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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반곡서원문학,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 영남 노론과 거제반곡서원
거제 반곡서원문학,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 영남 노론과 거제반곡서원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3.12.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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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도에 속하는 거제도는 본디 조선중기 고현동 거제향교 시절부터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일파가 몰락하자, 남명학파가 분해되어 일부는 퇴계학파에 합류했고, 일부는 정계 진출 및 생존의 차원에서 서인에게 접근하였으므로, 남명의 학통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자, 송시열의 거제도 유배가 계기가 되어 노론계 학통이 널리 숭상되었다.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은 1704년 영남 노론계 서원중 하나로써, 거제유림들과 송시열 문인인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로 인해 공교육기관인 거제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퇴색하고 사립학교 반곡서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송시열선생은 거제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거제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 거제유림들이 유배지 배소에다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하였다.
1689년 김진규 선생과 1722년 김창집선생의 연이은 거제면 동상리 유배로 인해,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나, 거제도는 유학의 절정기를 맞았다. 거제의 유림들은 중앙정계의 파당에 관계없이 조선 말기까지 안동 도산서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

영남의 노론으로는 상주지역에 창령 성씨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옥천 전씨가 있었다. 옥천전씨는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서인) 가문으로, 전유장(全有章)이 현종 8년(1667) 3월에 양현승무소를 올렸다. 전유장은 전유경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아들 모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아들 전극태는 함창의 채하징과 송시열변무소를 올린 바 있다. 종유록을 보면, 중앙의 노론계 인사 및 다른 영남지역의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전극념과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는 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바 있으며, 특히 전극화는 거제와 장기에 송시열 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극초는 송시열의 덕원 적소행을 배행하였고, 만년에 명왕조가 망하자 동지 13賢과 팔공산에 은거하였다.
숙종 19년(1693) 14賢 후손들이 유계(儒契)를 만들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여름에 수계(修契)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인동의 향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거제면에 위치한 반곡서원

청도의 밀양박씨 가문은 대구의 대표적인 서인(노론) 집안인 옥천 전씨와의 결혼관계로 맺어진 집안이다.
박내장(朴乃章)이 옥천전씨 시헌의 딸과, 박지현(朴之賢)은 옥천전씨 유장의 딸과, 그리고 박미장(朴彌章)의 사위가 전극념이다. 이 집안의 사승관계를 박지현(朴之賢,1634~1681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증조 양복(陽復)은 일찍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부 박내장(朴乃章,1602~1665)은 장현광 문인이고, 박지현의 父 박선장(朴宣章,1608~1685)은 사계 김장생 문인이다. 박지현의 아들 박태고(朴太古,1656~1704)는 전극태를 따라 거제로 귀양 온 송시열을 찾아뵙고 입문하였으며, 손자 박중채(朴重采, 1679~1750)는 권상하 문인이다.
거제의 반곡서원과 장기의 죽림서원은 전극화의 주도로, 거제의 옥삼헌(玉三獻)과 장기의 오도전 등 지역의 송시열 문인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옥삼헌과 오도전은 반곡․죽림서원의 수장․도원장(院首․道院長)이 되었다.

거제는 송시열이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터에서 적거생활 1여년밖에 되지 않아 영향이 크지 않았으나, 뒤이은 김진규의 유배로 인하여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전극화는 종백씨(전극흠)와 함께 숙종 29년(1703)에 거제로 들어가 읍유들과 서당 건립을 상의하여, 읍의 원님이 재력을 모아 서당 이름을 승석당(勝昔堂)으로 정하였다.
거제선비(士人) 옥삼헌(玉三獻) 등이 유상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어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숙종 31년(1705) 5월 상순에 전극화는 원수(院首)로서 욕례(縟禮)를 성대하게 치루었다(연방집권6, 「낙포유고」죽림서원창건일기).

장기는 송시열이 숙종 1년(1675) 6월 15일 덕원에서 이배되어 숙종 5년(1679) 4월에 거제로 이배되기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은 강학을 멈추지 않아 대구의 전극태 형제를 비롯 많은 선비(士人)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 장기의 사인들에게서 입사(立祠)에 대한 논의가 없자, 전극화는 거제의 반곡서원 봉안례에서 오도전(吳道全)에게 입사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직접 숙종 33년(1707)에 서울로 가서 유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

[주] 오도전(吳道全) : 자는 여완, 호는 경암, 본관은 해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왔을 때 공의 집에서 거처하였으므로, 문정공의 교화에 힘입어 문장이 뛰어났으며, 장기현의 훈장으로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견문학행이 출중하여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고 예절을 정비하여 많은 유풍선속을 전수하는데 공헌하였고, 공의 행적은 죽림원록에 기록되어 있다.

영남지방 노론계 서원의 건립현황을 보면, 숙종 27년 장희빈이 사사되고 남인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영남사림들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같은 지역내에 남인계 서원건립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남지방에 한정된 상황은 아니고 거의 전국적인 추세였다.
조정에서는 서원이 남설되자 몇 차례 남설금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고, 자파계 인물의 신원과 자파세력 부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 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세기 노론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정계와 학계가 낙론의 주도 속에 근기남인들의 부분 참여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호서․호남․영남지역은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고, 지역성은 더 고착되었다. 이는 중앙정계와 당색을 달리하는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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