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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의 사별(死別). 애도문[亡室哀悼文]>
<아내와의 사별(死別). 애도문[亡室哀悼文]>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6.03.2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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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실 애도문(亡室哀悼文)은 사별한 부인의 삶을 추모하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지은 글인데, 제문은 망자의 상장례(喪葬禮) 때 전례(奠禮)의 현장에서 직접 구술되는 산문 소품(小品)으로 상실한 슬픈 감정을 승화시켜 죽은 자를 위로하고 남은 자의 아픔과 슬픔을 토로하는 글이다. 따라서 제문은 예술성보다는 실용성이 강해서 문학성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제문만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사람이 짝을 이루어 살아가다가 한 짝을 버리게 될 때의 상실감이란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양(陰陽)의 조화가 무너지면 그 상실감은 천지우주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애도문(哀悼文)은 그 어떤 문학적 소재보다 인간의 감성을 극한에 이르게 하니, 인간내면의 심연(深淵)에서 가감 없이 우러러 표출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관문,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사물에게 적용되는 자연스런 질서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냥 슬퍼하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승의 연장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산 사람과 동등하게 여긴 측면이 장례 절차에 남아 있다. 장례 절차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지까지 상여(喪輿)를 이용하는 운구 절차이다. 이때에도 장지까지 상여소리로 망자와 생자가 서로 대화를 행하듯 의식을 거행했다. 입관하기 전에는 남편이나 아들이 관을 두드리며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登木贈言). 이러한 소리 속에는 살아있는 사람과 망자, 그리고 자연과 영혼이 연결된 관계에 있고, 조상 숭배는 물론 자연 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의 관습 풍습 생활상을 반영하며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죽은 망자가 저 세상에서 편히 쉴 것이라는 소망을 읊조린다. 누군가, ‘세상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했던가. 인생이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정열의 여름 지나, 가을 오면 열매 맺고, 찬바람 부는 날, 저 하늘을 향해 사라지는 것이거늘....”

 

1) <죽은 아내의 시신을 부여잡고[亡室挐屍身]> 고영화(高永和)

그대여~ 어드매로 가는고?

놀란 포말 사이로 쌍검(雙劍) 하나 사라지고

경대(鏡臺) 속 봉황새 이제 홀로 남았구려.

춘색(春色)이 아무리 빼어난들 당신 자태 같으리까.

아! 우리네 인생 허무함이여~

곡(哭)소리에 아침이슬도 어느새 사라졌다오.

 

그대여~ 어드매로 가는고?

항아(姮娥)의 불사약(不死藥) 그대가 먹었느뇨.

남편의 고분지통(鼓盆之痛) 어이하랴 떠났느뇨.

꽃다운 청춘인데, 지아비 남겨놓고 죽은 아이 돌보려 갔느뇨.

좋은 시절 못 보시고 어찌하여 뜨신거요.

청고(淸苦)한 생활 속에 이제 나는 어이하오.

 

그대여~ 어드매로 가는고?

원통(寃痛)하고 애석(哀惜)하오.

백년해로 약조(約條)가 물거품이 되었구려.

눈에 삼삼, 꿈에 아련, 까마귀소리 구슬프고 샘물소리에 목메이오.

인간세상 정리하고 내 따라 가리다.

그대여 월궁(月宮)에서 마음 편히 기다리소.

 

오호라! 부인 잃은 홀아비의 애달픔이여~ 비애가(悲哀歌)를 읊노매라!

 

◯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쳤다. 얼마 후에 암컷이 죽자 홀로 남은 수컷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앞에 거울을 달게 했더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슬피 울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는 설화가 있다. 금슬 좋은 부부는 대부분 백년해로하기를 소망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뒤따라가는 경우가 훨씬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반대로 여자가 먼저 떠나는 경우가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한다. 정황(丁熿) 선생이 귀양살이 동안 함께했던 정(鄭)씨는 조선시대 여인네가 그러했듯이 유배 전부터 시부모 모시고 제사 받들고 손님대접하며 일가친척 화목하게 하였다. 거제유배동안에도 종들 잘 다스리면서 육아교육, 이웃과의 예절, 치산(治産), 남편섬기기를 훌륭히 이끌었던 부인이었다. 그런데 어려운 귀양살이에서 함께 했던 부인이 황천으로 가버리니 그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 타향에서 자신을 돌보며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다 일찍 요절한 죄책감으로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 정황(丁熿)은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곤양(昆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巨濟)로 이배되어 1560년 거제도에서 사망했다. 1548년~1554년 까지 거제시 고현동 계룡산 아래 배소에서 측실 정(鄭)씨와 장모가 함께 따라와 그를 보살폈다. 1543년에는 거제도에서 태어난 호남(好男) 정남(正男) 서얼 두 아들을 돌림병으로 잃게 되었고, 다음해 1554년 정(鄭)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측실 정씨(鄭氏)는 1528년생이고 정황 선생은 1512년생이다. 1543년에 후실로 들이어 1554년 거제도 배소에서 파경을 맞았다. 정황의 나이 43세, 정씨의 나이 27세였고 결혼 11년 만이었다. 거제도에서 측실 정씨 사이에서 출생한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호남(好男)은 1550년 출생하여 1553년 8월 사망했고, 둘째 정남(正男)은 1553년 5월 출생하여 9월 사망했다. 그 다음해 1554년 측실 정씨가 사망하였다. 그는 이후 슬픔에 못 이겨 괴로워 하다가 1555년 봄에 주위 분들의 권유에 의해, 고현성 동문 대나무가 우거진 시냇가, 큰 바위 곁에다 새 초가를 지어 거처를 옮겼으나, 1558년 그의 머슴까지 잃게 된 후부터 극도의 외로움에 구련(拘攣)병[손발이 굳어 못쓰게 된 병]이 걸린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학문과 경세제민에 관한 책 저술에 전념하게 된다. 1560년 마침내 책을 완성한 후, 계룡산을 마지막으로 올라가 생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곤 배소에서 사망한다. 학문적으로는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어, 거제도에서 ≪부훤록(負暄錄)≫10권‚ ≪장행통고(壯行通考)≫10권 등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현재 그가 유배지 거제도에서 남긴 문학작품이 700여 편에 이른다.

 

◯ 정황(丁熿) 선생은 아래 애도문(哀悼文)을 통해 통탄의 울분을 표출한다.

“그대여~ 백년을 함께 살자며 이별은 말자했는데 사별이 진실로 운명이더냐. 그대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편안히 즐겁게 해주었다. 그대가 아니면 어찌 밥 먹고 옷 입고 살 수 있었으랴. 그대를 만나 존재할 수 있었고 반려자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했다. 친구로서 좋은 점도 있었고 부부로서 사랑도 있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입 없는 늙은이였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불행을 만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고 산다 해도 더욱 고통일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 있어도 누가 나를 알아주랴. 원통하다! 그대여~ 혼백이라도 매일 밤 꿈속으로 들어오시게.”

 

 

2) 측실 정씨에 대한 애도문[側室鄭氏哀文] / 정황(丁熿) 1554년 거제도유배 中.

슬프도다! 그대여~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 이달 20일 날 거제도 변방에서 홀로 되었네. 이제부터 영원히 볼 수가 없으니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예전에 내가 그대에게 백년을 함께 살자하니 무릇 조석을 내놓음에 그대가 나를 즐겁게 하였지.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니 하루가 9개월 같도다. 두 마음이 서로를 기억하며 생사로 이별을 말자 했었다. 방종과 안일함 없이 과실을 서로 보완하며 귀양 온 외로운 나를 지난 10년 동안 남쪽 바닷가에서 온전하게 해주었다. 삼려대부 굴원(屈原)의 혼(魂)에 들어갔고 가의(賈誼) 장사(長沙)의 복새에 눈물을 뿌렸다. 정신을 온전히 하라며 입과 배 등의 신체는 그 다음이라 했었다. 나를 편안히 즐겁게 하고 나를 따뜻이 배부르게 하였다. 따뜻하고 배부른 것을 제쳐두더라도 안락하게 해준 것을 어찌 잊으랴. 음식은 그대가 아니었으면 창자에 기갈이 들었을 것이고 의복은 그대가 아니었으면 몸이 벌거벗을 것이다. 언어는 그대가 아니었으면 남에게 들려오는 말이 없었을 것이고 질병에는 그대가 아니었으면 입 없는 늙은이였을 것이다. 먹지 못하면 낫지 아니하고 귀가 없으면 들음이 없다. 창자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신체의 헐벗음으로 세상의 편리함과 의지할 곳을 잃고 그대의 죽음에 심한 슬픔에 곡하누나. 어찌 음식이 없으랴마는 그대가 마련한 것이 아니고 어찌 의복이 없으랴마는 그대가 수선한 것이 아니도다. 들려오는 말이 있어도 때맞춰하는 그대의 말이 아니며 질병에 근심이 있어도 그대의 위로가 아니니 내가 그대를 그리워함에 어찌 끝이 있으랴. (옛날에)보모가 돌아가신 후에 부모의 집에 살면서 조상을 모시며 함께 살면서 혹은 산소에 가서 배알하곤 했다. 비록 그대가 형제는 없었으나 일가는 찾아보리다. 함께 해로하자는 말과 헤어지지 말자는 말을 했었지. 고향은 천 리 먼데 둘러싼 바다만 출렁이네. 먼 지방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며 남해 바다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귀양살이로 헐떡이니 순임금시대의 죄지은 백성일세. 사방을 둘러봐도 혈혈단신인데 어찌 생애가 이리도 미천한가? 그대를 만나 존재할 수 있었고 반려자로써 서로가 의지했었다. 비록 운명이 재촉했지만 어찌 등질 수 있으랴. 친구로서 좋은 점도 있었고 부부로서 사랑도 있었다. 한사람의 몸으로 아울렀더니 하루아침에 모두 가버렸구나. 나무 관의 덮개를 영원히 닫으니 그 모습 어느 곳에서 찾으랴. 원통하다! 혼백이여~ 이젠 나에게 슬픔만 남았네. 홀로 남은 당신의 모친을 생각하니 먼 하늘가에서 슬픔이 끝없도다. 여린 여인의 울음이 길가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가 43살에 이러한 불행을 만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고 산다 해도 더욱 고통이니 사별의 슬픔이 진실로 운수이더냐. 삶의 어려움이 있어도 누가 나를 알아주랴. 혼백은 아실 것이니 매일 밤 꿈속으로 들어오시게!

[慟夫人也 棄我而逝 今二十日 島夷之裔 一此無見 果如斯乎 昔我謂君 百年其俱 凡出朝夕 君懷我遊 今君缺缺 一日三秋 兩心相記 死生莫離 非存淫佚 過失是規 完我孤臣 十年楚澤 返三閭魂 揮長沙鵩 精神可全 口腹其餘 安余樂余 溫余飽予 溫飽且置 安樂可忘 飮食非君 飢渴于膓 衣服非君 脫赤于身 言語非君 則無耳人 疾病非君 則無口翁 無口無瘳 無耳無聰 膓之飢渴 身之脫赤 失寄世便 甚悼亡哭 豈無飮食 非子之供 豈無衣服 非子之縫 言語有聞 非子之時 疾病有憂 非子之宜 而余之思 曷有其窮 父母之後 父母之宮 追遠同居 或謁松楸 雖無兄弟 宗族是求 偕老之言 且不可分 故國千里 環海沄沄 漆齒非類 卉服非親 縲紲中喘 虞朝罪民 四顧孑孑 生涯何微 得子而存 鶼蟨相依 雖命之促 何忍乎背 朋友之好 夫婦之愛 兼一人身 竝一朝去 木之永蓋 影響何處 寃矣魂魄 我貽伊慽 寡母之追 天涯岡極 弱女之啼 路人心折 四十三年 遭如此厄 欲死不可 欲生尤苦 有死之哀 固在乎數 有生之艱 誰獲我心 魂如有知 入每夜深]

 

 

3) 관을 두드리며 말하노라[登木贈言] 입관을 하며 / 정황(丁熿) 1554년

“내 마음 타는 것같이, 내 마음 새는 것 같이, 홀로 선 흙과 나무처럼 하늘과 땅에 신령도 없는가! 백년해로의 맹세가 십년의 인연이더냐! 아들이 저승길에 앞섰는데 어찌 급히 둥근 거울을 깨뜨린단 말이더냐. 아비에게 돌아보지 않더니 어미에게도 차마 이러하냐. 부모의 상례를 마치고 한 해가 지난 뒤에 그대를 소중히 여기어 하늘같이 산같이 했었다. 그대가 한번이라도 돌아보지 않으면 문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기다리곤 했다. 정미년(1547년)에 출산하여 강보에 있었던 특별한 아이가 아직 여물지도 않아서 마침내 죽게 되었었지. 운명의 재촉이더냐. 그대 또한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죄를 따르는지 하늘가에서 원통하게 되었구나. 그대의 아름다운 행실은 친한 이웃에게도 드러나도 역사의 붓이 미치지 못하니 혹시 먼지 속에 묻혀 버릴까 안타깝도다. 남편에 대한 순종과 제사에 대한 정성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비복들에게도 기쁘고 정답게 하였다. 이미 대의에 통했으니 군자다운 사람이었다. 매양 감추어 드러내지 아니했으니 어찌 그리도 한결같이 어질었더냐. 전혀 자신을 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것 같다. 천지에 물어보고 귀신에게 따지랴. 내가 그대를 얻음으로써 그대는 내 마음속을 비추어 주었다. 내 말이 틀림없으니 금석과 같을 지다. 당신의 어머니 섬기기를 그대가 살았을 때와 같이 하리다. 관을 두드리며 그대에게 말하노라.”

[我心如焚 我言如漏 塊然土木 神明無主 百年之誓 十年之緣 將雛先路 遽缺鏡圓 不顧于父 能忍乎母 哭天及慈 隔一歲後 所重乎君 如天如山 君一不顧 倚門眼寒 丁未之産 襁褓之別 入稔不子 終底斯極 命之促矣 君亦無何 隨我于罪 寃于天涯 而君之美 著于親隣 史筆不及 惜或埋塵 隨唱之順 祭祀之誠 孝于父母 婢僕歡情 已通大義 君子之人 每晦不見 一何其仁 萬不掛一 五內如割 天地臨之 鬼神質之 自我得君 君照我中 我言不改 金石之同 我今事母 一如君存 無以永訣 登木贈言]

 

4) 첫 제사에 고하는 글[小祥告文] / 정황(丁熿) 1555년, 거제도배소

“이런 일이 있었던가? 그대 이미 떠났어라. 낮과 밤이 교대하며 이렇게 달이 흘렀네. 백년해로 인연 끊고 위하여 살다가 위하여 죽었구나. 영혼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밤나무 신주에 이미 의지했겠네. 영혼도 못가는 곳이 신령스런 산의 터(趾)이라지. 신(神)이 이르는 것을 알 수 없지만 내가 신에 의지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또 볼 수도 없으니 넉자의 만가(挽歌) 일뿐일세. 죽으면 본디 그러하다만 살아서도 어찌 그러했더냐. 음식을 마음대로 하면서 웃고 즐기는 일들을 매번 기다렸소. 오늘 하루 12시간 동안 오직 당신의 첫 제사만 생각했었소.”

[有如是乎 君其已矣 晝與宵交 逝月于此 割百年綠 爲生爲死 魂無不之 栗主依已 魄有所止 靈山之趾 不可度思 其依與靡 又不可見 四尺蒿里 死固然也 生何乃爾 飮食自如 言笑有俟 十二時中 獨念在是]

 

 

5) 죽은 처의 제삿날(亡妻亡日) / 정황(丁熿)

舊哭新悲叢一辰 옛 곡소리 새로운 슬픔 모두가 한 때인데

又爲去國念家人 또 떠나게 된 고향 집사람 생각한다.

古今窮獨誰相及 고금의 궁색한 홀아비인데 누가 미쳤다 하리오만,

餘外酸幸不可倫 남은 슬픔과 고통 비교할 수조차 없다네.

惟有向途安受命 오직 운명이라 여기고 편히 길을 향해 따르리라

更無他事以傷身 다시는 다른 일로 상한 몸이 되지 않으리.

雖知罪惡鬼誅慘 비록 나의 죄악은 귀신이 베어갈 참혹함인 줄 아노니

庶自來時求得仁 부디 다시 올 때는 덕이 있고 명(命)이 길기를 바라오.

 

6) 궁색한 홀아비(窮獨) 三首 / 정황(丁熿) 1554년.

前年兒死哭無過 작년 아이의 죽음에도 곡이 지나치지 않았는데

此日竝兒母奈何 이 날 아이와 어미가 함께하니 어찌하랴.

罔極天涯窮獨坐 끝없이 먼 바닷가 궁색한 홀아비로 앉았으니

有皇上帝忘人多 위대한 상제께서는 사람을 잘 잊어버리네.

 

前秋兒發慟無過 작년 가을 아이 초상에도 애통함이 지나치지 않았는데

此日竝兒母奈何 이 날 아이와 어미가 함께하니 어찌하랴.

罔極天涯窮獨坐 끝없이 먼 바닷가 궁색한 홀아비로 앉았으니

明明日月覆盂多 밝고 환한 해와 달이 엎어진 사발일 뿐.

 

前春兒葬踊無過 작년 봄 아이 장례에 슬퍼 뜀이 지나치지 않았는데

此日竝兒母奈何 이 날 아이와 어미가 함께하니 어찌하랴.

罔極天涯窮獨坐 끝없이 먼 바닷가 궁색한 홀아비로 앉았으니

莫寬后土我懷多 너그러움 없는 땅의 신이 나의 회포만 쌓게 하네.

 

 

7) 우연히 짓다(偶成). 사별한 부인 생각 / 정황(丁熿)

一去英靈不復缺 한번 간 영령은 다시 오질 않는데

缺磎宿草已焉哉 계곡의 묵은 풀을 생각지 말자.

金陵若有相聞事 금릉(金陵)에서 만약 서로 들릴 일이 있다면

夢寐先期面目回 꿈자리에서 먼저 만나 얼굴을 보여주시게.

[주] 금릉(金陵)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초나라의 읍(邑). 현재의 난징(南京)의 옛 이름이자 별칭(別稱)이다. 당나라 때에 금릉부라 칭한 데서 연유한다.

 

8) 술회(述懷) 三首 1558년, 부인을 그리며 / 정황(丁熿)

我倚君如母 나는 그대를 어머니같이

君倚我如父 그대는 나를 아버지같이 의지했다.

兩綠割一朝 두 인연이 하루아침에 갈라졌지만

以此成萬古 이로써 만고에 영원하리라

 

死者不可作 죽은 자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은

非今而自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

如何在曉頭 어찌하여 꼭두새벽에

去盖回魂魄 가고 난 후로 혼백만 돌아다니나.

 

醒來情自苦 술이 깨면 절로 괴로워져

蹴婢爲明炷 여종을 깨워 등잔 심을 돋우게 한다.

三匝殯牀回 세 번의 빈소를 차린 세월에

柩衣盡一塵 널 옷도 모두 티끌로 변했으리.

 

◯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지인(知人)들과 사별(死別)한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듯,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이다. 또한 만남과 이별이 곧 인생임을 깨닫는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은 우리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준다. 삶에서 배워야할 이러한 고통은 꼭 감당할 만큼만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상실감에서 다시 일어서서 조금씩 극복해 나가야 한다. 거제도는 봄철마다 매번 망자의 원혼인 듯, 춘백(春栢)의 동백꽃이 붉게 피었다가 피눈물을 쏟아내 땅바닥에 흩뿌리곤 한다. 산에는 망제(亡帝)의 원한인 진달래꽃이 가련하게 뒷동산을 덮는다. 누군가 말했듯이 예로부터 ‘이 세상은 살아남은 자의 몫’일뿐이다. 내 마음속에서 내 꿈속에서 이별한 이를 그리워하면서 살아도, 또한 가슴이 심히 미어지더라도, 먼저 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도, 이 땅에서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 때까지 제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내일도 태양은 따사로운 햇살을 비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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