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골 청년이 보자기 하나를 들고 관가(官家)로 찾아왔다. 그 청년은 그 고을 원님에게 말했다. “어저께 길에서 보자기를 하나 주었는데, 이 속에 엽전이 들어 있는것 같다”고 했다.
원님은 “청년에게 이 보자기를 풀어보았냐고 물었고, 그 청년은 풀어보지는 않았지만 엽전 같다”고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했다.
원님이 보자기를 풀어보니, 정말 그 속에는 엽전 200냥이 들어있었다.
이때 저 멀리서 보자기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어저께 엽전이 든 보자기를 잃어버렸다”고 원님에게 고했다.
원님이 보자기에 얼마가 들어있었느냐”고 물었다. 그 보자기 주인은 청년을 힐긋 쳐다보더니 “300냥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원님은 “이 보자기에는 200냥이 들어 있었다. 너는 이 보자기의 주인이 아니다”고 돌려보냈다.
원님은 그 자리에서 “이 보자기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보자기는 너의 것” 이라고 청년에게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보자기 주인은 원님에게 “어제는 제가 착각을 한 것 같다. 그 보자기에는 200냥이 들어 있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고을 원님은 이 보자기 주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님은 형방에게 “(이 자를)옥에 가두어라”고 지시하고, 청년에게는 200냥이 든 보자기를 주고 집으로 보냈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고, 듣는 전래 동화에 나오는 ‘원님의 재판’이란 제목의 이야기다. 이 동화는 거짓말하는 사람은 결국 벌을 받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바야흐로, 선량(選良)을 뽑는 계절이다. 누구는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했다. 정말 누구에게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계절이 될 것 같다.
오는 4월10일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거제의 분위기는 정중동이다. 선거전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지 않아서인지, 유권자들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후보자를 정당의 국회의원 의석 순에 따라 소개하면 더불어민주당 변광용, 국민의힘 서일준, 개혁신당 김범준 후보 등 3명이다. 이들은 현역국회의원, 전직 시장, 당 정책전략기획부총장 등 나름 화려한 경력과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후보자 면면의 식상함과 거제정치판의 인재의 빈곤함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일까. 이들은 벼슬을 했거나, 벼슬을 하고 있거나, 도전하고 있거나, 모두가 선거판 단골들이고, 어제의 용사들이다. 거제 정치판에서 이들의 얼굴 본 것을 굳이 따지면 강산은 한 번 바뀌었을 시간이다.
참신하지 않다. 이러니 유권자들 중에는 체기 정도는 아니지만, 가슴이 답답하단다.
그렇지만 이젠 유권자들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을 준비를 해야 한다. 유권자 중에는 물고 뜯는 선거판이 싫어 등을 돌린다. 또 무감동이고, 재미없는 후보자들이 싫어 눈길도 주기 싫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들이 지난날과 지금 알량한 말로 우리를 우롱하지 않았는지, 진정성 없는 비전으로 말장난을 치지 않았는지, 되짚고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
우리는 후보자들이 내놓는 공약이나 공식적인 발표가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민생경제, 청년, 보육, 의료, 노동, 지역숙원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말이다.
특히 우리는 어느 후보가 거짓말을 하는지 매의 눈으로 가려내야 한다. 그다음 우리는 표로써 심판해야 해야 한다. 이는 바로 우리가 대접받는 일이다. 자존감도 세운다.
어떤 전문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흥분도 잘하고, 눈물도 잘 흘린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감정에 약하다는 것과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은 다르다. 또 감정이 약하다는 것과 눈물이 많다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 유권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진정 이 거제에 필요한 인재를 선택하는 혜안을 가졌다.
비록 사는 것이 팍팍하고, 바빠 선거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더라도, ‘내가 빠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유권자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프랑스의 어느 계몽시상가는 “유권자는 오직 선거 때만 자유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 말은 유권자들이 자기의 권리행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흔히 “최선(最善)이 아니면 차선(次善)이고, 최악(最惡)이 싫어 차악(次惡)을 선택한다”고 한다. 유권자들의 깊은 고민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때로는 싫어도 할 때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