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14:21 (월)
[단독]비운의 여인 유처자, 200년 지나 빛을 보다
[단독]비운의 여인 유처자, 200년 지나 빛을 보다
  • 배종근 기자
  • 승인 2014.07.11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처자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항검 딸로 본명 ‘유섬이’로 확인
지난 4월 거제면 송곡마을에서 묘지와 비석 발견돼 교인들 관심

9세 때 관노로 유배와서 71세에 사망…하겸락이 묘비 세운 것으로 확인
오는 8월 교황의 한국 방문 때 유항검에 대한 시복으로 명예회복 될 듯

 

지난 11일 본지 기자들과 윤성부 이장이 유처자묘를 찾아 나섰다.


200여년 전 천주교박해로 한꺼번에 부모형제를 잃고 9세의 어린 나이에 관비로 전락, 한 평생을 거제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최근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이 여인이 집중조명을 받은 이유는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시복(諡福 : 가톨릭 용어. 죽은 뒤 복자품(福者品)에 오르는 일)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시복이 확정되면 그의 아버지는 성자(聖者)로 명예가 회복된다.

이에 따라 당시 일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녀에 대한 관심이 카톨릭 신자들 사이에 높아지면서 최근 묘지와 비석이 발견되고 방문객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묘지와 비석의 주인은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에 구전으로 전해지던 유처자(柳處子)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유섬이(柳暹伊)’이다. 유섬이(柳暹伊)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호남의 사도’라 불린 유항검(柳恒儉)의 딸로 밝혀졌다.

유섬이는 신유박해로 인해 9세때 거제부의 관노로 유배돼 와서 71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1862년 거제부사로 부임한 하겸락(河兼洛)에 의해 묘비가 세워진 것으로 확인됐다.
 

유처자묘(柳處子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유섬이 비석

비운의 주인공인 유섬이(유처자)의 묘와 비석에 대한 이야기는 이 마을 일대에서 구전돼 왔으며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돼 왔다.

하지만 최근 각종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된 실제 내용은 구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마을 윤성부 이장의 노력으로 묘지와 비석이 지난 4월말에 발견됐다.

본지 기자가 윤성부 이장과 함께 방문한 유섬이의 묘는 봉분이 거의 사라졌지만 유처자묘(柳處子墓)라고 새겨진 묘비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현장에서 확인한 유섬이의 봉분은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일반 백성들이 묘비를 세울 수 없었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하겸락 부사의 관심이 상당히 높았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윤 이장이 묘지와 비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마을이 장수마을로 지정되면서 마을역사와 이야깃거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다.

그는 “작년에 누군가 마을을 방문해 유처자묘를 찾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후 마을역사를 찾기 위해 문헌을 찾던 중 유처자 이야기를 발견하고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처자묘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서 “어릴 때부터 뛰어놀던 곳인데 그동안 관심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지난 4월말에서야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유처자에 대한 관심은 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을 지낸 하성래(아우구스티노) 박사에 의해 촉발됐다. 하 박사는 1862년부터 거제도호 부사를 역임한 하겸락의 문집 ‘사헌유집’의 해제를 집필하던 중 우연히 유섬이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하 박사와 서종태(스테파노) 교수는 유섬이의 묘 옆 바위에 ‘칠십일세유처녀지묘’라고 묘비를 새겼다는 ‘사헌유집’의 기록을 근거로 지난 2월 유섬이의 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거제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 방문에서 유섬이의 묘를 찾지 못하고 이후 윤성부 이장이 발견하면서 천주교 등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한편 거제문화원에서 발간한 문헌에는 “내원사(內院寺) 동쪽에 묘가 있는데 옛날 정승 유씨(柳氏)의 딸이 열살때 집안이 변을 당하여 어머니는 남해(南海)로 가고 거제(巨濟)의 어느집에 부치어 살다 자라서 시집도 못가고 죽으니 마을 사람들이 장사하였는데 그뒤 철종(哲宗) 13年(1862) 하겸락(河兼洛)이 묘비를 세웠다 한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 구전에 따르면 유섬이가 전라도 음식문화와 가사를 거제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운의 여인 유섬이가 묻힌 묘지와 비석


유섬이(유처자)를 관노로 내몬 신유박해
유처자 유섬이를 관노로 내몬 신유박해는 단순한 천주교박해가 아니라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벽파가 벌인 정략적 사건이다.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발생했지만 1794년 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명으로 교세가 확대됐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해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했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해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했다. 또한 그들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했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됐다.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됐고, 왕족인 송씨(宋氏 : 정조의 庶弟인 恩彦君의 부인)와 신씨(申氏 : 恩彦君의 며느리)도 사사(賜死)됐다.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했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혔는데 대부분은 배교 후 석방됐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돼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됐다.

`양박청래' 관련된 이들은 서울로 압송돼 곧 사형을 언도 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돼 9월 17일(음) 능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돼다.

신유박해의 마지막 처형은 12월28일(음) 전주에서 있었으며 유항검의 처 신씨 등 일가친척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천주교박해 일지>
- 1785년 : 을사추조적발사건. 이벽의 가택 감금과, 김범우 유배생활, 그 여파로 사망
- 1791년 : 신해박해.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 1801년 : 신유박해.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 1815년 : 을해박해. 경상도 교우 100여 명 체포, 그중 30여 명 순교
- 1827년 : 정해박해. 전라도 교우 240여 명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 여명 체 포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 1839년 : 기해박해.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명 순교
- 1846년 : 병오박해. 김대건 신부 등 10여 명 순교
- 1866년 : 병인박해. 대원군에 의해 8천~2만여 명 순교
- 1901년 : 제주교난.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 1910 ~ 1940 : 일제에 의해 박해. 안중근의 의병활동, 서상돈의 국채보상운동 등 전개
- 1953년 : 6.25 로 인해 북녁땅의 교회 박해 및 학살. 현재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음.
 

거제성당 신도들이 유섬이의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이정표를 세웠다.


유처자 유섬이 관련 중요 인물들

◆부친 유항검(柳恒儉)
교명은 아우구스티노. 전주(全州) 출생. 윤지충(尹持忠)·권일신(權日身) 등에 의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가성직(假聖職)제도에 따라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호남지방 전교에 힘써 ‘호남의 사도’로 불리었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교회를 모독하는 일임을 알자, 당시 북경(北京)주교에게 문을 구하여 즉각 조처를 취하였다. 북경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도와 함께 전교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호남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때 부인 신희(申喜), 큰아들 중철(重哲), 며느리 이순이(李順伊:누갈다), 둘째아들 문석(文碩), 동생 관검(觀儉)과 그의 아들 종선(宗善) ·문철(文喆) 등 일가족이 순교했다.

◆올케 이순이(李順伊)
세례명은 누갈다이며 태종의 14대손이고,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인 직암(稷庵) 권일신(權日身)의 여동생이다. 1797년(정조 21) 15세 때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주선으로 18세의 유중철(柳重哲)과 동정부부(童貞夫婦)로 혼인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시아버지 유항검(柳恒儉)과 남편이 양박청래사건(洋舶請來事件)에 연루돼 체포된 후에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체포돼 이듬해 초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했다.

그의 옥중 서한이 오빠 이경도(李景陶)가 순교 전날 어머니에게 보낸 서한 및 옥사한 동생 이경언(李景彦)의 일기와 함께 ‘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한다. 묘는 전라북도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大聖洞)의 천주교순교자묘에 있다.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우석(禹碩)이고, 호는 사헌(思軒)이다. 일찍이 이우빈(李佑斌)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853년(철종 4) 무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수문장 겸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훈련원첨정·어영파총(御營把摠) 등을 역임하고 1862년 거제도호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무신이었으나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이기집설(理氣輯說)’과 ‘봉선록(奉先錄)’을 편찬했으며 문집인 ‘사헌집’ 4권이 전한다.

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 선생, 사헌문집 해석
거제 일운면 출신 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 선생이 거제부사 하겸락의 ‘사헌문집’을 해석해 유처자로 알려진 유섬이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밝혀냈다.

고영화 선생은 ‘거제유배 류처녀의 삶’이라는 글을 통해 ▲류처녀(柳處女) 개요 ▲거제도 내간리 유섬이의 삶 ▲설화 <류처자(柳妻子) 이야기>와 시조 <처녀의 향수> ▲<부거제(附巨濟)>유섬이의 기록 ▲제거제류처자문[祭巨濟柳處子文] 거제 류처자 제문 ▲결어 및 제언 등 유처자를 소개하고 있다.

유처자와 관련된 고영화 선생의 글은 <관련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섬이의 묘지와 비석이 있는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