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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全鰒)에 대한 단상(斷想)
전복(全鰒)에 대한 단상(斷想)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8.2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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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은 고려시대만 해도 서민들도 즐겼던 식품이었는데, 송나라의 사신 일행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세민(細民)이 많이 먹는 해산물로는 미꾸라지, 전복(鰒), 새우, 대합, 굴, 게 등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1814년)'에서 민어와 복(鰒)에 대해 비슷한 설명을 했다. 복(鰒)은 복어가 아니라 전복을 말한다. 왕실 진상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말린 전복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통째로 말린 전복(全鰒), 두드려 펴가면서 말린 추복(鰒), 사과 깎듯 얇고 길게 저며 말린 인복(引鰒)이 있고, 조복(條鰒)도 나오는데 꼬챙이에 꿰어 말린 전복을 일컫는 듯하다.

영조3년 1727년 10월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길, "감영·통영·병영·수영의 세향 어물(歲餉魚物 세향은 연말에 바치는 것)을 갯가 백성들로부터 염가로 강제로 사들입니다.

전복(全鰒) 한 가지 일을 말씀드리면 어렵게 바다에 들어가 따오는 것은 두서너 개에 지나지 않으나 관가에서는 다만 많은 것만을 탐하여 적은 값에 많이 바꾸려 하니 갯가 백성들의 원망은 물이나 불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금년 감영·통영·병영·수영의 세향을 절반으로 줄이되 어물을 무역할 때에 시세에 따라 무역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분부하되 만약 준행하지 않으면 암행어사가 탐문한 뒤에 금령을 범한 자에게 장률(관원이 부정하게 재물을 취한 것을 처벌하는 율)로 논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각 읍의 세향도 금년에는 역시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아뢰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물 중에 특히 전복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백성을 위해 세향을 줄이고 제 값을 받게 하자는 장계를 올린 글이다.

거제도는 전복을 채취하면, 지역관청과 지역아전의 몫은 물론, 통영에 따로 물납하였고, 순영에 삭선(朔膳)이나 물선(物膳)의 맹목으로 상납하였으며, 경상우도 상주와 창원부의 것도 따로 챙겨야 했으니, 실제 서울 진상품 량의 너 댓 배는 더 생산해야만 했다.

조개의 귀족 전복은 예부터 귀물이어서 왕실 진상품의 중요 물목이었다. 말린 전복은 제주도에서 올렸고, 생전복은 충청도에서 정월과 8월에 300개씩 진상했다고 한다.

전복은 우리나라 모든 바다에서 난다. 참전복, 까막전복, 말전복, 시볼트전복, 오분자기가 대표 종이다. 참전복은 동.서.남해 연안에 모두 자라지만, 다른 전복들은 바다 밑 겨울 수온이 섭씨12도가 넘는 제주도 바다에 서식한다.

궁중 잔치 음식 가운데 전복탕이 있었다. 전복을 저며 끓인 맑은 국이다. 묵은 닭, 잣, 미나리 등이 함께 쓰였다고 한다. 추복탕이라고도 했으니 두드려 펴서 말린 전복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날 것을 저며 기름, 소금을 찍어 먹어도 맛있는 전복인데,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전복탕보다 더 호사스러운 음식이 제주에 있다.

제주에서 음력 6월 20일은 '닭 잡아먹는 날'이다. 초봄에 부화해 넉 달쯤 자란 중닭으로 이날 '닭제골'이라는 계절음식을 해먹었다. 중복 무렵이니 제주도식 복달임인 셈이다. 손질한 닭 속에 참기름을 바르고 마늘을 채운 다음 참기름을 더 넣는다.

뚝배기 위에 꼬챙이 7~8개를 걸치고 준비한 닭을 올려 무쇠솥에서 중탕한다. 뚝배기에 고이는 진국은 제주에서 최고로 꼽는 여름 보양식이다.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는 오골계를 쓰고 전복을 넣는다. 왕실의 전복탕이 부럽지 않다. 진국이 빠진 살코기는 푸석푸석하고 맛이 없다. 부잣집에서는 진국만 먹고 살코기는 버렸다.

전복은 자웅이체(雌雄異體)로 바다에 방란, 방정하여 체외수정(體外受精)을 하며, 조류 소통이 좋은 연안 암초 지대에서 미역, 다시마, 감태, 대황 등의 해초를 먹고사는 고급 패류로 특히 전복 내장에 있는 해조류의 맛은 별미이다.

1) 변와롱자[附 辨瓦壟子]. 전복, 꼬막 / 김려(金鑢 1766~1822)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담정유고(藫庭遺藁) 8권 <우해이어부(牛海異魚譜)>는 김려가 1803년 유배지 경남 창원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이고, <우산잡곡(牛山雜曲)>은 <우해이어부>에 함께 수록된 시집의 명칭이다.

다산 정약용이 1814년 흑산도 유배지에서 지은 <자산어보>보다 11년 앞서 지은 것으로써, <우해이어부><자산어보> 두 편은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어보로는 유일하다.

<자산어보>는 여러 서적을 동원하여 고증에 치중해서 사람들의 이용(利用)에 도움이 되는 실학의 전통 즉, 어류해조류의 종류, 성질, 분포, 생태 따위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기록한 반면에 <우해이어부>는 ‘우산잡곡’을 함께 수록하여 어류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어보의 제작과정에다가 시인으로서의 예민한 감수성과 기질을 담도 있다.

<우해이어부>에는 어류 53항목과 갑각류 8항목 패류 11항목 등 모두 72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자산어보>에는 어류 40항목 조개류 12항목 잡류 4항목 등 모두 56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도 비슷하거나 유연성이 깊은 종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기에 실제 수록된 어족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김려(金鑢)는 자기 시(詩)에서 버림받고 천대 받던 최하층 백성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정신세계를 그림으로써, 우리의 시가문학을 더욱 풍부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김려가 유숙하고 있던 진해현(창원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의 집에는 자그마한 고깃배 한 척이 있었는데, 이에 의거하여 고기들의 생김새, 습성, 용도, 그 이름의 유래 등에 대하여 쓸 수 있었다. 경이로운 어류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우해이어보>를 저술할 수 있었다.

또한 ‘우산잡곡’의 경우처럼 한 지역의 특이한 어류들을 집중 조명하여 시재(詩材)로 삼은 것은 이전에는 전례가 없었던 소재이며 한문학의 외연과 한시사(漢詩史)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전복, 꼬막>

[ 전복도 조개 종류이다. 전복 색깔은 조가비색과 같아서 옛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복 껍질을 가짜 조가비라고 하였다. 전복은 크고 작은 것이 있어 일정치 않다. 살아 있는 것은 생포(生包)라고 하고 죽은 것은 전복(全鰒)이라 했다. 여기에서 포(包)는 전복의 방언이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莾傳)에서 “전복을 먹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전복이다. 전복 중에는 기와전복이 있다. 껍질이 둥글고 크기는 쟁반만하다. 껍질의 등 쪽은 검은 자줏빛이고 기와지붕 같은 홈통이 있다. 껍질 안은 모두 흰색이라 껍데기 색깔이 나지 않는다.

살코기 맛은 전복과 비슷해도 전복보다 더 맛나다. 의서(醫書)에 “와롱자(꼬막)는 성질이 차고 맛이 짜서 부인의 생리가 불순해서 오랫동안 핏덩어리가 몸 안에 쌓여있는 병을 치유해 준다.”고 한다.

허준은 이 와롱자를 “관북지방에서 나오는 강요주(江瑤珠 살조개)의 껍데기라고 했는데 강요주도 조개 종류이다. 안과 밖의 껍질색이 모두 희고 껍질에 홈통이 있는데 전복보다 조금 작게 파여 있다.

내가 일찍이 강요주를 식초에 담가 구어서 용법대로 복용시켜보니 부인의 생리불순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지금 이 조개를 살펴보니 와롱자가 분명하다. 이것을 기록해 놓고서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려본다. 또한 와롱자를 생리불순을 다스리는데 시험해 보았으면 좋겠다. ]

[ 鰒亦蛤類 蛤色如貝 故東方人以鰒殼爲假貝 其大小不壹 而鮮曰生包 漧曰全鰒 包者方言鰒也 漢書王莾傳言啖鰒魚 卽此鰒也 有一種名瓦鰒 殼圓而大如槃 殼背紫黑色 有溝如瓦屋 殼內渾白 無貝色 肉味似全鰒而尤勝 醫書有瓦壟子 性凉味醎 能療婦人癖積癥瘕血塊云 許陽平浚以爲關北所產江瑤柱殼 江瑤柱亦蛤類 而殼色內外皆白有溝 然但微凹而已 余曾醋炙如法 用之婦人血病無效 今見此蛤 分明是瓦壟子 聊記之 以待知者 又欲試之治血云 ]

 

◯ 내가 지은 ‘우산잡곡’의 채합(綵蛤) 즉, 전복의 7언절구를 소개한다(余牛山雜曲曰).

新秋漁戶另相邀 가을 맞아 고기잡이 집에서 따로 초청하였는데

綵蛤登槃五味調 상 위에 오른 비단조개가 다섯 가지 맛의 조화로다.

若使陽平來海嶠 만약 양평군(陽平君) 허준이 이 바닷가에 왔다면

不將瓦壟視江瑤 와롱자(瓦壟子)를 강요주(江瑤珠)로 착각하진 않겠지.

[주1] 와롱자(瓦壟子) : 꼬막. 돌조갯과의 하나.

[주2] 왕망전(王莾傳) : <한서>에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뒤 황제에 즉위했던 찬탈자 왕망(王莽)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묘사하면서 그가 “편안한 자리에 앉아 전복만 먹었다”고 했다.

[주3] 강요주(江瑤珠) : 강에서 나는 아름다운 구슬이란 뜻으로, 꼬막과 비슷한 ‘살조개’ 달리 이르는 말. 건강요주(乾江瑤珠)는 꼬막의 살을 꼬챙이에 꿰어 말린 식품.

[주4] 오미(五味) : 신(辛)·산(酸)·감(甘)·함(鹹)·고(苦)를 가리킴.

● 옛 선조들은 전복이 진귀한 음식으로 최고의 술안주라 여겼다. 이시발(李時發)은 시집간 딸아이가 보내온 전복에 마음이 감응하여 감탄하였고, 유몽인(柳夢寅)은 삶은 전복 한 접시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읊었다.

정온(鄭蘊)은 초나라 굴원이 만약에, 전복 맛을 보았더라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을 것이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윤증(尹拯)은 야간에 고래기름 등불 아래에서 잠수하며 전복을 채취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어려서부터 익힌 잠수(수영) 덕분이라 하였다.

어찌되었건 예로부터 우리네 선조들은 전복이 최대의 진수성찬이었고 술안주이며, 숙취해소나 보양식의 한 방편이 된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전복에 관한 여러 한시 작품을 소개한다.

2) 신리의 두 나그네가 송이와 전복을 보내왔다[新里二客 餽以松耳鰒魚]. 보답하는 뜻에서 장난삼아 지어본다(戱吟以答意)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彦會風流別 선비가 모여 풍류를 나누는데

珍包韻味奇 보따리 속 진귀한 음식, 우아한 맛이 기이하다.

出波銀甲鰒 드러난 주름에 은빛 껍질 전복과

經雨碧松芝 지나가는 비에 푸르른 송이버섯이로다.

好酒宜同酌 술이 좋아 함께 즐거이 술잔 주고받으며

衰脾易擧匙 숟가락을 드니 밥통이 쉬이 줄어든다.

全勝對蒲塞 공양하는 음식 대하듯 모두 다 넘치나

還愧捨靈龜 신령스런 거북이 바친듯하여 도리어 부끄럽도다.

3) 여아(딸 아이)가 옥산에서 석결명을 구했다는 소리를 듣고[答玉山求石決明於女] / 이시발(李時發, 1569∼1626년).

海月百箇團 바다위에 뜬 달이 너무나 환히 둥글어

秋露一壺酒 가을 이슬에 한 병의 술이 반갑네.

區區小女心 구구한 소녀의 마음은

養志兼養口 부모의 마음과 몸을 잘 받드는 일이리라.

원운(原韻)

精乾石決明 정성으로 말린 석결명(전복)은

老子宜佐酒 늙은이 안주에 알맞다는데

留心須寄來 마음이 흔들려 마침내 부쳐왔구나

此物偏悅口 얼마나 입에 맞는 음식인지..

 

4) 김 승지에게 전복을 보냈다[贈金承旨鰒魚] / 구치용(具致用, 1590~1666)

形貌團團掌樣平 생긴 모양이 둥글며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非金非石月精英 돌도 쇠도 아닌 게, 달빛에 꽃부리같이 뛰어나다.

江瑤玉柱同風味 아름다운 살조개와 모두 같은 맛이라,

堪向罇前解宿酲 술상 앞에 권하노니 숙취를 푼다하네.

5) 이 목사(李牧使)가 추로주(秋露酒)와 전복(全鰒)을 보내온 것을 사례하다. 제주도 대정(大靜)에 있을 때이다 / 정온(鄭蘊 1569~1641).

酒滴金盤露 금쟁반의 이슬로 빚은 술에

肴分鮫室珍 안주는 바닷속 진미일세.

靈均若逢此 영균(屈原)이 이를 만났더라면

肯作獨醒人 홀로 깨어 있는 사람 되려 했을까?

[주1] 추로주(秋露酒) : 가을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 담근 술. 특히 향기롭고 쏘는 맛이 있다 하여 생긴 술 이름. 추로백주(秋露白酒).

[주2] 금쟁반의 술(承露盤) :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불로장생하기 위해 건장궁(建章宮) 신명대(神明臺)에 승로반(承露盤)이라는 구리 쟁반을 설치하여 여기에 맺힌 이슬에 옥가루를 타서 마셨다. 그 후 위(魏)나라 명제(明帝)가 본받아서 또 소림원(蘇林園)에 승로반을 설치하였다.

[주3] 영균(靈均) : 영균은 전국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굴원(屈原)의 자(字)이다. 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초사(楚辭)》에 수록된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한결같이 전무후무한 글들이다.

6) 삶은 전복을 보니 느끼는 바가 있어[見鰒魚羹有感] / 유몽인(柳夢寅,1559~1623)

今年二月春坊裏 금년 2월 동궁(東宮),

前席含香夜二更 밤 2경(10~12시) 쯤, 앞자리에 향기가 나서

講罷三廵玉觴酒 강독을 마치고 세 번을 돌아보다 옥잔의 술과

盤中一器鰒魚羹 소반 위 삶은 전복 한 접시와 마주하네.

關西異味兼山海 산해진미 아우른 관서지방의 별미라,

天上珍羞憶寵榮 천상의 진수성찬, 총애와 영광이로다.

路入雲山消息阻 구름 낀 산길에 들어서니 소식이 막히고

不堪當食涕垂纓 음식도 불감당이라 눈물이 갓끈에 드리운다.

7) 만경대에서 전복을 손으로 따서 보여준다[臨萬景臺觀摘鰒] / 조문명(趙文命1680~1732)

臨水觀魚坐石㙜 물가에서 물고기를 보며 석대에 앉았는데

就中盤進鰒魚來 소반에 올린 것 중에 특히 전복을 보는구나.

浦人洞見深深物 어부는 깊고 깊은 물건의 속까지 꿰뚫어 보며

摘出須臾數十回 잠시 동안 수십 번 끄집어낸다.

8) 간별 최보령[簡別崔保寧] 이별 편지 최보령(보령 최씨) / 이소한(李昭漢, 1598~1645)

孤村小酒駐征驂 외딴마을 작은 술자리로 먼 길 떠날 말이 머무는데

可耐頻行興未酣 흥에 취하지 않아 종종걸음인들 어찌하랴

石決明休君獨飮 맛좋은 석결명에 그대 홀로 술 마시니

數將書疏問湘潭 몇 통의 편지가 물가를 찾는구나.

9) 전복 따는 것을 구경하며 / 윤증(尹拯 1629~1714)

一點鯨油徹海空 고래 기름 등불 하나 바다 위를 비추는데

翻身出沒亂濤中 몸 뒤집어 파도 속을 마음대로 출몰하네.

問渠何術能如許 저들 무슨 기술로 이렇게 하는 건가

只是三三二二功 단지 어려서부터 익힌 덕분이라네.

 

10) 잠녀설[潛女說] / 김춘택(金春澤 1670~1717)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 제주도 1670년 作.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버지는 호조판서 진구(鎭龜)이고, 큰 숙부는 대제학을 지냈고 거제도로 유배된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작은 숙부는 진도로 유배 간 김진서였다.

그는 서인노론(西人老論)의 중심 가문에 태어났기에, 그의 가문은 늘 당쟁의 풍파에 시달렸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은 그의 스승이자 작은 할아버지이고, 그의 고모는 숙종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로 숙종이 등극하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다시 민비(閔妃)를 왕후로 맞았으나 후사(後嗣)가 없자 장희빈의 권력에 밀린 민비는 폐비가 되었다. 이들 집안을 살펴보면,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구나”하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네들에게 두려운 것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의지가 강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북헌이 제주도에서 보낸 기간은 모두 12년이다. 일찍이 아버지 김진구의 유배를 수발하기 위해 체류한 6년과 자신의 유배기간 6년을 제주에서 보냈다. 그는 자신의 유배기간 동안 많은 시문을 짓고, 후학을 가르쳐 제주의 유명한 선비들을 배출하였다.

김춘택과 잠녀와의 대화로 된 ‘잠녀설[潛女說]’은 우리가 어릴 적 보아온 해녀의 이야기이다. 그가 남긴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잠녀설(潛女說)>은 당시의 비참한 제주도 잠녀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잠녀라는 직업의 규정을 '물속에 잠수하여 미역이나 혹은 전복을 채취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얼굴은 시커멓고 초췌하여 걱정과 고난으로 죽다가 살아난 모습'이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알아둘 일은 "본조갱이(빈껍데기)"에 대한 것이다.

물안경이 있기 전에는 해녀들은 빈 전복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바다 밑에 내려갔다가 숨이 다 되면 그 위치를 알기 위해서 빈껍데기를 전복이 있는 곁에 놔두고 물위로 나온다. 빈껍데기는 오목하므로 난반사를 해서 물위에서 반짝이므로 그 빛을 보고 못 잡은 전복을 다시 찾아가 잡을 수 있게 된다.

전복을 따다가 할당량을 못 채우면 관아에 붙들려가서 매를 맞기도 하고, 모자라는 양은 사서라도 바쳐야 하는 해녀들의 비참한 생활이 기록하고 있다. 북헌이 제주잠녀와 인터뷰 한 내용을 <잠녀설[潛女說]>이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잠녀설[潛女說]>

[ 이른 바, 잠녀는 잠수해서​ 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여인이다. 그런데 전복과 미역을 채취하는 것이 심히 어렵고 고역이 지나쳐서, 그 용모까지 검고 초췌한데다 근심이 곤하여 죽을 지경의 형상이었다.

내가 위로하며, 그 사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답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물가에 나가서 땔감을 가져다가 불을 피웁니다. 우리는 맨몸에다 가슴에 곽(박)을 매달고 줄에 달린 바랑(망사리)을 박에 이어 맵니다.

전에 채취한 전복의 껍질을 바랑에 넣고, 철첨을  손에 잡고, 헤엄쳐가다가 잠수해서 물 밑에 이르면, 한 손으로 바윗돌을 더듬어 전복이 있음을 알게 되지만 전복이 바위에 찰싹 붙어 있는 것은 단단하므로, 단번에 떼어내지 못합니다. 붙어 있는 전복 껍질이 검으니 검은 바위돌과 혼동됩니다.

그래서 묵은 전복 껍질(본조갱이, 빈껍데기)의 안쪽을 위로하여 그 있는 곳을 알아냅니다. 전복 껍질의 안쪽은 투명하므로 빛이 반사되니, 물속에서도 가히 살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우리의 숨쉬기가 급해지면, 곧바로  수면으로 올라와 박을 안고 ‘휘익’ 숨을 쉬는데 그 소리가 긋듯이 오래 이어집니다. 무릇 몇 번인지 모르지만 그런 후에야 살 수 있는데, 다시 잠수합니다. 진즉 알아둔 곳으로 가서 쇠꼬챙이를 가지고 채취하여 줄에 달린 바랑에 담아가지고 나옵니다.

나와서 물가에 이르면 추워서 얼어버릴 것 같고 벌벌 몸이 떨려 견딜 수 없는 것이, 무릇 6월 달이라도 그러하지요. 마침 땔감에 불을 집혀 따뜻하게 하고서야 생기가 돕니다. 혹 한번 잠수해서 전복을 보지 못하고, 두 번 째 잠수해서도 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릇 한 개의 전복을 따려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또한 물밑의 돌이 혹 날카로워서 부딪쳐 곧 죽기도 하고, 벌레나 뱀 독물에 물리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동업하는 사람들이 급사하는 이가 많고, 돌이나 독물에 죽는 이가 이어집니다. 저는 비록 요행히 살아 있으나, 병에 시달리고 있지요. 제 이 용모를 좀 보세요." 하였다.

내가 민망하다 여기던 중에 여인이 먼저 말하기를, "공께서는 전복을 따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아시겠지만, 제가 전복을 사는 것이 더욱 심히 어렵다는 것은 모르실겁니다." 하였다. 내 말하기를, "당신은 지금 전복을 따는 사람이오. 또한 당신한테서 사다니 어찌 당신이 스스로 산다하는 것이오?"하고 묻자, 그가 말하기를,

 "저는 서민이고 전복은 맛이 좋은 물품입니다. 서민은 맛이 좋은 것을 채취하여 위에 바쳐 충족하게 여러 관인의 식재를 준비해야 합니다.

또 여러 관인들에게 공급하고 선사하는 것이 저의 직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비록 저의 의식주를 돌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양 관인과 그 공궤(供饋)를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그 맨 아래 나중에야 나 자신을 돌봐야 하는 것이 당면한 현실입니다.

제가 감히 공순하지 않고, 비록 걸린 병을 감히 한탄하겠습니까. 오직 관인이 매우 총애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두렵고 그들의 욕구를 채우지 못할 경우 미천한 것이 인색하다고 할 터이니, 저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직 붉은 분을 바르고 비단 옷을 입는 사람은 특이하지만, 내가 총애를 받는 까닭입니다. 나의 전복은 항상 그들을 위하여 채취합니다. 위의 말을 잘 복종하는 까닭에 더욱더 요구하고 독촉함이 그치지 않습니다. 필시 모은 것이 많아 가득 찼을 것이고 많을 것입니다.

고로 이것을 나누어 팔면 더욱 부유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제 병으로 채취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채취하더라도 얻어지는 것이 없으니, 요구하고 독촉하는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그들이 모아놓은 것을 팔 때 그것을 제가 사서 도로 관아에 보낼 것입니다.

대저 팔고 사는 것이 각각 하고자하는 바이니, 지금 저의 형편임을 아시게 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값을 극히 높여서 팔 터인데 저는 이에 파산할 것입니다. 전복은 하나인데 그것을  채취한 환란은 제 몸에 와서 멈추는군요. 그것을 사야하는 재앙은 가족 또한 모두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크게 곤란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어찌 이런 심한 곤란이 닥쳐오는 것입니까"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태산의 호랑이나 영주의 뱀이라도 좋으니, 가혹한 정사, 잔학한 부렴이나 없으면 다행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전복 채취와 전복 매수란 두 가지를 겸한 고통을 겪고 있으니, 진실로 이런 불쌍할 데가 또 어디에 있겠소?"할 뿐이었다.]

[有所謂潛女者 業潛水 採藿或採鰒 然採鰒比採藿 甚難而苦有過之 其容黧悴 有憂困求死之狀 余爲 勞之 仍問其事之詳 對曰 吾就浦邊 置薪而爇火 吾赤吾身 着匏於胸 以繩囊繫於匏 以舊所採者鰒之甲 盛于囊 手持鐵尖 以游以泳 遂以潛焉 及乎水底 以一手撫其厓石 知其有鰒 而鰒之黏於石者 堅而以甲伏焉 堅故不可卽採 伏故其色黑 與石混 乃以舊甲 仰而置之 以識其處 爲其裏面光明 在水中可察見也 於是吾氣甚急 卽出而抱其匏以息之 其聲劃然久者 不知凡幾 然後得生 遂復潛焉 以赴其嘗識處 以鐵尖採之 納於繩囊而出 至浦邊則寒凍 戰慄不可堪 雖六月亦然 遂就溫於薪火以得生 或一 潛不見鰒 再潛不果採者有之 凡採一鰒 其幾死者多 且水底之石 或廉利 觸之則死 其虫蛇惡物 噬之則死 故與吾同業者 以急死 以寒死 以石與虫物死者相望 吾雖幸生而苦病焉 試觀吾容色也 余爲之憫然 又前而言曰 公知採鰒之難 不知吾買鰒之甚難 余曰 汝今採鰒人 且從汝而買 何汝之自買爲 曰 吾小民也 鰒美味也 以小民取美味 以充上供 以備諸官人之食 又以給諸官人之所餽於人者 是吾職也 吾雖不得以爲吾衣食之資 每思官人與其所餽之人者 雖其最下 當有加於吾 吾敢不恭 雖病敢 以恨乎 惟諸官人之所甚寵 而惟恐其言之不從 其欲之不能滿者 其賤而可鄙 無以異於吾 惟塗朱粉被錦綺異矣 而以寵之故 吾之鰒 常爲其所聚 以言之從故 尤徵督不已 必其多聚而滿 欲以聚之多 故散而賣之 以益其富 吾苟病不能採 或採而無所得 而被徵督之迫焉 則時就其所聚而買之 還以輸於官 夫賣與買 各以所欲也 今知吾之勢 不得不買 故極其價之高而售之 吾於是破産焉 鰒一也 而其採之患 則止於吾身 其買之禍 則家族皆且不保 吾豈不大困而甚難哉 余以謂泰山之虎 永州之蛇 幸無 苛政虐賦 今汝兼有採鰒買鰒之苦 誠可憫也已]

 

11) 잠녀가[潛女歌] / 신광수(申光洙) 석북선생문집(石北先生文集).

1764년 영조 40년 정월 53세 때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는 금오랑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였다. 그는 40여일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의 풍토를 표현한 시들을 남겼다. 그 가운데 <잠녀가(潛女歌)>는 당시 잠녀의 모습과 그들의 처한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잠녀가[潛女歌] 제주 풍속에서 신부감으로는 '잠녀가 제일'이며, 부모들이 '옷과 음식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북쪽 사람 신광수는 '잠녀들이 발가벗은 몸뚱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펄펄 떨어지는 낙엽처럼 깊은 바다로 뛰어내리면서 좋아라고 웃는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잠녀들의 자맥질 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물오리나 따오기'로 보이고, 잠녀들의 긴 휘파람 소리(숨비소리)가 수궁(水宮)까지 메아리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잠녀를 보면서 매우 불안한 탄식을 보내고 있다.

"인생에 하필이면, 이 같은 험난한 업을 택해 한갓 돈 때문에 죽음을 소홀히 한다는 말인가. 육지에서 농사짓고 누에 치고, 산에서 나무 캐는 줄을 왜 듣지 못했던가? 균역법에 따라 날마다 관(官)에 바치는 일은 없어져 비록 값은 주고 산다고 하지만, 팔도에 진봉(進奉)하고 서울로 올려 보내자면 하루에 몇 짐이나 전복을 건져내야 할 것인가? 고관(高官)과 공자(公子)가 먹는 것이 이처럼 괴롭게 오는 줄 알리 있으리오.“

<잠녀가[潛女歌] 해녀를 읊다.>

[ 탐라 여자들은 잠수질을 잘 한다. 열 살 때 벌써 앞 냇가에서 수영을 배운다고 한다. 이곳 풍속에 신부 감으로는 잠녀가 제일이니 부모들이 의식주를 걱정 않는다고 자랑을 한다.

내가 북쪽 사람이라 듣고도 믿지 않았더니 이제 왕사로 남쪽 바다에 와 보았다. 성 동쪽 2월에 바람 부는 날 햇빛 따스한데 집집의 여인네들 물가로 나와서는 갈구리 하나, 채롱 하나, 뒤웅박 하나로 발가벗은 몸뚱이엔 조그만 잠방이를 차고 있는데, 일찍이 부끄럼이나 타 본 일 있었던가.

깊고 푸른 바닷물에 의심 없이 펄펄 떨어지는 낙엽처럼 빈 공중으로 뛰어 내린다. 북쪽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남쪽 사람들은 좋아라고 웃어대는구나. 물장구를 치고 장난들을 하며 비껴서 물결을 탄다. 홀연 오리새끼처럼 물속으로 쑥 들어가니 간 곳이 없다.

뒤웅박만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다. 조금 있다 창파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며 얼른 뒤웅박 끈을 풀어 배에 매고 긴 휘파람 큰 한숨에 그 소리 참으로 슬프고도 슬프게 아득한 수궁으로 메아리쳐 간다. 인생에서 하필이면 이 같은 험난한 업을 택해 한갓 돈 때문에 죽음을 소홀히 한단 말인가.

육지에서는 농사짓고 누에치고 산에서 나무 캐는 줄을 왜 듣지 못하였던가. 세상에 제일 무서운 곳이 물 만한 곳이 또 있던가. 능한 여인은 물속 근 백 척이나 들어간다 하니 자주 굶주린 고래 떼의 밥이 되기도 하겠다.

균역법 따라 날마다 관에 바치는 일은 없어져 비록 값은 주고 산다고 하지만 팔도에 진봉하고 서울로 올려 보내자면 하루에 몇 짐이나 생전복, 건전복을 내야 할 것인가. 금옥은 고관의 포주요, 아름다운 비단은 공자의 자리로다.

어찌 저희들 먹는 것이 이처럼 고생하여 오는 줄 알겠는가. 겨우 한 입을 씹어보다 상을 물렸다. 잠녀, 잠녀 그대들 즐거워 떠들고 있다마는 보는 사람은 너무 섧구나. 어이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농락하여 구복을 채우겠는가? 아서라, 우리 같은 가난한 선비들은 바닷가 고을의 청어도 제대로 못 얻어먹지만, 조석 밥상에 부추나물만 올라도 흐뭇하다네.]

[ 耽羅女兒能善泅 十歲已學前溪游 土俗婚姻重潛女 父母誇無衣食憂 我是北人聞不信 奉使今來南海遊 城東二月風日暄 家家兒女出水頭 一鍬一笭一匏子 赤身小袴何曾羞 直下不疑深靑水 紛紛風葉空中投 北人駭然南人笑 擊水相戲橫乘流 忽學鳧雛沒無處 但見匏子輕輕水上浮 斯須湧出碧波中 急引匏繩以腹留 一時長嘯吐氣息 其聲悲動水宮幽 人生爲業何須此 爾獨貪利絶輕死 豈不聞陸可農蠶山可採 世間極險無如水 能者深入近百尺 往往又遭飢蛟食 自從均役罷日供 官吏雖云與錢覓 八道進奉走京師 一日幾駄生乾鰒 金玉達官庖 綺羅公子席 豈知辛苦所從來 纔經一嚼案已推 潛女潛女爾雖樂吾自哀 奈何戲人性命累吾口腹 嗟吾書生海州靑魚亦難喫 但得朝夕一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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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2022-08-02 16:55:10
전복 따는것을 구경하며 윤증의글에서
'只是三三二二功 단지 어려서부터 익힌 덕분이라네.'
에서 "三三二二功"의 해석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