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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과 거제
우암 송시열과 거제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3.12.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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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시열과 거제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송시열(宋時烈)선생은 그의 나이 73세 때인 1679년 3월 25일에서 1680년 5월15일까지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당시 남인의 영수 남구만이 1679년 여름에 거제로 유폐되어, 이후 약 6개월 동안 거제는 노론(서인)과 남인 계열의 학통이 정면대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해 말에 남구만을 남해현으로 이배 시키면서, 거제는 송시열 노론계 학자들의 유배지로 조선 말기까지 그 명성을 이어갔다.

또한 선생의 거제 유배로 인해, 고현동 거제향교로부터 거제면 향교까지 이어온 남명학파의 학통이 사라지고 노론(서인)계 학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1679년 거제도유배시절 그의 손자 송주석과 함께 ‘주자어류’를 집중적으로 교감하여, 그 가운데 주자 문인들의 뒤섞인 기록을 정돈하고 번거롭고 중복되는 내용을 산삭하며 류에 맞게 문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하였다.

손자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귀양지 덕원, 거제도, 제주도로 따라와 끝까지 봉양했다. 거제로 따라왔던 회손(晦孫)이 1679년 9월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白日明孤島 滄溟遶一身 臨風送爾去 須愛卷中人]며, 손자에게 학문에 정진하라고 당부하는 말씀을 남기기도 했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김익훈 등은 물론, 거제 반곡서원에 제향 된 김진규 김창집 민진원 이중협 김수근은 모두 그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분들이었다.

선생은 거제도(岐城) 귀양살이를 한 반곡서원 배소 인근 샘물에서, 혹여 곤궁한 객지생활과 아름다운 거제풍경에, 그의 신념(정신)이 흔들려 더러워질까 고심한다.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고야선인(신선)도 불러올 것만 같아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羣山如畫海迢迢 姑射仙人若可招 却恐衣裾塵土在 汲泉淸濯此三朝]. 반곡서원 중수기(重修記)에 “동국(東國) 거제는 우암(송시열)에 이어 죽천(김진규)과 몽와(김창집)가 귀양 온 곳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섬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군자(大君子)의 도학풍을 보고 가르침을 받아 그 공경함이 깊었다”라고 적혀있다. 우암이 이 섬을 다녀간 후 이 섬에서는 많은 학자가 배출됐다.
그를 사숙하여 성리학을 크게 깨우친 동록 정혼성, 많은 저서를 낸 성기엽, 원원휘, 옥중환 ‘대학문답편’의 저자 윤영개, 김형중, 원도철 등은 거제를 대표하는 학자가 됐다.

주] 인일 : 음력 정월 7일. 옛 풍속에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1년 동안의 모든 길흉을 점친다 한다.
(3) 반곡서원 송시열 유배문학

① 회손(晦孫)에게 주어 작별하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9월 거제 동상리 배소.

白日明孤島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滄溟遶一身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臨風送爾去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須愛卷中人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 

 손자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은 물론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귀양지 덕원, 거제도, 제주도로 따라와 끝까지 봉양했다. 위 글은 거제로 따라왔던 회손(晦孫)이 서울로 돌아갈 때 학문에 힘쓰라 당부하는 글이다.

②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③ 손자 주석(疇錫)이 파리를 읊은 시에 차하다.  

世人情狀甚於蠅 세인의 정상은 파리보다 더한데

六一篇中恠獨憎 육일의 글에 파리만 미워한 것 괴이하네.

若使當時蠅有語 당시의 파리가 말을 했다면

不公之謗似丘陵 불공평하다는 훼방 산 같았으리. 

[주] 육일편중(六一篇中) : 육일은 송(宋) 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자칭한 것을 말하고 파리를 미워하는 증창승부(憎蒼蠅賦)를 지었다.

 

④ 바다를 건너오면서 경신년(1680, 숙종 6년, 선생 74세). 견내량을 건너며.

聖德寬臣海島囚 성덕으로 해도의 신하 풀어 주시어

鯨波重渡淚雙流 큰 물결 다시 건너며 눈물 흘렸노라

惟玆舊要要同利 옛 친구 함께 이로움 요하니

千里山川摠帶羞 천 리 산천 모두 부끄러움 띠었네. 

[주] 옛 친구 이로움 요하니 : 기해년 효종의 상사(喪事)에 자의전(慈懿殿)이 기년복을 입도록 주장한 우암이나 초려는 다른 한쪽의 공격을 받아 왔다. 15년 후 현종 갑인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사 때 예론(禮論)이 또 일어났는데 이때 초려는 효종이 적자(適子)이지만 복은 기년이어야 한다는 예설을 만들어 우암과 서신을 왕복한 일이 있다. 그후 6년 경신옥사(庚申獄事) 후에 유배에서 풀릴 때 숙종이 “송시열(宋時烈)의 소견도 이유태(李惟泰)와 같다 하니 모두 해배(解配)토록 하라.” 하였다. 

 

⑤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에게 보여 주고 화답을 구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賤迹寧須說 나의 한 일 무엇 말할 것 있는가?

前頭果若何 앞날이 과연 어찌 될지

都將生受事 쓰라린 일 모두 거두어

收入短長歌 짧고 긴 노래에 넣었노라.

薄俗嗟飜手 각박한 풍속은 손 뒤집듯 뻔하고

殘年歎逝波 쇠잔한 나이 흐르는 물결 같아라.

幸玆安靜日 다행히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談理恐無多 도리의 이야기 적을까 저어하노라

 

⑥ 김 용궁(金龍宮, 金德民) 신후(愼厚) 이 보내온 시에 차하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其一

碧天雲盡鴈初廻 푸른 하늘 구름 걷히고 기러기 오니

秋老江南草木衰 강남에 가을 깊어 초목도 시들었구나.

珍重一書千里至 진중한 편지 한 장 천 리 멀리 왔으니

却令開豁楚臣懷 문득 귀양 온 사람 마음을 열어주네

其二

心到閒時辛亦甘 마음 한가로우면 고생도 달가워

休憐遷北復移南 남북으로 옮겨다님 불쌍할 것 없다네.

高軒聽說仙桃熟 높은 마루에서 선도 익은 이야기 듣고

鶴眼將看海變三 학의 눈에 세 번 변하는 바다 보리라.

 

⑦ 기성(岐城). 거제도 죽천 샘물에서

羣山如畫海迢迢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姑射仙人若可招 고야선인도 불러올 것만 같아

却恐衣裾塵土在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汲泉淸濯此三朝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

[주] 고야선인 : 신선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묘고야(藐姑射)의 산에 신선이 있는데 살결이 옥설(玉雪) 같고 예쁘기가 처녀 같으며 곡식을 안 먹고 바람을 마신다.” 하였다. 

 거제도 풍경은 신선이 노닐 것 같이 아름다우나 선비의 정신(옷자락)이 진토에 더러워진 것 같아 깨끗한 샘물(죽천竹泉)에 씻으면 나아질까? 생각하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다짐하고 있는 한시(漢詩)이다. 

⑧ 기미년(1679년) 인일(人日 7월)에,  

人日初暾天氣勁 인일 아침 돋는 해 하늘 기운 거세면

人言其驗下民殃 사람들의 말 조짐 백성의 앙화라네

願言聖上回災沴 원컨대 성상께서는 재앙을 돌리어

甘雨和風遍四方 단비 화한 바람 사방에 두루하게 해 주오.

[주] 인일 : 음력 정월 7일. 옛 풍속에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1년 동안의 모든 길흉을 점친다 한다.

 

⑨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⑩ 최자경(崔子敬) 신(愼)의 운에 차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9월 하순.

기이(其一)

雲谷僞魁魁逆黨 주자가 위학의 괴수 역당의 괴수라 하여

門生故舊並罹殃 문생과 친구까지 모두 앙화받았는데

如何千載猶尊慕 어찌하여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존모하는가

抵死誠心質上蒼 죽도록 지켜온 성심 하늘에 질정하네.

송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자를 위학(僞學)의 괴수라 했고 뒤에는 역당의 괴수라 했다.

기이(其二)

胡紘繼祖今雖在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지금도 있지만

九死何曾懼禍殃 아홉 번 죽어도 어찌 화를 두려워하랴

惟是一斑窺未得 오직 한쪽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白頭今日媿穹蒼 백발 된 오늘에도 하늘에 부끄럽네.

기삼(其三)

罔極恩垂千億載 망극한 은혜 천년 억년 전해 오니

求疵者必有天殃 트집 잡는 자들 하늘의 화 있으리.

世道人心今若此 세도와 인심 이제 이 지경 되었으니

起看松月夜蒼蒼 일어나 침침한 밤 소나무의 달빛 보았노라.

문중자(文中子)가 ‘통(通)이 부자(夫子 공자(孔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다.

[주1] 최자경(崔子敬) :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 자경은 그의 자. 호는 학암(鶴菴).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주2]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 송 나라 경원(慶元) 병진년에 호굉이 우두머리로 나서서 주자를 위학(僞學)이라고 몰아붙였는데, 심계조(沈繼祖)가 이어 주창하였다. 《宋史 卷394》

 

⑪ 정 찰방(鄭察訪) 치(治) 이 종손(從孫) 강석(康錫)과 주고받은 운에 차하다.

鄒嶧江淮古史遷 추역과 강회에는 옛 사천 있었지만

我浮滄海勝當年 나는 바다에 떠다녔으니 그보다 낫다네.

歸來默坐山窓下 돌아와 묵묵히 산창에 앉아

長遣烟霞鎖洞天 늘 연하에 잠긴 골짝 하늘 보노라.

[주] 추역 강회 사천 : 추역과 강회(江淮)는 땅 이름이고 사천(史遷)은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는 20세에 강회를 유람하고 추역에서 향사례(鄕射禮)를 배우고 돌아와서 문장이 증진되었다고 한다.

 

⑫ 손자 순석(淳錫)의 망모(亡母) 기일에 차운하다.  

憶曾携爾壙邊臨 일찍이 널 데리고 무덤에 임하니

心似初亡尙不禁 초상 때 같은 마음 금할 수 없었네.

十八忌逢蠻海上 열여덟 번째 기일 바닷가에서 만나니

精靈應識我哀深 정령도 나의 깊은 슬픔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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