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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예술인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2).
거제예술인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4.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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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예작품 및 평가

(1) 성파(星坡)의 작품평가

◯ 하동주(河東洲)는 1869년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서 출생하였고 이후 거제시 거제면에 주소를 두고 있으면서, 주로 경남 지방에서 장성(長成) 활동하시다가 50대 중반에 진주로 나아가 서예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 하지호로부터 서예를 익히고 추사서첩을 입수 받아 추사체로써 일가를 이룬, 영남의 서예대가이자 거제시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선생은 추사체의 행서(行書)에 주력하여 경지에 올랐다. 일생을 거제시와 진주시 인근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진주지역의 서예가로 활동한 은초 정명수와 도연 김정에게 추사체를 전수하여 지금까지 그 서맥(書脈)이 이어지고 있다. 추사체의 맥을 이은 전통서예가로서, 추사체 특유의 강직함을 잘 살려 신(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울 종로 선학원 법당 <중앙선원(中央禪院)> 편액, 양산(梁山)의 <통도사(通度寺)>, 고성(固城)의 옥천사 <백련암(白蓮庵)>, 부산(釜山)의 범어사 <종루(鐘樓)>와 관음전<(觀音殿)>, 통영(統營)의 용화사 <용화전(龍華殿)> <벽발산안정사(碧鉢山安靜寺)>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진주(晋州)의 <월아산청곡사(月牙山靑谷寺)><촉석루>,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아랑사(阿娘祠)> 편액, 동래 범어사의 통도사 극락암의 <원광(圓光)>, 진주 의곡사 <대흥루> 1936년作, 경남 사천읍성(산성)의 <수양루(洙陽樓)> <보승관(保勝舘)>, 경남 함안 여항산 원효암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 <산령각(山靈閣)>, 함양 구천서원 <은성재(恩成齋)>, 합천 신천서당 <류하정사(柳下精舍)>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거제시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동주의 작품은 진주지역을 비롯한 고미술가에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서예사(書藝史)에 있어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법인 추사체의 맥을 잇게 한 서예가로, 후세에 추사체 행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서예작품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같은 작가의 글씨라도 초기·중기·말기에 따라 글씨의 형태와 우열이 다르고, 작품의 대소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하여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를 논할 때 그의 소품 한두 점을 보고 그 작가의 전모를 비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파의 서예를 역사적으로 정리함에 있어, 자료의 빈곤이라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여 전하는 그의 작품도 시기에 따라 여러 형태의 조형적인 요소가 달리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흉중성죽(胸中成竹)'이란 말이 있듯이 '화가가 대나무 그림을 그리기 前, 가슴 속에 이미 대나무 그림을 담아둬야 한다.'는 뜻인데, 성파의 편액문은 그 글의 의미를 미리 가슴속에 그려놓고, 그 장소의 용도와 쓰임새에 맞게끔, 서법(書法)의 필세(筆勢)을 달리 표현한 점은 서예대가로서의 품격을 느끼게 해준다.

 

◯ 어떤 이는 평하기를, "성파의 글씨는 혹독하게 완당을 모사(模寫)하여 신의 경지에 들었으나, 한스러운 것은 그 용의(用意)를 잡지 못하고 먼저 그 보(寶)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성파 하동주의 글씨가 추사 김정희를 모사하여 기교는 신(神)의 경지에 들었으나 글씨 쓴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아,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추사체의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서축(書軸)을 이어받았고 추사의 서체를 전승∙계승 발전시켜 추사체를 더욱 안정(安靜)∙평온하게 다가 갈 수 있도록 그 서맥(書脈)을 잇게 한 분이셨다.

한편 추사 생존 시부터 추사의 글을 흠모하여 따라 쓴 분들이 많아서 추사서파를 이루기도 했는데, 특히 추사의 문하생이 너무 많아서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 추사의 제자들은 추사체를 전승해 이어가지 못하였지만, 오직 추사서를 흠모하여 연구하고 그 서맥(書脈)을 일으켜 지금까지 서예의 일가를 이룬 분으로는 성파 하동주 선생만이 유일한 듯하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로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이라 단언한다면 이후 추사체의 대가(大家)로는 거제도출신의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선생을 능가할 분이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추사체를 곰곰이 살펴보면, 털처럼 가는 획(劃)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劃)도 있고, 추하고 아름다움에 마음을 격동(激動)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 또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感情)이 그대로 붓을 통해 표현(表現)된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옛 것을 돌아보며 새 것을 찾는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반해 성파의 글씨체는 획(劃)이 기름지고 두껍고 조형미(造形美)가 더욱 돋보이며 개성(個性)의 구현(具顯)에 꾸밈없이 자연스럽다. 성파의 편액문 글씨체는 나이에 따라 혹은 그 장소의 역할에 따라 붓끝의 서선(書線)을 달리 표현하니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어우러지는 화해(和解)의 경지에 오른 작품은, 타고난 천품(天稟)과 배움을 갖추어야 이룰 수 있는데 성파의 글씨체를 두고 한 말이다. 반면에 추사체는 때때로 불안하고 괴이(怪異)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성파의 글씨체는 인간이 겪은 수많은 속세의 어려움을 초월하여 안정된 원숙미가 가득 차 있다. 숙달(熟達)의 경지(境地)에서 원만(圓滿)한 노년의 능운지지(凌雲之志) 즉, 깨달음에 이르러 편안하고 넉넉하면서, 전체가 안정된 균형미를 이루니 선계(仙界)의 정신(精神)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 1989년 거제시에서 성파 하동주 선생 묵적비 건립위원회의 노력으로 사곡 삼거리에 있는 소공원에 성파 묵적비(墨跡碑)를 건립하여 앞면에는 선생의 지본작품을 뒷면에는 생애와 작품 활동을 개관하는 비문을 새겨둠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공의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그 웅장하고 힘차며 소박하고 꾸밈이 적은 필적에 가탄과 찬미를 연발케 하고 있다. 따라서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후생(後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동주(河東洲)의 호(號) ‘성파(星坡)’는 “언덕위의 별”이라는 의미이다. 거제시 거제면 어느 언덕 위에 누워서, 별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던 경험이 가장 좋은 추억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또한 ‘星坡’는 저녁과 새벽 언덕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반짝이는 금성(샛별, 양치기 별)으로 그 상징성을 유추할 수 있는데, ‘星坡’라는 호(號)를 읽을 때마다, 프랑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프로방스 양치기 이야기 즉, ‘별’이라는 작품내용 中에, 아름다운 아가씨 스떼파네뜨와 밤새 나눈 언덕 위 별의 이야기가 언제나 연상된다. 천상과 지상, 별과 인간을 대비시켜 천상의 별만이 가지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의 순수성을 추구한 소설인데, 목가적인 배경에 낭만적인 서정을 가득 담고 있다. 성파 선생도 거제도의 맑은 밤하늘, 고향 언덕의 별을 떠올리면서, 은하수 가득 담아 붓글씨를 거침없이 써 내려갔으리라 상상해 본다.

 (2) 성파(星坡) 서예작품 소개

 

①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 김해시 구천암 종무소

 

② 경남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 옥천사 나한전 주련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옛 부처가 나기 전에는

응연일원상(凝然一相圓) 한 덩어리 둥근 모습이었다네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 했거늘

가섭기능전(伽葉豈能傳) 가섭불(伽葉佛)이 어찌 전할 손가?

 

③ 송취백성(松醉栢醒) 소나무에 취하고 측백나무에 깨누나.

 

 

④ 용화사 ‘명부전(冥府殿)‘ 저승에서 심판을 받는 전각.

 

⑤ 밀양 ‘아랑사’ 편액 1910년에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洲, 1879~1944년)가 썼다.

 

⑥ 범어사 ‘관음전(觀音殿)’, ‘종루(鍾樓)’

 
 

⑦ 진주 의곡사 ‘대흥루(大興樓)’ 병자년 1936년.

 

⑧ 서울 종로 ‘중앙선원(中央禪院)’ 편액

 

⑨ '조월경운(釣月耕雲)‘ 구름을 헤치고(耕雲) 달을 낚아 올린다(釣月)는 말이다. 달이 비추는 밤에 홀로 물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몰렸다가 흩어지고, 또한 떠 있는 달은 둥글었다가 다시 이지러지기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글이다. 속세에서 벗어난 고고한 마음의 경지를 나타낸다. 곧 깊은 곳에 숨어사는 은자의 생활을 묘사한 표현인지라, 서체에서 강한 기운과 절제된 강직함이 우러난다.

 

⑩ 합천 신천서당 ‘류하정사(柳下精舍)’ 버드나무 아래 학문을 닦는 집.

 

⑪ ‘가화유도사기적(嫁禍有道辭其的)’ 하동주가 쓴 족자 한편의 글씨 내용을 보면, [嫁禍有道辭其的(가화유도사기적) 己卯臘 叟星坡河東州老腕(기사랍 수성파하동주로완) : 화(禍)를 피하는 방법이 있으니 그 화살의 표적을  없애는 것이다. 기묘년(1939년) 말에 늙은이 성파 하동주가 쓰다].

 

⑫ 청세정(聴洗亭) 갈고 닦고 다스리자. 굵고 거친 붓으로 거침없이 쓴 글로 학문에만 정진하고자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⑬ ‘경화천(敬華天)’ 화엄종과 천태종을 삼가 공경하며. 하늘 아래 부처의 배움을 실천하는 겸손의 미덕을 읽을 수 있다.

 

⑭ 함양 구천서원 ‘은성재(恩成齋)’ 감사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수양하자.

 

⑮ ‘인중락(忍中樂)’. 인중유락(忍中有樂) 참는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⑯ 족자 및 병풍

 
 

⑰ 시서유업[詩書遺業] 시와 글씨로써 선조의 업으로 삼는다. 또는 벼슬에 뜻을 두지 말고 학문을 중시하라. / 영정치원[寧靜致遠] 편안하고 정숙해야 원대함을 이룬다. / 담박명지[澹泊明志]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 / 근급시보[勤給是寶] 근면하고 베풂이 곧 보배이다.

성파 만년에 쓴 글귀로, 인생의 완숙된 철학을 표현한, 최고의 성숙미가 돋보인다.

 

⑱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동록당(東麓堂)’, 서상리 ‘기성관(岐城舘)’

 

⑲ 경남 진주 ‘월아산 청곡사(月牙山 靑谷寺)’

 

⑳ 경남 함안 여항산 원효암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 '산령각(山靈閣)'

 

○ 경남 사천읍성(산성)의 ‘수양루(洙陽樓)’ : 수양(洙陽)이라는 이름은 사천의 옛 지명 사수(泗水)의 水자와 곤양(昆陽)의 陽자를 따서 수양이라 지었다. / ‘보몽관(保朦舘)‘ : 달빛을 편안히 지키다. 객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5) 서예(書藝) 그리고 맺음말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말은 마음의 소리요, 서예는 마음의 그림이다.”하였다. “서예란 자기 마음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는 후세까지 자신의 마음을 그려서 전하는 예술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서예(書藝)는 동양의 독특한 필기도구인 붓을 사용하여 글씨를 심미적으로 서사(書寫)한 것으로 조선시대까지 서(書)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서도(書道)로 잠시 지칭되다가 8·15해방 이후 독립된 예술분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서예(書藝)로 부르기 시작했다. 쓰는 방법에 따라 한자(漢字)의 경우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隸書)·전서(篆書) 등의 서체가 있고, 한글에는 궁체(宮體) 등이 있다. 글씨에 관한 이론이나 저술은 서체별 필세론(筆勢論)을 비롯하여 품등(品等)·감상·수장에 대한 내용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서법은 집필법과 운필법이 핵심을 이루었다. 글씨의 기본결구, 점·선·획의 비례, 균형, 조화 등을 통해 독특한 조형미·율동미·공간미 등을 추구했으나 옛 대가들의 법도와 서풍을 따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법첩(法帖)의 성행과 더불어 독창성보다는 전통성이 중시되었다.

 

○ 중국 명나라 여곤(呂坤)이 쓴 신음어(呻吟語)편에서, 모필(毛筆) 글씨를 즐겨 쓰는 서도(書道)에 정진하면 3가지의 크나큰 법도(法道)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자신의 몸을 가누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둘째는 인물을 등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며, 셋째는 나라를 경영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서예(書藝)에서 서(書)는 성인의 말씀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글에 담긴 정신이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서예(書藝)는 미술보다는 문학에 더 가까운 예술이라, 이른바 서아일체(書我一體)의 경지를 이루어야 한다. 이에 심신단련(心身鍛鍊)∙성신극기(省身克己)∙수신지도(修身至道)∙용인처사(用人處事) 및 경세재물(經世宰物)의 치도(治道)를 동시에 터득하고 체득하는 묘리(妙理)를 제공한다.

 

○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의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 1827~1886) 선생이 어린 시절,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으로부터 행서와 초서를 배웠고 이후 장성하여 장사랑(將仕郞) 9품 문관직 관리로 근무하다가 추사서첩을 입수해, 아들 하동주에게 서(書)를 전수케 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성파 선생은 해서체(楷書)에 정통하고, 행서와 초서를 배운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차에, 추사서첩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추사체를 익혔다. 선고(先考) 하지호 공이 돌아가신, 18세 때인 1886년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였고, 그의 나이 40세쯤 경남지역에서 최고의 추사체 명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0년대부터 전국적인 서예대가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 전하고 있는 성파 작품 대부분이 성파 나이 60대 혹은 70대의 것이라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이에 선생은 자랑스러운 거제예술인으로서, 근현대서예사의 개창자로 이름을 남긴 수많은 분들의 실질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또한 조선시대 거제도 유학자들의 문필(文筆)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그 명맥을 이은 유일한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체에서 동록 정혼성과 추사체의 필체(筆體)를 한꺼번에 들어다 볼 수 있다.

 

○ 추사체를 이어받은 성파의 제자 중에 특히 은초선생과 도연선생은 각기 진주 의곡사와 사천 다솔사 천년 사찰에서 성파를 처음 만나 추사체를 배웠다. 성파선생 63세 1931년에 밀양 <영남루(嶺南樓)>의 대액을 써서 명성을 날리던 그해에, 도연은 사천 곤명면 다솔사에서 5년 동안 성파로부터 서법을 사사 받았다. 사천시 다솔사(多率寺)에서 효당 최범술 스님의 배려로 성파선생이 머물던 시기에 청남 오제봉, 파성 설창수, 도연 김정, 은초 정명수 등이 다솔사에 출입하면서 다담(茶談)을 즐겼다. 다솔사는 일제강점기에 효당을 포함해 만해 한용운, 김법린, 김범부 등의 ‘만당 비밀결사’라는 구국운동의 아지트로도 유명했다.

은초는 1939년 만석꾼 선친의 소개로 의곡사 청남 오재봉이 주지로 있을 때, 성파를 만나 추사체를 배웠는데 성파의 나이 71살 은초의 나이 31살이었다. 성파가 어린 시절 익힌 해서체(楷書)를 바탕으로, 이후 추사체로 원숙미를 더했다면, 성파의 두 제자는 스승의 틀에서 벗어나 제각기 양극을 달리었다. 도연은 웅장하고 힘이 있는 남성미를 느끼게 하고 은초는 청아하면서 부드럽고 온화했다. 이후 도연과 은초는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현재 이들이 경상도의 서예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 경남 고성군 옥천사에 가면 추사의 1대 제자 위당 신관호와 2대 제자 성파 하동주, 3대 제자 청남 그리고 도연과 은초의 유묵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나한전의 주련과 <백련암(白蓮菴)> 편액이 성파의 글이고, 일주문의 <연화산옥천사(蓮華山玉泉寺)>는 청남이, 성보박물관 편액 <보장각(寶藏閣)>은 은초가 썼다. 그리고 옥천사 입구 산문 석주 앞면의 <연화산옥천사(蓮華山玉泉寺)>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 그리고 안쪽 면의 <삼일수신천재보(三日修身天載寶)와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는 석각 글은 도연이 썼다. <자방루(滋芳樓)>와 자방루 마루에 걸려있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은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0~1888)가 썼으니 이들 모두가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맥(書脈)을 이어온, 큰 인연을 확신케 한다.

 

○ 경남 거제도가 배출한 서예대가 성파(星坡)는 일생을 오로지 추사체 전수에 힘을 바쳐, 강직하면서도 기예(奇藝)가 감도는 서체를 터득했다는 평을 받는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종이와 붓, 벼루와 함께 하면서, 붓을 놀리매 침착(沈着)하고 웅건(雄建)한 정신으로 사셨던 분이었다. 그의 일필휘지(一筆揮之)한 붓 끝에는 조수가 바뀌듯이 어떤 때는 국화꽃이 또 어떤 때는 매화꽃이 만발하였고, 거침없는 붓 봉오리가 때론 뾰족하고 때론 몽실한 젖가슴 같았다.

또한 그의 서체는 거제문학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과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의 지적인 단아함이 스며들어, 섬 거제도의 웅장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고 거침없이 떠다니는 자유로운 뭉게구름을 연상케 한다. 모나지도 않고 너무 곡선에 의존하지도 않는, 장중함이 고향 앞바다로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갑옷을 던져놓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황혼의 붉은 노을을 닮았다. 다도해의 섬들처럼 언제나 여백 속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넉넉하고 포근한 선생의 글씨를 보며, 지난 선생의 서도(書道)의 삶을 회상해 본다. 이에 선생의 호(號) ‘성파(星坡)’ 즉, “언덕위의 별”이라는 의미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서 샛별이 되어 밝게 빛날 것이다.

현대에 들어, 그 옛날 거제도의 화려했던 학자들의 교훈과 문필(文筆) 그리고 철학이 희미해지고, 거제도의 정체성을 담은 서(書)도 더 이상 계승하지 못하고 사라진 현실이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시대에 따라 새 옷을 입어야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중에도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는 논어의 가르침이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각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군자(君子)가 거제도에 참 많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또한 다행이다. 거제도 서법(書法)의 계승자이자 큰 스승인, 성파 선생의 서도(書道)의 삶 또한 이러하였다. 앞으로 고향 후배들이 선생을 널리 알리고 자랑스러운 거제예술인으로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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