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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요정(妖精) 잠자리(蜻蜓)
허공의 요정(妖精) 잠자리(蜻蜓)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09.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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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 선생

‘잠자리’는 조선 중종 때 번역한 <두시언해> 초간본에는 ‘잔자리(잔은 아래 아)’로 나오다가 그 후로는 잔자리로 기록되어 전하니 잔자리가 잠자리(Dragonfly)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에서는 일부 어른들이 잠자리가 떨면서 난다고 ‘떨보’, 또는 ‘철갱이(초랭이)’라 칭하기도 한다. 가을철 잠자리를 볼 때마다, 어릴 때 거제도 고향에서 잠자리를 잡으려 다니면서 부른, ‘잠자리 꽁꽁’ 노래와 ‘고추장 먹고 매에맴’이 생각난다.

[“잠자리 공공 붙은 자리 붙어라 멀리가면 죽는다.” / “고추잠자리 꼬오장 먹고 매에맴, 된~장잠자리 되엔장 먹고 매에맴”] 어릴 때 잠자리를 잡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풀섶에 앉아 있는 잠자리 곁으로 숨을 죽이고, 손가락을 빙빙 돌려 그리면서 다가가, 덥석 손으로 재빠르게 잡았다.

경북북부 지방에서는 잠자리 암놈을 ‘엘라’, 수놈은 ‘쉘라‘라 하며, 엘라 중에 옆구리에 넓고 푸른 점이 있는 놈은 잠자리 중의 여왕격으로 ’방처매’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통 놈은 암컷을 청곽, 수컷을 홍곽이라 하여 그리 대단한 축에 들지 못한다.

잠자리는 전 세계에 약 5,000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는 약 100종의 잠자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잠자리는 작은 곤충을 사냥하므로 작은 곤충들이 많이 사는 곳에 산다. 물가나 초원 같은 수풀이 무성한 곳은 작은 곤충이 많이 있으므로 잠자리가 좋아하나,

종류에 따라 특정지역을 좋아하기도 한다. 물잠자리는 물가를, 실잠자리는 수풀을 선호한다. 종류를 크게 나누면, 고추잠자리∙밀잠자리∙깃동잠자리∙나비잠자리∙장수잠자리∙물잠자리∙실잠자리∙왕잠자리∙된장잠자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잠자리를 대부분 ‘청정(蜻蜓)‘이라 표기했는데 간혹 ‘청령(蜻蛉)’이라 표기하기도 했다. 그 외 별칭으로는 호려(狐黎)∙청아랑(青鴉娘) 등이 있고 고추잠자리로는 적졸(赤卒)∙강추(絳騶)∙적의사자(赤衣使者)∙적변장인(赤弁丈人)이 있다.

◯ 조선후기 민노행(閔魯行 1777~1845)의 <명수지문(名數咫聞)>에 따르면, 잠자리는 세 종류(蜻蜓三種)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째 색이 푸르고 큰 것을 ‘청정(蜻蜓)‘이라 하고, 둘째 작고 누른 것을 ’호려(狐黎)‘라 부르며, 셋째 작고 붉은 것을 ’적졸(赤卒 고추잠자리)‘, 한편으론 ’강추(絳騶)‘라 말한다.(色靑而大者曰 蜻蜓 小而黃曰 狐黎 小而赤曰 赤卒 一曰 絳騶).

중국 서진(西晉)의 최표(崔豹)는 『고금주(古今注)』라는 책에서 “청정 즉 청령은 물 위에 모여서 날기를 좋아한다.”(古今注 蜻蜓卽蜻蛉 好飛集水上) 하였고, 1182년 중국 남송의 양극가(梁克家)가 지은 <순희삼산지(淳熙三山志)> 일명 장락지(長樂志)에서 언급하길, “청정은 한편으론 강추(絳騶)라 말하고, 한편으로 적의사자(赤衣使者)라 불리며, 또한 적변장인(赤弁丈人)이라 칭하기도 하고, 세속에서는 청아랑(青鴉娘)이라 불린다.(蜻蜓 一曰絳騶 一曰赤衣使者 又曰赤弁丈人 俗呼青鴉娘)“고 했다.

◯ 청령국(蜻蛉國)이란? 이덕무(李德懋)의 일본기(日本紀)에서, “청령은 옛 일본국의 명칭이다. 주(周)나라 유왕(幽王) 때 협야(挾野)라는 자가 화주(和州)의 무방산(畝傍山) 동남쪽 추원(樞原)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풍추진주(豐秋津洲)라 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잠자리(とんぼ 蜻蛉)를 추진(秋津)이라고 하는데, 그 지형이 잠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처음 중국과 교통하였다. 사서(史書)에서는 왜노(倭奴), 또는 야마(野馬)라고 하였다. 당나라 함평(咸平) 연간에 해가 뜨는 곳과 가깝다고 하여 국호를 ‘일본’이라 고쳤다.”한다.

◯ 중국에서 시성(詩聖)이라 칭하는 두보(杜甫)는, <곡강(曲江)>이란 시편에서, “꽃 사이로 나비는 깊이깊이 보이고, 물 점찍는 잠자리 팔랑팔랑 나누나.(穿花蛺蝶深深見, 點水蜻蜓款款飛)”고 읊었다. 그가 반쯤 취한 퇴근길에서 눈길 가는 곳이, 꽃밭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나비들과, 잔잔한 수면 위로 꽁지를 살짝 꼬부려 점 하나를 톡 찍고 날아가는 잠자리였다.

여기저기 들쑤시며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부산스레 돌아다니자, 두보는 자꾸만 그들이 부러워, 그 뒤를 따라 꽃밭 사이와 수면 위를 기웃기웃하며, 아름다운 봄날 풍광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1) 허공의 요정 잠자리[蜻蜓虛空妖精] 고영화(高永和).

“아득히 펼쳐진 푸른 물결,

석양에 돛단배 그림자 비취는데

소슬한 가을바람에 검푸른 아가씨(青鴉娘),

바다의 추파에 화답하듯 물 점을 찍는구나.

파란 물결 푸른 산은 나루터를 감쌌는데

햇살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다,

잠자리 앉은 외론 배는 물결 따라 흔들린다.

해질녘 돌밭에 질펀한 코스모스 송이송이,

뜨거운 햇살 걷히고 석양이 지니

명랑한 고추잠자리 군무(群舞)가 어지럽다.

가을 절후가 조석의 더위 거두니

서늘한 기운이 점점 피부에 와 닿아

만 가지 사색이 일어나는데

청정(蜻蜓)의 아양에 정신이 혼미하구려.

분분한 햇살에 온통 붉은 가을 풍광,

사방 산에서 늦은 바람 일어나니

허공의 붉은 요정(妖精) 투명그물 퍼떡이다가

순간이동의 묘미로 희롱하는 요매(妖魅),

이리저리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고추잠자리의 미혹에 눈길 돌린

소년은 적의사자(赤衣使者)의 흥에 미쳐버렸네.”

2) 청정[蜻蜓] 잠자리 / 신광수(申光洙 1712~1775).

山下柴門盡日開 산 아래 사립문은 온종일 열려 있고

蕪菁花發小庭隈 작은 뜰에는 장다리꽃이 피어 있다.

蜻蜓到地旋飛去 잠자리가 땅을 스쳐 돌아 날아가다가

直過西墻更却回 서쪽 담을 지나더니 문득 다시 돌아오네.

3) 고추잠자리가 희롱하는 모습을 보고[紅蜻蜓戱影]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墻紋細肖哥窰坼 입은 옷의 무늬가 미세하니 가요(哥窰)가 갈라진 듯하고

篁葉紛披个字靑 어지러이 흩어진 얇은 날개는 낱낱이 푸른 글자로다.

井畔秋陽生影纈 우물 두둑의 가을 햇살이 비단무늬 광채를 만들어

紅腰婀娜瘦蜻蜓 요염한 붉은 허리 고추잠자리가 하늘하늘 거리네.

[주] 가요(哥窰) : 송(宋)의 처주(處州)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 형제가 각기 자기를 구웠는데, 형이 구운 것이 아우의 것보다 약간 더 희고 깨진 무늬가 많아서 이를 ‘가요’라 하였다.

이름도 섹시한 가을의 전령 “고추잠자리”는 머리 몸통 꼬리를 아우르는 빨간 색깔이 관능적(官能的)이다. 아무리 선비의 얼음 같은 마음을 가다듬고 중심을 쏟으려 정신을 차리지만 청정성희(蜻蜓性戱)에 눈길을 빼앗긴다.

고추잠자리는 날면서 교미(交尾)를 자주 한다. 어느 시인은 고추잠자리의 교미에 “공중 섹스”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모든 고추잠자리가 빨간 것은 아니다. 수컷만이 빨갛다. 처음엔 노란색을 띠지만 초가을, 교미할 때가 되면 빨갛게 변한다. 그래서 고추잠자리의 빨간색은 혼인색(婚姻色)이고, 유혹의 색이다.

 

4) 거미줄을 읊다[蜘蛛網詠] / 윤증(尹拯 1629~1714)

蜘蛛結綱罟 거미가 거미줄을 치니

橫截下與上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爲我語蜻蜓 날 위해 잠자리에게 말을 해 주렴

愼勿簷前向 절대로 처마 밑엔 가지 말라고

위 글은 저자 윤증(尹拯)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비난과 변명의 대립관계가 지속되어 많은 어려움을 당한 현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거미는 노론을, 잠자리는 소론을 뜻한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5) 비 온 후에 잠자리가 뜰에 가득하네[雨後見滿庭蜻蜓] / 권정침(權正忱 1710∼1767)

山雨初晴新日輝 산비가 개이니 빛나는 햇살 새롭고

蜻蜓歀歀滿庭飛 사랑스런 잠자리 뜰에 가득 날고나.

下上乘風如自得 아래위로 바람타고 절로 뽐내며 우쭐거리는 듯이

靜中隨處驗天機 고요함 속에 곳곳을 누비니 천기(天機)를 증험하네.

[주] 천기(天機) : 모든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기밀(機密). 전하여, 중대한 기밀. 천부의 성질 또는 기지(機知).

6) 금강에서 배를 타고 잠자리를 읊다[錦江舟中賦蜻蜓] / 유득공(柳得恭 1749~1807)

蜻蜓復蜻蜓 잠자리 또 잠자리가

飛來錦水汀 아름다운 물가로 날아와

滄江映碧眼 파란 눈에 푸른 강이 비치고

晴日纈金翎 금빛 날개에는 햇살이 엉키네.

態逼羣魚逝 떼 지은 모습은 고기떼와 같고

情同片燕停 사뿐히 앉은 건 제비를 닮았네.

客心無住着 마음을 걷잡지 못하는 길손이 있어

應逐爾亭亭 너를 쫓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노라.

“파란 눈에 푸른 강이 비치고 금빛 날개에는 햇살이 엉키네(滄江映碧眼 晴日纈金翎).” 잠자리의 파란 눈에 비친 푸른 강이야 말로 푸른색의 절정이고,

잠자리의 금빛 날개에 엉킨 햇살은 오묘하고 다채로운 햇살의 아름다운 무늬, 그러한 잠자리를 바라보는 나그네의 마음(客心)은 걷잡지 못해, 잠자리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서 있다(無住着 應逐爾亭亭)

자연과 화자가 완전히 합체된, 시각적인 화려한 수사는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선생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빛에 따른 채색을 세밀히 관찰하고 형상화 한 그는 채색시인(彩色詩人)이라 할 만하다.

 

7) 고추잠자리, 어떤 사람의 시에 차운하여[蜻蜓次人韻] / 1885년 여름(乙丑夏) 김윤식(金允植 1835~1922).

赤幘朱裳映晩天 붉은 벼슬과 붉은 치마가 저문 하늘을 비추며

野行無處不相先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처 없이 들로 가는구나.

棲棲靡定巡階草 허둥허둥 이리저리 섬돌의 풀을 돌다가

箇箇如忙趁夕烟 하나하나 황망하니 저녁연기를 뒤쫓네.

世味閱來雙翼薄 세상의 온갖 경험 겪고 나니 두 날개가 얇아지고

光陰惜得努睛圓 흘러간 세월이 아쉬워 둥근 눈을 부라리네.

最憐堪入春風畵 아름다워라! 봄바람이 그림 속으로 살랑 들어와

黏在佳人碧玉鈿 가인의 푸른 옥비녀에 달라붙는다.

8) 아이가 잡은 잠자리[兒捕蜻蜓] / 이진백(李震白 1622∼1707)

裸體扶扶被髮兒 머리를 풀어헤친 알몸의 어린아이가

僂行持箒繞踈籬 재빨리 빗자루를 잡고 빙 두른 성긴 울타리로 가네.

勞心盡日終何得 진종일 속만 태워서 끝내 무엇을 얻으려나.

生捕蜻蜓雀躍歸 잠자리를 사로잡고는 깡충깡충 뛰며 돌아온다.

위아래 두 편의 청정[蜻蜓] 시편은, 무고로 인해 탄핵을 받고 고향 시골마을에서 잠자리를 잡는 아이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진백(李震白)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자는 태소(太素), 호는 서암노인(西巖老人)이다.

1657년 사마시에 합격, 7년 뒤인 1664년 순릉참봉(順陵參奉) 벼슬을 시작으로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를 지냈으며, 1671년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672년 평택현감으로 있을 때 흉년대책을 잘 세우고 소송을 공정히 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세 차례나 다녀간 암행어사의 보고에서 청렴한 관원으로 이름이 났다.

1677년 임기가 끝나던 해 무고로 인한 탄핵을 받아 고향에 돌아갔다. 1691년 첨지중추부사, 1701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위 시편은 아이가 잠자리를 잡는 동심을 읊은 것이고, 아래 시편은 자신의 現在 처지처럼 잠자리를 자신에게 투영해, 거미줄에 걸려 재앙을 당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9) 청정[蜻蜓] 잠자리 / 이진백(李震白 1622∼1707)

綃翼金眸品質微 얇은 날개, 금빛 눈, 그 품질이 정묘하여

暖風晴日作團飛 맑은 날 따듯한 바람타고 하염없이 나부끼네.

蜘蛛結網童持箒 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아이가 빗자루를 가지고 가는데

莫向其間觸禍機 그 사이에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걸리지 말거라.

10) 조촌(潮村) 물가에서 박초정(朴楚亭)의 운을 차하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荷屋朝光細引杯 띳집에서 아침볕에 조용히 잔을 드니

離情歸意兩相催 보내고 돌아가는 정(情)이 서로 얽혔구나.

我如衣上蜻蜓立 나는 옷 위에 앉은 잠자리 같으니

暫去那無暫復來 잠깐 가면 어찌 금방 돌아오지 않으리.

잠자리가 왔던 곳에 다시 되돌아옴은 정(情)이 서로 얽혀 있음이다. 우리도 잠자리의 정(情)과 같이, 어찌 금방 돌아오지 않으리. 당시 북학파들의 실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시편 속의 ‘정(情)’은 이를 두고 한 함축적인 표현이다. 박초정(朴楚亭)은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호이다. 이덕무(李德懋)는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들은 학문의 본령을 경제지지(經濟之志)에 두고 활동했다. 이러한 뜻은 1778년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1) ‘청령(蜻蛉)’을 사랑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거제도에서 잠자리 ‘청령(蜻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선생이다. 그는 생애동안 청령(蜻蛉)이란 말을 가장 많이 애용한 시인이었다.

청마 유치환은 1945년 해방이 된 그해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 권재순은 건국준비위원회로부터 일인(日人)이 소유했던 유치원을 양도 받아 문화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경영하게 된다.

이 무렵 청마는 사회활동과 더불어 부인의 유치원 2층 사택에다 서재를 마련하고 당호를 ‘영산장(映山莊)’이라 하여, 이곳에서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1946년에는 백상현(白相鉉)∙설창수(薛昌洙) 등이 대표가 되고 이경순(李敬純)∙조향(趙鄕)∙조지훈(趙芝薰)∙박목월(朴木月) 등이 동인이었던 진주시인협회의 『등불』, 이윤수(李潤守)를 대표로 하고 김동사(金東史)∙이효상(李孝祥)∙김달진(金達鎭) 등이 동인이었던 대구의 『죽순(竹筍)』에 참여하는 등, 작품 발표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 영산장은 ‘낙목산방(落木山傍)’ 혹은 ‘청령장(蜻蛉莊)’이라고도 불리어졌는데, 후에 그가 피난시절 부산시 영주동(대청동) 집을 다시 청령장(蜻蛉莊), 대구 시절의 집을 무동암(無東庵), 경주 시절의 집을 요지암(遙指庵)으로 호칭한 것은, 그의 문사(文士) 기질을 잘 드러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청마가 명명한 통영과 부산집 ‘청령장(蜻蛉莊)’은 모두 일본식 가옥(집)이었다. 이덕무(李德懋)의 일본기(日本紀)에서 일본의 옛 명칭이 ‘청령국(蜻蛉國)’이었으니 이를 빗대어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또한 ‘청령(蜻蛉 잠자리)‘라는 말을 많이 애용했던 것은, 잡힐 듯 말듯 한, 사랑했던 여인 이영도를 그가 자주 청령(蜻蛉)으로 비유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선생의 사랑이 어떤 방식이던, 부인을 둔 교육자로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성과의 사랑이었다.

여기에다 1949년 5월 청마의 네 번째 시집인 『청령일기(蜻蛉日記)』 등에서 보듯, ‘청령’에 대한 청마의 사랑은 남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마의 『청령일기』에는 대부분 시적자아의 일상적이고 관조적인 자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948년 『울릉도』시집에서 청마가 말하길, “여기에 기록한 것은 시집 『청령일기』와 아울러 1945년 8월15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만3년 동안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조국이 다시 암담한 혼돈에서 진통하던 그 가운데서 할 일없이 만지작거린 나의 죄스런 작품들이다.”라고 소회를 읊었다.

원래 『청령일기(蜻蛉日記)』는 '하루살이 일기'라는 뜻으로, 일본(日本) 헤이안시대(平安時代) 3대 미인으로 꼽힐 정도로 교양 있고 용모 단정했던 와카에(미치쓰나 어머니)가 21년 동안의 일을 기록하여 974 년경에 성립한 일본 여류 일기문학(日記文學)의 효시이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자조문학의 효시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평생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만 충실한 여성이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쓴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문학사, 특히 여성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이 일기에 수록된 와카[和歌]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작자의 심정과 일생을 잘 드러낸 작품 한 수, “한숨 속에서 홀로 지새는 밤이 밝기까지는 얼마나 길고 긴지 그대는 아는지요?”는 후대의 ≪햐쿠닌잇슈(百人一首)≫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청마는 아마도 일본의 『청령일기』를 읽고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통영시 청마문학관에 영랑의 시가 있었던 이유가 있다. 1950년 5月 남해에 대한 기행문을 쓰려 통영에 왔던 정지용(鄭芝溶 1903~1950)이 <문화유치원> 2층 청마의 서재 <청령장>에 묵을 당시,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시를 지용이 직접 쓰고, 화가 청계(鄭靑谿 1914~1984)가 모란을 그려 청마에게 선물한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제시 둔덕면에는 <청마기념관>이 있고, 메주산 소공원 광장에는 청마선생의 시비 7기와, 청마선생의 삶과 문학에 대해 설명해 놓은 연보벽(年譜壁)이 설치돼 있으며, 소공원 광장 아래쪽 오솔길을 따라 약100m 남짓 걸으면, 둔덕만 해안 일대를 훤히 볼 수 있는 청령정(蜻蛉亭)이 나온다.

청령정은 몇 년 전, 거제시가 청마묘소 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해 세운 정자이다. 다음은 시집 《청령일기(蜻蛉日記)》에 수록된 ‘그리움’이다. 그리운 ‘청령(蜻蛉)‘ 정향(丁香 이영도)을 향한 애절함이 깃든 시(詩)를 한번 감상해 보자.

 

① 그리움 / 유치환(柳致環 1908~1967)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의 시는 사랑했던 여인, 이영도 청령이 저 육지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청마는 파도처럼 쉼 없이 울부짖고 외친 작품이었다. 깃대에 묶인 깃발같이 그녀는 나부낄 뿐, 어떠한 화답도 없어, 청마의 가슴은 저 포말같이 흰 거품을 내며, 부셔지고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이에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 보내면서 애끓는 연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② 탑(塔) / 이영도(李永道 1916~1976)

“너는 저만치 가고 / 나는 여기 섰는데 /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 돌아선 하늘과 땅 / 애모는 사리(舍利)로 맺혀 / 푸른 돌로 굳어라”

③ 청마는 ‘청령’ 이영도에게 2편의 <청령가(蜻蛉歌)> 시를 썼는데, 그 중 1편에는 부제가 ‘정향(丁香 이영도)에게’로 되어 있다.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 / 무슨 보람이 이뤄져 너희 되었음이랴.

노을 구름 비껴 뜬 석양 하늘에 / 잔잔히 눈부신 마노(瑪瑙 석영이 섞인 보석의 하나)빛 나래는 / 어느 인류의 쌓은 탑이 / 아리아리 이에 더 설으랴.

덧없는 목숨이매 /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 --노래여. 뉘우침이여.“

④ 무제(無題) / 이영도(李永道 1916~1976)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선생의 호(號) 청마(靑馬)는 ‘청마만리(靑馬萬里)’란 말에서 온 듯하다. “푸른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만 리나 거칠 것이 없이 내달린다.” 즉, 역동적인 말처럼 힘차게 꿈을 펼치라는 의미이다.

그의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 序에서 <이 시는 나의 出血이오 發汗이옵니다><시인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했다. 피땀으로 쓴 시를 추려서 발간한 시집이라며 “시가 자신의 모든 것이다”라고 언급한 문구에서 청마 자신의 가치관을 말하고 있다. 이젠 나를 자학하지 않으리라, ‘나는 고독하지 않다’ 나에겐 시(詩)가 있으니....

청마는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한 여인 이영도를 향해 50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대구여고 교장시절,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미화된, 청마의 열성적인 편지를 3년간 받은 또 다른 여인 반희정과 더불어, 훗날 부인이 된 소녀 권재순에게, 총각시절 습작하면서 보낸 편지도 있었으니, 청마의 문학은 원초적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여성편력적인 사랑(involved with women)’에 대한 결핍에너지(lack of energy)가 시작(詩作)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잠자리(蜻蛉)가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정(情)’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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