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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반곡서원문학 2.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거제 반곡서원문학 2.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3.12.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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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진규(金鎭圭) 약력
조선 후기의 문신, 1658(효종 9)~1716(숙종 42). 노론의 대표적 정객으로 송시열(宋時烈)의 입장을 고수했다. 본관은 광산.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이고,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82년(숙종 8) 진사시에, 1686년에는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좌랑(吏曹佐郞) 재직 중, 1689년 6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약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제거 당하자 지평(持平)에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소론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戚臣)으로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동부승지로서 송시열과 입장을 달리한 윤증(尹拯)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했다.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거쳐 1706년 병조참판에 있을 때 소론이 집권하자 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 뒤 대제학·공조판서·좌참찬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 작성을 많이 했으며,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도 능했다. 문집으로 〈죽천집〉, 편저로 〈여문집성 儷文集成〉이 있다.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또한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산수화, 인물화에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2). 거제 유배생활
기사환국으로 1689년 6월(음)초순 선생이 거제읍내 관청에 도착하여, 현령 이집(李㙫)에게 신고하고 당시 거제 배소촌이었던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터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現 거제여상 건물 자리와 반곡서원 터는 움푹 들어간 지형이었고 빙 둘러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거제여상 건물 뒤편에 식수로 사용하던 샘물(竹泉)과 이어진 도랑은 유배인과 더불어 거제유생들의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주] 죽천(竹泉) [在盤谷書院之西十數步金文淸公謫時 嘗遊於此名曰竹泉因以自號]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 서쪽 십 수보에 김진규(金鎭圭:文淸公)가 귀양살이 할 시절에 일찍이 노닐며 즐긴, 대숲 샘물 "죽천"이 있는데 자신의 호로 삼은 계기가 되었다(거제부읍지).

김진규 선생은 송시열 선생의 배소인 반곡서원 터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거제유림들에게 강의를 하게 된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면, 그 부모들이 학비 대신 식량과 의복을 지급하였기 때문에 선생은 유배지의 곤궁한 삶을 해결할 수가 있었다. 마침내 그의 거제 제자인 옥삼헌(玉三獻), 윤도원(尹道元),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선생이 떠난 10년 후 1704년, 반곡서원을 창건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상리 마을 이름이 거제에서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난 것은 선생의 영향이었다.

거제에서 선생은 슬픔과 어려움 괴로움을 토로하면서 이를 억제하려고 노력하되, 유배현실을 개인의 일로 한정하지 않고 국가와 가족의 문제와 연결시켜 범주를 확장했으며, 현실적인 층위에서 일어난 가족 전체의 일을 내면화의 방법을 통해 가족으로 정서를 전환하였다.

남해도로 유배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서포 김만중은 김진규의 삼촌이다. '당시에 김만중 뿐만 아니라 김만기의 큰아들 김진구는 제주에 유배되었고 둘째 조카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셋째 조카 김진서도 진도로 유배가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구나 하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네들에게 두려운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의지가 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이어 김진규(金鎭圭) 한문학 편 계속--
1689년 겨울에,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인근 배소로, 아내가 보내준 옷가지와 편지를 읽고, 그리운 처자식을 생각한다. "나는 아이가 태어난 일을 몰랐는데 아내가 헤진 이불을 째서 아이 옷을 만들어 입혔다네" 멀리 서울 집에서 아내가 보내온 옷을 보고 "애끓는 그리움에 나도 몰래 옷을 입었다(戀戀着吾身)"라는 표현은, 집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을 느낄 수 있으며, 달빛에 "다듬이 돌이 차다." "눈썹먹에 눈살 찌푸리듯 하네."(映月應砧冷 挑燈想黛顰)라고 늘 걱정스레 늘어놓던 아내를 표현한 멋진 시구이다. 또한 선생은 날마다 잠 못 이루며 오두마니 앉아 등불 심지를 돋운다. 등불 심지가 다 타면 다시 심지를 돋우어 불을 꺼트리지 않을려고 한다. 등불마저 꺼져버리면 깜깜한 어둠속에서 자신과 함께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가물대는 등불 심지를 돋우다가 혹여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다림이 느껴진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 먹을까 괴로워했다. 아내가 보내준 겨울옷을 입고 보니 수초나 버들가지가 봄이 아닌데도 새로 피어난다며, 집밖에는 거제도 겨울추위가 재촉하지만, 방안에는 아내의 사랑이 충만하다. 긴 밤 아내가 그리워 여기 저기 비비고 만져보다가, 보내온 옷은 진작 만져 보지도 못했다. 한겨울에는 데리고 온 노복 두어 명이 추위에 떨고 있어 그 측은함에 선생은 괴로워 밤을 지세우곤 했다.

다음은 봄날을 맞아 선생의 거제 유배 심정을 담았다. "새봄이 완연하니 귀양살이 쓸쓸한 객지생활, 시름의 병 암담하여 가는 세월 겁이 난다.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는데 귀양살이 백발의 외로운 신세 어찌 탄식하지 않으리. 봄비 뒤에 꽃가지는 낮은 담장을 덮고 밤이면 밤마다 외로운 베갯머리 졸졸 시냇물 소리 감당치 못하겠네. 천리 멀리 고향 쪽 하늘 보며 창가에 우두커니 있노라니 돌아가고픈 이 심정을 어찌하누. 몸은 산중의 스님같이 속세에 멀어져 있는데 수염만 무성하다. 쓸쓸한 거제 바닷가 물과 구름 가녘, 푸른 바다에 저녁 조수 밀려가고 석양에 넋을 실은 지친 새는 둥지로 날아간다.

밤마다 꿈결에 젖어드는 천리 고향 길, 꿈결도 고달프고 유배 생활에 옛 친구가 그립다. 동산의 지저귀는 새소리, 들꽃과 봄바람, 성 머리 피리 소리, 언덕 위의 꽃들은 눈 가득히 피었건만 바다를 비추는 해는 새로운 서광이런가? 아침 일찍 끝난 비가 무지개를 만들어도 끝내는 돌아갈 나루터가 없어 그림자만 맴돌 뿐. 몸은 마치 고목이요 머리는 쑥대이니 궁벽한 마을에 쓸쓸히 문을 닫고 지낸다. 굶주린 까마귀 떠들어대고 하룻밤 차가운 바다 물결 굽이칠 때, 만 그루 죽림 속엔 둥근 달이 높이 떴다. 한 가락 맑은 바람소리 찬 하늘에 사무쳐라. 인간은 잠깐 사이에 고금을 이루나니 때때로 하늘 떠도는 조각구름 쳐다본다."

1689년 당시 거제면에는 많은 유배인들이 있었다. 시원한 골짜기나 작은 시냇가 등에는 그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먼저 온 유배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김진규 선생은 그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후 선생의 관직과 학문, 집안을 알게 되어, 거제현령, 거제유림 등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게 되었다.

(3). 죽천(竹泉)의 거제유배문학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1658~1716)선생은 유배현실의 괴로움을 억제하고자, 매개 대상을 통한 내면화로 인해, 유배작품에는 번민이 깔려 있다. 그가 남긴 거제유배문학 작품은 240 여편에 이르며, 1506년 용재 이행, 1548년~1560년 유헌 정황 선생과 더불어 거제 3대 대표 유배문학인이다.

선생의 유배문학의 이해를 돕고자, 거제에서 선생이 지은 작품들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689년 처음 도착한 거제면 읍내 풍경을 보고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거친 산이 비좁게 막혀있어 답답하고 사방을 바라보니 모두가 소금밭과 갯벌이다. 고을 관아는 물가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고 백성의 집은 대숲과 섞여 있다. 새벽안개가 아닌데도 항상 변방 마을을 뒤덮고 고래가 희롱하여 파도를 밀어 올린다"

또한 1689년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에는 선생의 선산이 있는 충청도 지역의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의 이름이 같은 걸 알고 자신의 귀양살이 동안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산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충청도 계룡산과 유사하여 자산(玆山), 즉 짙푸른 색에 더한 검은 산으로 표현했는데, 조선시대 유배 간 학자들은 그 지역의 수려한 산 이름을 대개 '현산(玆山)' 또는 '자산(玆山)'이라 표현했다(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

김진규(金鎭圭)선생이 거제면 동상리에 유배 살 때 유자 맛을 본 후, 귀양살이가 끝난 1694년 초겨울,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대궐 앞에서, 공물로 올라 온 '거제 유자'와 함께 임금을 배알하는 심정에, '거제유자찬가(南州柚歌)'를 지은 아름다운 한시가 전하고 있다.

거제도 봄날, 매화꽃이 막 지고 살구꽃이 피는, 찬란하고 화사한 봄빛은 바다 물결에도 닿아 살랑살랑 반짝인다. 멀리 고향집 정원에도 거제도처럼 꽃이 활짝 피기를 소원한다. 선생의 마음속엔 돌아 온 봄처럼, 다시 고향집에 돌아가고픈 희망과 설레임, 그리고 조바심을 함께 표현한 노래, "견화유사(見花有思)"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품이다. "매화꽃 반쯤 지니 살구꽃 피고 바다 멀리 봄빛은 나그네 마음 재촉하네. 멀리 고향의 우리 집 담 북쪽 모퉁이 내가 심은 몇 그루 나무도 꽃 피어났으리[梅花半落杏花開 海外春光客裏催 遙憶故園墻北角 數株芳樹手曾栽]". 선생은 거제 5년 귀양살이동안 봄날 봄꽃에 무척이나 감응하시어 유달리 봄꽃에 대한 작품이 많다. 1691년 '봄날(春日)' 율시 편에는, "거제에서 두 번째 맞는 봄, 배소 주위 푸른 대숲에 봄꽃이 만발하였고 거제 산과 바다가 모두 나를 알아보는 듯, 아양을 떤다. 비록 궁핍한 귀양살이지만, 복숭아 살구꽃에서 풍기는 봄날의 정취가 나그네의 외로움을 달래 준다"며 바닷가 생활에 적응한 속내를 나타내기도 한다.

'주면(晝眠)'이란 7언 절구에서는, 달콤한 지난 세월이 모두 한바탕의 일장춘몽이듯, 깨어보니 덧없는 부귀영화였다며, 거제도로 유배와서 이미 인생의 황혼기가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물을 쳐서 대구어를 잡는 거제 어부들의 모습과, 처음 먹어보는 대구 맛에, 고향집 홀로 계신 어머님이 생각날 정도로 대구 맛이 훌륭했음을 "대구를 먹으며..(食大口魚有感)"라는 시(詩)에다 담아냈다.

1691년 섣달 그믐날 밤, 거제에서 귀양살이 하던 김진규(金鎭圭)선생은 골육들 다 흩어지고 고향 땅은 아득히 멀어 천리 밖 거제에서 눈물 쏟고 홀로 마음 상해 섣달 그믐날 밤, '제야(除夜)'를 주저리주저리 읊는다. 제주도로 유배 간 백형이 탐라의 풍속 '탁라가'를 지었다고 하여 그도 거제 풍속을 그 운에 부쳐 "가라곡(加羅曲)"을 지었다. 또한 거제풍속(巨濟島俗)도 기록했으며,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 거제현 오양역(巨濟縣 烏壤驛)에서 모씨의 며느리가 피공으로부터 절개를 지킨 열부(烈婦)이야기,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도 기록으로 남겼다.

외로운 거제도 타향살이에서, 제철음식에 감응하여,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에게 깜짝 놀라 적은, 거제도 고유음식 '시래기 나물죽을 먹으며(食菁莖羹)', '죽매면부(竹梅麪賦)', '거제 봄철 산나물(食山蔬)', '죽순(筍賦)'은 거제 음식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거제면으로 유배와서 죽천기(竹泉記) 몰인설(沒人說) 격사문(擊蛇文)등, 설(說)또는 문(文),기(記)는 물론 많은 산문(散文)을 남겼다. '죽천기(竹泉記)'는 송시열 김진규 김창집 등이 거제 유배생활 동안 생명을 유지해 준, 대숲 샘물 기록이고, 문와설(聞鼃說) 개구리 소리는 죽천 (반곡서원 샘물)에서 여름날 홀로 앉아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지은 작품이다. 그리고 격사문(擊蛇文)은 평소에 저자가 곤충이나 파충류를 상당히 싫어했는데, 거제도에 유배와 자연과 함께 생활하며 뱀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을 극복하였으며, 또한 겪고 느낀 바를 대체로 상세히 표현해 냈다. 다소 주관적인 면이 있지만 당시 조선시대 양반 귀족의 관점에서는 그 표현이 세밀하고 획기적이다. 뱀이라는 하나의 파충류를 이 정도 묘사하고 글을 남긴 분은 아마도 조선시대에 저자 외에는 찾기가 힘들다. 정배된 곳인 거처(집)에는 물론이거니와 거처 바로 옆 작은 울안밭에도 뱀이 많다는 걸로 봐서는 거제도에는 참으로 뱀이 번성했고 많이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땅 속에서 새끼를 기르는 모습은 물론, 마치 뱀과 자신이 소통하듯이 표현하며 이 글속에 나타내었다.

전복(全鰒) 따는 잠수부(海南)의 인생론인, '몰인설(沒人說)'은 거제면 죽림포에서 본 잠수인(沒人), 즉 잠수부(해남)의 생활상을 세세히 살폈는데, 전복을 채취하는 방법, 잠수인의 외형적인 얼굴 모습, 긍정적인 잠수인과의 인터뷰 등을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당시 신분제도상으로 천하고 힘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어렵지만 훌륭히 꾸려 나가는 잠수부의 태도에 자신의 유배 상황과 견주면서 지난 세월을 반성하고 깨닫는 그런 글이다. 우리 거제인에게는 이 내용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예부터 지금까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아 온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거제도에 있었던, 이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녀보다 해남(海男) 즉 남자들이 잠수하여 여러 가지 해산물을 채취했음을 알 수 있다. 200여 년 전의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보다도 약 100여년 앞서 해남, 잠수부의 해산물 채취 방법과 생활상을 기록한 글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잠수부(해남)에 관한 상세 기록은 최초이며, 그 사실이 거제도에 있었다는게 참으로 자랑스럽다. 거제도 유배생활 중에 지은 시(詩)들과 각종 기록(竹泉記, 望鷄龍山記, 擊蛇文,沒人說 등)에서 당시 거제지역의 풍습과 거제민의 생활상, 거제 풍경을 잘 나타내어 거제 고전문학 및 유배문학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의 가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집사람에 대한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을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김진규(竹泉 金鎭圭, 1658~1716)선생은 1689년 7월~1694년 4월까지 거제도 유배생활동안 형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거니와, 아내와 자식의 사랑을 구구절절 거침없이 표현하였다. 영조실록 기사에 기술하기를, 선생의 부인인 정씨(鄭氏)는 정철(鄭澈)의 6대 손녀인데 집안에서의 기거하는 의범(懿範)이 일문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며 홀로 된 뒤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을 먹고 미음도 마시지 않아 결국 남편을 따라 사망해, 이후 영조 28년(1752년) 5월에 정려(旌閭)를 받았다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에 대한 연정(戀情)의 시편을 남겨 전하고 있으니, 부인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신 분이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과 현대인과의, 사랑의 시구(詩句)를 비교, 상상해서 읽다보면 그 재미가 솔솔하다. "고운 아내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데, 알고 보니 눈물에 치마가 젖었다. 가련토다, 하늘에 뜬 맑은 보름달, 선명하게 빛나네[嬋媛夜夜夢 覺來淚盈裳 可憐天上月 三五澄淸光].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 북쪽지방, 빼어난 자태, 부인 침실의 끈인가. 고운 눈썹은 세상에 다시없고 아름다운 얼굴엔 절로 향기 나구나"[佳人出北方 秀色絙洞房 蛾眉絶代無 玉顔自生香]. 선생의 비통한 시(詩)는 타인의 눈에 아무리 투박하고 모호하게 비추더라도 개의할 필요가 없는 자신만의 처연한 독백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숙부 형제 등 가족의 그리움을 나타낸 반곡구가(盤谷九歌 1689년), 반곡후구가(盤谷後九歌), 형제 사모곡(兄弟思慕曲 1691년)은 눈물 젖은 작품들이다. 盤谷九歌(반곡구가)는 1689년 거제도 유배 첫 해에 당나라 시인 두보의 동곡칠가(同谷七歌, 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를 본떠지었으며, 또한 한시 계열의 육가 칠가 구가는 숨어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양식개념 혹은 형식개념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시조 형식의 발전이라는 중요한 축과 연결되고 있다. 숙부 김만중은 경남 남해군 노도에 형 김진귀(金鎭龜)는 제주도로 각각 정배된 가족사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3년 후에 반곡후구가를 지어 돌아가신 할머니와 숙부를 추모하며 선생의 비통한 심경을 나타내었다.

두보의 "귀뚜라미"에 차운하여(次杜詩促織韻)라는 한시에서, "감색비단 실은 고치로 쓴 게 으뜸인데 베틀에서 천을 짜니 어찌나 사람에게 유익한지.. 거미줄같이 가늘어 가히 취할 만하고 반딧불이 밝아 친히 견딜 만하네. 한편에선 삐걱 베틀소리, 한밤의 울음소리, 부지런히 일하다 날이 다 새도다. 갖옷 갖추어 입고 이 소리 무성하니 무엇이 가짜이고 도리어 무엇이 진실인지?[繰縷元由繭 杼機豈屬人 蛛絲纖可取 螢火朗堪親 咿軋偏鳴夜 辛勤每達晨 衣裘成此響 誰假更誰眞]라며, 밤새 옆집에서 들려오는 베 짜는 소리 들으며 비몽사몽간에 읊었다.

한편 1690년경 거제면 동상리 녹반골에서, 보름달빛 아래 떨어진 꽃을 보다가, "꽃 지니 달은 밝고(花落後月明)" 시제를 붙여 그리운 이를 떠올린다. 꽃이 화려하게 피듯, 내가 좋을 때는 그대의 깊은 사랑을 미처 알지 못했는데 어려우니 그대를 그리는구나. 인생은 원래 희로애락이 있는 법. 꽃처럼 애처롭고 달처럼 사랑스러운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니, 찢어질듯 애달픈 마음에 잠 못 들어, 날이 밝도록 보름달빛 아래서 떨어진 꽃을 쉼 없이 주워본다.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 간절함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새벽에 읊은(曉吟)' 한시 속에서는, 절간의 선방(禪房)에서 새벽하늘 저편 봉우리를 바라보니 성긴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이 비춘다. 뒤척이다가 서둘러 베개에 누워 선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대궐로 들어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예불 종소리에 놀라 일어나보니 산중의 절간이다. 그의 옆에선, 스님이 미소를 지으며 “인생이란 본시 이런 것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선생은 시구 속에서 “부귀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당나라 심기제의 침중기에 나오는 "일침황량(一枕黃粱)"의 표현을 슬쩍 빌려 와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도 한다.

지는 해와 찬 밀물을 서로 대비 시킨 '지는 해(落日)' 5언 시에는 다시 정계로 복귀하고자하는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었다. "드높은 권력엔 까마귀가 모이나 똑바른 이치, 지름길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선생은 한탄하고 있다. 귀양살이 힘들고 어려워 앞날이 보이지 않아, 갈길 없이 서성이는데 의지 할 것은 내 손안에 있는 대지팡이 뿐이다. 집 앞 사립문에서 남몰래 밖을 내다보는 시구에서, 저자의 유배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을날 회포를 적다(秋日書懷)' 오언절구는 평기식(平起式)이고 운자(韻字)는 거성 '제(霽)'인데 거제면 가을날의 맑은 '이슬소리'와 애절한 '벌레소리' 바닷가의 '개펄냄새'를 거제도의 대표적인 가을 경치로 묘사했다.

찬바람 불고 서리 내릴 쯤 집안에 담근 술은 점점 익어간다. 온통 숲이 술에 취한 듯 붉다. 수심 가득한 귀양살이에 귀밑머리 희게 변해 가는데, 쓸쓸한 가을바람 불어와 백발을 휘날린다. '서리와 이슬'로 인해 '술'이 익어가니 '단풍'이 붉게 물들고, '나그네 수심'이 '백발'로 변해 '가을바람'을 일으키는 "붉은 단풍잎 (紅葉)"절구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대상을 대조(對照)와 대비(對比)로 비유(比喩)해 새로운 연상의 의미를 이끌어 낸다. 선생의 문학적 재치를 엿볼 수 있다.

김진규 선생은 다른 사람이 가진 기개와 학술을 한 몸에 모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그가 타고난 학파와 가문의 영향 속에서 숙종 당대의 격렬한 당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바로 숙종 당대의 정치적 평가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검소하고 준법정신이 뛰어 났지만 시기심이 많고 각박하며 편안한 기색이 없었다. 당시 시대 상황이 선생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유배기간 동안 많은 거제의 지리 문화를 기록하고 사랑해 주신 김진규 선생은 우리 거제도와 인연이 깊은 분임에 틀림없다.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김진규(金鎭圭,1658~1716년)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89년 거제면 동상리 반곡 골짜기로 송시열(宋時烈)선생에 이어 같은 장소에서 귀양살이 했으며, 그 뒤를 김창집 선생이 뒤 따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복권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선생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전서 ·예서와 산수화 ·인물화에 모두 능하였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거제유배 時, 약 2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거제에서 선생은 슬픔과 어려움 괴로움을 토로하면서 이를 억제하려고 노력하되, 유배현실을 개인의 일로 한정하지 않고 국가와 가족의 문제와 연결시켜 범주를 확장하고 있다. 현실적인 층위에서 일어난 가족 전체의 일과 내면화의 방법을 가족으로 정서를 전환한 것이다. 거제에서 적은 많은 시편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매개 대상을 통한 내면화로 남긴 많은 한시들의 바탕이 가족의 유리로 인한 번민이 깔려 있다.

--이어 김진규(金鎭圭) 한문학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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