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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3.
위대한 거제도 문학인 정종한(鄭宗翰) 3.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5.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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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연구:고영화(高永和)

☞차례 :
1.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의 생애 및 머리말
2. 《곡구집(谷口集)》과 여항문학(閭巷文學)
3. 정종한(鄭宗翰)의 운문(韻文)
4. 정종한(鄭宗翰)의 산문(散文)
5. 정종한(鄭宗翰)과 교류(交流)한 인물
6. 맺음말

 

5.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과 교류(交流)한 인물

한편 정종한 시인은 조선후기 문인(文人)이자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유자(游子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주로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시우(詩友)들과 유람하며 교류하였다. 그런 중에도 그는 말년까지 벼슬살이에 대한 욕망은 좀처럼 식지 않았음을 시편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그는 거제 섬 출신답게 은거하였던 숲속거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강(江)과 바다 인근에서 작시(作詩)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강호시인(江湖詩人)이었다.

그의 문집에서 밝힌, 그가 유람한 지역은, 충북 단양 충주 진천 영동, 충남 서산 부여 보령, 서울시 全지역과 특히 송파구 석촌, 교남동 필운대 옥류동 성균관 삼청동(三淸洞) 남산과 동대문일대 마포나루, 경기도 여주시 북성산(北城山) 신륵사 여강(驪江) 안성 남양주 화성, 강원도 원주, 전라도 나주 금성, 함경도 함흥 등인데, 서울 마포 송파구 석촌과 충북 단양

충주 그리고 경기도 여주 일대에서 거주하면서 남한강을 따라 유랑하며 교류(交流)하였고 그는 신분과 권력에 관계없이 당대의 위항시인·관료∙사대부·세도가들과 친밀히 지냈다.

『추재집秋齋集』을 지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위항시인 조수삼(趙秀三), 서울∙경기∙충청 지역의 수령(목사 현감 등)들, 경기도 여주(驪州)의 문학인의 모임, 서울 마포와 송파구 문인모임 등이 있었다. 이 중에 여주 민씨 집안의 십 여 명은 물론, 후에 명성왕후의 아버지가 된 민치록(閔致祿)과의 교분은 특이할 만하다.

 

1) 민치록(원덕)에게 주다[贈閔元德(致祿)] 五言律詩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덕(元德), 호는 서하(棲霞)이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 유중(維重)의 5대손이다. 1826년(순조 26) 문음(門蔭)으로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고, 그 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두루 거친 뒤 과천현감·임피현령(臨陂縣令) 등 지방수령으로 나가 활동하였다. 상경하여 조지서별감(造紙署別監)·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역임하고 다시 덕천군수(德川郡守)로 지방행정을 맡았다. 1855년(철종 6) 선혜청낭청(宣惠廳郎廳)을 맡았고, 1857년 영주군수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의 딸이 고종비로 입궁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9년 뒤인 1866년(고종 3)의 일이다. 그뒤 영의정으로 추서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봉작되었다. 승호(升鎬)가 입양되어 그의 가계를 이었다. 시호는 순간(純簡)이다. 민치록이 젊은 시절에, 곡구 정종한 선생이 그를 만나 대작(對酌)하며 느낀 소회를 읊은 시(詩)이다.

見君君子質 그대를 보니 군자의 자질을 갖추었으니
比玉玉無瑕 옥과 비교해도 흠이 없구나.
溫雅在今俗 온화하고 아담한 오늘날의 풍속이 있고
典刑餘古家 옛 법전에다 옛 집안 문화를 따르네.
論襟迎霽月 갠 날의 달처럼 흉금을 터놓고
洗盞酌流霞 깨끗한 잔에다 흐르는 노을처럼 술을 따른다.
安得他山石 어디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얻으랴.
相須度歲華 가는 세월을 반드시 살펴 고려해야한다.

[주] 타산지석(他山之石) : 다른 산의 돌이라는 뜻으로,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이라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을 갈 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智德)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

 

2) 20년 전 김죽암(장령 직순)이 방문 했을 때 지은 시를 추가하여 기록함[追錄二十年前訪金竹菴(掌令 直淳)時作].
김직순(金直淳)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실암(實庵)이다. 문간공 김양행의 손자이자 자연와(自然窩) 김이구(金履九)의 아들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를 지냈다. 아들(子)은 인근(仁根)이다.

驪鄕三秀竹菴名 여주 고을의 세 분의 뛰어난 수재로써 죽암이 알려졌는데
想見天姿鍾地英 짐작해보니 타고난 자태가 명예로운 땅에 모였네.
曽是先生生長處 오래전부터 선생이 성장한 곳,
山容如畵水心淸 그림 같은 산의 모습에 강물도 맑구나.

3) 노을을 맞으며 신상서(현)을 찾아뵙고[訪樓霞申尙書(絢)].
신현(申絢 1764~1827)의 부(父)는 호조참판 신대우(申大羽)이고 1794년(정조 18) 정시(庭試) 병과6(丙科6) 30세 급제해, 1799년(정조 18)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서장관이 되었다. 35세 1799년(정조 18) 암행어사 활동을 잘했다고 하여 정조로부터 상을 받다. 1800년(순조 즉위년) 수원부 암행어사, 충청도 암행어사. 예조, 공조, 판서 역임했으며 시효는 효헌(孝)이다.

蒼山流水好襟期 푸른 산과 맑은 물이 마음속 회포와 통하니
一部詩文一局碁 한 부분의 시문(詩文)과 한판의 바둑이로세.
出門見我欣然笑 집 떠난 나를 보니 흔연한 웃음이 나오는데
華髮韶顔苑舊時 고운 얼굴에 흰 머리털, 옛적엔 동산이었지.

4) 조수삼(지원)을 전송하려 청해막부로 거듭 달려가[送趙芝園(秀三)重赴靑海幕] 1811년. / 조선후기 대표적인 위항시인으로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인 조수삼(趙秀三)은 관직에 나간 이력이 없으나 그의 삶은 여행으로 특징지어 진다. 1789년(정조 13)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정종한(鄭宗翰)이 그를 친형같이 따랐으며 선진문물과 문학적인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평안북도 국경지역 관문인 청해막부까지 달려가 조수삼을 전송했던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鎻錀邉門靑海營 쇠사슬로 잠긴 청해영의 변문(邊門)에
白頭從事擅詩名 벼슬 없는 종사(從事)로써, 오로지 시인의 자격으로
知名執策揂文雅 오십의 나이에 채찍을 잡고 시문(詩文)을 짓고 모았는데
爲將収才亦俊英 그 재주 또한 영민하고 준수하여 장차 거두기 위함이었다.
官妓新粧欣慣面 새로 단장한 관의 기생이 낯익은 얼굴이라 반가웠으며
吏人曽服恱輪誠 관리가 약을 복용하며 수레를 모는 그 정성에 심히 기뻐하였다.
春深幕府饒閒日 봄이 깊어가는 막부에서 넉넉하고 한가로운 나날인데
謾管煙花人酒觥 사람들이 뿔 술잔과 불꽃놀이로 피리 불며 거만하네.

[주1] 변문(邊門) : 평안북도 의주성(義州城) 밖 만주(滿洲)와의 국경지역에 있던 관문(關門)이다. 예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은 물론 조선으로 가는 중국 사신들이 꼭 거쳐 가야 하는 유일한 관문으로, 일종의 국경을 표시하는 역할로 세워졌는데 변문과 만주 봉황성의 책문(柵門)까지의 장소에서는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주2] 백두(白頭) : 허옇게 센 머리라는 뜻으로,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의 일컬음.

5) 증 삼야와(삼야정) 주인 고명언(극명)[贈三野窩主人高明彦(克明)] 七言律詩.
고극명(高克明)은 조선말기 효자로 지금의 충주시 성안동의 이름을 지은 분이다. 고극명의 자(字)는 명언(明彦), 호(號)는 삼야정(三野亭)으로 본관(本貫)은 영주(瀛州)이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을 잘 하였다. 시문집 간송당문집(澗松堂文集), 고극명은 효성이 지극하여 "천지봉공(天地奉供)" 네 자를 부모의 방에 써 붙이고 "부모는 나의 천지(天地)이다. 사람이 부모에게 불효하면 천지에게 죄를 받을 것이니 어느 곳에 몸을 용납하리오" 하였다. 낮에는 밭갈이 하고 고기를 잡아 무모에게 봉양하고 밤이면 서당에 가서 밤늦도록 독서를 하였다. 또 풍수설을 연구하여 성인산(聖人山) 밑에 길지(吉地)를 얻어 성인동(聖人洞)이라 이름하고 농경(農耕)과 종수(種樹)에 힘쓰고 정자를 지어 "삼야정(三野亭)"이라 하고 연못을 파고 대(臺)를 쌓아 그 위에 삼강석(三綱石)과 오륜석(五倫石)을 세우고 낙화대(落花臺)와 학소대(鶴巢臺)을 쌓아 시를 지어 뜻을 보였다. 후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聖仁洞裏聖溪濱 어진 성인(聖仁)이 마을에 있으니 개울가가 맑은데
天報知君孝養親 어버이를 효행으로 봉양하는 그대를 하늘이 알고 갚아주네.
躬自闢荒明擇地 몸소 자신이 거친 황무지를 개간하여 좋은 땅을 갖추어
家能供具善迎賔 집안에서 손님을 훌륭히 맞이하고 음식을 잘 공양한다.
竒文眼過諸方笈 기묘한 글이 살아 있는듯하니 여러 지방에 알려지니
和氣脑全一段春 화창한 날씨에도 마음이 온전한 한 자락 봄을 알리네.
三野窩成閒送老 삼야정(三野亭) 정자를 만들어 한가한 여생을 보내는데
此了翁事此翁身 이런 여생이 늙은이 몸의 늙은이 일이다 하리오.

6) 정하교에게 부친다[寄丁令(夏敎)].
정하교(丁夏敎)는 본관 나주(羅州), 자 치서(稚序), 호(號)는 연풍(延豊), 거주지 원주. 순조(純祖) 13년(181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冗官縻子七年身 쓸모없는 관리로 7년 동안 매인 그대는
奇氣育中欝未伸 특이한 기운을 가졌으나 기개를 펼치지 못해 답답했다.
長令去寕還不偶 우두머리로 편히 갔으나 우연치 않게 돌아왔는데
天敎溟渤滌煩塵 하늘이 넓은 바다로 하여금 더러운 티끌을 씻어주었나.

7) 목사 이희온에게 올립니다[送呈李洪州(羲温)].
이희온(李羲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황주(黃州) 목사를 지낸 이희현(李羲玄 1765~1828)으로 추정된다. 1801년(순조 1) 진사시에 합격했고 1823년(순조 23) 황주목사에 올랐고 아버지는 이운영(李運永)이다. 아버지와 함께 창작하여 읊던 가사를 모아 필사한, 모두 7편의 가사가 수록되어 있는 〈언사 諺詞〉가 전한다.

警咳寥寥嵗暮時 깨우치는 기침소리 적적하니 한해가 가는데
霞愚書到始聞知 책을 쓸 때에야 지식이 적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淸秋就養南州去 화창한 가을날에 부모를 효양하려 남녘 고을로 간다하니
福履還從晚境綏 행복이 이어 따라와 만년의 형편이 편안하리다.

經年體氣問何如 한해가 지나가는데 몸과 마음이 어떠하신지요?
頥養由來稳起居 마음을 수양한 이래로 살아가는 형편이 안정됩니다.
早識心中無外物 일찍이 마음속에 가진 것이 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應將春晷付看書 응당 봄날 햇빛에서 책을 조용히 읽기를 권했지요.

自公南去悵無依 스스로 남녘으로 가는 공을 보니 의지할 데가 없이 원망스러워
寥落窮廬獨掩扉 적막하고 궁벽한 농막집에서 홀로 사립문을 닫습니다.
惟有夢魂曾不隔 오직 꿈속의 넋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를....
中宵頻逐嶺雲飛 한밤중이라도 고개 위 빈번히 떠가는 구름 쫓아가렵니다.

[주] 이양(頥養) :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하게 정신을 수양함.

 

8) 수윤생백[酬尹生白] 윤생백에게 보답하며.
곡구 선생이 主회원 이었던, 석림(石林) 생백회(生白會) 시인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의 회원 중 한분인 윤(尹)선생에게 보낸 글이다. ‘생백(生白)’은 허실생백(虛室生白)에서 온 말인데, ‘방을 비우면 빛이 그 틈새로 들어와 환하다는 뜻’으로, 잡념이 없으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말기 백성들로부터 시작된 사회질서와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현실에서 사회법도가 무너져 내리는 시기에 상대적으로 몰락해 가는 선비들의 궁한 처지를 읽을 수 있다.

太上不自有 먼 옛날부터 만물은 스스로 있지 아니하였는데
天地視蓬廬 하늘땅 아래 가난한 집만 보인다.
在我旡責賤 나에겐 천박함을 꾸짖지 아니한 책임이 있어
與物忘親疎 만물과 더불어 멀고 가까움을 잊었구나.
飮啄隨性分 마시고 쪼는 건 제 성질 그대로인지라
畊稼復佃漁 밭에 곡식을 심고 다시 사냥질과 고기잡이 한다네.
末俗日趍下 말세의 풍속은 날마다 아래로 달려가니
習尙知何如 일상생활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營營騖狭斜 좁은 골목에서 이익을 얻으려 골똘하니
齪齪離廣居 옹색하지만 넓은 집을 떠나야하네
于嗟窮寂士 아아 슬프다. 궁벽하고 쓸쓸한 선비여~
氣息誰能嘘 숨결에라도 누가 탄식할 수 있으랴.
不如飮美酒 좋은 술을 마시는 것만 못해
且還讀我書 또 다시 돌아와 나의 글을 읽는다.
門前江湖水 문 앞에 보이는 강호(江湖)의 큰 물속에
洋洋一雙魚 한없이 자유로운 한 쌍의 물고기여~

9) 함흥부사 윤광호가 청풍부(충북 제천) 승직하여 전송하며[送尹咸興光濩陞遷淸風府].
함흥 부사(咸興府使) 윤광호(尹光濩)는 본관이 파평, 대흥군수 돈녕부 도정 등을 역임한 인물로서 함흥부사 시절, 함경도 진흥왕비문을 탁본하기도 했고, 1800년에는 그의 어머니 박씨 부인의 일생을 한글로 적은 <선비유사언해>가 전해져 온다. 행실과 학문이 높아, 당시 함흥 지방에서 머물고 있던 곡구(谷口)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다.

咸興太守尹公賢 함흥태수 윤 공(公)이 현명하여
聲績年來益蔚然 명성과 공적이 여러해 전부터 더욱 성(盛)하였다.
剸劇方恢遊刅地 번거로운 사무를 뜯어 고치고 갖추니, 상처 난 땅을 즐기게 되었고
移閒復作上楊仙 아름답게 변하도록 다시 만드니 버드나무 신선같이 날리었다네.
芙蓉古峽行春脚 오랜 협곡에 연꽃이 피어나 봄의 다리를 건너가니
楊柳邊城惜別筵 변경 성곽 버드나무가 송별연을 열었다네.
聞說鳬驂経洛第 듣건대, 오리와 말이 잇닿은 물가에서 차례로 지나가며
公私恩造揔由天 공(公)과 사(私)로 은혜를 받았다하니, 모두 하늘의 뜻에 따랐음이다.

[주] 봄의 다리[春脚] : '다리 달린 봄날[有脚陽春]'의 준말로서 어진 정치를 하는 지방수령을 말함.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송경(宋璟)이 태수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다리 달린 봄날이라 했다.” 하였다.

10) 중양절기 봄 석림에서, ‘생백회’ 모임[重陽期春觀生白會石林]
淸秋佳景媚良辰 청명한 가을날 아름다운 경치가 아양 떠는 좋은 날에
步屧逍遙自有鄰 천천히 걸어 소요하는데 친근한 이웃이 있네.
靑眼趂期紅樹道 따뜻한 눈빛으로 달려가 모인 붉은 나뭇길에는,
黃花迎笑白頭人 웃으며 맞이하는 누런 국화와 백발의 시인.
行休在我窮何戚 가다가 멈춘 이가 나인데 궁하다 어찌 슬퍼하랴.
嘯詠無時貴任直 무시로 휘파람을 읊으며 귀한 분에게 곧게 대했다.
莫歎風流蕭索盡 쓸쓸함뿐인 풍류였다고 탄식 말라.
哀顔猶帶酒中春 술 가운데 봄은 가히 슬픈 얼굴 그대로일세.

11) 민광중과 이별하며[別閔光仲]
靑眼會誰喜 누구나 즐거이 모여 정다운 눈초리로
相逢十載前 십년 전에 서로 처음 만났다.
誠心君好學 성심을 다해 학문을 좋아하는 그대와
交契我忘年 사귄 정분에 우리는 나이를 잊게 했다.
竹屋寒梅下 대나무 집의 겨울 매화 아래에서
淵籬老菊邉 연목 옆의 울타리에 핀 시든 국화 곁에서
深情當少別 나눈 깊은 정(情)이 작은이별을 맞아
猶自覺悽然 오히려 처연한 마음 자각하네.

12) 박상서(주수)의 석촌 별장[題朴尙書(周壽)石村別業].
서울시 송파구 석촌(석호)에 살고 있는, 박주수(朴周壽 1787∼1836)의 별장에 왔다가 멀리 보이는 한양도성 동대문, 그리고 장통교(長通橋), 이모문(貽謨門)등을 기억하며 석촌 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넉넉한 물자에 감탄하는 글이다. 박주수(朴周壽)는 자가 군여(君與), 본관이 반남(潘南), 1807년 정묘(丁卯)년에 정시(庭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벼슬에 올라 훈련대장 총융사 병조판서,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1827년 이조참판 예조참판, 1834년 병조판서 좌참찬 등에 올랐던 인물이다.

東郭迢迢十里郊 동편 성곽이 아득한 십리 성(城) 밖의
一區林壑隔塵囂 한 구역 골짜기 숲이, 속세의 번거로움에 막히었네.
我來正值啇颷晩 나는 바로 해질녘 광풍이 누그러진 때에 맞춰 왔는데
霜後翻看錦葉凅 서리 내린 후, 약간 언 비단 단풍이 나부끼듯 보인다.
門架雲松長覆砌 시렁 문 위의 구름과 소나무가 길게 섬돌을 뒤덮고
溪穿巖閣逈通橋 시내를 관통한 바위 위의 집이 멀리 교량과 통한다.
從知逹識貽謨遠 멀리 이모문(貽謨門)이 현달한 식견을 알려주는데
餘地經論此地饒 다른 지역을 지나며 살펴보니 이 지역이 참 기름지네.

[주1] 석촌(石村) :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石湖) 일대
[주2] 통교(通橋) : 서울 장교동(長橋洞)과 관철동(貫鐵洞) 사이에 있었던 돌다리 ‘장통교(長通橋)’ 또는 ‘교량과 통하는 길.
[주3] 이모(貽謨) : 경복궁(景福宮)의 이모문(貽謨門)에서 이모(貽謨)란 뜻을 풀이하면, '선대 국왕(國王)이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을 의미한다. 이(貽)는 ‘깨쳐주다’, 모(謨)는 ’임금의 교훈‘이라는 뜻이다. ’재물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다.‘ 주다, 남겨주다 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13) 밤에 석호에서 모여 함께 짓다[石湖夜會共賦]. 서울시 송파구 석촌 호수에서...
絲染會憐墨子悲 물든 실이 가련타고 모인 묵자(墨子)의 슬픔이여.
花開徒下蕫生帷 만개한 꽃무리가 휘장을 펼쳐 독려하구나.
天門自有風雲會 하늘의 문에는 절로 바람과 구름이 모여들고
野草猶沾雨露滋 들풀은 비와 이슬에 흠뻑 젖어 생장한다네.
魯酒也能排客悶 노나라 술이 손님을 답답케 밀어 내니
楚騷何必怨秋時 하필 굴원(屈原)의 이소(離騷)가 가을철을 원망하였지.
幽琴小屋懷招隠 작은 집의 그윽한 거문고 소리가 숨은 마음을 불러내나
從古希音盖少知 예로부터 희음(希音)을 알아주는 사람 드물다네.

[주1] 묵비사염(墨悲絲染) : 흰 실에 검은 물이 들면 다시 희지 못함을 슬퍼함. 즉 사람도 매사(每事)를 조심하여야 함. / 묵자비염(墨子悲染)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묵자(墨子)가 실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사람은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품이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함을 이르는 말.
[주2] 풍운회(風雲會) : 바람과 구름이 모이는 것을 가리킨다. 또는 사물의 번다한 것, 좋은 기회의 뜻도 있다.
[주3] 노주(魯酒) : 노(魯)나라 술이 묽은 것이 조(趙)나라 한단과는 아무관계가 없으나, 그로인해 한단성이 포위 되었으므로 의외의 화를 입는 경우를 일컫는다.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주4] 초소(楚騷)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를 말한다.
[주5] 희음(希音) : 고맙고도 드문 소리라는 뜻. 곧 아주 드물고 진귀한 것. 그와 같은 예가 없는 것. 자연의 심경을 울리는 것이다.


14) 매산(洪直弼)에게 올린 시를 소동루에서 읊다[詠小東樓呈梅山]. 七言律詩
소동루(小東樓)는 조선 숙종대의 문신이던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살던 곳으로, 현재 서울시 마포구 현석동 177번지 부근이며 대지가 1,000여 평이었다고 한다. 후에 삼화장(三和莊)이라고 했다가 다시 백운각으로 불렀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현석동은 본래 농암(籠岩)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 소동루(小東樓)를 짓고 말년을 보낸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박세채의 호가 현석(玄石)이었던 데에서 현석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박세채의 사후(死後)에, 소동루는 시인묵객들의 중요한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매산(梅山)은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선생의 호(號)로 곡구(谷口)선생과 시우(詩友)로서 교류(交流)한 인물로 지평∙집의∙형조판서를 역임했다.

玄石江頭苐上層 강어귀 위쪽에 현석(玄石 朴世采)의 누각인
小東樓畔月初升 소동루(小東樓) 물가에서 달이 처음 떠오른다.
千峯皎潔三冬雪 교결한 수많은 봉우리엔 겨울눈이 덮였는데
五夜通明百尺氷 새벽녘을 밝혀 알리는 백 척의 얼음이로세.
神境會心人籟穵 신선의 땅에 마음을 모은 사람들이 소리를 내니
虛襟如水道機澄 물같이 거리낌 없는 도(道)의 기틀이 맑구나.
主翁這裏囂囂樂 주인 늙은이가 떠들썩하게 즐기는 이곳은
絃誦函遾有遠朋 거문고에 시를 읊고 술잔을 잡는, 멀리서 찾아온 벗이로세.

小樓逈壓大江湄 소동루는 멀리 큰 강 물가를 압도하고
萬象玲瓏月上時 온갖 물상은 달이 떠오를 때 영롱하네.
極浦雲煙交滅涢 먼 포구의 구름과 연기가 서로 밀어내다 사라지니
滿庭松樾亂叅差 뜰에 가득 찬 소나무 그늘만 들쭉날쭉 어지럽다.
疎襟自有僊僊想 긴 옷깃이 저절로 춤을 춘다 생각하는데
真境應存妙妙思 아름다운 경치에 응해 기묘한 심정이 드는구나.
惆悵前脩拾隱操 슬프다 선현(先賢)들이 서로 속세를 떠나려하지만
高風堪與道人知 뛰어난 인덕(人德)으로 도인(道人)과 사귀며 함께 즐기세.

[주] 은조(隱操) : 속세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

● 유랑자의 회포[游子懷抱] 韻字 ‘刪‘. / 곡구집을 읽고, 고영화(高永和)
漢水地盡江津間 한강 땅이 다한 강나루 사이에
春雨冥冥波浪慳 봄비가 으슥해도 물결이 없어라.
游子歸心風不借 돌아갈 마음 간절한데 바람 아니 빌려주니
孤帆泊處石能頑 외로운 돛단배가 정박한 곳에는 돌만 무정해라.
風波人事轉添愁 바람 따라 물결치는 인간 세상 시름만 더하고
天涯易感笑險艱 변방 거제도의 감상이 일어나니 험난함에도 웃는구나.
凡無執着脫束縛 무릇 집착 없는 삶에서 속박에서 벗어나,
抑無妄而破愁顔 언제나 망령되지 말아야 시름이 사라진다네.

6. 맺음말
곡구(谷口) 정종한(鄭宗翰) 선생은 초계(草溪) 정(鄭)씨로, 거제도(巨濟島)에서 갑신년 1764년에 출생하여 그의 나이 38세 때인 신유(辛酉 1801)년에 증광시(增廣試) 생원진사시 3등(三等)으로 합격한 인물이었다. 이후 서울 성균관에서 잠시 수학하였으나, 조선말기 세도정치와 함께 지역적인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을 유랑자 생활을 한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중년 이후에 서울시와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90 여명의 시인묵객들과 더불어, 시회(詩會)를 만들어 시편을 읊고 교류하며, 끝없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동시대에 거제도에서 살았던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도 언급했던, 거제도의 철학 중에 하나인, “속박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라.”라는 삶의 교훈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집착 없는 삶, 즉 ‘자유(浮)’를 찾아, 운명과 노력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한, ‘거제도 최고의 한문학인’이며, 거제도 고전문학의 큰 뿌리를 이어오게 한 자랑스러운 거제인(巨濟人)이었다.

그가 남긴 시편과 산문을 읽어 보면,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진리에 도달하려고 어떻게 열정적으로 살아 왔는지를 들어다 볼 수 있다. 또한 거제도뿐만 아니라, 19세기 경상남도 출신 中, 위대한 문학인으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으니,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과 벅찬 환희를 안겨준다.

또한 그는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보고자 노력하였고, 마음속의 잡념과 욕심을 비워 진리에 이르고자 그의 시편 곳곳에서, 이러한 내면의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천명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히 놓아준 다리이다(命也努力家來訪偶然橋).” “삶의 길에서 언제나 망령되지 말아야함을 강조하였다(抑無妄而然歟).” 그의 시편내용을 분류해보면, 자연의 경물을 읊은 시(詩)와 내면을 성찰한 시(詩), 그리고 시우(詩友)들과 교류한 시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특히 문(文)의 잡저(雜著)편은 그가 경험하고 체득한 삶의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곡구 선생은 일종의 시사(詩社)였던 서울의 ‘생백회(生白會)’, ‘석호회(石湖會)’와 충북 단양 시인(詩人)들 모임 ‘화암아회[畫巖雅會]’ 즉, 문인들이 한시를 창작하며 산수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서로 교류하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경기도 여주시 시인묵객 모임의 主회원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충북 충주, 서울시 송파구 석촌, 교남동, 옥류동, 삼청동(三淸洞), 동대문∙마포나루일대의 문인들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해, 시류(時流)를 논(論)하고 글월로써 서로 교류하고(文交) 사귀었다. 그의 호(號) 곡구(谷口)는 서울시 송파구 석촌 인근, 자신의 거처가 골 어귀(谷口)에 위치하였는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마음과 몸을 의탁한 곡구(谷口)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19세기 전반은 사대부의 한문학이 완전 퇴색되었다. 이에 성리학의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대중화로 이끌어낸, 우리나라 여항문학(閭巷文學)이 절정기를 이룬 시기였다. 이때 거제문학인(巨濟文學人) 정종한(鄭宗翰)은 강과 바다를 통해 교류한, 대표적인 강호시인(江湖詩人)∙여항시인(閭巷詩人) 중에 한분이었다. 특히 거제고성통영의 문학사(文學史)에서, 수많은 유명 근현대 문학인들이 태동하기 이전(以前), 이행기문학의 가교 역할을 한 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근고지영(根固枝榮)’이란 말이 있다. 뿌리가 튼튼해야 가지가 무성(茂盛)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인데, 근현대를 포함하여 미래 거제도 문학(文學)의 찬란한 꽃을 피우기 위한, 튼튼한 토대(土臺)를 구축한 거제문학인으로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가 남긴 400 여편의 한문학 작품은 유구한 거제도의 역사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거제시민에게 정체성과 자부심을 안겨준다. 이에 거제도 문학사(文學史)의 전통(傳統)과 한문학(漢文學)의 자존심을 지켜낸 선생께 삼가 존경과 감사의 마음(念)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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