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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 세미나 발제문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 세미나 발제문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5.09.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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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 고전연구가...12일 거제문화예술회관서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고전연구가 고영화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거제시청 관계자분들과 문인협회 문사 여러분 그리고 여러 교수님과 유배문중 여러분! 어려운 발걸음에 감사말씀 드립니다.^^ 시간 관계 上, 요점만 추려서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 정과정곡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과정곡의 저자인 정서의 거제배소가 거제시 ‘오양역’이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폐된 고려의종과 오양역의 정서가 1170년 10월 약 한 달간 거제도에서 재회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연구하게 됐습니다.

앞서 정과정곡에 관하여 발표된 많은 논문에서, ① 정서의 거제도 배소가 어딘지 쓰인 논문이 없었고 또한 ② 고려의종과 정서가 거제도에서 재회한 역사적 사실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논문이 정과정곡 창작 시점과 창작 배경 등이 단편적이었고, 또한 구체적인 역사내용이 아니라, 모두 앞서 발표된 자료를 참고하여 논문이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①의종과 정서의 재회, ②임춘의 증언, ③정과정곡 작품내용, ④280년간 구전물, 이라는 사실을 예를 들면서 한꺼번에 오늘 말씀 드리고자합니다.

 

① 첫째 의종과 정서의 재회,

고려의종과 정서가 1170년 10월 약 한달 간 거제도에서 재회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무신정변이 아주 계획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던 관계로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9월 고려의종이 개경에서 거제도로 유폐됩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0월 대사면령이 내려져 정서가 복권하게 되죠(중종반정 인조반정은 반정 다음날 대사면령과 중앙고위층 인사단행). 정서가 귀양살이 한 오양역과 의종이 유폐된 둔덕기성은 직선거리로 약 2Km 정도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약 한달 동안 거제도에서 두 사람이 한 지역에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거제도 창작설을 뒷받침 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려시대 정서(鄭敍)는 고려 문인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과정(瓜亭)입니다. 1151년에 폐신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1151년(고려 의종 5년)4월에 참소를 받고 동래로 귀양을 갔다가, 1157년 의종 11년 2월12일, 거제도 사등면 오양역으로 이배되어 1170년 무신정변 2달 후 10월말에 복권되었습니다. 마침 1170년 9월 고려 의종이 개경에서 축출 되어, 정서의 유배지인 오양역 인근 둔덕기성(폐왕성)에 와서, 1170년 10월 정서와 거제도에서 약 한 달간 재회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습니다. 정서의 유배기간은 관향인 동래 5년 10개월, 거제현 13년 8개월, 총 19년 6개월의 기나긴 귀양살이였습니다.

○ 참고로, 거제의 오양역은 고려시대 995년(성종 14)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습니다.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개경에서 가장 멀리 위치했던 곳이 오양역입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 가장 중요인물을 가장 멀리 보낼 때 거제도로 보냈던 것입니다.

○ 거제시 둔덕기성은 신라시대부터 거제도 고을관아와 오양역원을 보호∙방어하고 견내량을 통과하는 우리나라 어선을 보호하면서, 왜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지키는 역할을 해오다가 1170년 9월 고려의종의 배소로써 활용된 거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중에 하나입니다. 이후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 時, 강화도 거제도에 유폐된 고려왕씨들이 한때 거주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② 둘째 가장 신뢰성 있는 기록인, 임춘의 시편에서 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시대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이자 학자이고, 죽림칠현(竹林七賢, 국순전 공방전)의 한 사람인, 임춘(林椿, 1148~1186)이 정서가 남겨 놓은 글을 보고 지은 ‘차운 정시랑 서시(次韻鄭侍郞敍詩)’에서 임춘(林椿)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언해 줍니다. 당시 임춘의 글에는 정서의 동래생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의 시구에는 거제현에서 유배생활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거제현에서의 유배생활은 그의 관향이었던 동래보다는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의 사정을 "임춘(林椿)"의 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정서의 사후에, 임춘이 정서가 살던 집에 조문하려 와서 정서가 남겨놓은 시편을 보고 2편의 한시를 남깁니다. <정시랑(정서) 서시 차운(次韻鄭侍郞敍詩)><추도정학사서(追悼鄭學士敍)>.

/임춘이 정서가 펼쳐놓은 시편을 보고 차운한 글,[정시랑(정서) 서시 차운(次韻鄭侍郞敍詩)]

先어매20년 禦魅二十年 20년간 도깨비와 싸우게 되니 (동래 거제 유배 생활)

陌건과징어석 愆過懲於昔 허물은 예전에 징계됐는데도 (벌써 그 죄가를 치렀다)

旱천사석불난 遷徙席不暖 옮겨간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는 (거제도 이배)

質소거여우일 所居如郵馹 역참 같은 곳에 살았다네. (거제시 오양역)

남중장무심 南中瘴霧深 남쪽 땅에 나쁜 기운을 품은 안개가 짙으니

가우상기맥 可虞傷氣脈 기맥을 다칠 것을 염려할 정도였네(거제 유배생활)

우유종암학 優游縱巖壑 할 일없이 가파른 골짜기를 돌아다니는데

누섭등산극 屢躡登山屐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하네.

"언제나 나막신 신고 산에 올랐다" 이 구절은 유배인들이 그렇듯, 정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거제시 둔덕면 둔덕기성(岐城)에 올라, 유폐된 임금을 향해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했다는 뜻입니다. 정계로부터 버림받은 귀양살이에 대한 쓰린 마음에 더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깊은 고독과 상처는 '정과정곡'을 통해 표출되었습니다.

임춘이 쓴 2편의 시편내용 중에 일부분을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 “장사로 가생[가의, 한나라 가생(賈生, BC200~BC168)]이 쫓겨 갔다가 이전 자리로 다시 돌아오니 헛되지 않았다. 창랑수에 늙은 어부가 되어 물 위에 둥실 뜬 집을 지었네. / 문득 어제 남겨둔 필적 보니 직접 눈으로 본 분 같다. 신령한 붓글씨가 교룡이 다투듯 하고, 맹수와 이리를 다루듯 뛰어난 솜씨였다. 파도가 뒤집히듯 한번 시원스레 읽어보니 고질병이 뚫리듯 즐겨 읽힌다. ” 長沙逐賈生 無復虛前席 滄浪作釣翁 浮家而泛宅 / 忽昨見遺墨之人猶目擊 神毫鬪蛟螭 大手搏貙獥 翻瀾一快讀 嗜閱空成癖].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쓴 글씨를 본 듯합니다.

○ 또한 임춘(林椿)의 <추도정학사서(追悼鄭學士敍) 학사 정서를 추도하며>시편을 보면, [“선생은 속기를 벗은 고매한 분, 아~ 바람 앞의 등불처럼 꽃다운 선생의 모습 꺾이다니 하늘이 이와 같은 시인을 불러 가심은 바다와 산이 백락천 같은 시인을 기다렸음이라. 선생의 글은, 사람들의 보배였으니 선생의 높은 명성 조물주의 질투라네. 이제는 사명산의 가지장 같은 감식가도 없으니, 누가 우리의 귀양 간 신선의 재주 알아주랴.”[先生瀟灑出塵埃 忽嘆風前玉樹催 上帝已敎長吉去 海山曾待樂天來 當年翰墨爲人寶 高世聲名造物猜 從此四明無賀監 誰能知我謫仙才]

중국 가생(賈生)과 같은 의리와 충성을 갖춘 이, 백락천(白樂天)같은 대단한 문필가인, 정서(鄭敍)가, 정과정곡 같이 민중에게 회자되는 가요형태의 글을 지었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힘듭니다. 또한 정서 사후 280년간 구전물로서, 정과정곡에 나타나는 형식의 흔들림, 세속적인 표현, 운율을 무시한 형식의 자유로움과 진솔함은 당시 유명한 한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정서의 품격과는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이는 한글이 없던 고려시대에 학자이자 관료귀족 계층이였던 정서가 문장을 남겼다면 한시로 남겼을 것입니다. 아마 그가 남긴 한시가 사라지고, 정서의 사망 후, 약 280년 동안, 유행요로써 또는 궁중음악으로써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조선초기에 한글로 정착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과정곡>작품은 일반백성의 자유로운 가요형식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과정곡이란 가요제목도 후세 사람들이 정서의 호를 사용해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해오는 한글작품 ‘정과정곡’은 상층지식인 또는 궁중음악으로써 민중에 의해 구전되어, 불려 진 노래임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③ 셋째 정과정곡 내용,

정과정곡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서와 의종의 재회가 있지 않고는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가요입니다.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는 두견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아니며 거짓인 줄을, 아~ 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 아실 것입니다. 죽은 혼이라도 임과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아~ 우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전)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를 부른다는 말) 멀쩡한 (거짓) 말씀이었습니까? 죽고만 싶은 것이여, 아~ 임께서 저를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맙소사 그대여 돌이켜 들었던 것을 거두어 주오!!"

○ 우리가 알고 있는 정과정곡 노래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한글체 작품입니다. 이는 10구라는 점에서 10구체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 향가나 고려가요는 현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정과정곡’에서 마지막 제10구 처음에 감탄사 '아소 님하'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시가의 종결 서두에 감탄사를 두는 우리 시가 전반의 경향과 일치하는 특징입니다. 고려말기 고려가요 <만전춘별사>에도 “넉시라도 님은 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잇)가.” 감탄사 '아소 님하' 정과정곡 내용 부분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고려 중기 의종대에 귀족관료계층인 정서가 10구체 신라 향가의 형식을 계승하여 우리말 노래를 지은 것은 국문학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정과정곡은 의종 24년 1170년 9월에서 10월, 약 1개월 사이에, 당시 시대적 사건상황을 승화하여 창작된 작품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당시 고려의종의 찬축과 정서의 유배는 우리나라 정국에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정서와 민중들에 의해, 폐왕 의종이 거제도로 방축되어 왔을 때 정서 자신에 대한 비감과 울분, 의종에 대한 갖가지 감정이 뒤섞여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 노래가 나오지 않았나 유추해봅니다.

 

● 조선중기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동래에 있는 과정(瓜亭)이란 정자에다, 정서의 호(號)가 ‘과정(瓜亭)‘, 그리고 동래 정씨라는 이유만으로 동래에서 창작된 것으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현실입니다. 어떤 분은 ’그치르신‘ 표현 하나로 거칠 ’荒‘자를 끌어내어 ’荒‘자가 들어가는 산이나 장소를 찾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접동새(두견새)‘가 많이 사는 곳이라고도 합니다만, 이는 역사적 사실에 아무 관련 없는 시어를 선택해 상상력을 동원한 결과 일뿐, 사실과는 전혀 다릅니다.

현대에도 여러 학자들은 동래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더 많습니다. 이는 1451년『고려사』권71 지(志) 제25악 2와 1484년 『동국통감』24 고려의종 장효대왕 5년5월조 에서 "정서가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의 명령이 오지 않았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을 근거로 삼지만, 거제도로 이배되어 더 오랫동안 유배되었던 사실은 빠져있습니다. 『고려사』열전 정항(鄭沆) 조에는 "정서가 이미 귀양왔으나 소명(召命)이 오래도록 이르지 아니함으로 마침내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지었다"라고 기록한 채 동래란 말이 없습니다. 『동국통감』과 『고려사』열전의 기록은 같습니다. 『동국통감』內, 장효대왕 조와 정항(鄭沆) 조에 같은 내용을 같은 사적에 기록하면서 이처럼 달리 표현한 것은 기사내용이 단정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 못 됨을 시사합니다. 또한 약 280년 동안 민중의 입에서 구전되다가 조선초기 문자로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동래 창작설은 그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록에 나타나 있는 <정과정곡>의 내용과 약 한 달간 거제에서 의종과 정서가 재회한 점, 임춘의 시(詩)에 나타난 정서의 거제 유배생활을 유추해 보면, 거제에서 창작한 작품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덧붙여, 님 앞에서 하소연하듯 부르는 ‘정과정곡’의 내용 上, 두 사람의 재회가 있지 않고는 도저히 창작이 불가능한 노래임이 이를 증명합니다.

우찌되었건 정과정곡은 충신연주지사로써 오랫동안 사대부들이 열창한 대표적 고려가요입니다. 또한 ‘계면조‘로 애상하고 유면하며 듣는 이의 얼굴에 눈물이 금을 긋는 애잔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오는, 1400 여편의 거제도 유배문학 역사상 최초의 문학작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800년 거제도 유배역사의 훌륭한 문화콘텐츠로써, 향후 자랑스러운 거제도 문화유산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상 저의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질문 답변

정인호 선생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항상 승자의 몫입니다. 고려사 기록에 “성품이 경박하다”고 한 기록은 실제로 그의 성품이 경박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처했던 환경적인 요인과, 당시의 상황에, 매임이 없으려 했던 성품, 등에서 기인한, 기록의 편파성과 비신중성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글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시편의 역사내용 해설을 두고, ‘넋두리‘라던가 ’이성과 사랑‘이란, 이런 부분은 정통 유교사회에서는 납득하기가 힘들겠지만, 당시 신라 고려 우리나라 봉건사회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던 시대의, 음악적인 표현을 언급한 단어로써,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덧붙이면, 정서 선생이 동래 정씨 문중의 선조로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자이자 시인으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칭송과 함께 문학적 비평은 물론, 고려가요의 시편을 자유로이 시평하여 표현한 단어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동래 정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드리며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참고 : 거제의 오양역은 고려시대 995년(성종 14)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었다. 거제도는 조선초기까지, 일본으로 항해하는 모든 선박은, 거제도를 거쳐 항해를 했던 곳입니다. 신라가야백제의 해상무역, 몽골의 일본정벌, 고려말 조선초 대마도정벌, 모두가 거제도를 경유해 바닷길을 향한, 당시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해상통로이기도 했습니다.

○ 참고 : 익제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그의 문집 『익재난고』 소악부에 우리말로 된 <정과정곡>을 한역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이 작품의 국문학적 의의와 가치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임금을 생각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봄날 산의 자규와 같다.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이여 묻지 말라. 다만 잔월효성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億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獨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韻字 ‘微(元) 支 支’ 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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