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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1.
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1.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5.0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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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연구 : 고영화(高永和)
글 싣는 순서
▲ 자료연구 : 고영화(高永和)

1.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의 생애 및 머리말

거제인(巨濟人) 정종한(鄭宗翰 1764~?)은 자(字)가 중녕(仲寧), 호(號)는 곡구(谷口), 초계(草溪) 정(鄭)씨로, 갑신년(甲申年) 1764년(영조 40) 출생하여 그의 나이 38세 때인 순조(純祖) 1년 신유(辛酉 1801)년에 증광시(增廣試) 생원진사시 3등(三等)으로 합격한 인물이었다. 그의 부(父)는 정유(鄭游) 유학(幼學), 형 정종간(鄭宗幹), 아우 정종건(鄭宗乾) 정종조(鄭宗朝)이다. 출전『숭정3신유춘성상즉위경과별시증광사마방목(崇禎三辛酉春聖上卽位慶科別試增廣司馬榜目)』. 또한 <교남지(嶠南誌) 거제군(巨濟郡)>편에 따르면, “정종한은 조선후기 방랑객으로 본관이 초계(草溪), 철종(순조) 진사(進士)였고 문학이 넉넉하고 풍부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鄭宗翰 李朝 草溪人游子哲廟進士文學贍富見推士友(文學)]”라고 적고 있다.

그의 문집 내용에 의하면 그는 철종 재위 초까지 생존하여 장수한 시인(詩人)이나 사망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생원진사시 응시 기록에서 ‘거제인(巨濟人)‘이라고 뚜렷이 적혀 있고 그가 남긴 문집 《곡구집(谷口集)》이 전하고 있으니, 거제도 출신으로써 비록 벼슬살이는 못했지만,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후에 우리나라 중부지방 일대를 유랑한 조선후기 거제도 최고의 문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떠나온 고향 거제도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고자 했으나 19세기 전반에는, 멀리 떨어진 경남지역 출신들이 중앙의 세도정치와 혼란한 사회현실, 먼 변방지역의 차별로 인해, 정부요직의 관리로 등용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곡구 정종한은 평생을 고귀한 마음을 찾아다니는 시인으로, 시우(詩友)들과 교류하고 열망하고 사랑한, 방랑자의 인생길에서, 강호를 오만하게 유람하기를 원한 시인이었다.

고극명(高克明)의 《삼야정유고(三野亭遺稿)》 부록에 《곡구집(谷口集)》이 실려 있는데 《곡구집(谷口集)》에는 인물에 관한 아무런 정보가 없어, 거제인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과 동일 인물인지? 동명이인의 저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문집 中, ‘병신년 원조[丙申元朝]’편에 “칠십 삼세에 또 병신년이네(七十三年又丙申)”라며, 1836년 설날 아침에 거제인(巨濟人)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 선생이 73세를 맞아, 옛날 13세 때인 병인년(1776) 거제도를 떠올리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시편의 내용이 있고, 그의 출생년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다른 각종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거제인 곡구 정종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병신년 원조[丙申元朝]’편 내용은 성성한 백발 되어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지만, 앞으로 건강하고 평온한 여생과 삶의 도리(道理)를 헤아려 바른길로 가게 해달라고 소망하는 글이다.

한편 정종한 시인은 조선후기 문인(文人)이자 유자(游子 방랑자)로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유람하며 교류하였다. 그는 말년까지 벼슬살이에 대한 욕망은 좀처럼 식지 않았음을 시편 내용에서 알 수 있었다. 그의 문집에서 밝힌 유람한 지역은, 충북 단양 진천 영동, 충남 서산 부여 보령, 서울 석촌 교남동 필운대 성균관, 경기도 여주시 북성산(北城山) 신륵사 여강(驪江) 안성 남양주 화성, 강원도 원주 등인데, 대부분 서울 전지역과 충북 단양 그리고 경기도 여주 일대를 주무대로, 남한강을 유랑하며 교류(交流) 하였다.

 

 2. 《곡구집(谷口集)》과 여항문학(閭巷文學)

문집 《곡구집(谷口集)》은 4卷 2冊으로 총 160page 이고 문집의 정확한 필사 연기는 19세기 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필사본(稿本)이 있다. 그가 일생동안 대부분 남한강변을 따라, 체류 또는 거주∙기거하였으니 그가 교류한 인물들과 함께 남한강을 배경으로 지은 작품이 많다. 조선 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급제한 사람을 필두로, 각 지역 내 관리들과 은퇴한 노년의 지식인과의 교우는 그의 평생의 업이 되었다. 문집의 표지 서명은 ‘곡구유고(谷口遺稿)’‚ 권두 서명은 ‘곡구집(谷口集)’이다. 곡구 선생이 19세기 전반에 충청 경기일대를 유랑하며 지은 시편과 글월(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곡구집 목록(谷口集目錄)을 보면, 시편(詩篇)이 총 356편이고 문(文)이 57편으로 총 413편의 글이 문집에 담겨있다.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문과에 뜻이 없거나, 문과를 단념하여 생원·진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생원진사시를 택했다. 그들은 하급관직을 위해서나 관직에 관계없이 사류(士類)로서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 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정종한은 선비 또는 지식인의 무리로써 조선 후기의 위항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 조선 후기의 문인 이안중(李安中 1751~?), 여주목사 정의(鄭漪, 1782~1832),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元德 1799~1858), 이조참의(吏曹參議) 민태용(閔泰鏞 1791년~?), 호조참판 윤종의(尹宗儀 1805~1886), 여주목사 이도재(李道在 1771~?), 황주(黃州) 목사 이희현(李羲玄 1765~1828), 학자 신작(申綽 1760∼1828), 판서 신현(申絢 1764~1827), 대사헌 김양순(金陽淳 1776∼1840) 등 그의 문집에서 교류한 인물이 80 여명이나 된다. 특히 여주(驪州) 민(閔)씨 집안 분들과 많은 친분이 있었던 점이 특이할 만하다. 또한 그는 몰락한 양반 사대부는 물론 현직 관료, 중인, 평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 외 자신처럼 출신지역의 차별화로 조선의 주류에서 소외된 모든 지식인과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곡구 선생은 ‘화암아회[畫巖雅會]’라는 충북 단양 시인(詩人)들 모임, 일종의 시사(詩社)였던 즉, 문인들이 한시를 창작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서로 교류하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고 경기도 여주시 시인묵객 모임의 主회원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를 지나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가던 19세기 조선문단에는, 종래와는 '출신성분'이 전혀 다른 예술인들이 군상(群像)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시(漢詩)를 매개로 전개되는 여항문학(閭巷文學)은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 활동이었다. 여항(閭巷)이란 ‘저잣거리(민간 마을)’라는 뜻인데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상인·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여항(閭巷)은 위항(委巷)문학이라고도 하며 위항시인(委巷詩人)∙여항시인(閭巷詩人)이라 불린다. 여항 문학의 활동의 내용은 첫째 시사(詩社)의 조직, 둘째 공동시집의 발간, 셋째 공동 전기를 중심으로 한 중인역사의 정리로 요약할 수 있다. 곡구 정종한의 동시대인으로 지인(知人)이었던 조수삼(趙秀三)은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여항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당시 서리(胥吏)들을 중심으로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산과 강을 찾아 동인 문학 활동을 펴나갔으며 기존 사대부 문학과는 다른 활기찬 현실문학을 꽃피웠다. 18세기부터 퇴색해 가는 양반사대부 문화를 대체하는 문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여항인(閭巷人)들이 새로운 사회문화를 이끌었고, 이후 갑오경장·국권상실의 격변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문화운동의 주류를 형성하여 새로운 근대문학시대를 열었다. 위항인 문학은 몰락해 가는 사대부문학을 대체하기는 했으나 새로운 장르의 문학을 구현해 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으로써 그 공백기를 메꾸었고 시민문학인 근대문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까지 근대문학이 성향을 갖추고 자리를 잡는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19세기 전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절정기에 거제인(巨濟人) 정종한(鄭宗翰)도 이와 같은 여항시인(閭巷詩人) 중에 한분이었다. 고성통영거제의 문학사(文學史) 조류(潮流)적 관점에서 볼 때, 수많은 근대 문학인들의 이전(以前), 이행기문학의 가교 역할을 한 분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대표적인 곡구 선생의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중에 십여 편만 먼저 소개한다. 이후 문집의 모든 시편을 완역한 후 출판하고자 한다.

3.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의 운문(韻文)

1) 새 미나리를 맛보다[甞新芹]

靑靑水中芹 파릇파릇 물속의 미나리여~

霞然生生氣 아름다운 생기가 넘쳐나 싱싱하도다.

終朝採盈掬 아침 내내 한 웅큼 가득 캐어내니

野厨先春味 백성들 부엌에서 봄맛이 먼저 오는구나.

오언절구(五言絶句) [甞新芹] [春日卽事] 두 시편은 봄날 산뜻하고 기분 좋은 날, 싱싱한 미나리와 뻐꾸기의 상쾌한 울음소리를 등장시켜 아주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시적 화자의 심정에 담긴 봄날 정경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2) 봄날 즉사[春日卽事]

輕陰醸小雨 흐린 날씨에 비가 조금 내리니

古木生春心 고목에서 봄기운이 생겨나고나.

田翁出門笑 시골 늙은이는 문밖에서 웃음 짓고

布穀啼好音 뻐꾸기는 유쾌한 노래 부르네.

 

3) 병신년 원조[丙申元朝]

1836년 설날 아침에 거제인(巨濟人)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1764~?) 선생은 73세를 맞아, 옛날 13세 때인 병인년(1776) 거제도를 떠올리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성성한 백발 되어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지만, 앞으로 건강하고 평온한 여생과 삶의 도리(道理)를 헤아려 바른길로 가게 해달라고 소망한다.

記昔丙申如隔晨 옛날을 기억컨대 병신년이 어제 일 같은데

當時舜勺屬靑春 당시에는 평화로운 시대에 청춘을 누렸다.

今朝旅舘屠蘇飲 오늘 아침 여관에서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데

七十三年又丙申 칠십 삼세에 또 병신년이네.

七十三年又丙申 칠십 삼세에 또 병신년이라,

枉生天地一庸人 부질없이 천지가 생겨나 오로지 사람을 고용했는데

營營此世成何事 빈번한 이 세상에서 이룬 일이 무엇이더냐.

剰得凄黃髩髪新 게다가 쓸쓸한 늙은이 되니 머리만 백발이네.

剰得凄黃髩髪新 게다가 쓸쓸한 늙은이 되니 머리만 백발이라,

天公賦與未全貧 하느님이 나누어 주어 온전히 가난하지는 않구려.

傍人稱我三元頌 누군가 나를 진사(進士)시험의 우등 합격자라 칭찬하는데

爲把康寕說道頻 향후 안녕 강녕하고 도리(道理)를 잘 헤아리게 해주소서.

[주1] 도소(屠蘇) : 설날에, 술에 넣어서 마시는 약의 이름. 산초, 방풍, 백출, 밀감 피, 육계 피 따위를 섞어 만드는데, 이것을 마시면 한 해의 나쁜 기운을 없애며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주2] 삼원(三元) : ①상원(上元)과 중원(中元)과 하원(下元) ②삼재(三才) ③도가(道家)에서 세 가지 으뜸이란 뜻으로 하늘, 땅, 물을 일컫는 말 ④삼시(三始) ⑤천지(天地) 즉 세상의 시작과 중간과 끝 ⑥해원(解元), 회원(會元), 장원(壯元). 곧 향시(鄕試), 회시(會試), 정시(庭試)의 우등 합격자, 또는 진사(進士) 시험(試驗)에 1위, 2위, 3위의 세 사람.

 

4) 석양에 배를 띄우고[落日泛舟]

落日淸樓下 석양 속의 맑은 누각 아래

中流泛泛舟 강 중류에 배를 띄우니

山容交出没 산봉우리가 오고가며 출몰하고

雲影互沉浮 구름 그림자가 번갈아 물에 잠기어 떠다닌다.

飄若遺塵世 나부낌은 티끌세상을 잊어버린 듯,

翛然散客愁 유연하게 나그네의 수심이 흩어진다.

成連一去後 성연(成連)이 한번 떠난 후에

誰作水仙遊 누가 물에 신선이 노닐었다 하는가?

[주] 성연(成連) : 중국 전국시대 성련이 바다 물결이 출렁거림을 보고 거문고의 도를 깨우쳤다한다. 초(楚)나라 태생인 유백아(兪伯牙)는 성연(成連)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백아파금(伯牙破琴) 백아절현(伯牙折絃) 지음지교(知音之交) 고사성어의 어원이 되었다.

 

5) 춘우[春雨] 봄비

和煙和霧散如絲 자욱한 안개 속에 실처럼 흩뿌리고

陣陣輕風澹澹吹 이따금 가벼운 봄바람이 담담히 불어오네.

細着林園花暗醒 미미하게 드러난 정원 숲속의 산뜻한 꽃이 은밀한데

暫經原野草先知 잠시 지나온 벌판에선 풀들이 먼저 반기구나.

沉沉渾入崇朝醉 침침하니 혼탁함에 빠져 아침나절부터 취하는데

薄薄還徔落照欺 담백한 맛에 다시 가보니 저녁 햇살이 놀랍도다.

屋上班鳩啼不盡 지붕 위엔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얼룩 비둘기가

聲聲如欲喚新詩 소리마다 새로운 시(詩)를 지어 지저귀는 듯.

 

6) 늦봄 즉사[晩春卽事]

春晩山中景物賖 늦은 봄 산중에는 경물이 호사(豪奢)하고

良辰佳趣足君家 호시절 멋있는 흥취가 그대 집을 채우네.

風簷乍報琉璃磬 바람 부는 처마의 유리 같은 맑은 경쇠소리 잠시 들리더니

雨砌新開芍薬花 비 오는 섬돌 아래 작약 꽃이 새로 피었구려.

觀棋子落丁丁響 바둑돌이 떨어지며 타닥타닥 소리 울리는데

把酒香添細細霞 술잔에 향기 더하니 세세한 노을 드리웠네.

客裡神情顔自適 객지생활 안색에 유유자적한 모습 드러나니

不妨消遣暮年華 늘그막에 호화로운 소일꺼리로 무방하구나.

 

7) 화암 아회[畫巖雅會]. 충북 단양 시인(詩人)들 모임으로 일종의 시사(詩社)이다. 문인들이 한시를 창작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서로 교류하는 모임이다.

蒸霞暖旭藹晴空 짙은 노을에 따스한 태양이 쾌청한 하늘에 우거져

笻屐春山躡晩風 지팡이와 나막신 신고 저녁바람 따라 봄 산에 오른다.

嘉木欣欣新雨後 비가 내린 후에 아름다운 나무가 무성한데

繁花灼灼夕陽中 갖가지 꽃이 활짝 피어 석양 속에 빛나네.

誰憐短髮欺霜白 누가 짧은 머리칼이 흰 서리 같다고 업신여겨 가련타하는가?

猶喜衰顔借酒紅 오히려 쇠한 얼굴이 술기운에 붉어지니 기쁘구나.

石上間碁消永日 바위에서 바둑을 두면서 긴긴 날을 보내는데

時従年少較雌碓 때론 젊은이가 방앗간의 참새처럼 따른다네.

 

8) 매화(梅花)

誰遣氷姿雪裡新 눈 속의 얼음의 자태가 새롭다고 누가 말하는가?

淸馨端合伴高人 맑은 향기와 어울려 어찌 고인(高人)을 모시고 살아갈꼬.

人工赤有移天造 사람의 일에는 참된 마음이 있어, 하늘의 조화로 변하니

一室能面一度春 온 집안 얼굴에도 한 번씩 봄이 다시 찾아온다네.

[주] 고인(高人) :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 물욕에 뜻을 두지 아니하는 고상(高尙)한 사람.

 

9) 산가십영[山家十詠]

① 홍벽도[紅碧桃]. 복숭아나무의 한 변종. 홍도나무와 벽도나무를 접붙이어 된 것으로 관상용으로 키우며 열매는 없음.

紅碧桃花兩兩開 홍벽도(紅碧桃) 꽃이 쌍쌍이 피어나니

錦屛春色小墻廻 수놓은 비단 병풍의 봄 빛 따라 작은 담장을 빙빙 돈다.

只綠地僻無人見 푸름 가득한 외딴 곳에 사람은 보이질 않는데

忍遣英華自落來 꽃다움과 아름다움을 차마 떨쳐 버리려 해도 절로 떨어져 따라오네.

 

② 백오계[白烏鷄] 오골계. 시인은 지금 우리에게 오골계가 노니는 장면을, 화자의 시각을 통해 활동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盈盈來復去團團 찰랑찰랑 물에 놀다 다시 오고 뒤뚱뒤뚱 가다가

瓈觜粉腰子母難 유리 같은 부리로 허리 다듬어며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꺼려하네.

朝下中庭紛如雪 집 사이 마당에서 문안하려나? 눈처럼 번잡한데

不妨看作白壯丹 흰빛과 씩씩한 붉은색이 겹쳐 보여도 괜찮구나.

 

③ 종가장[種嘉菓] 아름다운 열매를 심다.

庭前嘉菓两三根 뜰 앞의 고운 열매 달린 두세 뿌리를

和土移來竗理存 흙으로 감싸 옮겨 왔는데 오묘한 이치가 있다.

不待看花兼食實 꽃을 즐기고 열매를 먹게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芳陰己在主人門 꽃그늘에서 내 몸이 살피니 주인 된 비결이었네.

 

④ 채유상[採柔桑] 어린 뽕잎을 채취하다

皺白草衫軟翠裳 거친 적삼에 찡그리며 흘겨보는 연한 비취색 치마 입은

一﨎僮女執懿筐 한 쌍의 동녀가 아름다운 광주리를 들고

探花掠柳逍遙去 꽃을 찾아 버드나무 스쳐 지나서 소요하며 가누나.

採採田間沃若桑 눈부시게 화려한 시골이 뽕잎처럼 윤택하다.

 

⑤ 두견화주[鵑花酒] 진달래술.

鵑花酒熟任鵑鳴 두견화술이 익었다고 두견새가 울어

一酌陶然百懬輕 한잔 술에 거나하게 취하니 온갖 공허함이 가볍네.

若使杜鵑能觧飮 만일 두견이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한다면

還應不作斷腸聲 응당 다시는 애달픈 소리 울지 않으리라.

 

⑥ 괴엽병[槐葉餠] 괴회나무의 잎을 따서 즙을 내어 보리 가루를 섞어 만든 떡.

新槐葉葉剪黃綃 새로 핀 회화나무의 잎마다, 누런 명주실을 잘라놓은 듯,

兒女爭攀沸地條 여자아이가 다투듯 잡아떼려니 좁은 곳이 들끓는다.

自道盈筐帰作餠 가득찬 광주리를 스스로 만족하며 돌아가 떡을 만들고

懸燈佳節是明宵 좋은 명절에 등을 높이 달아 올리니 무릇 밝은 밤이로세.

 

⑦ 계두선각[谿頭船閣] 계곡 꼭대기 뱃집

翠戶朱擔壓畵舲 푸른 집에 붉은 화물, 그림으로 장식한 작은 배 타고

曽從江海任居停 일찍이 강과 바다를 따라 머물며 살았는데

近來移向槐陰佳 근래에 옮겨 온 회화나무 그늘이 훌륭하고

又作山家擇勝亭 또한 뛰어난 정자가 있어 산집을 지었다네.

 

⑧ 천구어증[川口漁罾] 강어귀 고기잡이 그물.

江魚何若强磨腮 강 물고기가 어찌하여 서로 뺨을 힘써 비비는고?

枑死烝然觸石來 펄펄뛰다 돌에 부딪쳐 가로막이에서 죽는구나.

正是乘春渠自樂 봄을 맞아 그야말로 절로 즐기는 개천이니

罾人且莫截流回 그물 치는 이여~ 당분간 돌아오도록 물의 흐름을 막지 말라.

 

⑨ 백우정[白牛畊] 흰 소가 밭을 갈다.

濯濯全身白雪誇 깨끗한 흰 눈이 덮인 듯, 온 몸이 고운데

飽來牵出繋籬笆 배불리 먹인 소를 이끌고 와 울타리에 매어놓았네.

南隣少婦傳翁語 남쪽 이웃의 젊은 아낙네가 늙은이 말을 전하길,

明日儇家種木花 “내일 부지런한 집에선 목화를 심는단다.“

 

⑩ 명월완[明月浣] 밝은 달이 씻어주네.

村翁村媪敗綿衣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가 낡은 솜옷을 입고

上山下山恒暮歸 산을 오르내리락 거리다가 항상 저물녘에 돌아온다.

家有泉流流屋底 집에는 샘물 있어 집구석으로 흐르는데

夜中洴澼月中扉 밤중에 달빛아래 사립문에서 솜옷을 빤다네.

 

10) 술회[述懷] ‘支’

三代斯民歎後時 삼대의 이 나라 백성이 기회를 잃고 탄식하는데

行蔵未卜折瑷枝 내막을 모르는 체 아름다운 가지가 꺾이었네.

技竆白首雕蟲小 백발에 궁한 재능에다 글공부가 적어

路隔靑雲附驥遅 청운의 길 막히고 천리 말은 더디기만 하구나.

晩圃寒花任寂寞 해질녘 채마밭의 겨울 꽃은 적막 속에 견디며

半塘明月許推移 연못 가운데 밝은 달도 옮겨 나아가는구나.

不縁詩友能秋詠 가을을 읊을 수 있는 시 짓는 벗도 인연이 없으니

謾興誰敎倒綠危 흥이 나면 누가 넘어지고 위태하다 하리오.

[주1] 후시지탄(後時之歎) : 만시지탄(晩時之歎), 시기가 지나 기회를 잃고 탄식(歎息)하는 것을 말한다.

[주2] 부기(附驥) : 후배가 선배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음의 비유. 기(驥)는 천리를 달리는 명마. 사마천이 지은「사기(史記)」에 부기미(附驥尾)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다.’ 곧 명마의 꼬리에 붙으면 멀리 갈 수가 있다는 말로 훌륭한 인물에 붙좇아 그 덕분에 출세하거나 일을 성취한다는 뜻.

 

11) 스스로 탄식함[自歎]

半世踽涼一布衣 반평생을 외롭고 쓸쓸한 벼슬 없는 선비 신세,

夢中書釰尙依依 꿈속에서 지닌 서적과 칼이 오히려 아련하구나.

燕然勒石看靑史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새긴 역사를 헤아리니

凾丈趍隅憶絳幃 먼 곳의 스승님을 쫓아갔던 진홍색 휘장이 생각난다.

輸力荒田秋不熟 힘을 다한 거친 논밭에 가을 들어 아직 곡식이 익지 않았는데

滯身遙塞嵗將歸 변방출신에 얽매인 이 신세, 어느 해에 돌아가려나.

玄溪落日孤雲影 지는 해에 어둑한 계곡, 외딴 구름의 그림자 드리우니

目極天南雪更飛 눈 앞 아득한 남쪽 하늘에 눈이 다시 날린다.

[주1] 서검(書釰) : 서적과 칼. 옛 문인들이 몸에 간직한 물건

[주2] 연연산(燕然山) : 몽고(蒙古)지방에 있는 산으로 항애산(杭愛山)이라 불린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원년(元年)에 거기장군(車騎將軍)군 두헌(竇憲)이 남선우(南單于) 및 강호(羌胡)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계락산(稽落山)에서 북선우(北單于)와 싸워선 크게 승리하여 연연산을 점령하고 돌아왔는데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반고(班固)의 솜씨로 명(銘)을 지어 비석을 그곳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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