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황망한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거린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지나쳐가는 오늘을 기다리는 듯, 깊고 검은 눈엔 금 새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린다. “지금 몇 시야?”, 돌아오는 답은 늘 같다, “약 먹을 시간이요.”
아버지는 자꾸만 변해갔다. 아끼는 손목시계가 사라졌다며 헌신적인 딸 에겐 종종 화를 냈다. 아버지도 이 상황이 미칠 듯 두렵다. 그는 함께여도 혼자였고,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이 없었다.
배우 유퉁과 딸 미미가 1년 8개월 만에 부녀(父女)로 연극무대에서 다시 만난 ‘울퉁불퉁 라라뽕 콘서트’다. 연극은 30년 넘게 앓아온 당뇨와 합병증으로 기억을 지워가는 아버지 유퉁과 그를 돌보는 딸‘미미’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빠가 없으면 저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사람이 없어요. 아빠! 사랑해요.”(미미) 애지중지하는 딸의 이야기에 아버지는 내심 좋으면서도 괜히 한소리를 해본다. “에이 난 못 믿어. 연습 끝날 때마다 어찌나 야단하는지,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그런다고.(유퉁)
아버지의 이야기에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연극에선 권위적인 아버지이지만 실제론 ‘딸바보’라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몽골에서 이별할 때 3일을 울었어요.”(유퉁)
1997년 연극 ’유퉁의 헷소리‘이후 29년 만에 어린 딸과 마주한 무대다. ’울퉁불퉁 라라뽕’은 딸 미미의 아픈 추억과 사랑, 열정, 꿈을 향해 힘들지만 굴하지 않는 여정을 그렸다. 54살 차이가 나는 미미와 그의 애피소드를 연극, 뮤지컬, 콘서트를 접목 시킨 드라마 콘서트 무대다. 유퉁이 제작하고 미미와 유퉁의 막내동생 유현순이 출연했다. 가족극단이 탄생 된 것이다.
요즘 부녀는 온종일 함께 지낸다. 한집에 살면서 매일 영어, 피아노학원, 킥복싱 도장 등에 함께 출근해 연기 호흡을 맞추고, 매일 같은 시간 퇴근해 집으로 향한다. 최근 경남 마산 스파더스패이스 4층 연극전용 공연장에서 연극인 부녀를 만났다. 미소가 떠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애틋했다.
■병상에서의 ‘운명 같은 만남’...절망의 끝에 찾아온 연극 한 편‘
유튱이 연극의 대본을 쓴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그는 떠 올렸다. 주인공인 그는 ‘당뇨병 노인’이었다. ”아파서 병원에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이렇게 치료를 받으며, 이젠 끝났는가 보다 하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미미의 해맑은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이제 일어나야지 싶더라고, 정말 운명이지. (유퉁)
절망의 끝에 찾아온 연극 한 편은 노장 배우를 다시 일으켰다. 그를 다시 살게 한 작품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리기 일쑤였는데, 기적처럼 기력이 회복됐다. 13살짜리 미미는“아빠 그 까짓거 못하냐.”며‘연극 정신을 부추겼다. 그는 1987년 제5회 전국연극제에서 ’노인 새가 되어 날다‘ 안 덕만 역으로 남자 연기상을 수상한 개성파 연기력을 인정받은 명품 배우다.
“연극이 뭔지 몰랐던 그 시절엔 허영이 있었어요. 예술가는 무대 위에서 쓰러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그런 작품이에요. 이제 이거 하고 죽어야지(웃음)”(유퉁)
무대는 7년 전 33세 연하의 몽골인 여성과 8번째 결혼을 했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파경을 맞게 되어 딸 미미와의 이별과 사랑을 소재로 가져왔다. 조금은 복잡하다. 현실과 망상,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려 하면 기억의 단상들은 다시 엉키며 소름 돋는 기계음과 함께 장면이 전환 된다. 연극의 시점이 독특해서다.
이별과 사랑을 다룬 작품은 당사자의 고통과 갈등을 다룬다면, ’울퉁불퉁 라라뽕‘은 당뇨합병증에 걸린 아버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그려진다. 연극이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미미는 “연습을 하면서도 연기와 실제 마음이 끊임없이 충돌한다.”고 말했다. “배우의 입장으로 연기해야 하는데, 실제의 제 역할과 겹쳐져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아빠‘라고 부르는 몇몇 장면들은 제어가 되지 않아 울컥하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기도 해요.”(미미); 결국 유현순 배우는 미미에게 ’미미는 울면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유퉁은 작품에 대해 ”당뇨를 힘든 병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 삶의 연장 선상에서 겪는 하나의 일“이라며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이 순간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던져 준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연극은 이별과 만남이라는 소재를 통해 딸과 아빠의 관계 회복과 용서, 화합을 그려간다. “존엄성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다.
■배우지 않아도 닮아가는 부녀(父女)...미미는 내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
50여 년간 한 길을 걸어온 유퉁에게 ”연극은 삶 자체다. “대문 열면 사연 없는 집이 없더라.”고 회상하는 그는 ”우리가 몰랐던 것들, 가지고 있어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연극 안에 있다.”며“인생의 희노애락과 모는 갈등 관계 등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애비처럼 고생한다“며 딸이 연극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다. 몽골에서 가요대상을 수상했던 딸의 연기 선언 엔 대뜸 한숨이 지어졌다. 그 역시 운명이었는지, 이젠 같은 길을 걷는 든든한 동반자가 됐다. 딸 미미를 비롯해 막내동생 유현순도 모두 연극배우다. ‘울퉁불퉁 라라뽕’은 가족극단인 셈이다.
“결국 하려면 하라고 했어요. 단, 스타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죠.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니까. 연극을 학문으로 하거나 학문까지 아니더라도 올바르게 인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라면 하라고 했어요”(유퉁)
단 한 번도 배워본 적은 없지만, 딸의 연기력은 아버지를 닮았다. 말투, 제스쳐, 억양까지 닮아 있어서다.
전 부인이 다시 몽골로 돌아가면서 늦둥이 딸 미미와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여기에 코로나 19로 하늘길까지 막히면서 딸을 못본지 3년 이 지났다. 유퉁은 “내 몸은 미미가 없으면 바로 쓰러진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후 다시 만난 딸 미미에게 병원에 가는 상황을 설명하며 ”병원에 일주일 지나고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미는 “제가 도와주면 안 되나. 같이 있기로 약속하지 않았냐”라며 눈물을 보였다.
드라마콘서트라는 형식으로 꾸며진 이번 무대는 연극·뮤지컬·드라마·콘서트를 접목시킨 새로운 장르였다. 늘 새로움을 창조·창작하는 유퉁다운 발상으로 꾸며진 한편의 종합예술 그 자체였다.
오늘 공연 첫날 찾은 아주 특별한 손님! 바로 민속씨름의 전설, 털보장사 이승삼 교수가 공연장을 찾았다. 필자는 공연을 마친 배우 유퉁에게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물었다.
“경남 마산 스파더스패이스 4층 공연장에서 3월 한 달 매주 금, 토, 일 오후 4시, 1회 공연이 끝나면,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교민공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팬분들과 만나게 되는데요. 감동과 함께 좋은 하모니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다려 준 팬 들을 위한 공연이 안전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활동하는 저희의 모습 기대해 주시고 유튜브 방송 ‘유퉁 TV’도 많은 청취 부탁드립니다.
손영민 /꿈의 바닷길로 떠나는 거제도 여행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