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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단야장(晝短夜長) 동짓날
주단야장(晝短夜長) 동짓날
  • 거제시민뉴스
  • 승인 2014.12.1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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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冬至日, 亞歲)은 대설과 소한 사이에 오는 24절기의 하나로 북반구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지구가 23.5° 기울어진 자전축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기 때문에, 태양열을 받는 양이 달라지면서 계절의 변화가 생기는데,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은 날이 동짓날이다.

1년 24절기 中, 입춘으로부터 22번째 절기인 동지(冬至)는 양력 12월 22일경이고 추위가 점차 심해지기 시작한다.

이날은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누어 먹고, 집안 곳곳에 팥물을 뿌려 악귀를 쫓았다. 또한 새 달력을 만들어 걸었으며, 뱀 사(蛇)자가 씌어 진 부적을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여 놓기도 했다.

이날 날씨가 따뜻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고, 눈이 많이 오고 추우면 풍년이 들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한편, 동지팥죽을 끓이고 여기에다 찹쌀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이는데, 단자는 새알만한 크기로 하기 때문에 새알심(옹심이)이라 부른다.

거제도에서는 동짓날 새알을 나이만큼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여, 동생들과 팥죽새알을 더 먹으려고 다투기도 했다.

또한 동지의 절입 시간에 맞춰, 푹 고은 팥물과 촛불을 켜놓고 삼신(三神)·성주(聖主)∙조상(祖上)께 빌고, 모든 병과 악귀를 쫓기 위해 솔잎이나 숟가락으로 팥물을 집안 삽짝과 구세, 장독대, 구석진 담벼락과 마당 등에 뿌렸고 동네 어귀와 바닷가 뱃전에도 뿌렸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 동지가 음력으로 상순에 든 애기동지이다. 거제도는 집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애기동지가 든 동짓날에는 팥죽 대신에 팥밥이나 시루떡을 해 먹었다.

40여년 前 아양∙아주 동네에서는, 한 자쯤 되는 오색헝겊을 묶어 장독대나 부뚜막에 달아놓고는, 팥죽과 생수를 떠 올려놓고 두 손 모아 양기(陽氣)의 발현(發現)와 겨울 풍신(風神)에게 빈 후에 오색헝겊을 소지(燒紙)처럼 태워 허공으로 날리기도 했다. 제를 올리는 생수는 마을마다 지정되어 있는 ‘할만네’ 우물에서 반드시 떠 왔다.

팥죽의 기원은 6세기 중기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기록되어 전하는 바,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유입되어 신라시대부터 태양신을 숭배하고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행위로 시작되었고, 또한 고려시대 학자 이곡(李穀 1298~1351)과 이색(李穡 1328~1396) 선생이 ‘동지팥죽’에 대한 한시를 여러 편 전하고 있으니, 당시 고려시대에는 일반 백성들도 동짓날 팥죽을 먹으며 잡귀를 쫓고 건강과 장수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시대에는 흉년이 자주 들어 일반백성이 동지팥죽을 끓어먹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형편이 나은 집에서 많이 쑤어 이웃집과 나누어 먹었다.

또한 우리나라 설화 중에는, 동짓날 부처님이나 문수보살이 캄캄한 새벽에 절에서 민가로 내려와 팥죽을 얻어먹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 옛날 국가적인 종교의식이었던 불교 팔관회가 동짓날을 전후해서 대부분 개최했는데, 하루 오전 중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먹고 마시지 않으며 마음의 부정(不淨)을 밝히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더불어 육재일(六齋日)에 팔계를 지녀서 복덕(福德)을 닦는 유래와, 악귀(惡鬼)를 막는 동지팥죽 풍속에 의거하여, 민간에서 이런 일들이 혼용되어 전해진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다음은 출가한 딸 내외가 동짓날 친정집에 팥죽을 얻어먹으려고 와서, 딸이 새알심과 수제비는 남편(사위) 그릇에 몽땅 다 담으니 장인이 화가 나서 부른 민요이다.

“퐁땅퐁땅 할수제비 / 사위상에 다올랐네 / 요놈의 할미 어디가고 / 딸에게 동지를 왜 매꼈노.”

조선 후기 추담(秋潭) 남석하(南碩夏  1773~1853)가 제작한 총 222구의 장편가사 <백발가>내용 中, 동짓날 풍속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동짓달 동지 좋은 시절 / 계절 따라 새 해 시작 / 집집마다 팥죽으로 / 액을 쫓는 소년들아~ / 검은 머리 백발 되면 / 액을 쫓기 멀어진다.”

태음태양력으로 세시풍속을 형성시켜,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1년 중 밤이 가장 긴 이날부터 움츠렸던 땅속 양기가 다시 살아난다고 봤기에 만물이 회생하는 날이요, ‘태양탄생일’로 여겼으니 새해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당(唐)의 선명력을 그대로 썼으며, 충선왕 원년(1309년)에 와서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뀔 때까지 선명력을 사용하였다.

이로 보아 충선왕 이전까지는 동지를 설로 지냈을 것이다. 옛날에는 동짓날 관상감(觀象監)에서 달력을 만들어 모든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을 ‘동지력’이라 불렀다.

궁중에서는 원단(元旦)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축일로 생각하여 동짓날 군신(君臣)과 왕세자(王世子)가 모여 잔치를 하는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여 이날을 축하하였고, 지방의 관원(官員)들은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세시풍속에 관한 책 『동국세시기』와 6세기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바보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니, 붉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서 그를 물리친다.”라고 적혀 있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 행위의 일종이다. 이처럼 붉은 팥은 옛날부터 벽사(辟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모든 잡귀를 쫓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요즈음도 이러한 풍습이 이어져 고사를 지낼 때에는 팥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사민월령(四民月令)》에 “근고(近古)에 부인들이 늘 동짓날이 되면 시부모에게 신발과 버선을 바치곤[獻履襪] 하였다.”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새 버선을 지어 복을 담아 바치는 ‘풍정(豊呈)’이라는 습속이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해를 밟는다는 뜻으로 장수를 축원했던 것이다. 음력 10월 소춘(小春)은 《초학기(初學記)》에서 “겨울철에 양기(陽氣)가 발동하면서 만물이 귀의할 곳을 얻게 되는바, 그 기운이 봄처럼 따뜻하게 되기 때문에 소춘(小春) 혹은 소양춘(小陽春)이라고 한다.”하였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절후(節候)를 살피는 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태워 재로 만든 뒤 그것을 각각 율려(律呂)에 해당되는 여섯 개의 옥관(玉琯) 내단(內端)에다 넣어 두면 그 절후에 맞춰 재가 날아가는 바, 동지에는 황종(黃鍾) 율관(律管)의 재가 난다고 한다.

궁중의 여인들이 일하는 작업의 양을 가지고 낮 시간의 장단(長短)을 가늠한 데에서 온 말로, 동지 뒤에는 점점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바느질하는 일이 한층 더 늘어났다.”를 첨선(添線)으로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오색실 자수가 날로 많아지고 갈대 재를 불어 봄이 언제 올지 알아본다.[刺繡五紋添弱線 吹葭六琯動飛灰]”라는 구절이 있다.

조정에서는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기도 했는데, 『동국세시기』11월조에 제주도에서 귤, 유자, 감귤을 진상하는 일을 적고 있다.

이 귤들을 종묘에 진상하고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준다. 탐라의 성주가 이를 바칠 때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답습하여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귤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과거의 이름을 감제(柑製)라 했다.

 

1) 동지팥죽[冬至豆粥] 고영화(高永和)

陰陽妙回旋 음양이 오묘하여 돌고 돌다가

至日新開天 동짓날에 하늘이 새로이 열리니

陽生始長晝 양기가 처음 생겨나 낮이 길어지는데

寒波大寒聯 한파(寒波)는 대한까지 이어진다네.

鄕風作豆粥 시골 풍속에 팥죽을 쑤어 먹으면

萬物太平年 만물이 태평한 해가 되고

家家豆粥濃 집집마다 팥죽이 붉게 짙으면

疫鬼防未然 미연에 역귀를 방지함이다.

海曲冬至日 동짓날 바닷가 외진 곳,

煮豆晨粥焉 콩을 삶아 팥죽을 먹는 아침에

兄弟爭食蛋 형제는 다투듯 새알심을 먹어도

友愛無旁邊 동기간의 정(情)은 가이없어라.

豆粥椒醪延 팥죽과 초주(椒酒)를 늘여놓고

獻壽家長前 가장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것은

洗盡陰邪潤 음사(陰邪)를 다 씻어내고 윤택하게 되어

新歲無私偏 새해에는 사심과 편향됨 없기를....

[주1] 초주(椒酒) : 초주는 산초로 빚은 술을 가리키는데, 옛날에 신년 초하루가 되면 이 술을 가장(家長)에게 올려 헌수(獻壽)하던 풍속이 있었던바, 동지 또한 신년과 같이 초주를 빚어 마셨던 데서 온 말이다.

[주2] 음사(陰邪) : 옛날 풍속에 동짓날 팥죽빛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특히 팥죽에는 음귀(陰鬼)를 몰아내는 효험이 있다고 여겨 집안 곳곳에 팥죽을 담아 놓았다가 먹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3] 무사무편(無私無偏) : 사심(私心)이나 편파(偏頗)됨이 없다는 뜻으로, 매우 공평(公平)함을 이르는 말.

2) 동지[冬至] / 정황(丁熿) 五言古詩. 1553년경 거제시 고현동 배소에서.

無陽月曰陽 음력 10월을 이르되, "양기가 없다"하는데

況玆一陽生 (동지부터는) 더군다나 양기가 나온다네

碩果未見食 큰 과실을 아직 먹는 걸 보지 못했는데도

厥理有復萌 그것을 다스려 다시 싹이 트게 되었다.

地道不可塞 땅의 도리를 막히게 할 수 없고

天行必終亨 하늘의 운행은 반드시 형통한다네.

窮上卽反下 위에서 다하면 곧 아래로 돌아오고

可見天地情 천지의 진리를 가히 드러낸다.

先王以閉關 선왕이 동짓날 관문 닫게 하니

寂然雷未聲 적연하여 우레 소리도 없었다.

於姤却施命 구쾌(姤卦)가 도리어 명령을 베풀어

扶抑尙虛盈 비고 가득 찬 것을 도와주고 억누른다.

[주1] 무양월(無陽月) : 음력 10월의 이칭으로 주역 괘(掛)상으로 무양지월(無陽之月)이다. 음 10월은 볕은 가고 그늘의 달(陽盡陰月)인 때문에 옛 선비들이 이 무양지월을 소춘(小春)이라고 불렀다. 양(陽)은 동지(冬至)에 시작돼 이듬해 음력5월에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9월(戌月)에 양(陽)이 이울어진다. 곧 이 양(陽)이 없는 달을 옛 한자 문화권 선비들은 소춘(小春, 음력 10월) 이라고 명명했다.

[주2] 일양생(一陽生) :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1년 중 하루해가 가장 짧은 동지를 옛 사람들은 一陽이 生하도다 하여 경사스럽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다시 해가 길어지기 시작함을 기뻐한 것이다.

[주3] 선왕이폐관(先王以閉關) : 《주역(周易)》 복괘(復卦) 상사(象辭)에 “선왕이 복괘를 보고서, 동짓날에는 관문을 닫게 하고, 행상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며, 임금 자신은 지방을 순행하지 않는 것으로 경계를 삼았다.[先王 以 至日閉關 商旅不行 后不省方]” 하였는데, 이는 땅속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지극히 작은 하나의 양기(陽氣)를 보전하려는 경건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주4] 구쾌(姤卦) : 64괘의 42번째 괘, 음이 아주 강한 때이다. 구(姤)는 ‘만나다’라는 뜻으로 『단전(彖傳)』에서는 ‘유순한 음효가 강건(剛健)한 양효를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구괘는 12월 소식괘 중의 하나로서, 4월괘인 건괘(乾卦) 다음인 5월괘이다. 순양괘인 건괘에서부터 음효 하나가 생겨나서 음과 양이 처음으로 만나는 단계이기 때문에 ‘구(姤)’라고 이름을 붙였다.

유헌(游軒) 정황(丁熿) 선생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서, 유교의 이념은 예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므로 예학(禮學)을 중시하였으며, 예의 근거를 인간의 본질에 두었다.

이에 예의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예의 정신은 불변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하여 선생은 거제도에서 절기마다 예를 갖추었고 거제유생들에게 유교적 도(道)와 예법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하셨다.

 

3) 동짓날 계룡산 초가 암자에서 제관으로 밤을 지새다.[冬至日 齋宿于鷄龍草庵] 이튿날 15일 중종대왕 제삿날이라 거제향교 훈도 김급 외 여러 사람에게 써서 보이다[翌日十五 卽中宗大王諱辰也 書示金伋諸人辛亥] 1551년. / 정황(丁熿) 거제시 고현동.

至月至日鷄龍寺 동짓달 동지날 계룡사(거제시 신현읍 계룡사)에서

高陽北望暗銷魂 정오 한낮 북쪽을 바라보니 은근히 사람 혼을 녹인다.

對人不敢分明語 사람들에게 감히 분명한 말을 하지 못했으나

我是羣臣最得恩 나는 “이 많은 신하 중에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네

교관(敎官)은 향교에서 교수(敎授), 훈도(訓導), 교도(敎導)등을 통칭하는 말인데 1550년대 거제향교 교관(훈도)으로는 정9품 김적필(金迪弼) 김급(金伋) 안교관(安校官) 등이 있었고 30명의 유생을 가르쳤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정황 선생은 동짓날 암자에서 제관으로 양기(陽氣)가 발효됨을 기원 드렸고, 조선중종의 제삿날 옛 계룡사에서 거제향교 훈도 김급과 거제선비들이 함께 중종왕의 제를 올렸다.

4) 병중에 우연히 만나니 감회가 일어 위소주의 시에 화운하여 동짓날 밤에 많은 형제에게 부친다.[病裡遇至日感懷 和韋蘇州冬至夜寄諸弟韵] / 김진규(金鎭圭) 거제시 거제면 배소에서.

經旬抱病卧 열흘이 지나도록 지병으로 누웠는데

對案不能餐 밥상을 마주해도 들 수가 없구나.

愁中日南至 근심 중에 동짓날

海島始微寒 거제도는 비로소 약간 추워졌다.

短景添一線 짧은 해가 좀 더 길어지니

繁憂增萬端 수많은 우수에 온갖 것이 더하네.

食蘗未爲苦 산 나무 열매만 먹어도 괴롭지는 않는데

啜醋亦非酸 식초를 먹어도 신맛을 모르겠다.

豈如別離遠 어찌 내쫓긴 이별 같으리오.

重以歲月闌 거듭 세월이 가로막는구나.

天涯骨肉隔 하늘 끝 변방에 골육이 나뉘니

燈下形影單 등잔 밑엔 오직 그림자 뿐.

憶昔團圓日 예전엔 가족이 날마다 화목하여

佳辰共爲歡 함께 즐겁고 좋은 날이었다.

今宵望鄕處 오늘 밤도 고향 땅 그리는데

北斗空闌干 북두칠성이 난간에 걸려 공허하네.

5) 동지사[冬至詞] /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

“수놓는 베틀도 동지가 지나면 붉은 실이 길어지고 상서러운 태양이 화려하게 꾸민 전각에 멈추더니 관(管) 속의 재가 흩어지며 봄이 은밀히 일어난다. 차츰 겨울 매화가 꽃봉오리를 피우고 오색구름 채색한 누대에 올라보니 환히 펼쳐지는 붉은 망울 꽃이 다시 돌아오는데, 한밤중에 우레를 땅에 숨겼다가 일양(一陽)이 다시 생겨나니 많은 관리들이 조정에 나아가 보기 좋은 장식을 하고 왕께 하례를 한다.” [繡機添線 祥旭凝金殿玉 管撒灰春暗動 漸見寒梅花綻 五雲書彩登㙜 曉頒丹莢歸來 半夜潛雷陽復 千官朝賀蓬萊]

[주1] 첨선(添線) : 동지(冬至)를 의미한다. 동지가 되면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짐에 따라, 중국 진(晉)ㆍ위(魏) 나라 때 궁중에서는 수를 놓는 여공(女功)에게 매일 붉은 실을 조금씩 늘려가며 더 짜게 했다한다.[事文類聚]

[주2] 봉래(蓬萊) : 봉래산(蓬萊山). 또는 봉래산을 본떠서 송(松). 죽(竹). 매(梅). 학(鶴). 거북 같은 것을 만들어, 한데 보기 좋게 장식(裝飾)에서 축하(祝賀)하는 데에 쓰는 물건.

6) 11월27일 동짓날[十一月二十七日冬至] / 원나라 주덕윤(元 朱德潤) ‘灰’

捲地顚風響怒雷 땅을 말아 올릴 듯 세찬 바람 불어 성난 우레가 울리어

一宵天上報陽回 하루 밤사이에 하늘의 양기가 다시 돌아 왔구나.

日光繡戶初添線 햇살은 화려한 방을 비추니 그 날부터 실을 더 보태고

雪意屛山欲放梅 눈이 올 듯 병풍 같은 상에 매화가 피려 하네.

雙闕倚天瞻象魏 하늘에 의지한 높은 양쪽 누대 대궐문을 보노라니

五雲書彩望靈臺 오색구름 저 너머 임금이 바라보는 대가 보이네.

江南水暖不成凍 강남은 물이 따뜻하여 얼지 않나니

谿水穿魚換酒來 어부는 나뭇가지에 고기 끼워 술과 바꾸고 오구나.

[주1] 양회(陽回) : 동지는 음기(陰氣)가 다하여 양기(陽氣)가 생기기에 回(돌아올 회)를 쓴다.

[주2] 수호(繡戶) : 아름답게 꾸민 방. 부인의 방을 말한다.

[주3] 첨선(添線) : 궁중에서 일조량을 재기 위해 동지(冬至)후 매일 붉은 실을 보태어 감을 말한다.

[주4] 영대(靈臺) : 임금이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던 대(臺). 운기(雲氣)를 바라보는 대, 천문대.

[주5] 주덕윤(朱德潤 1294-1365) : 원나라 때 사대부화가. 자는 택민. 호는 휴양산인. 시문과 서법이 뛰어났다.

7) 동지[冬至] 겨울 경치(冬景) / 두보(杜甫 712~770) 당나라 시인.

天時人事日相催 천시(天時)나 인간사 모두 나날이 바뀌는데

冬至陽生春又來 동지에 양기가 생겨나 봄이 다시 찾아온다.

刺繡五紋添弱線 오색무늬 자수(刺繡)에 가는 선 더하듯,

吹葭六管動飛灰 태운 갈대 옥관(玉管)에 불어 봄이 언제 올까 점쳐본다.

岸容待臘將舒柳 강변 버드나무 섣달에 벌써 새싹이 나려하고

山意沖寒欲放梅 산도 엄동설한에 매화를 피우려 하는구나.

云物不殊鄕國異 아! 만물의 변화는 고향이나 타향이나 한결같아,

敎兒且覆掌中杯 아이에게 잔 가져오라하여 다시 한잔 들이키리.

[주] 가회(葭灰) : 진(秦)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인데 해마다 동지가 되면 재를 관에 넣고 후 불어서 재가 흩뿌려지는 모양을 보고 이번 겨울의 길고 짧음을 점쳤다고 한다.

 

8) 동지(冬至) / 이곡(李穀 1298~1351) 고려 학자.

扣門送粥自南隣 남쪽 이웃에서 팥죽 보내며 문을 두드려

驚倒周公夢裏身 주공의 꿈속에 있던 몸이 깜짝 놀랐다네

雷在地中翻碩果 석과가 뒤집혀 우레가 땅속에서 울리고

陽生井底轉洪鈞 우물 밑에서 양기가 나와 홍균을 돌리도다.

老懷漸覺羈遊惡 떠돌이 생활의 지겨움이 늙은 가슴에 점점 느껴지고

病眼偏驚節物新 시절의 경물 새롭게 바뀜에 병든 눈 새삼 놀라워라

聽取街頭賣新曆 길거리에서 들리나니 새해의 달력 파는 소리

萬年天子又頒春 만년 천자께서 또 새봄을 반포하셨나 봐.

[주1] 주공의 꿈속 몸(周公夢裏身) : 잠을 자다가 깬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내 꿈에 주공이 다시는 보이지 않은 적이 오래되었으니, 내가 너무도 쇠해졌나 보다.〔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2] 석과(碩果) : 순음(純陰)의 달인 10월을 지나 동지가 되면 밑에서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지뢰복괘(地雷復卦)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땅속에서 우레가 울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주역》〈산지박괘(山地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섯 개의 효(爻)가 모두 음(陰)인 상태에서 맨 위의 효 하나만 양(陽)인 것을 석과로 비유한 것으로, 하나 남은 양의 기운이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 박괘를 거꾸로 뒤집으면 바로 복괘(復卦)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3] 우물 밑에 홍균을 돌리다(井底轉洪鈞) : 《예기》 〈월령(月令)〉에 “동짓달에 우물물이 일렁이기 시작한다.〔仲冬之月 水泉動〕”라는 말이 나오고, 《일주서(逸周書)》 〈주월(周月)〉에 “동짓달에 미세한 양의 기운이 황천에서 움직인다.〔微陽動于黃泉〕”라는 말이 나온다. 또 두보(杜甫)의 시에 “사방팔방에 인수(仁壽)의 세계가 열리는 가운데, 하나의 양기가 홍균을 돌리기 시작했다.〔八荒開壽域 一氣轉洪鈞〕”라는 말이 나온다.《杜少陵詩集 卷3 上韋左相》 홍균(洪鈞)은 도자기를 만들 때 돌리는 큰 물레라는 뜻으로, 대자연이 원기(元氣)를 조화시켜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임금이나 재상이 훌륭한 정치를 행하는 비유로 흔히 쓰인다.

[주4] 만년 천자(萬年天子) : 만년토록 강녕한 복을 받을 천자라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강한(江漢)〉에 “소호(召虎)가 엎드려 절하고 천자의 만년을 빌었다.〔虎拜稽首 天子萬年〕”라는 말이 나온다.

●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1,032구의 월령체(月令體) 장편가사인,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농가의 행사·세시풍속뿐만 아니라 당시 농촌사회의 상황을 알 수 있다.

11월령 중에 동지(冬至)의 풍속을 읽어보자.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 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루하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황호(黃㦿 1604∼1656)의 ‘십일월 동지(十一月冬至)’편에는, “십이기일(十二氣日)은 절일이 아닌 것이 없으나, 특별히 동지만을 절일로 하는 것은 그것이, 일 양(陽)이 처음으로 생기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옛적에 천자(天子)가 동지(冬至)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祭壇)인 환구(圜丘)에서 풍악을 울리고 대(臺)에 올라, 구름의 기색(氣色)을 살펴서 길흉(吉凶)을 점치고 그것을 책(策)에 쓰는 서운물(書雲物)하는 예식(禮式)이 있었다.

지금은 만국(萬國)이 조하(朝賀)하되 모두 이날을 첫째로 삼는다. 우리나라에는 종묘(宗廟)의 토제(土祭)가 있고, 민가에서도 선조의 사당에 제사 지낸다.

또 형초(荊楚)의 풍속이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역귀(疫鬼)를 물리쳤으므로, 우리나라에서도 따라서 계절의 물건으로 제사 지낸다.[十二氣日 無非節日 獨以冬至爲節日者 以其爲一陽始生之辰也 古有圜丘奏樂登臺書雲物之禮 今者萬國朝賀 皆以此日爲首 國有宗廟土祭 民家亦祭先祠 又荊楚俗 至日作豆粥以辟疫鬼 故我國仍用爲節物奠薦]”

조선 말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동지헌말(冬至獻襪)> 즉, 동지에 버선을 드리는 글에는, “지금 풍속에 새로 출가한 부인은 매양 동지(冬至)가 되면 시부모에게 버선을 드린다.” 《여동서록(餘冬序錄)》에는 최호(崔浩)의 《여의(女儀)》 말을 인용했는데, “근고(近古)에는 부인들이 해마다 동지가 되면 시부모에게 신과 버선을 드렸으니, 이는 동지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므로, 그같이 장수(長壽)하라는 말로, 장지(長至)를 밟고 다니라는 뜻이다.”하였고, 또 조자건(曺子建 曹植 192~232)의 동지헌말송표(冬至獻襪頌表)에는, “엎드려 옛날 의전(儀典)을 보니, 국가에서 동짓날 신과 버선을 임금께 바치는 것은 수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동지에는 해가 극남(極南)으로 가서 그 그림자가 동지 전보다 한 길 세 치나 긴 까닭에 장지(長至)라고 했은즉, 신고 다니는 물건을 어른에게 드림은 복을 맞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풍속으로 되었는데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부인들은 지금까지 풍속에 따라 폐하지 않는다.

올해 동짓날에는 따뜻한 팥죽(팥밥) 한 그릇 맛나게 잡수시고 만년토록 강녕한 복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2014년 갑오년(甲午年) 한 해 동안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 을미년(乙未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螢波 高永和 拜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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