은 크게 기뻐하며 총각 처녀 3000명을 가려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아가서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한다. (이 후 이야기 생략..  널리 알려진 이야기).....

그 후 한국 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또는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으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나라와 일본에는 수많은 서불관련 전설이 약2000 여년에 걸쳐 내려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각종 한국 고서적에 수십 편의 기록이 남아 있음).  

그러나 이 시점에서 문화관광의 콘텐츠로 활용하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전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경남 남해안의 서불과차의 예를 들어보자.

① 거제 해금강의 마애각(磨崖刻)은 비록 태풍으로 그 흔적이 사라졌다하더라도, 앞서 소개한 조선말기 고종 때 월성 이유원 선생(영의정)이 탁본을 보고 설명한 "갈도석각가(1881년作)"처럼, 역사적 사실에 신뢰성이 있는 반면,

② 매물도의 글씽이굴 마애각은 서불과는 전혀 역사적 사실이 다르다. 구전되어 오면서 전설이 바뀐 경우이다. 임진난 때, 한산도해전에서 패한 왜장이 도망가다가 부족한 물을 배에 싣는 동안 "방휼시"라는 칠언율시를 새겨놓고 갔는데, 후에 서불로 바뀌어 전해져 오고 있다.

③ 또한 일운면 "와현"마을이 서불의 유숙지로써 현재 소개되고 있는데, 단지 "누우래"라는 지명 이름 하나로 그 이유를 들고 있어 안타깝다. 그래서 와현 마을의 지명 역사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④ 남해도 석각은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은 얼핏 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나즈막하고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上部)에 있는 점이 특이하며, 마치 종이에 글을 쓴 것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상형문자(象形文字)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암각화(岩刻畵)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하며, 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 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旗)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당시 2000년 前, 중국은 어느 정도 글자체가 완성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방사였던 서불이 글자를 순서도 없이 새긴다거나, 알 수 없는 상형문자를 누운 바위에 새긴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에서, 단순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니, 아래 부분에 새겨진 [하늘 "天" “上”] 자가 위 글과 동시대에 돌에다 새겼다면, 그건 틀림없이 남해도 가을 "밤하늘 별자리"를 동양적인 방법으로 새긴 것임에 틀림없다.(그런 경우는 첨성대 제작 시기와 비슷하게 봐야한다.) 여하튼 남해 석각은 앞으로도 연구해야할 대상이다.

/ 개인적 의견을 덧붙이면, 남해군 석각은 너무나 명백하여, 누가 봐도 사천시 조세원 선생의 ‘별자리’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선조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나중에 이 땅의 후손들에게 웃음거리로 전략할 수도 있다. 이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해군의 ‘서불프로젝트’는 신중히 추진해야 한다. 현재 제주도의 서불과차 전시관과 공원은 전체운영비의 10% 못 미치는 수입을 얻고 있으며, 10년째 제주시 보조금으로 적자를 매우고 있는 실정이다. 現 시점의 무리한 프로젝트가, 미래 세대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도해법과 만세고등법으로, 천명의 힘으로 새겼다”
⑤ 또한 서불이 당시 동해로 떠날 때는 진시황이 소전체 또는 예서체로 글자를 통일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제주도 목사의 정방폭포 서불과지(서불과차) 기록에도 그 글씨가 과두문자(올챙이문자)였다고 하는데, 남해도의 석각은 상형문자(?)에 가깝다. 거제도 해금강 문자는 이유원선생께서 도해법, 백세고등의 모양이었다고 기록에 전하니, 제주도와 거제도의 마애각은 시대상황으로 볼 때 소전체 前의 글씨체로 보여져 더욱 신빙성이 크다 하겠다.

2).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적 사실(갈도석각가, 매물도 방휼시, 일운면 와현마을)  

(1). 갈도석각가(葛島石刻歌) / 가오고략(嘉梧藁略). 月城 이유원(李裕元) 1881년 作.

[“영남의 기성(거제)현 해상에 "서불과차"라는 4자가 있다는데, 여기 지역은 일본과 접해있다네. 편히 사람들이 탁본하여, 보고 말하길, "서불" 2자는 맞으나 "과차" 2자는 아니구나. 내가 보기에 "과차 2자까지 보았다" 말하며 천년을 전해 왔네. / 본래부터 작고 큰 것이 아니라 진흙에다 본떠서 새겨 표시했고, 본래부터 글자가 오래되어 긁히고 깎여서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랐도다. 자연스럽게 그대로 베끼어 뚜렷이 남아 있는데, 몇 번의 비바람을 겪고 오래되어 희미해져 검게 되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어찌 할 수 없어 이 방법으로 하여 새겼구나. 글씨는 도해법과 만세고등법으로 천명의 힘으로 새겼다.”]

앞서 <해금강 1.편>에서 소개한 이유원(李裕元)의 작품 갈도석각가(葛島石刻歌)는 1881년 거제도 유배 때 저자가 직접 해금강(갈도)에 배를 타고 가서 탁본을 한 후에 남긴 작품이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 "기성죽지사"에서도 언급 하지만 거제 해금강 서불과차 증거 중에 현존하는 가장 자세하고 신뢰성 있는 기록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불" 두 글자는 비록 옛 문자이기는 해도 알아 볼 수 있었지만 나머지 글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글자 형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옛 서법(書法)의 일종인 도해법(倒薤法)과 백세고등(百歲枯藤) 방법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저자의 언급으로 보아 2000 여년 전에 만들어진 글씨체이며 서불과차의 자취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일설(문중門中 전해오는)에 의하면 秋史 김정희의 수제자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스승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1840~1848년)때 필요한 물품과 함께 당대 금석문의 대가였던 스승에게 해금강 서불과차 금석문을 탁본하여 보내 의뢰했다하나 그 명확한 답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거제에서 제주도까지 운송선이 있어 거제도 특산물 표고버섯을 제주도인들이 좋아해서 많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원(李裕元)선생 거제유배기간은 1881년 8월1일 ~ 동년 12월까지(거제면)이다.

(2) "거제부지[巨濟府志]", 이충무공전서 권14.(李忠武公全書卷之十四), 수록된 자료.

<每味島 "매미도" 방휼시(蚌鷸詩) 소개.>

距統營不遠 故老多有目擊者 忠武公閑山大捷後 敗歸倭酋題刻七律一首於巨濟外洋每味島石壁云 [통영에서 멀지 않는 거리에 있다. 많은 늙은이가 목격자다. 충무공의 한산대첩 후에 패하여 돌아가는 왜군의 장수가 거제도 외양(외해) 매미도(매물도) 석벽에 칠언 율시 한 수를 새겼다.]

① 방휼시(蚌鷸詩) 조개와 황새, / 매미도 석벽(每味島石壁)

◯ 거제부지 수록, 한자 중에 "푸른 글자"는 다른 책에 수록된 글자와 각기 다른 한자 임.

海蚌乘陽怕水寒 바다조개가 찬 물이 두려워, 양지 찾아 올랐는데

鷸禽何事苦相干 황새가 무슨 일로 괴롭게 서로 건드리나,

身離窟穴朱胎損 몸이 구멍 속을 나왔으니 붉은 태가 손상되고

力盡沙灘翠羽殘 모래 여울에서 소진한 몸 푸른 날개 쇠잔하다.

閉口豈期開口禍 입을 닫고 있을 적에 어찌 열은 입의 화를 알까?

入頭雖易出頭難 머리가 들어 간 뒤에는 아무리 빼려 해도 쉬이 나오기 어렵구나

早知俱落漁人手 어부의 손에 함께 떨어질 줄 일찍이 알았다면

雲水飛潛各自安 구름에 날고 물에 잠겨 피차 서로 편할 것을,

[주] 구전되어지고 있는 매물도 석벽의 "서불과차" 전설은, 방휼시(蚌鷸詩)를 말함을 알 수 있다. 위 방휼시에서 조개는 조선을, 황새는 일본을, 어부는 중국을 비유한 글이다.

 

② 방휼시(蚌鷸詩) / 가등청정(加藤淸正, 1562-1611), "나려칠률" "한양오백년가"에 수록. 

大蚌隨陽避日寒 크고 큰 저 조개 추운 날에 집을 지어 양지를 찾아 나와 물가에 붙었더니

鷸禽何事努相看 날아가는 저 황새가 무슨 일로 성을 내어 서로 밉게 보았는고.

身離屈宅朱態損 가련하다 저 조개 굴택을 떠나올 제 붉은 태가 손상되어

足踏沙場翠翼殘 어렵도다 이 황새여 사장을 밟아들 제 푸른 나래 쇠잔하다 불쌍하다 이 황새야

閉口之難開口害 입을 막고 있을 적에 입을 열면 해될 줄을 어이 그리 몰랐는고.

入頭惟易出頭難 가엽도다 저 황새야 들어오긴 쉽건 만은 나가기가 어려운 줄 네가 어이 몰랐던가

早知俱落漁人手 우리 둘이 어옹 손에 한가지로 떨어질 줄 일찍이 알았던들

雲水飛潛各自安 나는 나는 구름가고 잠긴 너는 물에 가서 피차 서로 편할 것을, 어찌하다 못하여서 후회한들 쓸데 있나, 둘의 목숨 그만일세.

③ 방휼시(蚌鷸詩), 중국 장수가 평양을 돌아보다가 조개와 황새의 사세에 비유하여 이 시를 지었다. / 선조26년(1593년) 난중잡록(亂中雜錄) 수록.

老蚌親陽爲怕寒 늙은 조개가 볕을 쪼임은 추위를 겁냄인데

野禽何事苦相干 들새는 무슨 일로 괴롭게 서로 건드리나

身離窟穴朱胎碎 몸이 구멍 속을 떠났으매 붉은 태가 부서졌고

力盡沙灘翠羽殘 모래 여울에서 힘이 다되었으매 푸른 날개가 상했네.

閉口豈知開口禍 입을 닫고 있을 적에 어찌 입을 열 때의 화를 알겠으며

入頭那解出頭難 머리를 들이밀 적에 어찌 머리 나오기 어려울 줄 알았으랴

早知俱落漁人手 어부의 손에 함께 들어갈 줄 일찍이 알았더라면

雲水飛潜各自安 구름과 나는 놈 물에 잠긴 놈 각기 스스로 편히 할 것을,

(3) 와현(臥峴)마을 지명 어원 

거제시 일운면 와현 마을은 천혜의 백사장을 가진 아름다운 마을이다. 지세포를 지나 누우레 재를 넘어서면 멀리 해금강이 펼쳐있고 내도 외도 구조라가 한눈에 들어온다. 멋진 풍경과 해수욕장을 지닌, 와현(臥峴)마을의 지명변천을 살펴보자.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옛 마을 이름 '눌일(訥逸)'이 >'와일(臥一, 臥逸)'로 >다시 '와현(臥峴)'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와현리의 지명 어원은 '눌일치(訥逸峙)'가 변하여 바뀐 이름이다. 고개 이름 '눌일티(누우레재)'에서 유래되었다. 옛 고려시대에서 조선중기까지는 마을을 "눌일몰(눌이실), 눌일곶리, 고개이름은 '눌일티(누울고개)', 뒷산 망대 명칭은, '눌일곶망' 등으로 불리어 졌다. 현재 마을지명은 조선후기(약 17세기 말)부터 "와현(臥峴 누운고개)"이란 지명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중기에서 현재까지 "와일포, 와현, 누우래, 눌일곶리"등이 함께 혼용 사용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지명의 역사성 지속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누운고개 누우래고개(재) 이름이 참 많다. 거제에도 와치(臥峙,누운재)가 있다. 이 '와치' 고개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곳이다. 예전에 신현읍(新縣邑) 서북단에 위치한 와치마을은 현재는 삼성조선소에 편입되어 이주하였으나 그 전에는 사등면(沙等面) 사곡(沙谷)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를 '누운티'라 하여 고개 마루에서 누어 쉬어간 곳으로 와치(臥峙=臥峴)라 하였다.  

와현 지명 어원인 '눌일'이란? 우리나라 고유어로써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여 마치 다락이나 옥상위에 집들이 있는 것처럼, 멀리 보인다는 뜻으로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함축한 말이다.  

아래의 조선조 역사 지명 기록을 볼 때, "눌일리 >누일리> 누울리> 누우래"로 "눌" 자가 "눕다"로 의미 변경되어 "눌일>와일>와현"으로 지명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① 정조2년 1778년 승정원일기에 경상도 거제부 둔전에 관한 보고서 중, "눌일포>와일포"로 지명 변화 기록이 있다.

[ 文臣 徐有防, 以耆老所言啓曰, 本所素稱殘薄, 若干給代, 不足爲養老之需, 自前設屯, 以補粥飮之資矣。慶尙道巨濟府民人等呈訴內, 本府 楊花亭 項里 '臥一浦', 望歭 書堂洞 等地, 本非封山牧場, 自是閑曠之處, 而土品亦甚膏沃, 政合起墾云, 只以民人等所訴, 有難準信,] 문신 서유방, 기로소가 아뢰기를, 본 지역은 본디부터 쇠잔하고 가난한 곳이다. “본소(本所)의 급대(給代)는 노인을 봉양하는 비용으로 부족해서 예전부터 둔전을 설치하여 죽음(粥飮 묵은 죽)의 비용을 보탰습니다. 경상도거제부민(巨濟府民) 백성의 하소연 안에, ‘본부(本府)의 양화정(楊花亭), 항리(項里 구조라), '와일포(臥一浦 눌일포)' 망치 서당동, 등의 땅은 본래 봉산(封山)과 목장(牧場)이 아니고 원래 묵고 있는 넓은 곳이어서 정히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기에 합당합니다.’ 하였습니다.  

[주1] 둔전(屯田) : 고려 조선시대 군수(軍需)나 지방관청의 운영경비 조달키 위해 설정했던 토지.

[주2] 절수(折受) : 봉록(俸祿)으로 토지(土地) 또는 결세를 자기(自己) 몫으로 떼어 받던 일

[주3] 급대(給代) : 딴 물건(物件)으로 대신(代身) 줌

② 집성』 완의 입의(完議·立誼) 乙丑(1805년) 19세기 초의 5동(항리, 왜구, 망치, 양화, '와일곶臥逸串')의  곽세전(藿稅錢)이 35냥,  관청곽(官廳藿) 61丹이었다(거제소다포염곽전절목『巨濟少多浦鹽藿田節目』)(1890년), 등의 기록上, 지명변천은,  눌일(訥逸) >와일(臥一, 臥逸) >와현(臥峴)으로 바뀌었음을 증명한다. 

(4).  조서불(嘲徐芾 서불을 조롱하다.) / 김시습(세종 17년 1435~ 1493년 ) 

인생단백세(人生但百歲) 인생이 한껏 해야 백년도 되나마나 

수천차재천(壽天且在天) 그나마도 수명 장단 하늘에 달렸거늘  

언능인세간(焉能人世間) 어쩌면 이 세상에 허구 많은 사람들이 

진득팽조년(盡得彭豎年) 모두가 팽조의 나이처럼 산단 말인가 

삼산수소견(三山誰所見) 그 누가 삼신산을 보았다더냐 

선이수소전(仙餌誰所傳) 그 누가 신선의 약을 전한다더냐 

나하일필부(奈何一匹夫) 하나의 평범한 백성되어서 

기사만승주(欺詐萬乘主) 대단히 높고 높은 임금을 속일려뇨 

일가입동해(一舸入東海) 큰 배 뛰워 동해 먼바다 떠난 뒤로는 

표묘무인도(漂渺無人覩) 까마득히 소식조차 전혀 없더란다.

삼천동남녀(三千童男女) 애매한 삼천명의 동남동녀만이

고고제제수(呱呱啼啼隨) 울며 불며 그 뒤를 따라간다네

축사천재하(逐使千載下) 천년이 지나간 오늘에 와서

면회양가비(緬懷良可悲) 생각하니 그들이 불쌍하도다.  

(5). 봉래각(蓬萊閣)에 올라 / 권근(權近,1352~1409년)  

蓬萊古閣在高丘 봉래각 옛집이 언덕 위에 높이 있어

破礎頹垣野草秋 깨진 주초 무너진 담이 가을 풀에 묻혔네.

徐市不還天渺渺 서불이 아니오니 하늘이 아득한데

安期難遇水悠悠 안기를 만날세라 물만이 유유하이.

鼉噴雪浪長風壯 고래는 물결 뿜어 바람이 길게 일고

鼇戴神山灝氣浮 자라는 신산을 이고 맑은 기운 떠오르네.

秦漢到頭何事業 진황(秦皇)과 한무(漢武)의 마지막 사업이 무엇이길래,

白雲千載使人愁 천 년 동안 흰 구름만 시름에 잠겼구려.

[주1] 서불(徐市)와 안기생(安期生) : 서불과 안기생(安期生)은 모두 진나라 때의 방사(方士). 시황(始皇)은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서불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자(使者)를 해중(海中)으로 보내어 안기생을 만나려 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주2] 자라는 신산을 이고(鼇戴神山) : 발해(渤海)의 동쪽에 신선이 산다는 영주(瀛州)ㆍ봉래(蓬萊)ㆍ방호(方壺) 등 다섯 산이 있는데, 원래 파도에 밀려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상제(上帝)는 책강(策彊)을 명하여 15마리의 큰 자라에게 이들 산을 이고 있게 하였더니, 그 다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

[주3] 진황(秦皇)과 한무(漢武) :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는 부질없이 신선이 되려고 노력하였지만 끝내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3). 맺음말 : 앞서 소개한 ‘거제해금강 1.’편에 나오는, 조익찬(曺益贊)장군의 <갈도(葛島,해금강)> 1870년대 作品과 이유원(李裕元)선생의 1881년 作品 <갈도석각가(葛島石刻歌)>에서 공통점을 발견 할 수가 있다. “해금강 석벽의 바둑판 흔적 위에 서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갈도석각가에서 언급한 ‘과차’ 두 글자는 아니라는 탁본소회와 그리고 “도해법과 만세고등법으로, 천명의 힘으로 새겼다”는 언급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거제해금강 마애각이 실존했다는 증거이다.

이에 해금강 전망대에 옛 선인이 남긴 한시(漢詩) 한 편쯤은 감상할 수 있도록 설치했으면 한다. 다른 지방의 관광객에게 천혜의 절경 해금강이 예로부터 칭송받는 명승지임을 알릴 수 있는, 김창협(金昌協)의 <해행(海行) 해변을 따라가며>, 조익찬(曺益贊)의 <갈도(葛島, 해금강)>, 이유원(李裕元)의 <갈도석각가(葛島石刻歌)> 中에, 선별해서 안내판에다 덧붙이면 좋겠다. 우리가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이 땅 거제도를, 빛나게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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