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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李學逵) 거제도 문학(文學) 2.
이학규(李學逵) 거제도 문학(文學) 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7.2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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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신(靈登神)은 주로 영남지방과 제주지방에서 받드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영등할머니’라고도 한다. 바람의 신인 영등할미는 곧 풍작과 풍어를 비는 농경시대의 상징적인 의식이었지만, 현대에는 미신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2월에는 집집마다 영등신(靈登神)에게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와 바람의 운행을 두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풍습이었다.

특히 뱃사람들이 정성껏 위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뱃일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신령 앞에서 비는 뜻으로 희고 얇은 종이를 불살라서 공중으로 올리기도 한다.

유구한 거제역사 속에서 예로부터 거제민의 가슴속에 소망과 욕망을 두루 살피는 전통 신(神)으로써 그 역할을 든든히 해왔다.

이학규(李學逵)선생은 영남악부(嶺南樂府)에서 '영동신(靈童神)'을 바람의 신(風神)으로써 영남의 풍속이라고 소개하며, '풍파(風婆, 바람의 노파)', '영등신(嶺登神)'은 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에 술과 음식을 갖추고 풍악도 울리면서 무당들이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다. 황현(黃玹,1855~1910년)선생은 매천집(梅泉集)에서 '영동 할미를 '영등신(永登神)'으로 소개하면서 "매년 음력 2월1일을 맞아 각 집마다 깨끗한 물을 떠놓고 술과 안주를 갖추고 어둑할 때 바람의 신(영등신)께 제사를 12일이나 20일이 될 때까지 지낸다"고 하며, 유교의 영향으로 토속신앙이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고 적고 있다.

11) 영동신(靈童神) / 영남악부(嶺南樂府) 1808년 作.

영동신은 풍신(風神,바람의 신)이기도 하다. 영남의 풍속이다. 매년 음력2월에 각 집마다 깨끗한 물을 떠놓고 술과 안주를 갖추고 바람의 신께 제사를 지낸다.

이 달, 제사는 반드시 날이 저물 때 행한다. 모든 상서롭지 못한 것, 문상을 가거나 장사지내는 곳을 꺼린다. 특히 개를 잡는 것을 꺼린다.

이에 대해 선비들에게 물으니, 이 풍속이 누구에게 시작되었고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두 모른다고 한다. 쌀밥과 걸린 술로 도깨비를 위하지 아니하고 조왕신께 아첨하지 아니한다.

어제는 좋은 말을 치고 매서운 바람에 흩날려 다투듯 울렸다. 맑디맑은 깨끗한 물에 채운 나의 큰 뿔잔을 보니 잠시 동안 정성스레 맞이한 별과 달이로다.

빛 또한 깨끗하고 맑은 술을 뿌리게 되니 금슬은 교량이 된다. 천천히 나는 멀리 바라보며 맑고 시원스런 하늘에 빠진다. (허왕을 정성스레 맞이한다). 늙은 무녀가 꾸짖듯 미친 듯, 강한 바가 없다면 그 어찌 창성할 수 있으랴. 어리석은 우리의 백성에게 영동신이 탄식한다. 태양(하늘)의 계획을 정성스레 맞이한다).

[靈童神 亦名風神 嶺南之俗 每歲仲春 各家陳明水 具酒肴 以祀風神 祀必用昏時 是月 忌問喪送葬及諸不祥 尤忌磔狗 問之士人 擧未知此俗刱於何人 昉於何時也 烹稻粱 漉酒漿 不爲豆豆里 不爲媚竈王 昨日打馬兎 爭鳴烈風揚 湛湛明水鑒我大觥 叶切姑 星兮月兮 旣潔且光 淸酤爲酒汛 琴瑟爲橋梁 跂余以望遠 泠然入太虛 (叶虛王切) 婆婆女巫 如誶如狂 不有所暋其何能昌 嗟靈童兮愚我之民 (叶謨陽切)]

 

12) 영동편(靈童辨) /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 1812년 作.

영남의 풍속에 매년 음력2월, 각 집마다 영동신(靈童神)께 제사를 올린다. 혹은 영등신(嶺登神)이라 하며, 혹은 풍신(바람의 신)이라고도 한다.

또는 말하길, 풍파(바람의 노파)라 했다. 찰떡과 고깃국, 단술을 제수용으로 사용한다. 사내나 여인이나 목욕재계하고 경건 엄숙하다.

진신 세족(높은 직위의 집안)으로부터 시골 농부 어리석은 백성에 이르기까지 개고기를 금하는 것은 같은 풍습이다.

"신(神)이 본래부터 영남의 좌측 어느 고을 사내아이를 해마다 음력 2월에 죽인다"고 어떤 자가 말한다. 신령은 응당 복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니 한 고을에 이런 말이 자자하게 되었다.

말세의 풍속은 안방에서 요사스런 말을 서로 옮기고 모방하게 된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에 달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라 고려시대부터 특히 귀신을 숭상하고 받들어 모셨다.

용왕이나 두두을(나무요괴, 목각인형), 도깨비 대장 비형랑(신라 진지왕 아들)같고 삼신상제 등의 이름이 심히 많다. 비형랑은 왕자라 한다. 용왕과 제석신(삼신상제)의 별도의 사당이 있다. 왕가에서도 제사를 올린다.

두두을을 생각해 보면, 고려 이의민의 경주 집에서 섬기던 귀신상이다. 또한 대관령 밖에서는 듣지 못한 말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집에서 축원하며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오늘날의 '영동'이라는 것과 비슷하다.

(설령) 영동이 어린나이에 일찍 죽었는데 즉, 어린아이가 부당하게 죽어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 또한 부당한데 딴 무리들까지 (영향을)미친다. 설령 어린아이가 아닐지라도, 시대가 변해 사당을 업신여긴다. 그 친족과 함께 합사한다.

제사 올리는 대(代)의 수가 필히, 이미 오래되었다. (설령) 또 전 왕조 고려의 4태사(四太師,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같이 베푼다. 우리 조선은 오선생(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 황)이 있다. 오로지 위패를 안치한 신령의 장소가 있고 정성스레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 있다.

각 집마다 이에 골고루 제사를 올린다. 또 세속에서는 풍파(바람의 노파)라고도 하며 풍신(바람의 신), 바람과 구름, 천둥과 비를 다스린다. 제사 드리는 예법에 있고 국왕도 제사를 올리고 서민도 사사로이 편히 제사를 올린다.

영남에선 본디 일컫기를 "우리 동쪽은 공자 맹자의 고장이다" "이름 난 현인과 고고한 선비에다 노을이 아름답고 까치가 날아다닌다." 어찌 옳지 않다고 그 귀신에게 제사 올리는 도리를 잘못이라 하리오. 진실로 당연하게 배워 익숙하게 되었으니 그 마을 우직한 백성들이 어리석어 진실로 가르침이 부족하다.

고택의 높은 벼슬 세족들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지 않고 좋아하는 귀신이 중요하다하여, 삼가 하지 않으며 무당과 박수의 일에도 부끄러움이 없다. 방탕하고 사특한 행동이 단순하고 경솔한 죄과인데도, 스스로 못난이가 되려하는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구나. 혹자는 말하길, “영동신을 버리는 것이 진실로 어렵지 않다.” 하는데 (이는) 재앙의 업보에 곧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어찌하랴. 응대하며 말한다. 예전에 서문에 표범이 숨어있다고 강가의 무당이 말하니 적량공[중국 당(唐)나라 적인걸(狄人傑)]이 모든 사악한 사당을 헐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앙의 업보를 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군자는 사리에 밝아 마음이 미혹됨이 없다. 진심으로 이치를 믿으면 사악함을 범하지 않는다. 어찌 구차스런 영동신이 영악한 것에 능하단 말인가.

[ 嶺南之俗 每歲仲春 各家祀靈童神 或曰嶺登神 或曰風神 又曰 風婆 祭用醴酒 餈餌 羹臛 男婦齋沐虔肅 自搢紳世族 以至邨畯愚甿 靡肰同風 或曰 神本嶺左某(君+邑)童子 以歲仲春而死 有靈應能(示+乃+吉)福人 一(君+邑)敬事之 末俗寢訛 轉相慕效 至于今日而極矣 愚按羅麗之世 尤尙淫祠 如鼻荊郞 豆豆乙 龍王 帝釋等名目甚多 而鼻荊謂之王子 龍王 帝釋 另有祠院 自王家祀饗之 惟豆豆乙 爲李義旼家所奉 亦未聞大嶺之外 萬姓之衆 家祝而戶禋之 如今日之靈童者也 設若靈童 夭于髫齡 則下殤不當有祭 祭亦不當及于它族也 設若非童子 秊代寢邈 以其族班祔 親盡必已久矣 設又如勝國之四太師 我朝之五先生 必有妥靈之所 必有腏享之典 各家安得以徧祭之 設又如俗所云風婆 風神 風雲雷雨 載于祀典 國王祭之 庶人安得以私享之 嶺南素號我東鄒魯 名贒碩士 霞蔚鵲起 其於非其鬼不祭之義 固當講之熟矣 彼邨蠢愚甿 固不足訓 不謂絃誦古家簪纓世族 而不恤乎好鬼之目 不恥乎巫覡之事 自底乎淫邪鹵莽之科 而不自覺也 或曰 廢靈童固不難 而如殃報立至 柰何 畣曰 昔西門豹沈巫于河 狄梁公徧毁淫祠 未聞由此而見受殃報 君子見理朙則心不惑 信道篤則邪不犯 豈區區靈童所能逞虐者耶 ]

[주] 두두을(豆豆乙) :

(1)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1184년(명종 14년)에서 1196년(명종 26년)까지 13년간 지속된 이의민 정권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는 그의 실각을 예고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한토막이 실려져 있다.

“이의민은 까막눈에다 무당을 몹시 신봉하였다. 그의 고향 경주에 나무로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자기 집에다 사당을 짓고 그 귀신을 가져다가 날마다 제사하면서 복을 빌었는데 하루는 사당에서 귀신의 곡성이 들렸다.

괴상히 여긴 이의민이 연유를 물으니 그 귀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져 울고 있는 것이다.”

(2) 신라부흥 운동을 이끈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비범한 인물. 이의민에게 신라제국을 재창업한 황제로 등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이의민의 스승이자, 벗이었고 정치적 위기를 구해주는 장자방인 동시에 직언을 하는 충신의 역할을 한다.

거칠 것이 없었던 이의민이 공경하였던 유일한 인물이다. 이의민이 최고 집권자로 군림한 후 신라 황제등극의 꿈을 포기하자 이의민과 결별하고 경주로 돌아가 김사미와 효심의 난을 배후에서 이끈다.

미타산에서 이의민의 최후를 지켜본 뒤 몇 년후 최충헌정권에 도전하는 경주지역의 민란을 이끌다가 죽는다. 스스로 경주에 있는 목우(木偶)귀신 두두을(豆豆乙)이라 자처하였다.

 

● 거제영등 할미

영등신(靈登神)은 주로 영남지방과 제주지방에서 받드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영등할머니라고도 한다. 바람의 신인 영등할미는 곧 풍작과 풍어를 비는 농경시대의 상징적인 의식이었지만, 현대에는 미신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2월에는 집집마다 영등신(靈登神)에게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와 바람의 운행을 두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풍습이었다.

특히 뱃사람들이 정성껏 위한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뱃일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신령 앞에서 비는 뜻으로 희고 얇은 종이를 불살라서 공중으로 올리기도 한다. 유구한 거제역사 속에서 예로부터 거제민의 가슴속에 소망과 욕망을 두루 살피는 전통 신(神)으로써 그 역할을 든든히 해왔다.

'영등 할마씨'는 농업과 어업 모든 곳에서 불리어진 민요이다. 한두 마디 가사만 바꾸어서, 여러 가지 노동요에 불리어졌다. 민요를 선창(先唱)하는 사람은 '영등할매'에게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소원하며 불리었다.

① '영등 할마시' / 사등면 성내리 신만순, 1926년생"영등영등 할마시야 / 한 바구리만 캐어주소 /두 바구리만 되어주소/ 영등영등 할마시 /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등할마시 비나이다/ 이 갯물이 많이 나서 /두 소쿠리 캐고 나면 / 바다 물이 들어오소 / 비나이다 비나이다.

② '영동동 할마씨(한바귀만 불아주소)' / 박또악, 거제면 내간리 1910년생 영동동 할마씨 / 많이도 하지마고 / 젝기도 하지마고/ 한바기미만 불아주소 / 영등 영등 할마시야. 봄나물을 캐러왔소 / 많이도 하지말고 / 적기도 하지말고 / 한 바구리만 불아주소 / 영등 영등 할마시야.

유달리 가난했던 어릴 시절, 동네 처자들은 나물 캐러 자주 다녔다. 나물은 많이 캐어지지 않고 햇볕에 캔 나물이 말라서 줄어들면, 나물 캐는 칼을 땅에 꽂고 그 앞에 앉아서 바구니를 돌리면서 불렀다고 한다.

또한 사리 날 갯가에 개발 가서 밀물이 들어오기 전에, 많은 식구들 걱정에 한 소쿠리만 더 캐야 되는데.. 아쉬워하며 부르던 민요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 민요의 박자는 6/8, 3/4, 3/8, 9/8 등 3박자 계열 또는 3음 리듬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6/8박자가 으뜸가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민요는 4/4박자가, 일본의 민요는 2/4박자가 대다수인데, 위의 "영동동 할마씨"는 한 음보를 2/4 박자에 곡조를 붙여서 경쾌하게 노래했다.

'영등할미' 영등신(靈登神)은 조상숭배와 달리 여성들의 힘(모계사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러한 토속신앙은 사라지고 조상숭배만 남았지만, 이것은 유교의 영향과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변화된 사회현상 때문이다.그리고 거제도 영등포(永登浦)의 명칭의 유래는 바로 '바람을 타고 순행하는 포구'로 그 어원을 유추할 수 있다.

'永登'은 '진등', 또는 '긴 등성이'라고 한자어를 훈독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육지 속의 지명에 사용할 때 붙이는 뜻이며, 바닷가 포구(항구)는 옛 부터 전해오는 영등할미에 대한 "항해 길의 안전"과 "풍요로운 바다", "바람타고 쏜살같이 달릴 수 있는 돛배" 등을 소원해, 한자의 음을 차용하여 쓰이는 명칭이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옛 사람들의 태도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 우리민속 전통의 일부로써 전승해야 할 부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13) 앙가오장(秧歌五章), 모내기 노래

이학규 선생은 민요를 수용하는 방식은 한결같지 않았다. 민요를 그대로 옮기거나 또는 일부 창작하기도 하였고 모티브만 취하여 새로이 창작하기도 했다.

앙가오장(秧歌五章)은 모두 모내기 하면서 부른 민요를 그대로 옮겨 한역한 경우이다. 민요의 고유한 리듬과 정감까지 최대한 수용하려 했는데 그로인해 전통 한시로써 시체의 격식을 이탈하게 되면서, 서민의 사설과 방언까지도 구사하게 되었다.

제1장

今日晴復陰 날씨가 맑았다 흐린데

雨脚來輕颸 빗줄기에 가벼운 바람 일고나.

新秧(臼+禺) ‥ 稞 새 모를 쪄 묶어

駄向前陂時 얼마 전에 때맞춰 방죽 향해 모찜 날랐다네.

娟娟新嫁娘 고운 새색시를

姊妹相携持 자매가 서로 이끈다.

揷秧亦有法 모심기도 요령이 있어

男前而女隨 남정네가 먼저하고 여인네가 따라한다.

男歌徒亂耳 남정네 노래는 그저 귀만 시끄럽게 할 뿐이나

女歌多新詞 여인네의 노래는 사설이 많다네.

新詞四五闋 새로운 노래 너댓 편을 차례로 들어 보시오.

次第請聞之 처음 소리를 뽑을 적에는

稍揚若風絮 자못 버들강아지 같이 들리더니

轉細如煙絲 점차 아지랑이처럼 가늘게 맴도네.

若是乎怨思 원망할 수 있으랴.

怨思將爲誰 누굴 원망하리오.

儂家雒東里 우리 집은 낙동 마을

三男美須髭 세 아들 모두 수염이 예쁘다.

儂生三男後 내가 나고 세 아들이 태어났다.

父母之所慈 부모의 사랑에

千錢買長髢 천전으로 가발을 사고

百錢裝匳資 백전의 화장품으로 치장했다.

一棹便斷送 조각배로 기어이 보내버리니

送嫁江南兒 강남쪽 아이에게 시집보냈구려.

兼是暮春日 이에 봄날이 저물었다네.

回頭何限思 지나간 나의 회포 어찌 끝이 있으랴

愔愔白茅屋 조용한 흰 초가집

歷歷靑楓枝 역력한 푸른 단풍나무 가지

江南異江北 강 남쪽과 북쪽이 다르네.

事在鹺魚鮞 생선 알을 절이는 일로

三月送郞行 3월에 신랑을 보내

九月迎郞期 9월에 맞이할 기약한다.

江潮日兩回 강 조수는 날마다 2번씩인데

燕子春深知 제비는 봄 깊은 줄 아는지

潮回復燕去 조수가 돌아나가니 제비가 떠난다.

敎人長別離 사람은 죽어서야 이별한다지.

鮮鮮皷子花 곱디고운 저기 저 메꽃

蔓絶花亦萎 덩굴이 끊어지면 꽃도 함께 시드나니

阿姑自老大 시어머님 어른이라고

言語太差池 하시는 말씀 어이없어라

出門試長望 사립문이라 밖을 나와 하염없이 바라보며

涕泗霑兩腮 흘리는 눈물 콧물에 두 뺨을 적시는구나.

隔江父母家 강물이 막혔네. 저 너머 어매 아배 사시는 집

烟波正無涯 물안개 자욱하여 끝간데 모를레라

哀哀乎父母 어쩌자고 울어매 울 아배는

生儂太不奇 나를 왜 이리 낳았소?

當日不生儂 이내 몸 낳지를 않았던들

今日無儂悲 오늘에 이 슬픔이야 아주아주 없었을걸.

 위 마지막 구절과 유사한 민요가 전남 지방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 내용이 이와 같다. “아배 아배 우리 아배는 / 뭐하려고 날 낳아갖고 / 날 날적에 잘 났으면 / 이런 고생도 안하련만” 당시 김해지방에서 채집하여 한역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남 경남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불리어졌던 민요임을 알 수 있다.

제2장 친정 가는 소리

今日不易暮 쉬이 저물지 않는 하루

努力請揷秧 논 모내기가 힘들구나.

秔秧十万稞 십만 벼 모를 쪄서

稬秧千稞強 천개 모내기 괴롭네.

秔熟不須問 벼가 자랄지 모르겠지만

稬熟須穰穰 벼가 익어 풍년들면

炊稬作糗餈 벼로 쌀떡 만들어

入口黏且香 먹으면 찰지고 맛나겠지.

䧺犬磔爲 살찐 수캐를 차버리고

嫰鷄生縛裝 어린 닭을 묶어서

持以去歸寧 손에 들고 친정아버지 뵈려 가는데

時維七月凉 때는 서늘한 7월 달,

儂是預嫁女 너는 출가외인

総角卽家郞 총각은 이제 집의 아들이고

儂騎曲角牸 너는 걸터앉은 뿔 굽은 암소다.

郞衣白苧光 흰모시 사내 옷이 빛나네.

遅遅乎七月 지루한 7월이여

歸寧亦云忙 친정아버지 바쁘다하니

但願七月後 7월 이후에 바라건대

霖雨九旬長 장마가 구십일 내내 이어지길.

 

제3장 쌍랍환(雙鑞環) 민요 '쌍금쌍금 쌍가락지'.

조선후기에 이르러 사대부 사이에서도 민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고, 백성으로부터 애민의식이 점철된 동력이 생겨나, 현실주의적 문학세계에 공감했고, 민중들의 생활양상과 감정을 나타낸 민요를 한시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유몽인 홍만종 최성대 이사질 이유원 홍양호 정약용 이양연 이학규 등은 이에 긴요한 역할을 한 분들이다. 민요에 대한 근대적인 의미로는 민중문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의의가 있다.

민요한시야말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요한시 개척한 분 중, 이학규(李學逵) 선생은 거제도를 2차례나 방문해 거제민요 <기성마고사(歧城蘑菰詞) '거제표고버섯찬가'>를 7언 한시로, <쌍랍환(雙鑞環) '쌍금쌍금 쌍까락지'>를 5언 한시로 옮겨 놓았다.

다음은 쌍가락지 민요를 한시로 바꾸어 놓은 이학규(李學逵) 선생의 작품인데, 오빠가 누이를 모함한 데 대한 항변으로 이어지는 사설로써 경상도 지방에 널리 불러진 유행민요이다.

◯ 쌍랍환(雙鑞環) 쌍가락지 노래

纖纖雙鑞環 쌍금쌍금 쌍가락지

摩挲五指於 호작질로 닦아내어

在遠人是月 먼 데 보니 달이로세

至近云是渠 젙에 보니 처자로세

家兄好口輔 오랍 오랍 울 오랍씨

言語太輕疎 거짓말씀 말아주소

謂言儂寢所 처자애기 자는 방에

鼾息䉶吹如 숨소리도 둘이로세

儂實黃花子 나야 본디 국화씨라

生小愼興居 애리서로 단정했소

昨夜南風惡 동남풍이 디리 불어

窓紙鳴噓噓 풍지 떠는 소리라요.

여동생이 자는 방에 바람이 불어 문풍지가 떠는 소리를 오해하곤, 오빠가 여동생을 의심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민요를 부른 여성 가창자들은 자신들을 오해한 오빠에 대한 원망을 노래하고 있다.

현재 거제지방에 구전되는 <쌍금쌍금 쌍까락지>민요는 삼삼기과 모내기 등을 하면서 불린 부녀 유희요이다. 거제의 민요는 대부분 4․4조 4음보율이 기본을 이룬다.

제4장 주흘령[主紇嶺]

曾聞主紇嶺 주흘령 고개에 대해서 들어보니

上峯天西陬 천서추가 최고봉이라네

雲亦一半休 구름도 거반 쉬어 넘고

風亦一半休 바람도 거반 쉬어 간다네

豪鷹海靑鳥 날쌔고 거친 송골매도

仰視應復愁 주흘령 바라보고 다시 시름겨워하네

儂是弱脚女 나는 다리 약한 여인네

步履只甌寠 작은 언덕이나 걷는다지만

聞知所歡在 내 좋아하는 사람 있다 소문 들으면

峻嶺卽平疇 높은 언덕도 평지인양

千步不一喙 천 걸음 걸어도 한 숨 쉬지 않고

飛越上上頭 날 듯 달려가 꼭대기에 오르리라.

 

제5장 앙가[秧歌]:날라리(악기의 일종)징과 북으로 반주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

여인의 간절한 연모의 정을 그리고 있는 제5장 앙가[秧歌]는 첫 절구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연인을 향한 투정을 노래하고 있다.

미덥지 못한 상대에 대한 불만의 간접적인 토로인 것이다. 두 번째 절구에서는 이러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당신에 대한 사랑을 거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였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당당한 사랑을 확인시키며 야무진 여성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민중 사회 여성의 발랄하고 진솔한 애정의 솔직한 자세와 건강한 사랑을 노래한 민요이다.

請將馬州秤 대마주의 저울을 가지고

秤汝憐儂意 나를 사랑하는 그대 마음을 달아보아요

請將海倉斛 해창의 말을 가지고

量儂之恩義 나의 사랑도 재어보아요

不然並打團 아니면 모두 둥글게 뭉쳐

十襲褁衣帔 열 겹 치마폭에 싸서

縈之復結之 얽어매고 묶어 매어

裝作一擔蕢 한 삼태기로 만들어

擔在兩肩頭 양 어깨에 짊어지고

千步百顚躓 천 걸음에 백 번 꺼꾸러져서

寧被擔磕死 차라리 짐에 눌러 죽는다 해도

此心無汝媿 이 마음 그대에게 부끄럼이 없다오.

14) 7월 보름날 밤에 회포가 일어[中元夜有褱]

雲林一曲思千廻 구름 숲 한 구비에 수없이 돌고 도는 상념이어라

况對新秋把酒杯 더구나 가을을 새로이 맞으니 술잔을 쥘 수밖에.

幾日淸風聞海國 며칠 맑은 바람 불어와 섬나라 소식 들리는데

今宵凉月遍荒臺 오늘밤 서늘한 달이 황량한 누대에 두루 비추네.

碧簫醉後詩仍就 푸른 퉁소 소리에 취한 후, 시는 이루어져 가지만

紅藕香歬信不來 붉은 연꽃 향기가 인도한다는 말 믿지 않는다.

後約旗亭重見好 훗날에 약속한 술집으로 거듭 나아가니

纖歌定向故人開 고운 노랫소리 들리는 곳에 옛 친구가 사라지네.

相知凡幾日 서로 아는 사이로 얼마나 살았는가?

相別復經秊 이별하고 다시 몇 해 이던가?

雅語番番得 우아한 말들이 번번이 이루어져

新詩箇箇圓 새로 지은 시가 하나하나 온전하였지.

靑山行有約 청산(靑山)으로 산행해야할 약속이 있으나

丹竈定無緣 단조(丹竈)와는 정히 인연이 없어라.

江蓴秋來美 가을이 오니 강가의 부들 꽃이 아름다운데

因君一悵肰 그대로 인하여 온통 슬퍼하노라.

[주1] 기정(旗亭) : 깃발을 단 집. 술집. 옛날 술집에서는 기를 문밖에 달아 술집 표지(標識)로 삼았기에 하는 말.

[주2] 단조(丹竈) : 선가의 도사(道士)가 단약(丹藥)을 고는 부엌, 전하여 단약을 말함. 단조협(丹竈峽)은 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말한다. 단조는 단약(丹藥)을 달이는 부엌이다.

15) 증별태백산인[贈別太白山人]

樹色經冬在 나무 색은 겨울을 지나고도 그대로인데

雲容入夏奇 구름의 모양은 여름에 들어서니 기이하구나.

何時阮公屐 완적(阮籍)의 나막신 그 언제였던가?

重與道林期 길 가 숲에서의 약속을 중히 여기리라.

[주] 완공(阮公) : 완적(阮籍)을 말함.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문학가·사상가. 자는 사종(嗣宗). 일찍이 보병교위(步兵校尉) 벼슬을 지내서 보통 완보병(阮步兵)이라고 불렀다.

괴짜 시인으로 죽림7현 중에 가장 유명하다. 지배층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시골에서 쾌락과 시에 묻혀 살았다. 마음에 드는 벗을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면 백안(白眼)으로 대하여 ‘백안시(白眼視)라는 고사를 만들어냈다.

후세 연작시(連作詩)의 선구가 된‘영회시(詠懷詩)’80여 수는 고독한 영혼의 독백이다. 또한 완적(阮籍)이 술이 취하여 길 뚫린 대로 따라갔다가, 길이 다 되면 통곡(痛哭)하고 돌아왔다.

16) 증별[贈別]

勞歌一疊古陽關 이별의 노래 한 곡조 읊는 옛 양관(陽關),

無限離情山上山 한없는 이별의 정(情)이 산 위의 산이로다.

楊柳不堪重寄與 버들가지에다 어이 차마 부탁해 보내랴.

灞陵春(西+水)去秊懽 파릉(灞陵) 서안의 봄이 지난해 기쁨이었네.

[주1] 노가(勞歌) : 멀리 떠나는 손님을 전송하면서 부르는 노래.

[주2] 양관(陽關) : 실크로드의 관문인 중국 감수성 돈황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곳. 이별을 노래한 왕유(王維;699-759)의 시 ‘陽關三疊(양관삼첩)’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이다.

[주3] 파릉(灞陵) : 파릉교(灞陵橋) 버들가지 꺾어 이별하던 곳, 관우가 조조에 의탁했던 것을 정리하고 유비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는 다리. 또한 이백(李白)이 ‘송군파릉정(送君灞陵亭)’ ‘그대를 보내는 파릉정‘이라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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