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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거제한시(漢詩)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거제한시(漢詩)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5.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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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1347~1434년) 거제도 한시 작품을 살펴보면, 선생은 당나라 시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시에 대한 조감(藻鑑)이 뛰어난 분이셨고 조선초기 시인 중에 가장 뛰어난 쌍매당 이첨 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또한 정감(情感)을 중시하며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기교는 별로 없으나 고아한 표현에 운율미를 갖추고 있다. 거제도 관련 시들은 교은 정이오 선생이 평소 친분이 두텁던 박덕공이 제주목사로 임명되어 갈 때 병조의랑(정4품 관직)으로 임명되어 함께 제주도로 가면서 지은 시들이다.

1401년 10월에 박덕공이 제주목사로 부임(제주도착)하여 1403년 12월 퇴임 한 기록을 참고하면, 1401년 6월(음력) 경상도 웅천 소속 수군의 함정에 박덕공과 함께 타고<조풍설 기록> 가덕도에서 출항하여 이들을 마중 나온 전라수사 진원세의 함대와 함께 제주로 가는 도중, 한여름 풍랑을 만나 고생하다 거제도 영등(장목면, 구영등)포를 거쳐 칠천도, 견내량을 지나 남해 관음포, 순천 묘도(猫島)로 가 전라남도 고흥(강진)에서 제주도로 향하였다.

선생은 뱃길을 따라 가면서 보고 느낀 점을 시(詩)로서 남겨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교은 정이오 선생은 거제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 <도거제견내량 1401년>,<과거제영등포영 1401년>,<거제2수 1401년>,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은 <과거제칠천도 1404년>와 그 외 몇 편의 글을 남겨 우리 거제도의 고전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또한 그의 아들 정분(鄭苯)은 사등성에서 고현성으로 거제현 치소를 옮길 때 관찰사 하연(河演), 거제현령 이호성(李好誠)과 더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왜적으로부터 방어 가능한 성(城)의 위치는 물론, 풍수지리설에 의한 성문, 관아 건물, 향교 등을 모두 기초하신 분이다. 정이오 선생은 진주가 고향이라, 이후 낙향하여 살았다.

① 거제도 영등포영을 지나가며[過巨濟永登浦營] (장목면 구영등) / 古詩. 1401년作.

舳艫人語譁 배의 앞뒤로 떠들썩한 사람들 소리 들리고

臥聽橈聲發 누워서 노 젖는 노래 소리 듣노라

楫師能知風 뱃사공은 바람을 잘 아는데

掛席䫻殘月 돛을 펼치니 새벽달이 떠있구나

天明出浦淑 하늘이 밝아오는 포구를 나서니

浩浩雲濤闊 구름과 바다물결이 끝없이 펼쳐 있고

潮送輕鷗來 물 위로 갈매기 가볍게 날아와

同歸不忍別 따라오면서 차마 떠나질 못하네

回望永登島 영등도가 아득히 보이더니

倐已空中㓕 잠깐 사이에 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리니

若非乘水便 이렇게 물 위를 지나는 배편이 없었다면

窮討何由豁 궁한 싯구가 어떻게 활달할 수 있었을까

[주] 쾌석(掛席) : 돛을 펼쳐 배를 나아가다(掛帆)는 뜻이다.

⑥ 갈매기에게(謝白鷗) / 정이오(鄭以吾)
② 거제 칠천도를 지나며[過巨濟漆川島] /古詩. 1404년作.

三日東北風 3일 간의 동북풍에

澒洞翻溟渤 골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히네.

四面雪山崩 사방으로 눈산 같은 물결이 무너져

倒瀉鼋鼍窟 자라 굴에 거꾸로 쏟아지네.

雲陰日色薄 구름이 그늘져 햇볕이 엷고

雨點還蕭瑟 빗방울은 도리어 쓸쓸하네.

巨艦低且昻 큰 배가 낮았다가 솟구치고

島嶼惘相失 섬들은 아득하여 서로 찾지 못하네.

性命鴻毛輕 생명은 기러기 털처럼 가벼우니,

所賴惟忠質 믿는 것은 오직 충성된 이 마음 뿐.

于役微君故 일에 매인 것 임금의 일 아니라면,

胡爲不自逸 어찌 스스로 편하게 하지 않으리.

天懽諒斯裏 하늘만은 이 충정(衷情)을 알아주어서

訖可賜晴日 웬만하면 개인 날을 내려 주겠지.

遠愧晉謝安 아득히 진(晉) 나라 사안(謝安)에게 부끄러워라.

還家歸棹疾 집으로 돌아가는 돛배가 빠르구나.” 

[주1] 홍동(澒洞) : 연속한 모양.

[주2] 우역(于役) : 부역 나감, 혹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감.

[주3] 사안(謝安) : 중국 동진 말년의 정승인 사안은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조카가 진왕 부견의 95만 대군을 8만으로 물리쳤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큰일에도 태연하던 사안에게 부끄럽다는 말이다.

③ 거제도 견내량을 건너며[渡巨濟見乃梁] / 五言律詩. 1401년作.

曠望海空闊 멀리 바라보니 바다가 넓고

願瞻山紏紛 돌아보니 산이 얽혀 있다.

光陰古今變 세월은 예와 지금이 변했는데,

潮汐往來分 밀물과 썰물은 가고 옴이 분명하구나.

盡角穿秋漢 나팔 소리는 가을 하늘을 뚫고,

危檣劃暮雲 높은 돛대는 저녁 구름을 가리네.

入舟還有惑 배에 오르니 도리어 감회 있어,

簫皷酹王孫 퉁소와 북으로 왕손을 조상하네

   

濯足滄海水 창랑수(滄浪水)에 발을 씻고

停艫杜若洲 두약주(杜若洲)에 배를 대누나.

潮生靑嶂斷 파도가 이니 푸른 멧부리가 끊어진 듯하고,

海闊碧天浮 바다가 넓으니 파란 하늘이 둥실하네.

橫樂曹公詠 조공(曹公 조조)은 창을 가로잡고 시 읊었고

乘槎漢使遊 한(漢) 나라 사신은 타고 놀았다지.

往來成信宿 오가노라 이틀을 머무르며

相伴有沙鷗 모래 위 갈매기 짝을 짓는다.

 

長風送征㠶 긴 바람에 돛배 보내고,

高枕舟中臥 배 안에서 편안히 베개 베고 누웠네.

回回白沙平 빙빙 돌아드니 흰 모래가 평평하고,

冉冉靑山過 언뜻 언뜻 청산을 지나가네.

江闊浪花多 강이 넓으니 파도에 꽃 같은 무늬 일고,

天晴雲葉破 하늘이 개니 구름 잎처럼 갈라지네.

何圖島夷窟 섬 오랑캐들, 이날에

此日歸王化 왕화(王化)에 돌아올 줄 어찌 짐작했으리.

[주1] 두약(杜若) : 다년생 향초의 이름, 높이 1,2척에 매운 향이 있고 여름에 흰 꽃이 피며 열매는 검푸른 색이다. 문학작품에서는 군자, 현인을 비유한다.

[주2] 신숙(信宿) : 연이어 이틀 밤을 묶는 것을 말한다. 혹은 2~3일을 가리킨다.

[주3] 낭하(浪花) : 혹은 낭화(浪華)라고하며 파도가 서로 충돌하여 좌우로 일어나는 물거품(泡沫)을 말한다.

[주4] 도이(島夷) : 중국 동부의 해양민족 또는 왜구를 가리키며, 국내로 침략하는 해적을 총칭해서 말한다.

[주5] 왕화(王化) : 임금의 교화

④ 거제 형승 [巨濟形勝] / 七言絶句. 1401년作. 2首.

風聒危檣浪拍天 바람은 돛대에 시끄럽고 파도는 하늘에 닿은 듯하네.

南來跕跕墮飛鳶 남쪽으로 오니, 날던 솔개가 툭툭 떨어진다.

落帆已是仍掀舞 해진 돛은 춤추듯 너울거리고

斗牛更深更不眠 밤(斗牛)이 깊어질수록 더욱 잠 못 들어 하네.

群山揷海淺還深 여러 산들 바다에 꽂혀 얕았다가 다시 깊어지고

頃刻能晴又易陰 날씨는 일순간에 개이다가 곧 쉽게 흐려지구나

誰倚船窓夜吹笛 누가 배의 창가에 기대어 밤늦도록 피리를 부는지..

滿松風雨老龍吟 바다 물에 가득한 비바람을 타고, 늙은 용이 노래 부르네.

[주1] 솔개가~ 떨어진다 : 고온다습한 날씨를 비유함. 후한의 마원이 남만을 칠 때, 그 지역이 고온다습하여 독기가 자욱하게 끼었기 때문에 '솔개가 날다가도 물속으로 툭툭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한서>

[주2] 두우(斗牛) : 북두성과 견우성.

⑤ < 조풍설(阻風說) >            

동문선 제98권 1401년 作. 정이오(鄭以吾) : 1347(충목왕3)∼1434(세종16). 고려말 조선초 문신,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신중(臣重)의 아들이다.  

⌈가덕도(可德島)는 삼면이 모두 큰 바다요, 북쪽에 포구(浦口)가 있으니, 소위 내례항(內禮項)이란 곳이 그곳이다. 바위와 돌이 첩첩이 쌓여 산봉우리를 이루었고, 수목이 그 위에 빼곡히 늘어서 있는데, 그 형세가 특히 힘차게 달려 바다로 들어간 것이 마치 새가 부리로 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아서, 바람이 오기를 동쪽으로부터 오면 배를 서쪽으로 옮기고, 서쪽으로부터 오면 동쪽으로 옮기는 것은 형세와 편의에 기인하는 것이다.

6월 갑인(甲寅)일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박(朴)공이 그 서쪽에 닻줄을 내리고, 전라 원수(全羅元帥) 진원세(陳元世)공과 더불어 군졸을 휴식하게 하고 있었는데, 성낸 회오리바람이 동쪽으로부터 일어나 파도가 키질하듯 하고, 눈 산더미가 사방으로 무너지면서 배가 춤을 추듯 흔들리며 돛대가 기울고 노가 꺾이니 아, 두렵도다.

전라도의 한 배가 풍랑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연 바다 가운데로 나가 장차 정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중류에서 돛을 들어 곧장 거제(巨濟)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 무렵에 이르러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고 거칠며 비도 또한 쏟아져 사람들이 모두 눈을 뜨지 못하였다.

박공의 막료(幕僚) 김원덕(金元德)이 탄 배 한 척도 풍랑에 쫓겨 마구 흔들려 정박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바라보고 선채로 술을 불러 마음을 정성스럽고 결백하게 하여 하늘에 제사하여 경건히 빌고, 또 옷을 벗어 불살라 신명께 바쳤다.

그 기도를 마치자 동풍이 되돌아 서풍이 되니, 비록 감응이 있는 것 같으나 그 노한 기운은 바다를 말고, 그 기세는 산을 쌓을 것 같았으며, 큰 비가 사나워지기 시작해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넋을 잃을 만하니, 비록 영(郢)땅 사람으로 배를 잡게 하고 오(吳)나라 사람으로 물의 이치를 풀게 한다 해도 어느 겨를에 배를 옮기겠는가.

큰 전함(戰艦) 3척이 암석 가까이 정박해 있었는데, 앞으로 밀려 격돌할 것 같아 그 닻줄이 바람과 대결함이 마치 한 털이 천균(千鈞)의 중량을 끄는 것 같았다. 장군이 체면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군졸과 더불어 고난을 같이하며 친히 그 상앗대를 잡고 세 배를 서로 안배하여 부딪쳐 파괴되지 않도록 초저녁부터 5경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였다.

그러더니 바로 구름과 음기가 흩어지고 별과 달이 밝게 빛나며 바람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라도의 배가 이미 도서(島嶼)에 의지하였으니 그 완전을 어찌 바라며, 김원덕의 배는 대양 위로 나갔으니 어찌 다시 돌아올 이치가 있겠는가.”하고, 서로 돌아보며 한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순라(巡邏)하는 아전이 보고해 오기를, “전라도의 배는 동풍에는 보전하였으나 서풍에 부서졌고, 김원덕의 배는 가덕 남방에 무사하게 있다.”는 것이다. 말이 채 마치기 전에 과연 돛을 들고 들어왔다.

군졸에게 물으니, 울며 말하기를, “간밤에 하늘이 서풍을 아꼈으면 우리들은 물고기가 되었을런지, 이역(異域)으로 갔을런지 모를 것인데, 서풍을 이루게 한 것이 곧 공의 기도의 소치인 줄은 몰랐다.”하였다. 무릇 지성이면 신명을 감동하게 하고, 정성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옛사람은 능히 형산(衡山)의 구름을 헤친 자가 있는가 하면, 능히 염여(灩澦)의 물을 물리친 자도 있고 또 바람을 돌려 불을 잡은 자도 있으니, 이는 모두 하나의 정성을 쌓은 것뿐이다.

진실로 정성의 감동이 아니면 동풍에 몰리던 배가 어찌 하룻저녁에 서풍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혹 동풍엔 보전함을 얻었다가 서풍에 패하고, 동풍에 곤액을 당하다가 서풍에 보전함을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천도(天道)가 고르지 못함이 아니요, 모두 하나의 만물을 살게 하는 마음인 것이다. 전라도의 배는 이미 도서에 의지하였으니, 배는 비록 파손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은 삶을 얻었고, 김원덕의 배는 이미 큰 해양 위에 나왔으니, 다시 서풍이 없었으면 마침내 물고기와 자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 풍우와 하해(河海)는 모두 천지의 기운이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다. 그 바르게 하고 순하게 하는 것은 또한 성(誠)에 불과할 뿐이니, 성이란 것은 성실한 이치요, 사람에 있어서는 성실한 마음이다.

그 미묘함이 천지를 관통하고 시종을 한결같이 하여 비록 쇠와 돌의 단단함도 오히려 통과할 수 있거늘, 하물며 기운이 부동(浮動)하는 자가 어찌 내 마음에 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사람들이 다만 공의 능한 바가 천지인 줄만 알고, 공의 하늘에 능한 까닭이 성(誠)인 줄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성으로 설을 지어 장차 붓대를 잡는 자에게 고하려 한다.⌋ 

[주] 형산(衡山)의 …… 자 : 당나라의 한유(韓愈)가 조주(潮州)의 자사로 좌천되어 갈 때, 형산에 올라 최고봉에 구름이 끼인 것을 보고 하늘에 묵도하였더니 구름이 걷혔는데, 그것은 한유의 정성에 감동된 것이라 한다. 

⑥ 갈매기에게(謝白鷗) / 정이오(鄭以吾)

예나 지금이나 풍물시(諷物詩)에 있어 시인(詩人),묵객(墨客)들은 모두 갈매기를 빌어서 그 한적한 멋과 뛰어난 모습을 비기고 있도다. 잠깐 대가(大家)를 예로 든다면 노두(老杜,두보를 말함)의 문집에서도 보이는도다.

나는 박복파(朴伏波, 水軍 장수)를 따라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갔더니, 갈매기들이 언제나 배가 정박한 곳과 군사가 쉬는 곳에 날아들었다. 이 새는 목욕을 아니하여도 희고 물들이지 아니하여도 흐리며, 그 정신과 태도는 뜬 구름처럼 무심한 것이라서 멀리서는 볼 수는 있어도 조롱 속에다 넣어 둘 수는 없었다. 오래 되어 자세히 보니, 그가 배에 다가오는 것은 오직 먹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어찌 알고 말하는 것이냐 하면, 무릇 누선(樓船)에 있는 군사들 중에는 고기를 낚는 자도 있고 짐승을 잡는 자도 있는데 그 새,짐승,물고기,자라 등의 비늘,껍질,간(肝),신장[腎]을 모두 얻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으로 그 소위(所謂)를 달갑지 않게 여겼도다. 또 무릇 새나 짐승이 잡혀 죽는 것은 대개 먹이를 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났도다. 이에 나는 무부(武夫)에게 탄환(彈丸)을 달래서 한 번 쏘아 그 형상이 어찌되는가 보려했도다. 내가 탄환을 얻어 가진 뒤로는 갈매기도 감히 배에 다가오지 않았으니 그 기미를 알았단 말인가. 논어(論語)에 있는 “빛만 보고 퍼득 날아, 빙 돌다가 다시 앉네.”라는 말은 갈매기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나는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시인, 묵객들이 이를 시로 꼭 읊는 까닭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취할 점도 인정하게 되었도다. 아, 세상에서는 이득(利得)과 봉록(俸祿)을 탐내고 재산과 지위를 탐내다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나니, 사람으로써 새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사례하도다. 

“새 가운데 갈매기가 있음이여~ 구름보다 희어라.

호탕함을 탐냄이여~ 길들기 어렵노라.

사람의 낯빛만 보고도 퍼득 날아감이여~ 주살을 멀리 피하려 함이라.

네가 태어남이여~ 기미를 앎이 신통하도다.

나의 잠깐 부끄럼이여~ 갈매기에 쏘려던 탄환을 버리노라.

왕래함이 없음이여~ 마음이 근심스럽도다.

세상 사람들이여~ 웃음 속에 칼을 품었도다.

흰 갈매기를 버려둠이여~ 나는 누구와 더불어 갈 것인가.

하물며 파리 떼들이 천지간에 가득함이여~ 내 마음을 누구에게 밝힐 것인가.

강과 바다로 표표히 다님이여~ 마침내 너와 함께 하기를 맹세하노라.”

[古今諷物 詩人墨客 皆假其鷗 以况其閑適之趣 飄逸之態 姑擧大家而言之 如老杜集中可見已 予從朴伏波 乘樓船 遵海而南 則鷗之翔集 每於泊船之灣 休師之次 其爲鳥也 不浴而白 不染而濁 其精神態度 漠然如浮雲之無心 可遠觀而不可籠也 旣久而熟視之 其所以近船者 惟飮啄是求焉耳 何以言之 凡師于樓船者 有漁者 有獵者 其鳥獸魚鼈鱗甲肝腎 皆得而食之故也 遂於心不屑其所爲 且以爲凡禽獸之失身者 盖爲稻粱謀也 於是從武夫 索彈丸欲射之 以觀其狀焉 自予得彈丸而有之 鷗亦不敢近船 意者其知幾乎 語有之曰 色斯擧矣 翔而後集 鷗之謂矣 予然後知詩人墨客 必播詠於詩而有所取也 嗚呼 世之貪利祿饕富貴者 觸刑辟而不知 可以人而不如鳥乎 作文以謝之 其辭曰 “鳥有鷗兮白於雲 沒浩蕩兮難乎馴 色斯擧兮遠矰繳 爾之生兮知幾其神 我且愧兮棄彈丸 莫往來兮心惸惸 世之人兮咲中有刀 捨白鷗兮吾誰與行 矧蒼蠅之滿天地兮 我衷孰明 飄飄江海兮 終與爾同盟”]

◯ 조선초기 학자들의 문학작품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질 않다. 그래서 정이오 선생의 작품은 조선초기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풍속 등등에 많은 연구 자료를 제공한다.

조선왕조가 창업한 뒤 정도전 권근 하륜 서거정으로 이어지는 소위 관각문인들의 문학은 15세기 성종대까지 문단의 주류로 자기매김한다.

이들은 새 왕조의 사업을 기록하고 태평성대를 아름답게 노래하였다.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다는 문장화국(文章華國)에 그 기반을 두었고 특히 정교나 의례성이 강한 문장에 치중하였다.

이에 교은 선생의 시문에도 새로운 왕조의 창업과 기강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성리학적 경세론에 바탕을 두었으며, 그의 문장에서 문학적인 함축미와 회화미, 문장이 갖는 구성미가 돋보인다.

선생은 거제도관련 시문을 통하여, 험난한 바닷길에도 충군려민(忠君慮民)하는 마음을 몸소 실천하신 위정자이자 조선전기 대표적 관각문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위 시편을 통하여 거제도 영등포진영은 1401년 이전에 진영이 벌써 개설되어 있었고, 고려말기 몽고의 일본정벌 때 남부면 다대포에 가라산방어소(수군진영)가 구축되어 거제도 해안방위를 담당하고 있었고, 뒤이어 견내량 수군진영이 개설되어 만호가 파견되었다.

또한 여말선초, 거제도의 몇몇 수군진영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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