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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민요 ‘서울선비 왕대밭에’
거제민요 ‘서울선비 왕대밭에’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6.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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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는 서민적이면서 기능적이고 지역의 속성과 주민의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거제민요는 거제섬의 서민생활을 그대로 축약하여 거제의 자족적 성격을 띠면서 서정적이면서 거제도 특성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 거제민요 ‘서울선비’는 모두 모심기할 때 불렀던 노동요로 4·4조에 4·8구가 기본으로 하지만 거제는 그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구절로 노래한다. 원래 논에 모를 심을 때 앞소리군이 노래하면 모심는 사람이 ‘상사아디요’라고 뒷소리를 받아서 부르는 노래로, 원래 사설이 아주 길지만, 보통은 8구에서 10구절 사설을 나누어 이어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이 거제사람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의 위세에 설움과 피압 받은 거제민은 안락과 권세 위풍의 화신인 서울사람이 언제나 자극적인 대상이었다. 부역과 부세 진상을 통제하던 그들을 보는 선망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만 갔다. ‘서울선비’는 서울 왕대밭에 왕대 나듯이 이 땅에 수천 년을 이어온 지배의 관념이 짙게 드리운 함축된 단어이다. 거제남자야 어쩌다가 여러 가지 경로로 상경할 수도 있었지만 거제여인들에게는 서울과 하등의 인연을 맺기가 어려웠다. 이에 서울관리의 현지처가 되기도 하였고, 이에 서얼을 거제 땅에 남겨두는 일도 많았으며, 반반한 유부녀는 서울관리에게 겁탈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유람 온 서울선비가 동네처자를 유혹하여 하룻밤 풋사랑을 남겨놓고 떠나더라도 그 아픔은 고스란히 거제여인의 몫이었다. 이에 거제여인들에게 서울선비는 원망과 동경이 어우러진 어쩔 수없는 상흔으로 남게 되었다.

[주] 수갑사(繡甲紗) : 수놓은 품질 좋은 비단.
1). 서울 선비 / 유금아, 연초면 오비리 금구몰.

서울선비가 낳은 씨, 즉 서얼도 선비의 자식이련만 선비는 소식이 없다. 거제옥산에 왔던 한량 서울선비가 연줄을 가라앉히는 구경을 가자해도 여비가 없다. 왕대밭에 왕대 나듯, 금비둘기 귀한 자식, 서울선비의 알을 낳아서 쥐어보고 안아도 봤는데, 결국 아이만 빼앗기고 왔다는 민요이다.

“서울선비 연을띄와 / 거제옥산 연걸었더이 / 꾼아꾼아 서당꾼아 / 연줄을잠간 귀겅가저이 간마마는 / 노자없이 또어이가꼬이.

서울이라 왕대밭에 / 금비들키두야 알을낳아여 / 안아보고 찌여보고야 / 몬가온도 내아이야”

2). 저건네라 왕대밭에 / 조필금, 거제면 내간리.

저 건너 왕대밭에 이 건너 쑥대밭에 바삐 꿩 잡으려고 갔다가 꿩을 못 잡고 오니, 꽃 같은 내 색시 서울선비에게 도둑을 맞았다. 어찌하리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에라만소~.

“저건네라 왕대밭에 / 이건네라 쑥대밭에 / 받은밥상 밀처놓고 / 꽁잡으로 내갔드니 / 꽁도잃고 매도잃고 / 꽃겉은 내각씨 / 산도둑 맞았네 / 에라만소 에라하고도 대신이야.“

3). 통제사노래 / 장금안, 옥포동.

통영의 통제사는 권세가 있어 아무 나무도 잘 벤다. 서울에 있는 왕대밭은 통영거제고성 권세가인 통제사와 같은 서울선비를 일컫는 말이고, 금비둘기 알은 선비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를 뜻한다. 풋내기 사랑의 결실인 아이까지 남겨두고 돌아가는 선비를 보고는, 이내 꽃을 꺾어 가라했지만, 선비는 본체만체 무심히 가버린다. 애타는 사랑을 하소연하는 여인의, 한(恨)많은 정서가 담긴 노래이다.

“통영하고 통지사는 / 시우져도 잘도 벤다 / 서울이라 왕대밭에 / 금비둘기 알을 낳아 / 안아보고 지어나 보고 / 놓고 가는 저 선비야 / 저산 넘어 가면 / 이내 꽃도 만발했네 / 그 선비는 천관인가 / 꽃을 보고 지내가네”

[주] 천관(天官) : 조정의 이조판서 또는 하늘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귀인을 지칭함.

4). 서울이라 열두동네 / 김옥란 신악이, 하청면 어은리 장곶.

4·4조 10구의 거제민요인데, 장곶 할머니들께서 말씀하시길, ‘서울’이라는 말로 부르는 민요는 모두 슬픈 노래라고 전한다. 서울사람 말에 현혹되어 결국 죽어버린 어미의 외로운 장례를 치루면서, 원통하고 한탄스런 장면을 노래했다.

"서울바람 내리불어 / 만인간이 복을입네 / 복띄우게 복갓끈에 / 백립씌기도 한심하다.

서울이라 열두동네 / 울오마니 외가리다 / 한심하다 명정대는 / 외갓곳으로 비치고나.

명졍공포 은애산에 / 요롱소리가 한심하다."

[주1] 백립(白笠) : 상중(喪中)에 쓰는 흰 갓. 가늘게 쪼갠 대오리[竹絲]로 갓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흰 베를 둘러 만들기 때문에 백포립(白布笠)이라고도 부른다.

[주2] 명정 공포 은애산 : ‘銘旌 功布 雲亞翣에’의 변형이다.

[주3] 명정공포(銘旌功布) 즉 명정은 죽은 사람의 본관, 성씨 등을 써서 관 위에 덮는 천이고 공포는 관을 닦는 삼베이다. 두 가지 모두 장대에 달아 상여 앞에 세우고 감.

[주4] 운아삽(雲亞翣) : 즉 발인할 때 상여 앞뒤에 세우고 가는 널판으로 운삽에는 구름무늬, 아삽에는 아(亞)자 무늬를 그림.

5). 댕기 노래 / 김임순 성옥동, 내간리 내간.

서울 밖에서 널뛰다가 잃은 댕기, 서울선비여~ 나에게 달라. 임자 없이 주은 댕기를 눈치 없이 나에게 주지는 않으리라. 번쩍 반짝 옥비녀와 수갑사 댕기로 담장과 골목에서 나를 유혹하누나.

“한성밖에 널뛰다가 / 한성밖에다 잃은댕기 / 군아군아 서당군아 / 주은댕기로 나를주마. / 임자없이 주원댕기 / 눈꽁없이 니를주까.”

“반듯반듯 옥비네꼭지 / 담장속에서 날속이네 / 팔랑팔랑 수갑사댕기 / 골목속에서 날속이네.”

[주] 수갑사(繡甲紗) : 수놓은 품질 좋은 비단.

◯ 그 옛날 우리 거제도는 당시 ‘서울 선비’라 일컫는 사람들, 즉 지배계급층에 대한 피압(被壓迫階級)의 고통과 원망에 대한 인내가 필요했다. 이에 거제도 사람들은 섬지방 출신이라고 무시당하고 치욕적인 언사와 모욕적인 행위에도 하소연도 못하고 살았다. 또한 거제도에 임명된 관리(현령 만호 등)는 1년 만에 대부분 서울 집을 한 채씩 구입했다고 전하니 거제부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거제출신 선비는 조선후기부터 중앙관료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언젠가부터 거제민요 〈서울선비〉뿐만 아니라, 거제설화 〈옥범좌수전설〉, 〈옥좌수〉, 〈최참봉전설〉 등의 설화가, 지역 한(恨)의 정서를 승화코자 자연스레 생겨났다. 육지 사람과 서울선비를 통쾌하게 골탕 먹이는 내용을 서로에게 읊으며 그 울분을 삼켜야만했다. 1897년 거제도 선비이자 거제가사문학의 아버지 ‘조호식(趙顥植, 1840~1899년)’은 거제도민이 부당하게 상납하던 정조정미세를 없애기 위해, 여러 거제선비들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서 청원 하던 중, 서울선비들과 접촉하며 <금침가(金鍼歌)> 150수 가사문학을 창작했다. 이때에도 동료들은 거제출신임을 수치로 여기고, 수인사할 때 통영출신이라고 했으나, 조호식(趙顥植) 선생만큼 거제출신임을 당당하게 밝혔다고 한다. 서울선비들이 “거제도에도 저런 학식과 인간됨을 갖춘 양반이 있느냐?”고 탄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거제도 지식인이 조선후기 서울로 상경하여 통영출신으로 살았겠는가? 불과 100 여 년 전, 우리 거제도의 실상이었다.

◯ 거제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유배인(流配客)뿐만 아니라, 유람이나 은둔을 위해 찾아온 내방객(來訪客), 중앙임명직 관리(官客)인 거제부사(현령) 만호 권관 등은 거제부임 기간 중에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부녀자를 희롱하여 생긴 서얼자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육지로 돌아간 후에는 본처와 문중의 갈등을 염려해 거제도에 그대로 두고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그 책임도 모두 거제민의 몫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글픈 정서를 담고 태어난 거제민요가 ‘서울선비’였다. 이에 불합리 불평등 부조리한 고해(苦海)의 현실을 구원해, 넉넉한 즐거움이 충만한 정토(淨土)의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고, 개인의 괴로운 삶속에서, 정신적으로 의탁할 곳은 각종 무속과 주술뿐이었다. 이에 무당의 수도 다른 고장에 비해 매우 많았으며 주술과 각종 신(神)들이 난무하는 다신사상(多神思像)의 고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흔히 ‘선비’라고 하면, 전근대사회에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개한 지사, 혹은 서책에만 몰두하는 창백한 지식인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받고 인지하는 ‘선비’는 500년 동안 조선 사회를 이끌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고, 조선이 몰락한 후에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순절하거나, 광복을 위해 독립투쟁에 나섰던, ‘선비 정신’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비정신을 이어간 분들은 사실, 일부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조선시대 ‘선비’라 일컫는 분들의 대부분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선비’는 유교적 정신문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사전적의미의, 함축적이고 철학적인 단어일 뿐이다. 실제 조선시대 선비들의 지조와 의리 도덕적 정신은 그들만의 세계일뿐이고 텅 빈 나라의 살림과 궁핍한 백성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조선중기 어무적(魚無迹)이, “윗사람은 물이 새는 지붕 위에 있지만, 새는 줄 아는 백성은 밑에 있다.[屋漏在上 知之者在下]’라는 말로 상소를 올렸다. 이 말은 위에서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고스란히 아래에 있는 사람들 몫임을 비유한 것이다. 무릇 권력을 가진 윗사람부터 근본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여 탐욕을 물리친다면, 아첨하는 사람이 간사(奸邪)함을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시대가 달라도 문제의 원인이나 사회의 병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시위소찬(尸位素餐) 즉, 지금도 공무원들 중에는 높은 자리에만 올라, 녹만 축내는 사람이 없는지 스스로 뒤돌아볼 때이다. 오늘날 국민의 생명과 윤리, 사회 정의와 도리는 실종하고 권력과 이윤만이 판을 치는 부조리한 사회를 지켜보면서 그 옛날 ‘참다운 선비정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답답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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