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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④-1
거제도 창작, '정과정곡(鄭瓜亭曲)'과 정서(鄭敍)…④-1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3.0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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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과정곡 결론 및 맺음말

고려시대 정서가 지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은 그의 사후 300 여년 까지 어느 곳에서 지은 작품인지 정확히 기록된 사료는 없다. 단지 그의 관향 동래6년과 이배된 거제13년, 총 약20년 간, 귀양살이 동안 창작된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조선중기 이후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동래에 있는 과정(瓜亭)이란 정자와 동래 정씨라는 이유만으로 동래에서 창작된 것으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현실이다. 현대에도 여러 학자들은 동래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더 많다. 이는 1451년『고려사』권71 지(志) 제25악 2와 1484년 『동국통감』24 고려의종 장효대왕 5년5월조, "정서가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의 명령이 오지 않았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거제에 이배되어 더 오랫동안 유배되었던 사실은 빠져있다. 『고려사』열전 정항(鄭沆) 조에는 "정서가 이미 귀양왔으나 소명(召命)이 오래도록 이르지 아니함으로 마침내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지었다"라고 기록한 채 동래란 말이 없다. 『동국통감』과 『고려사』열전의 기록은 같다. 『동국통감』內, 장효대왕 조와 정항(鄭沆) 조에 같은 내용을 같은 사적에 기록하면서 이처럼 달리 표현한 것은 기사내용이 단정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 못 됨을 시사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록에 나타나 있는 <정과정곡>의 내용과 약 한 달간 거제에서 의종과 정서가 재회한 점, 임춘의 시(詩)에 나타난 정서의 거제 유배생활을 유추해 보면, 거제에서 창작한 작품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조선초기 학자들은 동래에서 거제도로 이배되었다는 사실과 고려의종과 재회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 못내 아쉽다.

◯ 정서 사후, 후세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란 제목으로 약 300년 간 조선초기까지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하게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20년 유배기간 동안 창작한 작품이라 함이 가장 합리적이다. 하지만 정과정곡 내용 上, 거제도 둔덕기성에서 의종 앞에서 불린 노래임을 증명할 수 있다.

⌈고려의 대문인(大文人) 임춘에 따르면, 정서는 대학자이며 백락천 같은 대문호라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세속적인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 앞에서, 직접 하소연한 노래(가요)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만일 동래에서 이 작품을 지었다면, 당시 정치상황과 맞물려, 불순하고 경박한 노래 내용으로 인해, 개경의 의종과 간신 무리배들이 정서를 참형에 쳐했으리라, 쉬이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약 280년 간 민중들에 의해 구전(口傳)되다가 조선시대 초기에 문헌에 정착된 노래인 이유도 한 몫을 하니, 거제도에서 창작되었음이 확실하다.⌋

◯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때에 내면의 결핍에너지(lack of energy)가 분출(volcanic energy)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명작품(名作品)이다. 그도 6년 동안 관향인 동래에서의 삶은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이배된 거제 13년 동안의 귀양살이 동안 스스로 삶을 영위해야 했으므로 그에게 닥친 정서적 경제적 궁핍은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거제도로 유폐된 의종을 만나 지난날의 회한을 하소연하듯 늘어놓은 작품이 바로 <정과정곡>인 것이다. 부산 수영구에 비록 정과정곡의 시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제시 오양역이나 둔덕기성에 <정과정곡>의 기념비를 세운다고 전혀 문제 될 바가 아니다. 앞으로 <정과정곡>이 동래보다 거제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려야하며, 소중한 거제의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나가야 한다.

⇨ 향후 사업방향 : 오양역 성(城)에서 둔덕기성까지, 또는 둔덕면 거림리에서 둔덕기성까지, 현재의 산길을 그대로 이용해서 '고려문화길', 또는 '정과정길', '고려 의종길'을 만들어야 한다. 산길에 정과정곡 시비, 의종에게 바친 황보탁(皇甫倬)의 '작약(芍藥) 시(詩)에 대한 응제(應製)', 그리고 '오양열부사' 이야기 조성은 물론, '둔덕기성에 관한 이야기 설화', '작약 꽃길'을 조성해야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임춘(林椿)이 쓴 '정서에 대한 한시' 시비도 함께 건설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 그리고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과정곡’ 저자인 정서와 고려의종의 20년만의 재회를 상징하는 ‘정과정곡’ 시비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한다면, 그 관광 상품으로서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거기엔 당연히 둔덕기성(폐왕성)까지 오르는 길을 확장하거나 순환체험길을 만들어서, 그 옛날 고려역사문화의 감흥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체험길 조성은 지역주민과 더불어 지역설화 역사 이야기를 덧붙이면 된다.

고려의종은 산남대로를 따라 전주에서 진주로 다시 고성을 거쳐 거제 오양포에 도착한다. 오양역원에 마중 나온 거제현령이 뱃길을 따라, 둔덕면 술역리 하둔리를 거쳐 거림리에 도착,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둔덕기성으로 배소를 결정한다. 하지만 각지에서 따라 온 수백 명의 가솔들의 주거지를 우선 결정해야하는 상황에서, 거제수령의 권유로 둔덕면 거림리 일대에다 가솔들의 주거지로 결정하게 되었고, 또한 뒤이어 거제도로 쫓아온 왕의 애희(愛姬) 무비(無比)는 거제도에서 왕비에 준하는 위상을 갖게 된다. 이로써 고려의종은 둔덕기성을 중심으로, 사등면 오양리와 둔덕면 거림리를 오고가게 된다.

처음 고려의종이 거제에 유폐되었을 때에는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가 오양리에서 총 20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사적으로는 이모부인 정서를 자신이 유배 보내놓고 방치한 사실에 심히 죄송스러워 했을 것이다. 이에 정서는 날마다 둔덕기성으로 올라와 고려의종에게 지난 세월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바로 이때 쓰여진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가 바로 “정과정곡”이다. 약 한달 후에 무신정권이 대사면령을 내린다. 정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의종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곤, 그가 사망할 때까지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

◯ 현재 둔덕기성 성내에는 수많은 몽돌과 토기 파편이 지천에 깔려 있다. 4단의 평지터로 이루어진 건물터와 제단의 흔적은 물론 둔덕기성 인근 산자락에는 3~4군데 토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성내(城內) 연지 못(집수정) 발굴조사는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일부분이고 성내 전체를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 이에 따라 둔덕기성의 옛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둔덕기성 內 성루(城樓) 또는 정자(亭子), 누정을 복원하고 고려의종과 시녀 시종 병사들의 처소건물과 군기창, 제단, 지휘관 건물, 성문 등을 복원 건립해야하며 관광객이 둔덕기성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지정된 코스에는 고려의종이 좋아한 작약꽃길을 만들고 오양리 성쪽에는 정과정곡 시비(詩碑)에다가 고려의종과 정서의 실제 역사 이야기를 덧붙여야 한다. 체험길 주변에는 거제의 역사문화를 한 눈에 읽을 수가 있는 역사 상징물을 만들고, 교훈적인 글과 거제형승을 읊은 한시 몇 편도 띄엄띄엄 만들어, 걷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하면서, 견내량 통영쪽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포토존(Photo Zone)을 만들어 관광객이 사진에 담도록 해야 한다.

◯ 또한 거제 고려의종에 관한 스토리텔링에는 당시 거제도로 다녀 간, 정서와 의종의 재회, 이의민이 거제도로 와서 무비를 압송하여 개경으로 데려간 역사적 기록과 지역의 설화도 함께 덧붙여야만 한다. 이에 시나리오•소설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지역의 대표적인 종합문화예술로 자리매김 하도록 여러 분야의 예술인이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단편적인 무대와 창의성과 상상력이 결여된 예술은 울타리에 갇혀 세계화 할 수 없다. 세계로 나아갈 거제도의 고유문화에는 반드시 상상력과 창의적인 토속적 스토리가 필요하다.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10. 고려의종에게 바치는 한시

고려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대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이 나이 20세였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거제도로 추방된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된 역원 중에는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역(驛)이 오양역이라, 산남도 역길을 따라 거제 오양역으로 보내졌다. 당시 오양리 일대는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는 공해전이라, 거제현령의 권유로 둔덕면 거림리 일대에 터를 잡게 되었고,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둔덕기성에서 약 2년 9개월을 보낸다. 이때 그가 유배 보냈던 정서(정과정)가 약 20년 간 유배되어 있었는데, 대사면령이 내릴 때까지 고려 의종과 정서는 거제도에서 약 한 달가량 함께 보내게 된다.

의종이 거제도에 있는 동안의 역사기록은 현재까지 전무하다. 그러나 황제에서 폐위된 후, 먼 변방 작은 성(城)에서의 삶은 참으로 혹독했으리라 여겨진다.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물론이거니와, 개경에서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재복귀의 유혹에 빠져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1). 우거즉사(寓居卽事) 둔덕기성 / 정황(丁熿).

정황 선생은 1552년경 고현성 북편에 있다가, 거제현령이 육지로 통하는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 인근에, 배소를 잠시 옮기도록 허락한다. 정황(丁熿)은 몇 개월 거주하는 동안 둔덕기성과 오양역 일대를 둘러보게 된다. 다음은 신라시대부터 이어 왔다는 ‘둔덕기성’을 언급한 유일한 문헌기록이다.

一島浮眉碧 푸른 눈썹처럼 떠 있는 한 섬

四年住嘯歌 4년간 거주하며 휘파람불고 노래했다.

山河通日本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城郭自新羅 성곽(둔덕기성)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安分非今爾 분수에 편히 하려고 함이 오늘뿐만 아니지만.

向隅是命何 실망하는 이 운명을 어찌하랴.

月明倚東柱 밝은 달은 동쪽 기둥에 기대고

回鴈聽西過 돌아온 기러기 서쪽으로 가는 소리 들리네.

2). 기성유배 고려의종을 추도하며(追悼岐城謫毅宗) / 고영화(高永和)

不向普賢飛(불향보현비) 어찌하여 보현원(普賢院)에 날아가지 않고서,

岐城見者稀(기성견자희) 보아 주는 이 없는 기성(거제)에 사는고?

俗世身早蜕(속세신조태)  속세에 일찌감치 벗어난 뒤로,

歲寒且安歸(세한차안귀) 추운겨울 오면 어디로 돌아가리.

浩浩雲濤闊(호호운도활) 구름과 바다물결 끝없이 펼쳐 있고

殘月海上窺(잔월해상규) 새벽달은 바다 위를 살피네.

春回山舊靑(춘회산구청) 돌아 온 봄, 산은 옛 같이 푸르니

不肖復爲悲(불초부위비)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주1] 둔덕기성(屯德岐城) : 폐왕성(피왕성). 거제지역 국가사적지정 제509호 문화재, 해발 326m 우봉산 자락에 위치, 신라시대부터 내려 온 성(城)으로 고려의종(약 3년간)과 조선태조 때 고려 왕씨들의 유배지.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호.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3). 그대 그리워(思君) / 고영화(高永和)

見乃梁雲看漠然(견내량운간막연) 견내량의 구름, 막연히 보이는데

逸韻忙情散遠汀(일운망정산원정) 빼어난 소리와 애타는 정이 멀리 물가에 흩어지네.

送君鷄林不敢忘(송군계림불감망) 계림으로 보낸 그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不眠深夜月孤懸(불면심야월고현)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외로운 달만 걸렸구나.

고려 의종이 거제 도착, 한달 이후까지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가 오양역에서 13년간 거제 귀양살이를 했다. 그도 산남대로(통영별로)를 이용해 견내량을 건너 오양포에 도착, 오양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서해안 뱃길은 너무 위험하고 또한 수백 명의 문무백관과 가솔들, 각 지역추종자, 각종 화물을 싣고 오기가 힘들었으며, 왜구가 남해 서해안에 득실하던 때라 안전한 육로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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