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은 애초에 천무지체(天武肢體)는 아니었다. 무공을 연마하기엔 먼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다.
어릴 적 높은 곳에서 떨어져 뇌진탕 후유증과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오른손 엄지손가락 골절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마비증상과 함께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으면 엄청난 통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단점도 주었지만 장점도 하사했다. 타고 난 전투본능과 파괴력 그리고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맹주에 오른 후 통치기간은 불과 10개월 하지만 그는 그 짧은 기간에 세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의 스타일답게 ‘굵고 짧게’ 그렇게 살다 사라져 갔다.
작은 키에 그의 고향 묵호를 닮은 촌티 나는 주름진 얼굴 그리고 밑으로 쳐진 눈은 한없이 선해 보이기만 하다.
반면 링 위에 오르면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절대 물러섬이 없이 철저히 두들겨 부수는 그의 스타일은 구름 같은 관중을 몰고 다녔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세인들은 ‘작은 거인’ 혹은 돌격 밖에 모르는 ‘독일 병정’이라 불렸다.
김태식은 1957년 7월 4일 강원도 묵호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싸움이라면 장소가 어디든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질 않고 찾아 다녔다.
무적을 자랑하던 김태식의 이름이 묵호 바닥에 각인 될 쯤 아마추어 복싱선수 생활을 하던 선배가 찾아 와 “너 정도 실력이면 프로에서도 통한다. 복싱을 본격적으로 함 해봐라.” 하고 권유한다. 즉답은 피했지만 선배의 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귓전에서 맴돈다.
김태식은 중학교 2학년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온다. ‘전학수속’이 까다롭다는 핑계로 일치감치 학업은 때려치운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무작정 홍수환의 매니저 김준호가 서울역 근처에 체육관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가자마자 대뜸 스파링을 시켜 달라 하자 당돌하게 생각한 김준호가 관원 중 한명과 스파링을 붙인다.
처음 정식으로 하게 된 스파링에서 그는 묵사발이 된다. 상대는 요리 조리 피하면서 쉴 틈 없이 날리는 주먹은 고스란히 안면으로 흡수되고 그 결과 코에서는 끊임없이 코피가 흘러 내리지만 김준호는 스파링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약이 바싹 오른 김태식은 앞 뒤 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던 중 한방이 제대로 걸려 상대가 큰대자로 뻗어 버린다. 가공할 파괴력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김준호는 군침을 삼키면서 흔쾌히 김태식의 입관을 허락한다.
1977년 9월 30일. 김태식은 강호에 발을 들이자 말자 고기봉에게 무기력하게 3회에 나가떨어진다. 그렇게 그는 시작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 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부활한 MBC권투 신인왕전에 참가한다. 첫 시합에서 신갑철을 4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그 다음 시합에 문용식을 1회에 패대기친다.
다시 김정규을 6회 판정으로 그리고 이성국, 문정운을 나란히 3회에 날려 버리고 5연승으로 신인왕전 최우수선수상을 받는다.
날개를 단 김태식은 세계랭커에 진입할 때 까지 신인왕전 포함 파죽의 9연속 KO승을 달리며 세인들에게 경량급 원조 괴물의 탄생을 알린다.
그 동안 매니저들의 수작으로 자신도 모르게 뒷거래로 팔려가는 일도 있었고 대전료를 사기당한데 격분, 매니저 책상에 불을 지르고 수개월을 방황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평생의 은인이자 후원자인 김상기 회장을 만나 그는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당시 주니어 플라이급 제왕으로 군림하던 일본의 영웅 구시겐 요코가 김태식과의 대전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른 한국선수들은 다 되는데 김태식만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만큼 김태식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김태식은 모든 선수들이 주저하는 체급 이동을 단행한다. 바로 한 체급 위의 플라이급으로 전향한다.
그러자마자 그에게 낭보가 날아온다. 베네수엘라의 강타자 베툴리오 곤잘레스가 흔쾌히 도전을 받아준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생각지도 않는 문제가 생긴다. 그만 챔피언 곤잘레스가 파나마의 루이스 이바라에게 패하고 만다. 김태식은 낙담한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새로 등극한 맹주 이바라가 김태식을 도전자로 지목한다. 그것도 원정이 아닌 서울에서 비무를 하겠다고 한다.
김태식에 대한 오만한 자신감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바라는 땅을 치며 통곡한다.
사실 이바라는 백전노장 강타자 곤잘레스를 제압하고 김태식 경기 비디오를 보고 롱 훅만 남발하는 스타일에 딱히 기술이 출중한 것도 아닌 것을 간파하고 저 정도의 도전자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훗날 김태식 스스로도 곤잘레스와 이바라의 경기를 비디오로 보고 “솔직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고 술회한다. 그 만큼 이바라의 실력이 출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헛되이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싸우다 안 되면 차라리 링 위에서 죽자.” 김태식은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1980년 대한민국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김태식이 시합을 앞 둔 불과 몇 개월 전 10월 26일 고요한 밤하늘을 뚫고 한 발의 총성이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울린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전권을 장악 한 후 국보위를 설치 모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봄은 왔지만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5월의 광주, 피의 서막을 예상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군부의 군홧발에 신음하면서도 민초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속에 ‘독일병정’ 김태식이 있었다.
1980년 2월 17일 서울 장충체육관, WBA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매치.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의 1차 방어전이었다. 당시 이바라가 26세, 19전 18승(7KO) 1패의 전적이었고 도전자 김태식은 23세, 13전 12승(10KO)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무도 쉽게 김태식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챔피언은 큰 키에 까다로운 사우스포(왼손잡이)에 기술 그리고 펀치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1회 공이 울리자 세인들은 챔피언의 빠른 발과 속사포 같은 잽에 경악한다. 왼손잡이 인줄 알았는데 오른손 왼손 자유자재로 스타일을 바꿔가며 도전자를 괴롭힌다.
하지만 1분 후 씩씩거리며 쫒아 다니던 도전자가 챔피언을 기어코 우리 안에 가둔다. 이때부터 강호에 전설로 내려오는 250발의 장쾌한 풍차놀이가 시작된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듯 단 1초도 쉬지 않고 풍차가 돌아가듯이 도전자의 훅은 원형을 그리면서 챔피언의 몸통을 난사한다.
조용하게 관망하던 관중들도 도전자의 풍차놀이에 맞춰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성원한다.
관중들의 함성에 묻혀 주심도 그렇고 시합하던 당사자들도 종료 공 소리를 듣지 못해 챔피언은 20초 동안 샌드백이 되어 공매를 맞고 있었다. 억울해도 정신이 없어 항의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챔피언으로서는 이래저래 안 되는 날이었다.
주심이 정신 차려 둘을 떼어 놓고 겨우 1회전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챔피언의 다리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2회전이 시작되자 작은 비바람은 폭풍우가 되어 몰아친다. 마지못해 끌려 나온듯한 챔피언은 몸을 웅크리고 거센 폭풍우를 피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도전자는 인정사정이 없다. 롱 훅과 어퍼컷은 챔피언 몸통과 얼굴 그리고 글로브 위, 어디를 가리지 않고 퍼붓는다.
링 위에는 새까만 챔피언과 도전자는 보이지 않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두 개의 바람개비 밖에 없었다.
결국 챔피언이 주저앉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난다.
장쾌한 승리였다. 장충체육관 지붕이 떠나 갈 듯한 함성이 장내를 메웠다.
군부 독재에 신음하던 민초들은 김태식의 시원한 승리를 위안으로 삼아 그 날 하루만이라도 웃고 그리고 여운을 즐겼다.
김태식의 승리 후 강원도 출신 재벌들은 앞을 다투어 아파트, 승용차를 선물하고 그것을 소리 높여 광고하고 떠벌였다.
‘독일병정’ 김태식의 임전무퇴 돌진과 분투는 민초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돈과 명예 그리고 민초들의 인기를 온몸에 받고 챔피언 김태식은 동갑내기 필리핀의 아로넬 아로살과 1차 방어전을 치른다. 아로살은 18전 12승(6KO) 5패 1무의 그저 그런 복서였다.
아로살은 4개월 전 김태식의 라이벌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와 대전하여 15회 판정으로 패했다. 김태식 측은 박찬희에게 보란 듯이 때려 눕혀 자신들이 한 수 위임을 자랑하고 싶은 속셈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1회 공이 울리면서 김태식은 평소 때와 같이 거칠게 몰아붙였다. 웬 걸 아로살은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사전공격 없이 조자룡 헌 창 쓰듯이 마구잡이로 롱 훅만 남발하다 보니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5회 도전자의 강렬한 어퍼컷을 허용, 챔피언이 그로기 상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랬다. 김태식은 5회에 맞은 펀치로 턱이 부러진 것이다. 결과는 판정승이었지만 텃세로 이긴 것이나 진배없었다.
시합 후 병원으로 이송하여 검진한 결과 담당의사는 “6개월이 걸려야 완치가 가능한 상처로 이 지경으로 어떻게 싸웠냐.”며 혀를 내둘렀다. 다른 선수였다면 벌써 시합을 포기했을 것이다. 이처럼 무모에 가까운 일은 ‘독종’ 김태식이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기마저 김태식 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불운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당시 총칼로 주도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인종차별을 하는 남아프리카와의 교류를 일체 금지한 UN의 결의를 어기지 않으려 했다. 공교롭게도 김태식의 지명 도전자가 남아프리카의 피터 마테블라였다. 홈 링에서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써봤지만 전두환의 국보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차선으로 택한 것이 LA결전이었다.
제3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 김태식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였지만 그래도 미국 현지에서 가장 교민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턱뼈 치료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연습도 제대로 못한 채 김태식은 링 위에 올랐다. 게다가 공개스파링도 못하게 해 상대를 파악할 수 없도록 했고 그리고 시합 5분전에 멕시코제 6온스 글로브가 아닌 일본제 8온스 글로브로 일방적으로 변경해 버렸다. 이래저래 김태식에겐 꼬인 이상한 경기였다.
1980년 12월 13일. 당시 도전자 마테블라는 36전 30승(13KO) 1무 5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초반에서 중반까지 도전자의 빠른 발과 컨디션이 엉망인 관계로 고전하지만 후반 들어 특유의 근성으로 거칠게 몰아부처 민초들과 현지 언론은 챔피언의 우세로 보았지만 결과는 의외로 부심 2명은 145:143로 도전자 우세, 또 한명의 부심은 145:142로 챔피언의 우세를 주어 2대1 판정으로 허무하게 맹주의 자리를 내어준다. 한국에서 싸웠다면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을 것이다.
왕좌를 잃은 시름을 털고 김태식은 재기 전에서 헨리 발리나를 2회에 요절내고 이번엔 WBC 플라이급 도전권을 획득한다. 상대는 박찬희에게서 타이틀을 뺏어간 일본의 오쿠마 쇼지를 박살내고 맹주에 등극한 멕시코의 강타자 안토니오 아벨라였다. 당시 그는 37전 28승(23KO) 1무 8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민초들은 김태식이 다시한번 루이스 이바라전을 재현 시켜 주길 기대하며 구름처럼 운집했지만 결과는 2회 2분 46초 만에 무릎을 꿇고 만다.
김태식에게 또 다시 불운이 닥쳐온다. 두 차례의 재기 전에서 1차전은 일본의 후나키 가즈요시를 2회 단 한방으로 제압하지만 2차전 멕시코의 로베르토 라미레즈를 10회 판정으로 이긴 후 설사와 구토 증세를 호소한 후 실신한다. 위급한 사항이라 서울로 이송할 시간이 없어 대구에서 5시간 동안 대수술을 받았다. 어릴 적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이미 뇌손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작은 거인’ 김태식, ‘독일병정’ 김태식의 짧지만 화려했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동시대 라이벌로 있었던 박찬희는 아마추어 복서출신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고 엘리트코스를 밟았다면 반대로 김태식은 들판의 잡초와 같은 복서였다.
훗날 김태식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복싱지론을 이렇게 말한다. “권투는 스포츠라기보다 싸움에 가깝죠. 흔히 권투를 ‘허가 난 싸움’ 이라고 하잖아요. 링 위에서는 사람을 때려 죽여도 하자가 없어요. 허가가 났기 때문에. 그 만큼 위험한 운동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배짱이 없으면 못하는 거예요. 제가 이긴 건 싸움할 때처럼 내 목을 걸고 죽음을 불사르고 하니까 이기는 거죠.”
김태식은 은퇴 후 이것저것 사업에 손대보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복싱짐을 개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짧고 굵게’ 그리고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다 간 그를 팬들은 그리워한다.
김태식 생애 통산 전적 20전 17승(13KO) 3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