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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2.
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2.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5.1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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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연구 : 고영화(高永和

3. 정종한(鄭宗翰)의 운문(韻文) / 앞 기고문에 이어서.... 

12) 매화에게 묻다[問梅]

寒英詎是怕春寒 추위 속의 꽃송이가 봄추위를 어찌 두려워하랴마는

憔悴如何似病殘 병자와 같이 초췌하니 어떠하리오.

只爲年年開太盛 다만 해마다 무성하게 꽃피우기 위해서니

要人把作戒盈看 요컨대 사람이 한 손으로 잡고 교만하게 바라봄은 삼가 해주오.

[주] 계영배(戒盈杯) : 과음을 경계하기 위하여, 술을 어느 한도 이상으로 따르면 술잔 옆에 난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

13) 모내기를 보다[觀移秧].

모내기 이양법은 17세기에 들어 수리관개가 확충되고서야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이양법’은 본격적으로 실시된다. 이로써 대지주가 생겨나고 농사로도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에, 볍씨를 논밭 이랑에 뿌려 그대로 키워 재배하는 ‘직파법’이 소작농 사이에서 함께 경작되고 있었다. 이 시편(詩篇)의 전반부에서, 부잣집 농토에서는 이른 시기에 농부들이 줄지어 모내기를 하는데, 후반부는 늦은 벼가 보리를 수확할 즈음에, 논밭 이랑사이에서 늦벼가 자라나고 있다며,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전반에 농공상 부분에서 부를 축척하는, 새로운 조선의 사회질서가 재편되고 있었다. 농업부분에서도 대지주들이 산출이 높은 이양법과 2모작을 일찍 실행에 옮겨 부를 축척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냈다.

布裙葦笠列成行 베치마에 갈삿갓 쓰고 차례로 줄이어 가면서

齊手輕輕點水忙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볍게 물 점을 바쁘게 찍는구나.

自是移秧時尙早 때가 이른 시기에 모내기를 바로 시작하여 의아한데

行人說道富家庄 행인이 말하길, 부잣집 농토라 그렇다네.

 

穉禾立畞麥登塲 늦은 벼가 이랑에 줄이어 자랄 때 보리가 논밭에서 여물어

到處村聲喜降康 시골마을 도처에서 기쁘고 편안한 소리 들리는구나.

比嵗邦憂民力渴 해마다 나라의 근심이 생길까봐 백성들이 노력을 다하니

天將大有紓吾王 하늘이 우리 왕을 너그러이 여겨 수확이 좋다네.

 

 14) 백일홍[百日紅] 七言律詩

製錦軒前百日紅 제금헌(製錦軒) 건물 앞에 백일홍

一雙相對立西東 한 쌍이 동서로 마주보며 피웠네.

香添朱墨凝晨露 붉은색 먹빛에 향기를 더하여 새벽이슬에 엉기었는데

影佛綺羅妬晩風 고운 비단옷 입은 부처의 자태에 늦바람이 시기한다.

地面落來恒簌簌 언제나 땅바닥에 떨어져 수북이 쌓이어도

樹頭開爛更濛濛 자욱한 나무 가지에 다시금 곱게 피었구나.

隔簾不有呈嬌艶 주렴 저편에 아리땁고 요염한 모습 나타나도

長夏無聊霧眼中 긴 여름 눈 앞에 안개 자욱하니 무료할 뿐.

 

15) 고향을 그리며[懷鄕] 七言律詩

東江一棹杳三秋 동강에서 삿대 들고 배 저은 3년이 아득해라

夢在煙波不盡流 꿈속에서 안개 낀 잔물결이 끝없이 흘러간다.

落日寒城吹畫角 석양 속에 차가운 성(城)엔 쇠뿔 악기 소리 들리니

白雲遙夜宿虛樓 긴긴밤 흰 구름은 빈 누각에서 잠든다네.

春傳驛路梅花使 역참 길에 매화로 하여금 봄을 전해오니

嵗暮仙翁竹葉舟 세모에 늙은 신선이 댓잎 배를 타누나.

獨倚書窓眼未穏 홀로 서재의 창문에 기대니 눈길 줄 곳이 없고

天涯霜雪攪人愁 먼 변방의 눈서리는 사람의 시름을 어지럽히네.

 

16) 봄날에[春事] 七言絶句

的的名花種種開 밝고 고운 이름난 꽃이 각양각색 피어난

錦丹山下錦成堆 금단산(錦丹山) 아래는, 비단이 무더기를 이룬 곳.

松門閴寂書帷靜 소나무 사립문 적막하고 서재 또한 고요한데

日見馨香繞屋來 날마다 꽃향기가 집을 빙 둘러 퍼져온다.

 

17) 주애사탄[舟礙沙灘] 모래여울에 배가 얽매여

沙灘水弱不流沙 모래 여울에는 물이 약해 모래에 물이 흐르지 못하니

滯我行舟日己斜 내가 배를 타고 가려해도 막히고 해는 이미 저물었네.

莫向前津愁歇泊 배를 대고 머물다 시름겨워도 앞 나루터로 향하지 말라.

吾身到扅是浮家 이 몸이 문빗장에 걸린 바로 물에 뜬 집이라오.

 

18) 스스로 조롱하며[自嘲]

天生魯質莫如吾 천생에 우둔한 사람, 나만한 이 없으리라.

日浴那看不黔烏 매일 목욕한다고 어찌 까마귀가 검지 않다 하리오.

四五十年求學志 사오십년 동안 배움의 뜻을 구하였지만

终然甘作一庸夫 끝내는 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즐겨 지을 뿐이네.

 

19) 주중 유의[舟中遺意] 배 안에 남긴 생각. 七言絶句

黃梅小雨白蘋風 황매(黃梅)에 보슬비 내리니 흰 물마름에 바람 일고

五日舟行七十翁 5일 날 칠십 늙은이 배를 타고 간다네.

莫言蓬底支離若 쑥대 밑이 지루하다 말하지 말라.

自在淸冷山水中 맑고 서늘하니 편안하여 산수화 속이라오.

扁舟西去馭冷風 조각배로 서쪽으로 가며 시원한 바람 맞는데

鎭日山光水色中 언제나 산은 빛나고 그윽한 물색의 풍경이라

旅夢今宵何所似 오늘밤 꿈꾸는 나그네와 어찌 같다 하리까?

下江煙雨人空濛 강에 내리는 안개비가 사람을 묘망케 한다.

[주] 열자어냉연(列子馭冷然) : 열자(列子) 천서(天瑞)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열어구(列禦寇)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시원하게 잘 지내다가 보름 만에야 돌아오곤 했다.

 

20) 신륵사에 머무르며[泊神勒寺] 경기도 여주시 고찰 신륵사.

泊舟東塔下 동쪽 탑 아래 여강(驪江)에 배를 대고

散策夕陽中 석양 속에 산책하는데

巖隙通花經 바위 사이 틈이 꽃길로 통하고

槐陰隱梵宮 회화나무 그늘이 불당에 기댄다.

佛靈留慧日 부처님의 지혜로 머무는데

仙躅襲香風 신선의 자취에 향기로운 바람 불어 머뭇거린다.

曠恨千年事 천년의 역사 속에 한(恨)을 비우고자

晨昏警法鍾 어스름 새벽에 법종 울려 경계하네.

[주] 혜일(慧日) : 부처의 지혜를 햇빛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4. 곡구집(谷口集) 정종한(鄭宗翰)의 산문(散文), 잡저(雜著).

1) 편경설[片鏡說]. 거울 조각을 통해 본 견해. 잡저(雜著) / 번역해설 고영화(高永和)

천하의 일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時)에 맞는 하늘의 뜻 즉, 운명(천명)이 따라줘야 된다는 교훈을 설파(說破)한 글이다. 조각난 거울을 창틈으로 비춰보면서 곡구(谷口)선생은 사물을 비춰봄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바라보는 데는 괜찮다고 여긴다. 자신 또한 조각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완벽한 인간은 아닌지라, 어쩌면 온전한 거울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온전한 나의 꿈을 이루어줄 누군가를 그리다가 문득 옛 성현(聖賢)들의 교훈을 떠올리며 ‘편경(片鏡)‘을 통해 본, 인간의 무단한 노력과 운명에 대해 풀어간다. “천명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히 놓아준 다리이다(命也努力家來訪偶然橋).”

주역 서괘전(序卦傳)에서 "다시 돌아오니 망령되지 말아야 한다(復則無妄). 그러므로 무망(無妄)이다."라고 했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오고 다시 돌아오니 망령됨이 없어야겠다는 말이다. 또한 맹자(孟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그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이르게 하는 것은 하늘의 명령(命) 즉, 운명이다(孟子曰 莫之爲而爲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라고 했다. 덧붙여 중국 삼국지 제갈량(諸葛亮)이 언급하길,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謨事在人 成事在天)" ‘성공하기를 구하는 데에는 도가 있으나, 얻느냐 못 얻느냐는 천명에 따른다.’는 뜻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운명과 노력 사이에는 끝없는 싸움이 있다. 그 싸움 가운데서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할 뿐 그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했다.

 

[ 무릇 만물은 이루어졌다가도 사라지니 어떤 이가 말하길 “정해진 운수나 순서가 있다.” 혹 어떤 이는 “모든 것은 허망하여 이치가 없다.”한다. 나는 일찍이 그러한 풍설(風說, 學說)을 궁리 하다가, 부득이 집에 있는 거울 조각을 가지고 다락집의 창틈으로 집 밖의 사물을 잘 살펴보았다. 나는 거울을 아끼고 소중히 다루지만 다만 당기다 다칠까 두려웠다. 하루는 새삼스럽게 닥나무 종이를 들추어 동자에게 주려는데, 동자가 뜰에서 여러 문서들을 잘못 다루다가 찢어지게 되니 남김없이 감추었다. 나는 놀라서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말하길, “이러한 결과에도 이치가 있다. 그렇지 않는가? 삼가 망령됨이 없어야한다. 그렇지 않는가?” “이와 같이 무망(無妄)하다함은 세밀하지 못하니 감추지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이 정해진 운수가 있는 것인지라, 허물은 이에 더해져 더욱더 신중하지 아니함에 있었다. 나의 미혹함이다.” 가부(賈傳)가 말하길, “내버려두어도 그러하다.” 맹자가 말하길, “하려고 하지 않는데 저절로 되는 것은 내버려두어도 그러한데도 남을 책망한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운명(천명)에 의존함이다.” 이는 모두 이치에 통달함을 말하며 깨달음을 이해함이다. 대저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도로 돌아가더라도 운명이 아닌 것이다. 운명이 있는데 알지 못하니 전문가라는 사람 역시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틀림없이 이전 일은 나의 책임인데, 내버려두어도 그러한대도, 저절로 이루어 진 연후에야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 운명이 그러하여 심히 젊잖게 물들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사람이 있고 천명(운명)이 있는 이치이니 다소나마 2가지 계책(計策)에 따라 나의 마음이 당혹스럽기도 하고 가히 의심이 풀리기도 한다. 대개 천하의 일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것을 비록 증명한다 해도 가히 비유는 크다 할만하다. 이에 드디어 학설(學說)이 되었고 저절로 깨달음에 다다르게 하였다.]

[凢物之成毀 或謂之有數 或謂之旡妄 余嘗究其說 而不得家有片鏡樓之牕隙以明見戶外之事 余愛護之惟恐揁傷 一日因改楮摘授童子 童子蔵諸券中誤拂於庭破碎無餘 余愕然自語曰 是果有数 而然歟 抑無妄而然歟 若曰無妄則蔵非不密 若曰有數則咎在不愼是滋 余之惑也 賈傳曰置之安震(處)則安孟子曰莫之爲而爲置之安者責於人也 莫之爲者委之命也 此皆達理之論知道之訓也 夫不責於人而歸之命者非也 不知有命而專責之人者亦非也 然則何爲而可乎 必也 先畵(書)在我之責而置之安處及其莫之爲然後順受 其命而無甚懙淄則其於在人在命之理 庶可以兩畵而吾心之疑亦可以釋矣 盖天下之事無不皆然 此雖至徵可以喻大 故遂爲之說以自觧云甭]

[주1] 가부(賈傳) : 한나라 때의 천재 학자 가의(賈誼)가 태부(太傅)벼슬을 지냈으므로 ‘가부(賈傳)’라 이르고 있으며, 그가 상수(소상강)를 지나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을 애도하는 글을 지어 강물에 던졌던 고사.

[주2] 망령(妄靈) :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것.

 

2) 책을 마주하고서[書對]. 잡저(雜著). 슬픔을 없애려다 생긴 병 / 한문번역 이종묵 교수.

거제도 출신으로 1801년에 증광시(增廣試)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던 정종한(鄭宗翰 1764~?)이 출신지 거제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와중에,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충청 경기 서울지역의 문인학자들과 교류하며 하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때, 충북 단양 출신 문인 이주영(李周永)을 부여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마음에 병이 생겨 망상이 일어나고 집중력이 없어지고 헛것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문의한다. 이에 정종한 선생이 말하길, “정신을 닦지 않으면 마음의 병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아내를 잃은 사람에겐,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할 땐 경전을 읽으며 덕을 닦는 것이 으뜸”이라며, “예전에 상처(喪妻)한 아픔을 달랬던 경험이 있다”고 정종한 선생이 설명하고 있다. [고영화]

  정종한은 호서에 있을 때 이주영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주영은 상을 당한 슬픔을 잊기 위해 《장자》를 읽다가 망상에 빠지고 바둑에 몰두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종한은 그를 보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젊은 시절의 정종한은 급한 마음에 졸속으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조급증에 걸려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부친의 훈계를 듣고서야 조금 나아졌지만, 처를 잃은 슬픔에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를 불쌍히 여긴 벗이 판소리 광대의 공연을 구경하도록 하였다. 정종한은 여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잠자리에 누워서도 허상이 아른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병이며,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고전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것을. 슬픔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도적이다. 환락과 방탕으로는 도적을 막을 수 없다. 도적을 막는 방법은 고전에 있다. 책으로 슬픔을 잊은 사람이 정종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종묵]

 

[ 내가 호서 지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삼산(三山) 이주영[李周永 한산(韓山) 이씨 이희관(李羲觀 1753~?)의 생부(生父)] 어르신께서 나부산(羅浮山)1)의 집으로 찾아와 묵게 되었는데, 한밤에 나를 불러 이부자리 곁으로 오게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새 나는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지금은 또 바둑판이 눈앞에 아른거려 이렇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의 병이 심하네. 병의 근원을 찾아보면 죽은 사람을 애도하느라 그런 것이요, 병이 나도록 재촉한 것은 《장자(莊子)》라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외우는 데만 힘을 쏟다가 마음이 어지럽게 되었네. 약이나 침으로는 병을 낫게 할 수 없으니, 자네가 나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갑작스러운 일이라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이공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내게 병이 생겼던 근원과 효험을 얻었던 처방을 낱낱이 말씀드렸다. 그러자 공이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나보다 먼저 팔이 부러진 사람일세.2) 그 전말을 기록하여 내가 병을 치료할 처방으로 삼도록 해주게.”  나는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올렸다.

  예전에 과거 공부를 하면서 문제를 풀이하는 글을 지은 적이 있었다. 마침 가을 향시(鄕試)가 멀지 않았기에 서둘러 완성하려는 마음이 앞서 조금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붓을 들어 바로 글을 써내려가는 일을 능사로 여겼다. 많은 것을 탐하며 얻는 데에 주력하다 보니3) 조급한 마음에 뒤죽박죽이 되어 몇 줄만 써 내려가도 바로 망연히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이렇게 몇 달을 보내자 스스로 하찮게 여겨지고 정신이 어지러워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너무나 겁이 나서 아버님께 아뢰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너는 마음으로 터득하지 못하였으니 병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학업이란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한 다음에야 착실하게 되고, 착실한 다음에야 밝아지게 된다. 밝아진 다음에야 터득하는 것이 있어 저절로 알차게 축적된 생각에서 글이 시원스럽게 나오는 법이다. 그러면 어지러울 까닭이 있겠느냐?”

  이때부터 함부로 붓을 대려 들지 않고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를 하여 마음이 명료해진 다음에야 썼다. 이렇게 글을 완성하고 또 잘 외우니, 정신도 날마다 조금씩 맑아졌다.

  그러다가 아내를 잃고 나자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비통하고 그리운 마음에 정신이 멍해지고 눈이 침침해져서 붉은 것이 푸른 것처럼 보였다.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지고 마침내 늘 외우던 옛 책을 덮어버렸다.

  하루는 연화당(鍊化堂) 주인이 갑자기 음식을 마련하고 두세 명의 벗을 초청하였다. 동갑의 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풍악을 울리고 기생들을 춤추게 하는 등 잡다한 놀이를 시키더니 나중에는 광대를 불러다 소리까지 시켰다. 광대는 계단 앞에 서서 이쪽저쪽을 보며 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사설이 늘어지다가 갑자기 빨라지며 어조가 격앙되었다. 마침 가을이 한창이라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뜰에 나뭇잎이 날렸다.

이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눈앞에서 재주를 펼치는 모습이 가물거렸다. 소매를 펼치고 목청을 높이며 장단에 맞추어 북을 치고 부채를 흔드는데 느려지는가 하면 빨라지고 기쁜 것 같다가도 슬퍼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으니, 모두 연화당 앞에서 본 광경이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싫어서 손을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도 멈추지 않았다. 힘써 저항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음이 날로 어지러워져 병이 될까봐 너무 두려웠다. 그러다 홀연 이렇게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객사(客邪)4)라는 것이구나.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틈을 타 침입하여 맞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주인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임금이 태만하고 방탕할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가 함께 조정에 나오는 것과 같다. 이들을 물리치자면 덕을 닦는 것이 으뜸이다. 하지만 당장의 급박한 일을 해결하려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경전은 우리 주인의 훌륭한 보필이다.’  그리하여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궁구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광대의 허상은 점차 사라졌다.][주1] 나부산(羅浮山) : 충청도 부여 인근에 있는 산 이름. [주2] “자네는 나보다 먼저 팔이 부러진 사람일세. : 《춘추좌씨전》에 “팔이 세 번 부러져 봐야만 훌륭한 의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 한 말이 있다. 여기서는 먼저 병을 얻어 그 처방을 잘 얻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주3] 많은 것을 탐하며 얻는 데에 주력하다 보니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많은 것을 탐하고 얻기를 힘쓴다(貪多務得)”는 구절이 보인다.

[주4] 객사(客邪) : 질병의 원인이 되는 귀신을 이르는 말.

[余客於湖 一日三山李丈周永 來宿羅浮之舍 夜分招余致臥側曰 近我妄念紛興 連夜不成寐 今又棋在阿賭中 輾轉至此 心病之甚也 其源則哭傷也 促其發者莊子也 吾讀其書 惟誦是務 以致煩亂 非藥石可攻 子爲我醫之乎 余卒無以對 忽想曾有所經歷者 恰似李公境界 遂將自己受病之源 收效之方 歷陳之 公喜曰 子是先折臂者 可錄其顚末 備我對症之劑也 余謝不獲 援筆書進 嘗從事功令業 做釋疑文 時秋圍不遠 汲汲有速成意 不少究硏 以下筆爲能事 貪多務得 慌忙顚錯 數行之後 便茫然不省 如是有月 自視欿然 精神昏懞 若在煙霧中 於是大恐 白家大人 曰汝不得於心 宜其病也 凡所業 必求諸心 然後有實地 有實地然後有所明 有所明 方有所得 而自有充然積而油然發者矣 復何迷亂之有 自是不敢取辦於毫端 必理會於心上 心頗瞭然而後乃書之 篇成而且能誦 神心日以稍醒 自叩盆以來 心無所定 忽忽惻惻 悠揚怳悢 視丹如碧 一切無人世意 遂廢古書之恒誦者 一日鍊化主人 設不時需 邀數三知舊 修庚好也 命簫鼓女舞雜陳之 旣而進優人之唱 優當階而立 左眄右嬉 始之以靡曼之辭 忽奮迅爲激楚之響 時秋高風颯 庭葉飄飜 自是以後 每從就眠之時 怳惚有效技於前者 振袂揚喉 鼓箑中節 乍繁旋促 忽欣倏戚 閃弄熒惑 無非鍊化堂前光景 余厭惡之 揮之不去 呵之不止 拒甚力而無奈之何 由是方寸日亂 大懼成疾 忽猛省曰 是所謂客邪也 心不守宅 故投間而入 以至於抵敵不得 此主翁之勢弱也 譬如人主怠荒 姦佞竝進 苟欲屛退 莫如修德 然而救時之急 用賢爲先 夫經籍者 吾主翁之良輔也 於是重繹所講之編 日以爲常 居無何 優稍稍銷滅]

 

3) 삼부설[三浮說]. 집착 없는 자유로운 삶. 잡저(雜著). / 번역해설 고영화(高永和)

곡구(谷口) 선생은 70대 중반을 넘긴 말년에, 자유로운 영혼과 욕심을 비운 삶속에서, 살아온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부(三浮)’라는 뜻으로 3가지 예를 들어 ‘자유(浮)’ 즉, 집착 없는 삶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글 속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는데, 자랄 때는 거제도 바닷가, 중년에는 서울생활 그리고 이후 노년에 중부지방에서 유랑∙교류하던 시절을 언급하기도 한다. 한편 선생이 이르길, “이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고 비우고 자유로이 유랑하는 삶과 마음은 사실 큰 병이다.”라면서, ‘학문(學問)에 정진한다 해도, 관리(事務)로써 일에 전념한다 해도, 온전한 집안의 법도(家道)를 세운다 해도, 집착 없는 영혼과 육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세간(世間)에서 말하듯, ‘인생이 덧없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삶과 죽음이 분분하니, 하늘에 생겼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다.’한다. 또한 세상의 일체 현상 사이엔 서로가 집착함이 없으니 “온갖 딴 생각을 하지도 않는 것(不浮)이 집착 없는 자유로운 삶”이라고 맺고 있다. 동시대에 살았던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도 언급한, “속박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라.”라는 삶의 교훈과 너무나 닮아있다.

[ 무릇 집착하지 않음을 일컫는데 흘러 떠다닌다는 것이 천하의 큰 병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 병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그 병을 분명히 알게 되어 능히 고치는 것은 대개 또한 드물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저절로 미혹되어 기쁘고 글을 보고도 기쁘다. 옛 성현의 경서가 즐겁고 제가(諸家)의 역사 기록, 지나간 패관(稗官) 소설, 눈으로 보는 것들이 기쁘고 즐겁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에 저러한 서적이 풍족해 미리 준비하니 홀연히 뒤에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하고 어수선하여 걷잡을 수 없어도, 결국에는 당연히 명백해야 한다. 전혀 얻을 바 없는 마음만 떠다닌다. 자라면서 바닷가 어촌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도시에 매달렸다. 계문(棨門)에서 머무르며 사립문을 향해 가기도 하였다. 혹은 가다가 산집 방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수행하기도 했고, 마을 집을 지나가니 한랭한 추위가 멀어지고 산과 물이 가까웠다. 문학인 모임(詩社)이 있는데 해마다 그르지 않는 해가 없으니 장차 늙어감이 이르는지, 몸이 알지 못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중년에 여태까지 몸에 지니고 다니며 서호(西湖)에서 동쪽으로 되돌아갔다. 동협(東峽) 북쪽으로 들어갔다가 서울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광릉(廣陵)이 넓은 까닭에 대나무를 알았는데 여기에 집이 있었다. 또한 자유로웠다. 집착 없는 자유로움에서 아아! 집착 없는 마음이다. 학문으로 집착 없는 육체를 만들 수는 없고, 일(관직)로써 집착 없는 집안을 이룰 수 없으니 집안의 법도로도 이를 이룰 수 없음이다. 바야흐로 큰 병이 끝내 고쳐지지 않으니 어찌 하리오. 옛 사람들이 삶(生)이 덧없는 인생이라 하였고 세간(世間)에서도 이같이 덧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삶도 이 생애에서 덧없었으며 또한 유랑했으니 대저 생사(死生)와 영욕(榮辱)이 분분(紛紜)하였다. 그 사이 뜬 구름(浮雲)이 일어났다 쓰러짐과 무엇이 다르리오. 저기 병든 자 역시, 모두다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듯 종잡을 수 없이, 오직 오로지 귀하고 천하다는 것, 오래 사는 일과 일찍 죽는 일만 생각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가 자유롭지 않음이라 말할 수 있다.]

[凡無着之謂浮浮者天下之大病也 人莫不受其病亦莫不知 其病然知而能改 盖亦鮮矣 有人於此自幻喜書喜經籍喜史傳諸家稗官之過於目者 無不喜耽此而腴彼偹前 而忽後眩慌散漫白終如 而無所得心之浮也 長而好遊潮鄕暮都援之 則止棨門蓽戶可徃 則徃或山房結夏閭舎經寒威遠以山水近以詩社無歲不然不知老之將至身之浮也 中歲提挈西至于 西湖東返于 東峽北入于 漢師南渡于 廣陵由廣而之竹是家室亦浮矣 浮故無着噫心無着 而學不成身無着 而事不成家無着 而家道不成此 其大病終莫之變何也 古之人有以生謂浮生 以卋謂浮卋如是觀也 吾生是浮此卋亦浮夫死生榮辱紛紜 其間何異浮雲之起滅也 彼以是病者亦皆夢中說夢 惟齊彭殤而一貴賤者 方可語浮不浮哉]

--- 이어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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