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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난자(酣紅爛紫) 오색 단풍
감홍난자(酣紅爛紫) 오색 단풍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10.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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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단풍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코스모스가 시작하여 국화가 마무리하는 완연한 가을날이자, 또한 책읽기에 딱 좋은 서늘한 날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온 산에 붉게 물든 단풍은, 천고마비(天高馬肥) 계절의 절정을 알리는 파수꾼이다.

꿈과 희망의 싹을 틔우어, 청춘의 녹음을 피우더니, 찬란하고 열정의 여름을 지나, 삶의 절정에 온갖 색깔을 뿜어내고 소진(消盡)하는 오색영롱(五色玲瓏)한 단풍이기도 하다.

가을은 하늘이 너무나 맑아서 “말발굽에 고인 물도 마실 수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 푸른 하늘아래 산천을 수놓는, 아름다운 나뭇잎 색깔인 단풍은, 우리에게는 환상적인 모습이지만, 나무들에게는 다음 해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기러기가 날고 산이 붉게 물든(征雁紅葉) 풍경’, ‘글 읽기에 딱 좋은 초가을 날씨(新凉燈火)’,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좋다(燈火可親)’는 등, 가을은 깨끗함∙절개∙운치∙독서∙고독∙성찰∙기개의 계절이었다.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시에, “수레 멎고 앉아서 석양의 단풍 감상하노니, 단풍 든 잎새가 이월의 꽃보다 더 붉구나.[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 이 시(詩) 속의 ‘풍림정거(楓林停車)’는 각종 그림의 제목(畵題)으로써, 많이 그려졌다. 가을 색이 완연한 산길에서, 수레를 멈추고 바위에 앉아 단풍구경하는 선비를 그렸기 때문이었다.

옛사람들은 “봄은 해 뜨는 동쪽, 여름은 남쪽, 가을은 서쪽, 겨울은 북쪽”이라 표현했다. 늦가을 태양은 점점 짧아지고, 해질녘 낙조 아래 붉고 노란 단풍을 바라보면서, 삶의 성찰과 회한을 통해 되돌아보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진달래 피는 봄날엔 한걸음 한걸음 산 정상을 향해 분홍빛 물감으로 물들이며 위로 거침없이 올라간다. 그러다가 한여름엔 진한 녹음이 신음하듯, 생명의 절정을 만끽하다가 가을되면 단풍이 정상에서 울긋불긋 물들이며 내려와서, 잠시 숨을 멈추고는 봄날 새 생명의 초록빛 싹을 피운다.

오늘도 하루가 어김없이 기우는데, 갑자기 유리창 너머 저녁햇살이 눈부시게 추파를 던지니, 하늬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 해질녘 아름다운 풍경이다.

1) 단풍잎의 회포[丹楓懷抱]. 고영화(高永和)

“바닷가 벼랑에 단풍 하나 떨어지니 어옹(漁翁)이 낚싯줄을 손질해 배를 이끌고 조수 따라 가는데 기이한 바윗돌은 푸른 물을 쏟아낸다.

높은 가을 하늘 따라 망망한 사념(思念), 바다 밖의 단풍 숲, 그 빛깔 이미 그윽하여, 석양빛 환한 선창에서 반갑게 맞아주니, 흥청망청 취한 술에 붉은 홍조가 화려하게 빛나네.

며칠부터 세찬 바람 불어와 자욱이 비 내리더니, 비단 무늬 일천 숲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다시 중턱으로 오더니만, 이젠 온 산 가득 가을빛을 거두었다.

가을철 경물 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멋진 시구들이라, 흩어진 오색단풍 모아 푸른 바다에 띄워 보내보아도 어찌 소년 시절 풍류와 똑같으리오.

가을 산과 바다에 몰아치는 암담한 마음, 가을 풍경 저 멀리 끝없는 운무(雲霧), 어찌 견딜까? 처창(凄愴)한 가을 기분을 같이 할 벗이, 갈수록 어디 있으랴만....

바람 일어 붉은 홍엽(紅葉) 팔락이고 잔잔히 파도 이는 수면에 토닥토닥 빗방울 두드리니 향긋한 껄티(그루터기)냄새에 담긴 단풍잎에다 느슨하게 탁주잔이나 기울여보세.

산에는 단청(丹靑) 들어 층층이 비단인데 바다의 어룡들은 가을 물에 싸늘하고, 붉은 산 푸른 바다에 즐길 만한 단풍과 국화, 눈에 가득 가을일세.

소슬한 늦가을 풍림(楓林), 해는 짧고 높은 하늘엔 또 낙엽풍이 불어 대니 푸르름 듬성한 건 문밖의 동백이요, 한창 붉은 건 물가의 단풍이라, 한가히 흰 모래에 노니는 갈매기를 헤아리니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 아니던가?

석양빛이 아양 떠는 낙엽 진 저문 날에, 비단그물 깔아 놓은 단풍 숲이 뻐기는데, 시냇물에 잠긴 오색상림(五色霜林) 붉은 노을 질투하네.

단풍잎과 흰 국화가 아롱다롱 섞여 있는 해변의 모래톱엔, 썰물에 드러난 모래 반짝여 가을빛이 차가워라. 추깡엔 물이 깊어 배를 댈 만한지? 해질녘의 배 한 척이 물굽이 따라 돌아오는데 석양에 햇살비친 단풍(丹楓) 향기 새롭더라.“

◯ 단풍이 붉은 노을을 일으키네[丹楓起紅霞] 고영화(高永和)

霜林何五色 어찌 서리 맞은 숲이 오색으로 변한

楓林披錦遐 단풍 숲에, 비단옷을 저 멀리 펼쳐 놓았나.

海方傷心歌 바닷가에 상심의 노래 울리니

楓水起紅霞 물속의 단풍잎이 붉은 노을을 일으킨다.

秋風紅葉飛 가을바람에 붉은 단풍이 휘날리고

葉紅於春花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어서,

欲寫畵未工 그림을 그리려 해도 표현을 못하니

斜陽暫交加 석양이 잠시 동안 서로를 비춰주네.

2) 붉은 단풍잎[紅葉]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귀양살이 中에.

霜露醲於酒 서리와 이슬 내려 술 더욱 진해지니

楓林醉色紅 단풍나무 숲이 낯을 붉혀 취하네.

蕭條愁客鬢 시름겨운 나그네 귀밑머리 쓸쓸한데

白髮生秋風 백발이 가을바람을 일으킨다.

거제도 늦가을에 서리와 이슬 내리니 온통 오색 물감으로 칠한 듯, 단풍이 붉게 누렇게 물들었다. 저 계룡산이 맑게 드러나,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나부낀다.

선생의 귀밑머리 하얀 털도 가을바람 타고 휘날리니, 고향생각 간절하고 귀양살이 쓸쓸하다. 붉은 단풍잎(紅葉)은 홍군(紅裙)이라고도 하는데, 뜻은 붉은색 치마로, 미녀(美女)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단풍잎을 형용한 말로 더 널리 쓰인다.

김진규 선생은 1689년부터 1694년까지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상 터에서 귀양살이 했다. 위 시는 당시 늦가을 거제도 계룡산에 붉게 물든 단풍 숲을 보고 읊조린 5언절구이다.

▲ 거제시 구천동 단풍

◯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인로는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 또한 뛰어나 초서(草書)와 예서(隸書)가 특출하였다.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흠모하여 죽림고회란 모임을 만들어 시와 술을 즐겼다.

그가 즐겨 쓰던 초서를 족자에다가 ‘단풍잎 사랑이야기’, 즉 당 희종(唐僖宗) 때 ‘홍엽제시(紅葉題詩)’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3) 초서 족자에 적다[題草書簇子] / 이인로(李仁老 1152~1220)

紅葉題詩出鳳城 단풍잎에 시를 써서 궁성(宮城)에서 내보내니

淚痕和墨尙分明 눈물이 먹에 아롱져 더욱 분명하여라.

御溝流水渾無賴 어구의 흐르는 물이야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되지만

漏洩宮娥一片情 궁녀의 한 조각 정을 바깥으로 흘려보냈다네.

고사성어 홍엽제시(紅葉題詩)는 궁녀(宮女)가 가을철의 붉은 잎에 시를 써서 어구(御溝 궁중의 개울)에 띄워 밖으로 흘러 보낸 옛날의 이야기를 두고 지은 것이다.

그 예(例)로는 당나라 때에 궁녀 한씨(韓氏)가 붉은 잎에 시를 써서 개울에 흘려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 시에, “흐르는 물은 왜 이다지도 급한고? 깊은 궁중은 종일토록 한가한데, 은근히 붉은 잎을 부치노니, 잘 가서 인간에 이르러라[流水何太急 深宮盡日閒 慇懃付紅葉 好去到人間].”하였다.

우우가 개울에서 이 시를 읽고 화답하는 시를 역시 붉은 잎에 써서 궁성(宮城) 뒤 개울의 상류에서 궁중으로 띄웠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는데 그 후에 궁녀를 방출(放出)하여 시집보낼 때에, 우우가 마침 한씨(韓氏)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에 붉은 잎을 내보이니, 한씨도 역시 그 붉은 잎을 내놓으면서 시를 짓기를, “한 절의 아름다운 글귀 흐르는 물 따랐으니, 십년동안 시름이 가슴에 가득하였네. 오늘날 봉황과 짝을 이루니, 홍엽이 좋은 중매인 줄 이제야 알겠네[一聯佳句隨流水 十載幽愁滿素懷 今日已成鸞鳳侶 方知紅葉是良媒].”하였다.

4) 홍엽수[紅葉樹] 붉게 물든 단풍나무 / 최치원(崔致遠 857~?)

白雲巖畔立仙姝 흰 구름 바윗가에 선녀가 서있는 듯

一簇煙蘿倚畫圖 한 무더기 우거진 덩굴 그림 같아라.

麗色也知於世有 고운 빛 세상의 존재들을 막아낼 줄 알고

閒情長得似君無 한적한 정은 그대만한 이 다시없으련만

宿妝含露疑垂泣 묵은 화장, 머금은 이슬은 눈물을 흘린 듯하고

醉態迎風欲待扶 바람 맞은 취한 모습 부축받기 기다리는 듯하다

吟對寒林却惆悵 시를 읊으며 차가운 숲 바라보니 쓸쓸하기만 한데

山中猶自辨榮枯 산중에서는 아직도 절로 영고성쇠 분별케 하구나.

5) 붉은 단풍잎[紅葉]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秋霞翦作淺深紅 가을 노을 오려 얕고 깊은 붉은 것을 만들다니

靑女多情巧不窮 청녀(눈과 서리의 여신)는 정도 많고 오묘해라.

點點欲燒殘照外 낙조 밖에서 붉은 잎들 불타는 듯하고

層層如畫亂山中 첩첩한 산속이 층층이 그림 같구나.

數行書字悲心事 마음이 서글퍼서 두어줄 적어보니

幾个牽愁落晚風 켕기던 근심이 저녁바람에 떨어지네.

莫向秋深怨零落 깊은 가을에 잎이 진다 원망하지 말라.

東君應又綴殘叢 동군(春神)이 마땅히 꽃떨기를 이어주려니.

자연은 가을이면 잎이 지고 봄이면 꽃을 피우는 조화의 세계이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온전한 조화를 느껴야 하거늘, 그렇지가 못하다. 허무감이 어느새 가슴속을 파고들어 쉬이 툴툴 털어낼 수가 없다. 인간사는 모순에 차 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또 흘러간다. 서리 갓 내린 어느 가을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을 얻는다.

6) 어부(漁夫)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策策西風紅葉飛 소슬한 가을바람에 단풍잎은 흩날리고

碧波靑嶂繞苔磯 파란 물결 푸른 산은 낚시터를 감쌌네

漁郞不管秋深淺 어부는 가을의 깊고 얕음은 아랑곳 않고

落日孤舟緩棹歸 석양에 외론 배 천천히 노질하여 가누나

7) 붉은 단풍잎[紅葉] / 이산해(李山海 1539~1609)

錦繡粧林日 수놓은 비단으로 숲을 단장하고

猩紅着葉初 핏빛이 처음 잎에 물드는 이때

繁華一年最 번화하기론 일 년 중 제일이라

霜露九秋餘 서리와 이슬 많은 가을이라오.

醉面猜相映 취한 뺨 서로 시샘하듯 비추니

春花愧不如 봄꽃은 아예 비교가 안 되누나

折來簪白髮 꺾어다 백발에 꽂아 보니

猶足詫村閭 그런 대로 마을에서 뽐낼 만하네.

8) 단풍잎을 노래하다[題紅葉] / 김홍욱(金弘郁 1602~1654)

家家棗栗曬簷曦 집집마다 대추와 밤을 처마의 햇살로 말리는

搖落山村九月時 낙엽 지는 산촌의 구월(음력) 가을,

終日園林無一事 종일토록 정원 숲에 아무 일도 없으니

謾將紅葉自題詩 부질없이 제목을 ‘홍엽(紅葉)’이라 붙여 짓노라.

 

9) 붉은 단풍잎[紅葉] / 강백년(姜栢年 1603~1681)

晩林紅葉鏡中明 해질녘 붉게 물든 단풍 숲이 거울 속에서 환하고

濯錦江光造次成 강 빛에 씻은 비단, 어찌 이런 명승지 만드셨나?

還訝此身經錦水 행여 이 몸이 비단 물길을 지나가는지 의아하여

却呼漁叟問溪名 늙은 어부 불러 묻노니 “이름 난 시냇물이냐?”

해질녘 붉은 단풍 숲에 물든 아름다운 오색 물길을 따라 가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혹시 이 시냇물이 이름 난 명승지인지? 어부에게 묻는다. 그리고 문득, ‘계학지욕(溪壑之慾)’이란 사자성어를 떠 올린다.

‘말을 타면 노비를 거느리고 싶은, 끝없는 산골짜기의 욕심을 경계해야한다’는 교훈을 시구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일찍이 강백년(姜栢年)은 부친의 뇌물수수 사건을 겪은 후 젊어서부터 몸을 단정히 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사후인 1695년(숙종 21) 관직 수행 능력이 뛰어나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 덕목을 두루 겸비한 사람에게 주는 청백리에 피선(被選)되었다.

10) 단풍잎을 노래하다[題紅葉]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自憐菲薄質 스스로 허약한 체질을 슬퍼하면서

開落一聽天 피고 짐을 오로지 하늘에 맡겼네.

不學靑松樹 푸른 소나무는 배우지도 않고서

空爭造化權 공연히 조화옹(조물주)의 권능만 다투었구나.

11) 붉은 단풍잎[紅葉] / 조인영(趙寅永 1782~1850)

楓林吸露露淸泠 단풍나무 숲이 이슬을 머금으니 맑고 깨끗한데

葉葉如花半帶靑 꽃 같은 잎마다 푸른빛 반쯤 둘렀네.

肯與夭桃爭主世 꼽게 핀 복사꽃과 함께 세상의 주인인양 타투니

秖從幽菊各分庭 때마침 그윽한 국화가 각각 뜰에 나뉘어 조용히 피는구나.

丹砂道客爐添候 붉은 비단이 길 가는 나그네에게 때마침 화롯불 밝히고

紅玉佳人夢未醒 붉은 구슬, 아름다운 여인, 아직도 꿈속인 듯 하여라.

秋入吳江吹不落 오강(吳江)에 가을바람 불어도 낙엽이 떨어지질 않으니

石蹊猶俟小車停 돌길에서 다만 작은 수레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12) 붉은 단풍잎[紅葉] / 허훈(許薰 1836~1907)

堂前曾種鴈來紅 대청 앞에 일찍이 안래홍(雁來紅)을 심었는데

鴈不來時紅已空 이미 붉은 빛이 사라졌는데도 기러기가 오질 않네.

惟有酣霜千萬樹 다만 된서리가 수많은 나무에 내려

如霞如綉映簾櫳 노을처럼 수놓은 듯, 발을 친 창을 비춘다.

[주] 안래홍(雁來紅) : 비름과에 딸린 한해살이풀. 잎은 촘촘히 어긋맞게 나며, 긴 길둥근꼴의 바소꼴 또는 줄꼴인데, 노랑, 빨강의 얼룩무늬가 있음. 8∼9월에 엷은 녹색 또는 누르스름한 잔 꽃이 잎 사이에 빽빽하게 핌. 열대 아시아 원산으로 정원에 심음. 색비름

13) 홍엽시(紅葉詩) / 이색(李穡 1328~1396)

病餘秋色忽相干 병중에 가을빛이 갑자기 드러나니

紅葉吟來下字難 단풍잎을 읊자 해도 글자 놓기 어려워라

雲斷夕陽低塞外 석양에 끊긴 구름은 변새 밖에 나직하고

風狂野燒上林端 거센 바람 탄 빨간 단풍 숲 끝까지 타올랐네

蕭蕭鞭影長亭遠 채찍 그림자 쓸쓸해라 역참은 멀기만 하고

耿耿燈華小屋寒 등잔불은 반짝이어라 작은 집은 썰렁한데

更遣雁行天際去 또 기러기 떼 쓸쓸히 하늘가를 날아가니

誰能鼻孔不生酸 그 누가 콧구멍이 시큰하지 않을 수 있나

 

14) 가을장마[秋霖]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秋霖人自絶 가을장마라 사람 절로 끊이니

柴戶不曾開 사립문 일찍이 열지를 않네.

籬落堆紅葉 울 밑엔 붉은 잎이 수북 쌓이고

庭除長綠苔 뜰에는 푸른 이끼 자랐군 그래

鳥寒相並宿 새들도 추위 느껴 맞대고 자고

鴈濕遠飛來 기러기도 젖어서 멀리 날아오누나.

寂寞悲吾道 슬프다 우리 도는 왜 적막한고.

惟應泥酒杯 술에 아니 빠지고 어찌하리까.

15) 단풍을 읊다. 절구[詠紅葉絶句]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側壁欹嵒到半天 기울어진 암벽이 중천에 높이 솟아

蒼鼯欲度絶攀緣 날다람쥐 건너려도 의지할 게 전혀 없네

誰將颯沓臙脂筆 어느 누가 빨간 연지 듬뿍 묻은 붓으로

細點西施翠黛邊 서시의 눈썹 가에 아름답게 찍어놨나

盤陀老石飽陰霏 크고 넓은 바윗돌 구름 기운 배었는데

風蔓幽幽土蘚肥 뻗은 덩굴 그윽하고 이끼 자라 두툼하다

坐愛一張紅傘子 한 장의 붉은 일산 밑에 앉아 즐기노니

夕陽輝映滿人衣 석양에 빛난 빛이 사람 옷에 가득하네

上枝紅艶下枝黃 윗가지는 붉어 곱고 아랫가지 누르스름

黃暈蕭條病裏妝 병중의 단장인가 누런 모습 쓸쓸하다

不是天心慳雨露 하늘이 단비 이슬 아낀 것이 아니라

無緣弱質冒風霜 약한 가지 모진 풍상 견디지를 못해서지

秋草離離古澗邊 해묵은 도랑가에 시들어진 가을풀

一枝孤艶更堪憐 외론 꽃가지 하나 사랑겹기 그지없네

且休折向雲臺去 여보게들 이걸 꺾어 운대 향해 가지 마소

紫錦紅羅滿眼前 자줏빛에 붉은 비단 눈앞에 널렸거니

蝶翅翩(覀仓羽)燕尾尖 둥글넓적 나비 나래 뾰족한 제비 꼬리

交刀剪出巧纖纖 온갖 모양 가위로 섬세하게 오려낸 듯

雖令葉葉成如許 잎사귀마다 이처럼 기묘함을 이뤘으나

那得紅霜萬斛霑 일만 섬 붉은 서리로 어찌하며 물들일꼬.

16) 가을날 배를 띄운다[秋日泛舟] / 오한경(吳漢卿 1242∼1314)

海霧晴猶暗 바다 안개는 개여도 오히려 어두운데

江風晩更斜 강바람은 늦게 다시 비끼누나.

滿汀紅葉亂 물가에 가득히 단풍잎이 흩어진 것을

疑是泛桃花 복사꽃이 떠 오는가 의심하였네.

水鳥浮還沒 물새는 떴다가 도리어 잠기는데

沙洲直復斜 사주는 곧다가 비뚤었다가 하네.

傍舟山展畫 배 가까이 산이 그림을 펼치고

迎棹浪生花 돛대를 맞아 물결이 꽃을 만드네.

[주] 복사꽃이 떠 오는가 :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고사(故事)를 연상한 것인데, “어부(漁父)가 냇물에 복사꽃이 떠 오는 것을 보고 물을 따라 올라가서 선경(仙境)을 발견하였다.”한다.

◯ 가을은 살아 온 삶에 대한, 진실의 깨달음을 성찰하고 발견하는 과정의 계절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고, 또한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절망의 상황을 이겨내고, 맞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의 정신적 의지에 따라 삶의 빛깔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존재와 삶이 지니는 가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살고자 희망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또한 삶을 수용하는 단계가 아니라 자신의 색채로 채색하기 위해 희망차게 걸어가는 인간의 자유와 존귀함을 알려주고 있다. 운명이 나에게 다가오면, 그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삶이 되도록 만든다.

이태 것 자신의 도도함과 고고함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다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고은의 시 ‘그 꽃’이라는 시는 단, 세 줄의 매우 짧은 시이지만, 그 속에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누구나 젊고, 잘 나갈 때는 앞만 보며 달려간다.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이건 아니다’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비로소 깨닫는다.

일반적으로 봄날의 화폭은 “밝고 생동감 있는 수채화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저문 가을은 “몇 겹으로 덧칠한 유화체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에 오색영롱(五色玲瓏)의 영광과 질곡, 회한이 질감에 담겨있어, 삶의 성찰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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