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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李學逵) 거제도 문학(文學) 3.
이학규(李學逵) 거제도 문학(文學) 3.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7.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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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낙하생집에서 '거제부는 변진때 소국이 있었는데 독로라 일컬었다가 후에 여기에 상군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며[巨濟府 弁辰時有小國 曰瀆盧 後置爲裳郡是已] 또한 청나라 학자 정겸(丁謙)이 말하기를 '독로는 경상도 남쪽 거제도이며 이 섬은 동서 거리가 멀지 않았고 왜와 경계와 접하고 있다'[瀆盧 當卽今慶尙道南巨濟島 此島 東西相距不遠 故曰接界]고 했다.

또한 양주동의 고가연구, 선석열의 경남대 문헌에서 본 가야와 고대 일본에 대하여 거제에 독로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거제 섬은 상당한 세력을 갖춘 해양문화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학규는 거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거제 땅은 배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은 아니나, 큰물이 일어나 몹시 울려 흔들리는 곳이며, 연기와 아지랑이에 장기 어린 안개로 푹푹 찌는 곳이다. 무성한 숲에 표고버섯이 자라고, 빛깔 좋은 비자나무가 비탈진 곳에 퍼져 있으며,

향기로운 유자가 생산되는 빼어난 곳이다. 뒤뚱뒤뚱 오르는 물개와 때깔 좋은 말, 사슴, 두더지가 살쪄 산다. 해파리에 이르기까지 바다 수면은 기이하고, 물속의 괴룡(怪龍)과 바다의 신은 괴이한 신령이 하나뿐 아니라 아주 많다. 이런 연고로 그 사람들 됨됨이가 다혈질이라고, 선박을 책임지는 관리가 얼굴을 붉힌다.

맨발로 다니면서 한뎃잠을 자며, 거룻배를 궁색한 집으로 삼아 생활하기 위해 낚시와 주살질을 한다. 어른을 봉양하고 장사를 잘 치루는 것에 대해 유감이 없다. 한가한 관리와 유배자가 사사로이 만나도 싫어하여 아주 물리쳐 버리는 까닭이다.

유림들은 힘들여 술을 마시고 시문(詩文)를 읊으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논한다. 갓과 의복을 보니 백월(중국 광동 지방)과 같을 뿐 아니라, 천리 양락(양의 젖으로 만든 음식)의 추한 것에 웃으니 그 얼마나 오래된 일이던가.”

또한 이학규 선생이 창작한 많은 시편 중에 바다의 물산 즉, 어패류 관련 작품은 거제도와 김해에서 체험한 작품이 함께 섞여 <낙하생집>에 실려 있어, 당시 19세기 초의 경남 해안지방의 물산(物産)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집이다.

◯ 1644년 중국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할 즈음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 공을 세웠던 명나라장수 후손과, 1661년 남명(南明) 멸망 후 도래한 일반 유민들이 거제도로 피난해 왔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왜군과의 접전을 했던 남해안은 명나라 유민들로서는 도피처로서 안전지대라 믿었기 때문인데, 청나라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멀고 또한 선조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외간리에서 귀양살이 하던 황경원에 따르면, 명나라 유민(황조인)이 거제면 간덕마을(외간리)에 몇 십 년째 집단 이주민으로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1644년 거제면으로 거제읍치를 이건할 즈음인, 1644년과 1661년 두 차례 도입(島入)한 명나라 유민들이, 거제읍치의 각종 신축건물, 즉 기성관 동헌 등의 건축에 참여하다보니, 원목을 사용한 기둥의 중장미와 선의 개방, 남아식 불화단청(南亞式 佛畵丹靑)은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건축기법을 사용하였고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었다.

또한 관아 건물들의 배산 구조와 안산, 관청배치와 진입로 구조가 시각적으로 뚜렷한 축을 형성토록 설계한 것도 이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황조인의 중국문화를 거제부민이 받아들여, 기성관 옆에 작은 건물 ‘화연고(火鳶庫)’를 지어 객사의 손님을 성대히 환영했고, 거제부민이 연말에 폭죽을 터뜨려 액을 물리치는 놀이도 19세기까지 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거제민의 갓과 의복은 물론 음식까지 중국 광동성 남방식 문화를 널리 애용하고 있었는데, 이학규 선생이 19세기 초반 거제도에 왔을 때도 그 문화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17) 유한옥 한암 시고서(兪漢玉漢巖詩藳序) 1821년 경.

거제부는 영남에 멀리 있는 섬이고, 변진 때 소국이었는데, '독로'라 일컬었다. 후에 여기에 '상군'을 설치했다. 그 땅은 배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은 아니나, 큰물이 일어나 몹시 울려 흔들리는 곳이며, 연기와 아지랑이에 장기 어린 안개로 푹푹 찌는 곳이다.

무성한 숲에 표고버섯이 자라고, 빛깔 좋은 비자나무 비탈진 곳에 퍼져 있으며, 향기로운 유자가 생산되는 빼어난 곳이다. 뒤뚱뒤뚱 오르는 물개와 때깔 좋은 말, 사슴, 두더지가 살쪄 산다. 해파리에 이르기까지 바다 수면은 기이하고, 물속의 괴룡(怪龍)과 바다의 신은 괴이한 신령이 하나뿐 아니라 아주 많다.

이런 연고로 그 사람들 됨됨이가 다혈질이라고, 선박을 책임지는 관리가 얼굴을 붉힌다. 맨발로 다니면서 한뎃잠을 자며, 거룻배를 궁색한 집으로 삼아 생활하기 위해 낚시와 주살질을 한다. 어른을 봉양하고 장사를 잘 치루는 것에 대해 유감이 없다.

사사로이 한가한 관리와 유배자가 만나도 싫어하여 아주 물리쳐 버리는 까닭이다. 유림들은 힘들여 술을 마시고 시문(詩文)를 읊으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논한다.

갓과 의복을 보니 백월(중국 광동 지방)과 같을 뿐 아니라, 천리 양락(양의 젖으로 만든 음식)의 추한 것에 웃으니 그 얼마나 오래된 일이던가. 유한옥 선비도 근처 읍내 사람이다. 저번에 내가 찾아 방문했을 때 연이은 나무가 있는 집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눈동자가 모나면 흥하여 오래 산다하고 도교를 닦는 사람들이 천천히 두드리며 간다. 재치 있고 재빠르게 응대하는데 큰 종소리 같이 말소리가 울리고 좋은 옷을 입고 나간다. 오언 칠언 율시 절구 시(詩) 약간 편(若干篇)을 내놓고 내게 평가할 꺼리를 청하니, 주고받으며 읽고, 모든 책을 다 끝냈다.

그 주어진 내용을 상의하였고 모든 사람들을 불러 화답했다. 여러 고을에서 뽑힌 사람들과 예로부터 전해오는 고사를 모아서 모두 깊숙한 창고에 감추어 두었다. 또한 글을 잘 짓는 재능으로 폭풍이 갑자기 불 듯 일어나니 곁의 사람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할지어다. 마치 높고 거룩하고 깨끗하여 뛰어난 것 같다. 대오를 짓지 않음이 없었다. “수다라 후다라..” 모두 쉽게 도(道)를 얻는다.

그러하여 사람 보는 안목이 한 번의 말로써는 단지 불가함을 후에야 선비는 깨달았다. 예전에 송나라의 경애 강당좌가 과거에 응시하고자 서울로 갔다. 파옹(蘇東坡)은 파천황(강당좌)의 글귀가 알맞고 합당하다 했었다. 선성의 류구규는 유서(類書,일종의 백과사전)를 편집했다. 탕공이 있는데 어디에서 이야기를 듣고 찾았을까? 나의 삶에 따르면, 이도 또한 이와 같음이다.

신사년(1821년) 여름에 선비가 또한 나에게 편지를 밀어 젖히며 그 '한암시고'를 책 상자 하나에 나란히 넣고 소중한 한마디 말이라도 들려 달라고 애걸한다.

곧 전날의 문제를 제기하고 시험한 바를 칭찬하는 것은 오로지 외웠기 때문이란다. 모든 글은 돌아가는 것으로써 한가지로 통한다. 어떤 날, 독로(두루, 거제)의 터, 영남의 바다가 음란하여도 능히 가게 되었다.

바람이 불어 근심이 일면 제사 용 술을 먹는다거나 비단 천으로 정성껏 문지르고, 또는 배나무 대추나무의 액(厄)으로 사사로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로지 매일같이 멀리서 바라봤다. [巨濟府 在嶺表爲蕞遠 弁辰時有小國 曰瀆盧 後置爲裳(君+邑)是已 其地非舟檝不能到 爲巨浸所震盪 煙嵐瘴霧所熏蒸 其挺而爲香柚文榧曼陀蘑菰之森蔚 孕而爲豪豬麠鹿(馬+孛)馬膃肭之騰踔 以至水母海鏡之詭異 蝄象馬銜之靈怪 不一而足 故其爲人類多騂面黃頭 跣行露宿 以舴艋爲室廬 弋釣爲衣食 其於養生送死 無憾也 間有散吏遷客遭擯斥至此者 類多辦文字之飮 倡聲詩之論 不翅若百粤之視冠裳 千里之笑羊酪者 幾數千秊矣 近有兪生漢玉者 府中人也 向日訪予于因樹屋中 視其䫉 方瞳豐輔 類有道者 徐叩之 應對敏給 音吐如洪鐘褏出 五七言律絶若干篇 求予評騭 予受而讀之旣盡卷 詢其所與倡和諸人 則皆列邑之選也 攟摭故事 則皆祕府之藏也 且其藻思飆發 不傍人塗轍 有如尊勝淨勝 罔不作隊 脩羅㬋羅 皆可得道 肰後知生之不可但以一詞人目之也 昔瓊厓姜唐佐赴試圍 坡翁有端合破天荒之句 宣城劉九逵纂類書 湯公有何處搜索得之語 予於生 亦如是云 歲辛巳夏 生又抵書于予 並其漢巖詩藳一袠 乞予一言爲重 乃擧似前日所嘗稱道者爲一誦之 並書一通以歸之 異日瀆盧之墟 有能去嶺海之淫哇 爲風騷之祭酒 縑素糜而棃棗厄者 卽非生也邪 予惟日望之 ]

[주1] 강당좌(姜唐佐) : 소식(蘇軾)의 문인. 소동파의 제자로서 소동파는 강당좌를 인재라고 칭찬하면서 강당좌의 문장이 ‘기세가 웅장하고 변화무쌍하다'했다. 소식이 해남도에 귀양와서 강당좌를 가르쳐 해남도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인재가 되었다.

[주2] 파천황(破天荒) : 인재가 나지 아니한 땅에 처음으로 인재가 나거나, 아무도 한 적이 없는 큰일을 제일 먼저 한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임.

 

18) 유한옥여정기유약[兪漢玉與情妓有約] 석왕기가칙불재(夕往其家則不在). 거제인 유한옥과 더불어 정기(사랑하는 기생)와 약속이 있어, 저녁에 그 집에 갔으나 없었다.

箏語鳥舍去 풍경 소리에 새가 둥지로 날아가고

花枝月暎來 꽃 달린 가지에 달빛이 비추는데

不知今夕約 오늘 저녁 맺은 언약 알지 못하누

何處泥人杯 술잔이 진창 된 곳 어디인가?

19) 유한옥여정기유약[兪漢玉與情妓有約] 왕방기가(往訪其家) 즉동방적요(則洞房寂寥) 패흥이기(敗興而歸). 유한옥과 함께 정인(情人)과 약속이 있어, 그 집을 방문하려고 갔으나 침실이 적막했다. 흥이 깨어져 돌아왔다.

劇憐一約兩相知 몹시 어여뻐서 한 약속으로 둘이 만나고자

小醉閒行有所思 조금 취해 너를 그리며 한가히 갔다네.

簾外杏花花外月 주렴 밖의 살구꽃, 꽃 너머 달이 떠서

最無情緖過門時 문 앞을 지날 때마다 내 심정 어떠하겠소?

20) 기증 유한옥[寄贈兪漢玉]

寧州初見面 영주에서 처음 만나 생각하니

德浦舊聞名 거제 덕포는 옛날에 듣던 이름이다.

襍佩逢人贈 잡다한 방물을 만나는 사람마다 줘버리고

新詩對客成 새로운 시는 객을 대하며 짓는다네.

蘑菰春信動 표고버섯은 봄소식에 움트고

橘樹暮寒生 귤나무는 저물녘 추위에도 싱싱하다.

計日郵程近 역참에서 친구의 시(詩)를 날마다 기다리며,

從玆數寄聲 이제부터 풍류 소리, 자주 부쳐 주시게나.

[주] 정근(程近) : 지은이에게 시를 보내준 친구. 정연(程延)이라고도 함.

21) 술 취한 후, 유한옥에게 보낸다[酒後贈兪漢玉]

此意終難道 끝내 가시밭길 걷는다는 생각 들지만

吾生亦有涯 우리 인생 어차피 끝이 있는 것,

醉鄕閑日月 취한 세상에 한가한 세월이라,

歸路漭雲沙 돌아가는 길은 아득히 구름 낀 모래벌판 뿐.

石蜐春盤鱠 거북손 봄나물 생선회

蘑菰水驛花 표고버섯은 수역(水驛)의 꽃이며,

濟南生理地 물 건너간 남쪽은 자연의 땅인지라,

無計共浮家 대부분 물에 뜬 집에서 벗어남이 없도다.

遊俠高風貨殖才 고상한 풍채의 협객은 재물을 늘리는 재주가 있어,

酒樓花市意悠哉 주류(酒樓)와 꽃시장, 아아 하염없어라.

何當復翦西窗燭 언제 다시 서창의 촛불심지 자르며

共醉寒宵柚子杯 추운 밤에 함께 취해 유자주 잔에 채울까?

[주1] 수역(水驛) : 옛날 역선 등(等)을 갖춘 수로(水路)의 역참(驛站), 역의 항구. 거제도는 오양역 앞 항구에 수역을 처음 설치 함. 배를 접안하는 곳을 총칭하기도 함.

[주2] 주류(酒樓) : 설비(設備)를 크게 잘 꾸며서 술을 파는 집.

22) 바다를 따라 동문에 이르니 풍화루로다[從海東門至風化樓]. 배윤원 허성능 김희서와 함께한 야화(同裵允元 許性能 金羲瑞夜話) 이 날이 입춘이었다(是日立春) 거제향교 풍화루에서.

衙鼓無聲墟市空 관아 북소리도 없는 텅 빈 저잣거리,

芒鞵緩蹋子城東 짚신 느긋하게 밟으며 자성(子城) 동쪽으로 간다.

鳴泉瑟縮凄風外 덜덜 떠는 샘물 소리 바람 밖이 쓸쓸한데

高閣嶙峋細月中 첩첩 쌓인 산중의 높은 누각, 초승달빛에 어려 있네.

夕院燈光諠宿客 여관의 등잔 불빛에 머문 손님 드러내고

春畼鐃吹走邨翁 춘궁기의 징소리에 마을 노인 달려간다.

秊來差喜身強健 새해에도 기쁜 것은 몸이 강건함이라,

覓句呼觴意不竆 좋은 글귀 찾다 잔을 내니, 아아 끝이 없도다.

23) 정수사[淨水寺] / 하청면 유계리

檜影森森風滿臺 무성한 느티나무, 바람 휘도는 높은 누각에

峰巓日落水聲迴 봉우리 걸린 해가 지자, 들려오는 물소리,

寺歬欹笠時相見 사찰로 인도하는 삐딱한 삿갓과 서로 보자마자

可有幽人覓句來 고상한 은자(隱者)의 좋은 글귀 찾게 되네.

[주1] 은자(隱者) : 은인(隱人), 속세(俗世)를 떠나 숨어사는 사람 [주2] 정수사(淨水寺) : 거제시 하청면 유계리 앵산 중턱에 있었던 절, 하청북사가 없어진 후 조선 인조 원년(1623년)에 정수사(淨水寺)를 지었다 전한다. 19세기에 폐찰 됨.

거제시 하청면에서 앵산을 등산하려면, 유계리 산126번지 광천사라는 절을 지난다. 이곳에는 고려현종17년(1026년) 하청북사지란 큰 절이 있었고, 북사지가 폐사된 후, 인조 원년(1623)년 정수사(淨水寺)란 사찰이 신축되었다가 19세기 폐찰되었다.

1982년에 다시 광천사란 절이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천사 대웅전 바로 옆에 이름 모를 묘가 하나 있고 그 앞에 부도(浮屠) 1기가 세월의 무상함을 모른 채 외로이 서 있다. 높이 215cm로 비교적 규모가 큰 석종형 부도에 속한다.

장방형의 기단부는 상면을 둥글게 다듬었고, 또 탑신주위는 장방형으로 긴 팔각형의 얕은 부조장식 2단으로 되어 있다. 기단 위로 1m 정도 크기의 길쭉한 항아리형 탑신석을 세우고 그 위에 큰 연봉이 장식된 지붕형 상륜부를 올렸다.

상륜아래 중앙은 탑신과 맞추기 위해 ‘井’자형과 네모서리는 서까레가 모각되었다. 이 부도는 규모나 탑신의 표면에 명문이 생략된 점으로 보아 대체로 조선전반기에 제작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정면에서 보면 좌우폭이 137.2cm, 전후폭이 107.2cm이며, 탑신의 최대경은 67.4cm 정도이다.

24) 은적암[隱寂庵] [在玉林山今廢] 재 옥림산(옥녀봉)금폐 아양동.

度世隨緣是 세상은 인연 따라 사는 것,

相尋不弍門 서로 애타게 그리니 두 마음 아닐지라.

虛樓圍澗響 텅 빈 누각엔 산골 물소리 에두르고

高石走松根 뽐낸 돌엔 소나무 뿌리 감는다.

山外朱陽沒 산 넘어 붉은 태양 떨어지니

僧邊碧樹昬 스님 곁의 푸른 나무 어둑하다.

孤菴眞隱寂 외딴 암자가 자연에 묻혀 고요해도

惟愛谷禽喧 오직 사랑하는 골짜기에 새소리 가득할 뿐.

 거제시 아주동 아양동 일대는 옛 신라 고려시대, 거제현의 속현인 아주현이 있었다. 소성왕(昭聖王) 원년(799년) 춘3월에는 청주(菁州: 현 진주)의 거로현(居老縣), 즉 거제시의 아주현(鵝州縣)을 국학생(國學生)의 녹읍(祿邑)으로 삼았다고 한다[삼국사기(三國史記)].

이 같은 사실은 아주현지역의 풍부한 해상 경제력 및 농업 생산력 기반이 상당하였음을 입증한다. 7세기 중엽 경덕왕이 '거로현'을 '아주현'으로 개명했지만, 7세기 말 소성왕 원년까지 이전의 군현명인 거로현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러한 지역적 특색으로 신라시대부터 '법률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아양리 삼층석탑(높이 303㎝, 지금은 옥포조선소 내 이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은적암(隱寂庵)이란 큰 절이 신축되어 이어져 왔었다. 유독 고찰의 흔적이 많은 이 지역에, 석탑이 서 있던 곳을 탑골이라 부른다. ※ 삼거리 북병산쪽에도 똑 같은 이름의 은적암이 있었다.

25) 화산[畵山] 花山 거제읍내 북쪽 산.

一角靑山六曲屛 한 귀퉁이 푸른 산은 여섯 폭의 머릿병풍,

開簾好遣月斜朙 발 걷어 곧잘 보낸, 기운 달이 밝구나.

幽人手按枯梧坐 은자(隱者)가 손수 잡은 마른 오동나무에 앉아보니

奏出千巖万壑情 여쭈듯 드러난 많은 바위는 온갖 골짜기의 정(情)이로다.

26) 기녀에게 바친다[贈妓].

몇 달 머문 거제도에서 만난, 거제기생의 아리따운 모습을 표현한 한시(漢詩)이다. 첫째 시편은 봄날 뒤숭숭한 기생의 여심을 표현하였다.

春入花心㬉不知 봄이 되니 따뜻해진 여자마음 알 수 없네.

當時小別動相思 잠깐 이별한 때에도 서로 그리워 동요한다.

難忘最是無言處 잊을 수 없다는 듯, 말없는 모습으로

未必凝粧帶笑時 약간의 치장에다, 늘 웃음 띤 얼굴이다.

 

27) 증이아[贈棃娥] 거제기생 이아에게 바친다. 

다음 시(詩)는 우연히 지나가다 스친, 기생 이아(棃娥)의 아리따운 자태에, 첫눈에 빠져버린 선생이 편지를 적어 보낸다. 그러나 편지는 되돌아오고, 그녀는 반응이 없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고, 인연이 이어지지 않음에,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다. 어찌 옷깃과 소매가 스치는데 거문고 소리가 날까? 너무나 청초한 본능적 사랑이다.

何必相迎襟袖聯 하필 마중 가는 길에 옷깃과 소매가 스치는데

知音元不在彈絃 현 줄 없는 거문고 소리 듣기 처음이네.

依俙面色花梢月 아스라한 얼굴색은 꽃 끝의 밝은 달이

嬝娜情懷柳際煙 아리따운 정을 품고 버드나무 끝에 달린 듯, 아리땁다.

可是佳音從海外 하지만 기쁜 소식은 바다 밖으로 쫓아가고

還將麗句寄風歬 돌아온 아름다운 글귀가 바람 앞에 실려 왔다.

百回吟望千回夢 백번을 읊조리고 바라보며, 천 번을 꿈꾸었는데

欲達封函未有緣 봉한 이내 마음 전하려하나 인연이 아니라하네.

28) 증 옥매[贈玉梅] 옥매 꽃을 바치며. 

春天一樹綺牕梅 봄 하늘아래 비단 지게문 밖 한그루 매화나무,

句引流風蝶影來 떠도는 바람 당겨오니 나비 그림자 돌아오네.

靑子綠陰時到了 녹음의 푸른 열매 때마다 주렁주렁

芳心肯向別人開 꽃 같은 애틋함에 사람들이 마음 열어 즐거이 대한다.

 

29) 죽림루[竹林樓] (1). 거제시 거제면 죽림포.

江日亭亭隱一灣 강 위의 해는 우뚝 솟아 만(灣)속에 감추니

遊人猶自凭空欄 구경꾼은 스스로 빈 난간에 기대어 보는구나

百秊可使樓中住 한평생 일을 부리다 다락에서 머무는데

未必人間做好官 높은 벼슬에 올랐다하여 반드시 됨됨이가 좋지는 않다네.

30) 죽림루[竹林樓] (2).

一曲朱欄枕碧流 한 굽이 붉은 난간 푸른 물을 베고 있어

行人指點竹林樓 행인이 가리키며 죽림포라네

管絃聲裏沉紅日 관 현악 소리에 석양의 붉은 해 가라앉고

楊柳枝歬隱綠洲 버들개지 가지 앞에 푸른 물가 숨는구나

百尺元龍眞幷世 큰 다락에서 참으로 인간세상을 아우르고

万錢騎鶴屬同游 만전(万錢)에 학을 타고 함께 무리지어 노닌다네

佗時擬見岐城好 다른 때 언제 보아도 거제(기성)는 아름다워.

名▼(西*水)千鐘畵鷁浮 소문엔 서쪽 물가에 천개의 종이 있어 익조(물새)화상이 떠다닌다네

 

不風流自?風流 바람이 없어 자연히 흘러 풍류에 젖으니

始說名樓便詠樓 비로소 말하길 이름난 누각이 편영루라네.

朙月幾回留畵壁 밝은 달이 몇 번이나 화벽(畵壁)에 머물고

綠蕪何處近長洲 푸른 풀섶 어느 곳이 가까운 장주(長洲)인가?

百秊未滿嗟吾老 한평생 만족하지 못해 늙어서 탄식하는데

一世相知羡爾游 그 때 서로 아는 사이라 너의 헤엄치는 모습을 부러워하겠구나.

十曲欄干千尺舫 열 굽이 난간에 천 자(길이)의 배

常時魂夢此中浮 상시 꿈속의 넋은 이 가운데 떠다니네.

[주] 백척원룡(百尺元龍) : 원룡은 동한 진 등의 자. 호기가 있는 사람. 허범이라는 사람이 찾아가니 그는 큰 침상에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백척원룡은 큰 다락을 일컬음.

 

31) 아름다운 기생에게 희증하다[戲贈玉妓]. 千遍低聲喚玉人 천 번의 낮은 목소리로 어여쁜 기생 부르고

眼中秋水臉中春 눈매는 깨끗하고 쾌활하며 뺨은 봄이 한창이네

心搖宋玉牆頭見 송옥도 마음이 흔들려 담장 끝에서 힐끈 쳐다보는데

腸斷崔徽畵裏身 애가 끊겨 죽은 최휘는 그림속의 몸이라네.

金縷長衣隨步蹙 비단 금실 옷 입고 뒤따라 발걸음 재촉하며

紅牙小板曲歌新 붉고 작은 박판에 곡파(曲破) 노래 새롭구나.

元來密約無多語 원래부터 밀약하여 말이 많지 않는데

遠客何須枉損神 나그네는 어찌하여 허전하다 굽히는가?

[주1] 송옥(宋玉 290~223 B.C) 전국시대 초(楚)의 문장가, 시인. 자 자연(子淵). 굴원(屈原)의 제자. 천하 미남이었다. 작품에 〈구변(九辯)〉, 〈초혼(招魂)〉, 〈고당부(高唐賦)〉 따위가 있다.

[주2] 최휘(崔徽) : 당나라 관기 최휘는 사랑하던 배경중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 가는데 따라가지 못하자 병이나 미쳐서 죽었다.

[주3] 곡파(曲破) : 곡파(曲破)는 송나라 대곡(大曲)의 하나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춤의 절차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석노교곡파(惜奴嬌曲破)에 악사(樂詞)가 전한다. 곡파 정재는 세종 7년에 벌써 없어졌는데, 그 절주(節奏)를 기억하는 늙은 기생이 있어 복원되어 세종 7년 10월에 세종 앞에서 연주되었다. 따라서 곡파 정재는 오래 쓰이지 않아 거의 잊혀 질 위기에 있었던 것을 세종조에 다시 재연(再演)한 것으로 보인다.  

32) 뽕나무 아래 지발문[桑下志跋] 菜花居集(채화거집) [丙子1816년]

1815년, 순조15년 겨울, 거제인 유한옥이 방문했을 때, 나는 작은집 안에 배추꽃이 자라는 곳에 있었다. 깊은 밤 날씨가 몹시 추운데, 바람이 불어 처마 가운데가 부서지고 귀신이 되어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성긴 초가집에서 쓸쓸히 애써 버티는데, 등불이 콩과 같아 더디게 불타며 녹색 빛이라, 주인과 손님이 서로 돌아보며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술꾼 김덕하는 힘을 다하여 진한 소주 한 주전자를 내어놓고는 다만 포와 고깃점에 관계없이 술을 권하며, 잔을 내곤 술을 길어다 잔에 부어 베풀었다. 유한옥은 나에게 유자 한 상자를 보냈다. 그 유자 껍질을 도려내고 술안주로 삼는다.

맡긴 그 껍질을 모아두고 술잔을 돌리니, 지난 일에 취기가 올라 지청거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고하고 떠나려고, 옷을 차려 입고 나타나 뽕나무 아래에서 뜻을 두어 책 한권을 나에게 주었다.

어찌 3~4년 사이에 산 넘고 물 건너 남쪽 영남과 호남을 서쪽 촉(한)나라처럼 다녔는가. 북쪽 한강에서 누에가 엎드려 기어가듯 더디게 문전걸식하면서 갔다.

무릇 그 이별과 만남, 슬픔과 기쁨,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늘어서서 다 싣지 못해 쓰러졌다. 그런 까닭에 남김없이 모조리 그리워 할 수는 없다. 그럼으로 뽕나무 아래에서 명명하였다. 아아 슬프다.

해질 무렵의 일이라, 비록 그 슬픔에 잠겨 춥다하더라도 편안히 안거를 위해 부족하더라도 배부르고 등따신게 이치이다. 그리고 마치 한나라 구슬처럼 온갖 고생을 모두 경험한 걸 생각하니, 이것들을 반드시 남김없이 그리워 할 수는 없다.

책 뒤에 나란히 글을 쓴다. 마음 다스리는 중에도 미처 싣지 못한 것이 있었다. [ 乙亥冬歧城兪漢玉訪余于菜花居矮屋中値深夜 夜大寒 風入破檐中 作鬼嘯聲 疎茅淅淅力戰 燈燄如豆 湛肰綠色 主客相顧有怖色 酒徒金悳河 力致火酒一匜 顧無脯胾佐酒及桮觴供挹注者 兪饋余柚子一笲 剜其瓤以當殽膳奠其殼以任醻酢 酒酣以往 淋漓睡倒 翌曉將告發 褏出桑下志一卷授余 蓋其三四秊間跋涉嶺湖以南及蜀漢之西 洌水之北 重繭匍匐 叩門乞食 凡其離合悲懽 飢渴寒暑 靡不載叙 而以其不能無遺戀也 故以桑下命之也 嗟乎 向夕之事 雖其憯悽凜凓 不足爲安居飽溫者道 而使如漢玉之備經辛苦者念之 是必不能無遺戀也 並書之卷後 以補志中之未及載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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