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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방문 남명(南冥) 조식(曺植)
거제도방문 남명(南冥) 조식(曺植)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12.0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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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은 조선중기의 학자이며,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여,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외가인 삼가현(경남 합천군 일대) 토동에서 태어난, 경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남명의 학문 세계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서 나타나듯 다분히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던 퇴계의 성리학과는 다르게, 의리(義理)와 의기(義氣)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현실과 정치 모순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추구했다.

이황의 성리학이 순수한 사고나 이성만으로 사물을 인식하려는 ‘사변철학(思辨哲學)’에 가까웠다면, 조식의 성리학은 현실을 인식한 ‘사회비판철학(社會批判哲學)’에 가까웠다.

유학을 이념으로 하는 왕조국가의 군신(君臣) 관계는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의 관계이다. 그러나 그는 임금을 향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직언(直言)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명종 母)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을 “선왕(중종)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명종)”이라 지칭했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속의 이욕(利慾)에 초탈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이렇듯 권력의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현실에 당당하게 맞섰던 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글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민암부(民巖賦)’이다. 이 글은 제목에서부터 불경(不敬)하고 불충(不忠)한 것이다. 민암(民巖)이란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민암부’에서 남명은 임금의 덕목이 백성을 아끼고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이 나라를 엎을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을 주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고 일제강점기 時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나라의 진정한 선비정신은 남명선생의 철학과 사상으로부터 그 바탕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와 함께 출범한 명종대(1545~1567)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외척(外戚),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신료들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서하자 이복동생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명종을 대신하여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정사를 처리하고, 그녀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로부터 외척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척신정치(戚臣政治)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윤원형 등은 권력을 배경으로 부정 축재를 자행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러 엄청난 재물을 쌓았다.

먼저 토지를 확보하려고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매입이나 개간 등 합법적인 수단 말고도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553년(명종 8년)까지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이후에도 윤원형 등과 협력하여 정사(政事)에 지속적으로 간여하였다.

1553년 20살이 된 명종은 친정(親政)에 나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명종이 취했던 방식 또한 다른 외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妃) 심씨 집안의 인척 심통원(沈通源)과 이량(李樑) 등을 중용하여 윤원형을 견제했다. 훗날 이량의 권력이 너무 커지자 이번에는 자신의 처남 심의겸(沈義謙) 등이 나서 이량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이래저래 척신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었다. 척신정치 아래서 갖가지 모순들이 터져 나왔다. 척신들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여 조정 안팎의 관직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심었다. 지방 수령이나 변방 방어를 책임지는 병사(兵使), 수사(水使)들은 척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청탁했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한편 거제도의 유헌(游軒) 정황(丁熿) 선생은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 '선왕의 신하 죽이기'로 파직 당하여 잠시 고향에 살다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 발생, 1547년 경상도 곤양으로 처음 유배 갔다가, 1548년부터 거제도로 이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유헌 선생 나이 42세(四十二歲) 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한 척신정치의 폐단과 관리들의 부정축재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문하는 격렬한 상소를 작성하였는데, 때마침 합천의 남명조식이 거제도로 찾아왔다가 이를 읽어보고, “귀양살이하는 신세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면 목숨을 보전키 어렵다”며 극구 만류하여 중지하였다.

이후 1555년(乙卯年) 남명 선생은 명종(明宗)이 그를 단성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이른바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내용에서, 유헌 정황 선생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명종 왕을 “선왕(중종)의 한 외로운 어린 아들”일 뿐이라고 부르고, 또한 사화(士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던 살아있는 권력 문정왕후를 향해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을묘사직소’에 적고 있다.

이는 정황 선생의 영향을 받은 글로써 얼마나 피맺힌 통분(痛憤)이 컸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정황(丁熿) 선생은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도 2번이나 권력에 기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로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기 직전, 윤원형(尹元衡)이 윤춘년(尹春年)을 밤중에 은밀히 선생에게 보내어 화복(禍福)으로 꾀면서 한 번 만나주기를 간곡히 요구하였으나, 공이 끝내 응하지 않았다.

또한 선생이 1548년 늦가을 거제도(島中)에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도 어떤 사람이 윤원형의 지시를 받고 와 은근한 정을 펴면서, 공의 말 한마디를 얻어 가지고 돌아가 윤원형에게 보고하도록 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은 죽기로써 스스로 맹세하기를 “조석 간에 어명이 내리기를 기다릴 뿐인데, 어찌 감히 서로 누를 끼치겠는가.” 하였으니, 공의 마음가짐이 이렇게 곧고 지조가 확고하였다. [乙巳尹元衡使尹春年乘夜潛來 誘以禍福 懇求一見 公終不應 其在島中 又有人受元衡指 致其慇懃 要得一言以歸報 公以死自誓曰 朝夕待命 豈敢相累 其處心之貞確如此]

유헌 선생은 1560년 음력 7월6일 거제도 배소에서 사망했다. 아들 지(至)와 문인 정염(丁焰)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그 해 10월 남원부 북쪽 원당산 선영 아래 반상(返喪)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 선조왕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상소문으로 관직이 회복되었고 전북 남원시 영천서원(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1553년 조식(曺植) 남명(南冥) 선생은 합천에서, 부인이 거주하는 경남 김해를 방문하였다가 배를 타고 거제도 영등포 나루터에 도착하여, 영등포 만호 신경숙(愼敬叔)의 안내로 거제시 고현동 공설운동장 인근, 정황(丁熿) 선생의 배소를 찾게 된다.

당시 서울에서 내려오는 편지나 물품 등 우편물은 1500년에 새로이 축성∙정비한 오양역을 거쳐 읍치인 고현성에 도착하여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또한 가족과 함께 거제도로 내려온 서울 파견 관리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거제향교가 있는 읍치 고현동에 거주하면서, 각 임지(任地) 즉, 수군진영이나 목장점마소 등을 몇 주 간격으로 다녀오곤 했다.

거제도 장목면 율포 권관 노대유(盧大猷)나 영등포 만호 신경숙(愼敬叔), 만호 이지형(李之亨, 養仲), 구천동 점마소 유지숙에게(兪評事九川點馬所)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던 관리였다.

이들은 고현동에 귀양살이 하면서 거제향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정황 선생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후에 임기가 끝나 서울로 상경한 후에도 서로 간에 안부∙서신을 교환하였다.

이 때 방문한 남명 선생은 거제현령 권이평(權以平, 父 權彬)의 안내로 거제향교와 읍성 고현성 등을 둘러보고 며칠을 보낸 후에 거제 오양역 견내량을 거쳐, 고성 진주를 경유해 합천으로 돌아갔다.

특히 정황 선생은 예학(禮學)에 밝아 남명(南冥)이 1553년 거제도 배소(配所) 계룡산 아래 해산(亥山) 집까지 찾아가 더불어 예(禮)를 논한 일이 있었다.

이보다 앞서, 유헌 선생이 예전에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천 리 먼 경상도 남명 선생과 서로 서신(書信)을 통해, 사귄지가 12년이 지난, 1553년 이날 저녁에야 두 분이 상봉할 수 있었다. 당시 남명 선생 나이가 11살이나 더 많아, 유헌 선생이 예를 갖추어 어른인 ‘장로(丈老)’로 호칭하였다.

남명 선생은 경상도 각지를 유람하시며 문사를 만나고 학문을 연찬∙강론 하시니 유헌 선생께서 그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조선중기 우리나라 평균 사망나이가 약 40세인 점을 감안한다면, 두 분의 상봉 時 남명 53세, 유헌 42세였으니 두 분 다 노인들이었다.

이후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은 1558년(명종13년) 그의 나이 57세 때 두류산(頭流山) 즉 지리산 전체를 유람한 적도 있었다. 특히 남명 선생은 문무(文武)를 두루 갖추고 의리(義理)와 의기(義氣)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또한 직설적이며 단순명쾌한 화법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헌(游軒) 정황(丁熿) 선생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서, 유교의 이념은 예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므로 예학(禮學)을 중시하였으며, 예의 근거를 인간의 본질에 두었다.

이에 예의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예의 정신은 불변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정통 유학자였다. 이러한 두 분의 우정으로 유헌 선생이 사망한 1560년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문하생이 되었다.

두 선생이 거제도에서 시국에 관해 전반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이 해(1553년)는,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親政)에 나섰던 해(年)이다.

유헌 선생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한 척신정치의 폐단과 관리들의 부정축재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문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했는데, 당시 거제도에서 이를 읽어 본 남명 선생이, 내용이 너무 격렬하다 염려하면서 말하길, “수렴청정만 거두었지 실제 권력은 변함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유배자의 처지를 고려해 상소를 거두도록 설득하였고 결국 유헌 선생은 이를 따랐다.

이 상소문은 유헌 선생 사망 후 그의 아들과 문인, 제자들이 수거해 갔다가 <유헌선생집>을 정리∙발간하면서 싣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상소문(上疏文)과 남명 선생과의 시국에 관한 대화가 알려지면, 집안과 문하생 모두가 또 다른 큰 화(禍)를 당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1553년 가을, 두 분이 거제도에서 첫 상봉한 날 저녁에, 예법에 관심이 많았던 유헌 선생이라 그런지 ‘부모상(喪)과 임금의 상(喪)’, 즉 상례(喪禮)에 관해 문답(問答)한 글이 <유헌선생 속집 권지5>에 전해오고 있다. 내용인즉, 부모나 임금이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일반 백성은 3년 시묘(侍墓)살이를 할 형편이 안 되지만, 사대부 양반은 반드시 행해야만 하고, 시묘살이로 기력이 쇠하고 어려우면 형제나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집안의 종을 시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아니 되며 남녀가 함께 시묘살이를 해서도 안된다.

임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씨가 다른 신하에게 맡겨서도 아니 되며, 종친이나 여러 왕자, 또는 부마가 서로 형편을 고려해서 봉사케 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무엇보다도 궁중의 장례절차와 예법에 정통한 유헌 선생이었지만, 남명 선생의 의견을 복응(服膺)하고 기록한 점은 유헌 선생이 남명 선생을 많이 존경하고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거제도에서 만난 두 분은 밤새도록 시국과 학문에 관해 회포를 나누었는데, 아마 생선 안주에 술을 드시며 더불어 거나하게 취했을 것이다.

1558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쓴 ‘유두류록(遊頭流錄)‘편 내용에 의하면, 거제도 정황 선생이 하인을 시켜 지리산을 유람하는 조식 선생께 술과 생선안주를 보낸 사실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1) 남명(南冥)과 유헌(游軒)의 조우(遭遇). 1553년 가을 거제시 고현동 / 고영화(高永和)

嶺南形勝優岐城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형승을 자랑하는 거제도에,

丈老情意來訪程 어르신이 방문한 정과 뜻을 헤아린다.

盛年官吏往來書 젊은 관리시절부터 서신을 주고받았다지만

相逢一醉豈容輕 서로 만나 한 번 취함을 어찌 가벼이 했으랴.

德業相勸優遊適 유헌 선생이 덕업상권하고 우유자적하며

藏修遊息未歸情 학문에 전력해도 돌아갈 수 없지만,

世事莫論士禍後 참혹한 세상의 사화(士禍)를 더 이상 논하진 말자.

却恐危途觸罻坑 험난한 길에서 그물구덩이에 걸려들까 두렵다.

南冥游軒話所思 남명과 유헌이 서로 속마음을 털어 놓는데

魚肴佳醑樽滿盈 물고기 안주에 좋은 술이 동이에 가득하였다.

敬以直內義方外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하며

多事禮法實躬行 세상의 여러 일에는 예법이 있으니 올곧게 행동하여야 한다.“

乙巳喪亂幾家門 을사사화 난리 통에 몇 가문이 남았더냐며

戚臣弊端招說明 척신정치 폐단을 지적하고 설명하면서

示意草疏題時弊 유헌 선생이 시폐(時弊)를 쓴 상소를 보여주니

南溟往見說止征 남명 선생이 보고는 힘써말려 그만두었다네.

 

2) 남명(南冥)과 유헌(游軒) 선생 관련기록

(1) 신흠(申欽 1566∼1628)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유헌 정황 선생전[游軒丁先生傳]’ 내용 중에, “일찍이 상소를 초하고 시폐(時弊)를 극진하게 써서 올리려 하였더니, 조남명(曹南溟)이 보고 중지시켜서 실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유배지에서 몸을 마쳤다.” [嘗草疏極陳時弊 將上 曹南溟往見而止之 不果 遂終于謫所]

(2) 권상하(權尙夏)가 1761년 쓴 <한수재집(寒水齋集)> ‘충간(忠簡) 유헌(游軒) 정공(丁公) 황(熿)의 신도비(神道碑)명 병서’ 내용 중에, “공은 비록 유배 중에 있을 적에도 왕실을 연연하여 차마 무관시하지 못한 나머지, 마침내 소(疏)를 초해서 시사(時事)를 극론하였는데, 남명[南溟 조식(曺植)] 조공(曺公)이 가서 보고 극력 저지함으로써 그 소를 올리지 않고 말았다.” [公雖在放逐中 係戀王室 不忍恝視 遂草疏極論時事 南溟曹公往見力止 不果上]

(3) <유헌선생년보(游軒先生年譜)> 계축년(癸丑年) 1553년 선생 나이 42세(先生四十二歲) 때 기록. / “상소문을 지었으나 올리지는 못하였다. 당시에 선생이 비록 귀양 중에 있었지만 시사(時事)를 가슴 아리게 생각하여 상소문을 지어서 지극히 논란하고 곧 올리고자 했는데, 남명 조식 공이 가서 보고는, 힘써 말려 상소를 비록 올리지는 못했지만 왕실에 대한 정성스러운 뜻은 일찍 잊은 적이 없었다.” [草疏不果上 時先生雖在流放之中 痛念時事 草疏極論 方欲上進 南冥曹公植往見而力止之 疏雖未上 而惓惓王室之意 未嘗忘焉]

(4) 남명(南冥) 조식(曺植)과의 문답(問答) / 1553년 정황(丁熿) 42세, 거제도 고현동 배소. <유헌선생 속집 권지5>

[ 이달 11일 저녁에 건중(健仲, 조식의 字) 조남명(曺南冥) 장로(丈老)께서 영등포 나루를 거쳐 쓸쓸한 나의 해산(亥山) 집에 이르셨다.

서로 마음(書信)으로 천 리에서 사귄지가 12년이 됨에, 이날 저녁만남은 어떠한 저녁이었더냐. 얼굴을 뵙고 말씀을 나누매, 그렇게 적막한 속에서도 기쁨과 다행함이 어떠하리오.

고루한 처지에 비린(鄙吝)한 인생이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분류로 돌아감이 오래되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시고 큰 공적도 없는 이 사람에게 잡초를 베어 내는 공과 때를 문질러내고 갈아내는 노력이 있다고 생각하셨으니 장로(丈老)의 부지런함이시다. 그 어진 마음이여~ 그 어진 마음이여~

곁에 있던 손님이 장로(丈老)에게 묻기를, “부모의 상을 다함에 조석으로 제물(奠)을 올려 삼년이면 마치는 것은 곧 죽은 이를 산 사람같이 섬기고 사망한 이를 생존한 이와 같이 섬겨서 미루어 옮긴 것이다.

사람이 대현(大賢) 이상으로 인정(人情)과 도리(道理)의 바른 길을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구한 사정으로 거의 변하지 않는 도리를 행하지 않게 됩니다.

3년 전, 효자의 마음이 어찌 성인(聖人)의 제례(制禮)에 범할 수가 있으랴마는 스스로 그 성품이 편벽하게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당에 신주를 모심에 이르렀다.

억지로 풀밭 땅 집에 머물면서 정성을 다하여 그 몸을 바쳐 죽는다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어진 마음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익히고 숭상함이 있는 어진 이와 군자에게서도 그릇된 것을 깨달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재계하는 곳인 무덤 아래에서 남녀가 섞여 거처하는 것은 사람의 예의에 불합(不合)할 뿐만 아니라 신령의 도리에도 더욱 죄송한 것입니다.

주부(主婦)와 버금며느리도 따라가지 아니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늘, 더구나 마땅히 멀리해야할 여종을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맏상주를 따르는 남자 종은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씻는 외에 당에 올라서 식사를 올리고 빗자루를 잡으니 부인 가까이 자리할 때마다 미안하겠지요.

이전부터 평소 내외의 사이가 엄격하게 지냈는데 이로써 지금 바뀌니, 진실로 우리 어버이가 죽었다는 의심을 하게 되어 번민이 긴박합니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였다.

남명(南冥) 장로(丈老)께서 말씀하시길, ”효자가 부모 상(喪)을 당해 음식 맛을 잃고 기력이 저절로 소모되어 소리 내어 슬피 울며(哭泣) 거상(居喪)을 하니 질병이 따라서 생긴다.

그 사이에 노쇠함이 오게 되면 진실로 스스로 거상(居喪)을 마칠 수 없다. 3년 사이에 남자 종을 대신하는 것은 진실로 손님 말과 같다. 부득이 대신하게 할 적에는 자제(子弟)를 쓰는 것이 옳다. 자제가 없으면 집안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하셨다.

유헌(游軒)이 말하길, ”일반사람이라면 그 가르침을 듣겠습니다만 군신(君臣)의 거상(居喪, 除)도 부자의 상(喪)처럼 한결같이 해야 합니까? 가로되, 제가(齊家)를 하고 치국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치국의 도리가 어찌 제가와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 능(陵)에 대왕과 왕비가 같은 언덕에 있는 것도 있고 또 왕비 홀로 무덤을 한 것도 있는데 전각 내(殿內)의 평상(平床)이나 침대(寢臺) 등의 여러 기구 및 제사 물건 종류들을 참봉(參奉)이 지키는 종과 더불어 그 일을 집행하고 있으니 이전에 나의 모친이 불안(不安)한 것 같았으니 하물며 임금의 모친인들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로(丈老)께서 말씀하시길, “여러 능(陵)에 일이 있음에 다른 성씨를 가진 신하를 사용하는 것은 과연 강론을 아니 했음이다. 그러나 왕자와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 및 종친의 복이 다하지 아니한 자는 이로써 다른 성씨의 신하의 소원(疎遠) 즉, 서먹서먹한 신하를 대신함이 대체로 옳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장로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은 집안이나 나라에 시행할 수가 있는 것으로, 그 외에 복응(服膺) 즉,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어 빠뜨리지 아니하여야하며 만만히 말할 바가 아니다. ]

 

(5) 1553년 거제도 남명∙유헌 선생과 함께한 분들에 관한 시편 / 정황(丁熿)

① 우연히 신경숙에게 써 부치다[偶書奇愼敬叔]

我愛永登君 내가 아끼는 영등포 만호는

早知臣子職 일찍이 신하와 자식 된 자의 직분을 알았다.

移來自乃庭 그대의 집안에서 옮겨 왔는데

頼及矜諸國 스스로 지원하니 이 고장의 자랑이다.

籌策劣前人 계책은 선현들보다 못하지만

城池謀後式 성지(城池)를 모색함은 후인의 법식이 되었다.

矛盾可奈何 창과 방패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지만

事業身歸潔 공적인 일에 몸을 깨끗이 하는데 기준을 둬라.

② 영등포 귤당에서 ‘閒’자 운을 얻어 신경숙에게 주다[永登浦橘堂得閒字韻贈愼敬叔].

愛橘新堂逈 어여쁜 귤, 새 집이 뛰어난데

前湖沈碧山 앞 호수에 잠긴 푸른 산,

島夷長笑裏 섬 오랑캐 긴 웃음 속에

王室赤心間 왕실의 충심을 엿보네.

夜桂落淸鼻 계수나무는 밤에 맑은 향기 두르고

朝曦承好顔 아침 햇살이 좋은 기운을 얼굴에 비추네.

談兵得餘暇 국방을 얘기하다 남은 겨를에

把酒任便閒 술을 들고 편히 한가로움 느낀다.

③ 신경숙(인)이 달밤에 찾아와[愼敬叔寅 月下見訪]

寒宵明月下 차가운 밤 밝은 달빛 아래

有意肯相尋 뜻이 있으니 즐거이 서로를 찾는구나.

死菊無生氣 국화는 이미 죽어 생기가 없고

霜篁自凍林 언 숲에는 서리 맞은 대나무

誰言一陽復 누가 일 양(陽)이 회복됐다 말하는가?

遮莫三更侵 엄호하여 삼경에 침범 못하게 하라.

盃至須看底 술잔은 필히 다 비워야 하는데

興闌豈慢吟 흥취는 어찌 시 읊는 일에 그치랴.

情多休易起 정이 많아 아름다움이 쉬이 일어나고

燭盡尙專心 촛불이 다함에 오히려 전심(專心)이 된다.

更把十年事 다시 10년의 일을 파악해보니

天涯鯨浪深 하늘가 큰 물결만 깊겠구나.

[주1] 일양복(一陽復) : 일양생(一陽生).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1년 중 하루해가 가장 짧은 동지를 옛 사람들은 一陽이 生하도다 하여 경사스럽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함을 기뻐한 것이다.

[주2] 전심치지(專心致之) : 딴 생각 없이 오로지 그 일에만 힘씀

④ 칠천도에 늦게 정박하다[漆川島晩泊]

寓宿永登浦 영등포에서 잠깐 묵는데

浦公能愛賢 영등포 공은 어진 이를 사랑한다.

樓船載厚意 누선에 도타운 마음 실으니

雲日低高天 구름 속 태양이 높은 하늘에 머무네.

棹去馬山後 마산을 뒤로하고 노 저어 가는데

風便烏壤前 오양 앞바다에서 순풍을 만났다.

不降漆川島 칠천도에 상륙하기 어려워도

堪看鯨濤邊 큰 물결 언저리 참 볼만 하구나.

⑤ 신경숙이 서울로 돌아감을 전송하며[送愼敬叔歸京]

出宿古城曲 옛 성의 모퉁이에 나와 숙박하고

送君千里京 그대를 천 리 서울로 보낸다.

春宵苦不長 봄밤은 괴롭게도 길지 않아서

一場話短檠 등잔불 아래 대화는 짧았다.

深情共四年 깊은 정을 갖고 함께한 4년

奈此忙歸程 어찌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바쁘더냐.

有酒不敢斟 술을 감히 따르지도 못하고

無語留君行 그대의 가는 걸음에 머물라 말을 못했다.

撩亂百花間 요란한 일백 꽃송이 사이에

去住蠻海橫 가고 오는 남해 바다가 비껴있네.

⑥ 율포 권관 노대유를 보내며[送栗浦盧大猷]

栗浦權管盧大猷 율포 권관 노대유와

三年死生共腥陬 3년 동안 비린내 나는 바닷가에서 생사를 같이 했다.

如今去住無邊思 이제는 떠나니 남아있는 이에게 끝없는 생각날 뿐,

天地中間獨上樓 천지 중간에서 홀로 누각에 오른다.

(6) 유두류록[遊頭流錄]. /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58년 명종13년 57세 때, 5월 10일부터 16일간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에 올라 적은 유람기 중에, 유헌 정황 선생이 거제도에서 술과 말린 생선을 지리산까지 보낸 글이다.

“1558년 5월 18일. 산길이 젖어 미끄러워 불일암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나 신응사로 들어가지 못하여 쌍계사에 그대로 있었다.

호남 순변사(湖南巡邊使) 남치근(南致勤)이 이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는데, 종사관의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종 청룡(靑龍)과 사인(舍人) 계회(季晦, 정황의 字) 정황(丁璜)의 종(奴)이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인사를 했다.

신응사 지임인 윤의(允誼)가 와서 인사를 했다. 내 동생이 타던 말이 병이 나서 접천(蝶川) 밖에 사는 진(塵)이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돌보도록 부탁하였다.

저녁에 우옹과 함께 뒤채 서쪽에 있는 방장(方丈)의 방에서 함께 잤다.” [十八日 因山路濕 未得上佛日 溪水漲 未得入神凝 留在 湖南巡邊使南致勤 致酒食於寅叔 爲從事之父也 河進士宗岳奴靑龍 丁舍人季晦奴 俱以酒鱗來謁 神凝持任允誼來見 舍弟所騎馬病 蝶川外有人塵其名者 付以調養 夕與愚翁 共宿後殿之西方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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